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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윤지헌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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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5 ㅣ No.568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윤지헌 프란치스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의 하나로 꼽히는 전주 전동성당은 문화재로서 가치가 커 사적 제28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곳이 아름다운 이유 중 하나는 1791년 윤지충과 권상연, 1801년에 유항검과 동료들이 순교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없앤 윤지충과 그의 이종사촌 권상연

 

윤지충(尹持忠 바오로, 1759-1791년)은 전라도 진산(현 충남 금산군 진산면)에서 태어났고, 1783년 봄 진사시에 합격하였습니다. 이듬해 겨울 김범우 토마스에게 “천주실의”와 “칠극”을 빌려 보았고, 2-3년 뒤 내외종간인 정약전 · 약용 집에서 천주교 책들을 본 뒤 실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791년 여름 어머니를 여의었을 때, 이종사촌 권상연 야고보와 함께 교회의 제사 금지령에 따라 장례는 치르면서도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없앴습니다. 이 사실을 안 척사론자 홍낙안은 9월 진산군수와 좌의정에게 서한을, 10월 초 여러 유생들에게 통문을 보냈습니다.

 

윤지충은 10월 말 감옥에 갇혔는데, “천주는 모든 피조물의 창조자요 위대한 아버지이신데, 그분을 섬기는 것을 사교(邪敎)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배교를 거부하였습니다.

 

감옥에서 그는 “천주를 큰 부모로 여기는 이상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 것은 결코 공경하고 높이는 뜻이 못 됩니다. 사대부 집안의 목주(신주)는 천주교에서 금하는 것이니, 차라리 사대부에게 죄를 얻을지언정 천주에게 죄를 얻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집안에 땅을 파고 신주를 묻었습니다. 신주를 세우지도 않았고 제향도 차리지 않았는데, 이는 천주의 가르침을 위한 것일 뿐 나라의 금범을 범한 일은 아닌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권상연(權尙然 야고보, 1751-1791년)은 같은 마을에 살던 고종사촌 윤지충 바오로에게 교리를 배운 뒤 입교하였습니다. 그는 “저는 윤지충과 내외종 사이로 같은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저의 집 신주를 애초에 땅에 묻으려 하였으나, 이목이 번거로울까 두려워 남몰래 불태우고 그 재를 무덤 앞에 묻었습니다.” 하였습니다.

 

관찰사는 “(두 사람이) 형문을 당할 때, 하나하나 따지는 과정에서 피를 흘리고 살이 터지면서도 찡그리거나 신음하는 기색을 얼굴이나 말에 보이지 않았고, 말끝마다 천주의 가르침이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임금의 명을 어기고 부모의 명을 어길 수는 있어도, 천주의 가르침은 비록 사형의 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결코 바꿀 수 없다고 하였으니, 확실히 칼날을 받고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뜻이 있었습니다.” 하고 보고하였습니다. 이내 조정에서는 그들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소리가 드높았고, 결국 정조도 처형을 윤허하였습니다.

 

1791년 11월 13일 윤지충과 권상연은 전주 남문 밖에서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면서 순교하였습니다. 이것이 천주교인에 대한 공식적인 첫 번째 처형이었습니다. 1795년 4월 유관검이 주문모 신부님을 모시고 두 사람의 무덤 아래를 지나면서, “이는 우리나라의 교회 안에서 고명한 사람의 무덤입니다.” 하였습니다. 이에 신주님은 “성교(聖敎)에 이른다면 마땅히 그 사람의 무덤 위에 천주당을 건립해야 할 것이니, 후일 조선의 성교가 크게 성행하게 되면 이 두 사람의 무덤은 마땅히 천주당 안에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이 순교한 그 자리에 1889년 봄에 전동본당이 설립되었고, 성당 건물은 1908년에 기공하여 1914년에 완공, 1931년에 봉헌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윤지충의 막내 동생 윤지헌

 

윤지헌(尹持憲 프란치스코, 1764-1801)은 윤지충의 막내 동생으로 형에게 교리를 배웠고, 1787년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1791년 형이 순교하자, 진산을 떠나 전북 완주군 운주면 저구리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는 1795년 주문모 신부님에게 성사를 받았으며, 밀사 황심 토마스를 북경에 보내는 데 동참하였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전주 감영에 갇혔습니다.

 

감사는 그에게 “형 윤지충이 사형을 당한 이후에, 무릇 이 사학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너의 형이 절의를 지키다가 죽었다고 여겨서 ‘교의 주관자’[主敎]처럼 존경하니, 너의 집안은 곧 사학하는 집안들의 주인이다.” 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이에 그는 “평소에 좋아하던 천주교 교리를 끊지 못하였고, 고질병처럼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있으니, 오로지 만 번 죽겠다는 말씀만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 천당 지옥의 이치를 굳게 믿은 탓에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고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포도청과 형조를 거쳐 의금부에서 마지막 문초를 받은 뒤 사형선고를 받고 전주로 이송되어 9월 17일 순교하였습니다.

 

태조의 영정을 봉안한 경기전과 한옥마을이 함께 자리하고 있어 동서양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신비스런 곳인 전주 전동성당은, 지난날의 순교자들과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만나는 거룩한 땅이기도 합니다. 그분들은 오늘도 우리에게 교회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경향잡지, 2008년 4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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