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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선교 이야기1: 타이완(대만) 천주교회의 역사와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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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1-16 ㅣ No.167

김 마리안나 수녀의 타이완 선교 이야기 - 타이완(台灣) 천주교회의 역사와 현황

 

 

타이완천주교회의 역사

 

‘아름다운 섬(Ilha Formosa)’이라는 별명을 가진 대만은 우리나라 영토의 3분의 1정도의 크기로, 고구마 모양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약 2시간 30분이면 닿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타이완은 네델란드, 스페인 등 서구 열강 사이에서 잦은 침략을 받아 오랜 시간 네델란드의 식민지로 있었으며 청나라 시대에 들어서는 중국 한족이 점점 많이 이동해 와서 살았다.

 

17세기 스페인이 새로운 항로를 발견한 후 무역거점으로 대만을 점거한 후 도미니코회 선교사들도 그들과 함께 들어오게 된다. 하지만 당시 남부에서 시작해서 세력을 확대해 가고 있던 네델란드인과 충돌하게 된 북부의 스페인 세력은 결국 대만에서 밀려나게 되고 도미니코회 신부들도 인도네시아나 그 주변으로 쫓겨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스페인의 타이완 북부통치는 끝나게 될 뿐만 아니라 이후 217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타이완에서의 천주교 전교활동은 멈춰지게 된다.

 

이후 1858년 교황청은 도미니코회 로사리오관구에 타이완 전교를 위임하게 되고, 그 이듬해 도미니코회 선교사들이 타이완 카오숑(高雄)에 도착해서 전교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1863년 당시 타이완의 유일한 천주교 성당인 로사리오 성모당이 카오숑(高雄) 치엔진(前金)에 세워지면서 점차 전교활동을 북부로 넓혀 나가게 된다.

 

타이완 역시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식민지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로 일본 정부의 손에서 중국 국민당 총수 장개석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1949년 중국 본토에 내전이 일어나고 국민당은 중국 공산당에 밀려 대만으로 후퇴하게 되었는데, 당시 중국 공산당은 중국 내의 많은 사제, 수도자 그리고 교우들을 박해하였고, 그와 함께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했고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공산당의 박해를 피해 대만으로 오게 되었다. 수많은 천주교 신자의 출현은 타이완 교회에 있어서 큰 자극이 되었고 이로써 전교활동도 정점을 이루게 된다.

 

1945년 타이완 성직자의 수는 20명 가량이었다. 그러나 점점 그 수가 늘어나 1966년에는 762명이 되었고 교우 수 역시 1만 명에서 30만 명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수도회 또한 1945년에는 겨우 스페인의 도미니코회와 도미니코 전교수녀회만 전교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1968년에는 남자 수도회  18개, 여자 수도회 43개로 늘어났다. 1949년부터 이러한 빠른 전교활동에 대응하기 위해 타이완 감목구는 5개의 감목구로 늘어났다.

 

 

타이완 천주교회의 특징과 현황

 

현재 타이완교회의 현황을 보면 7개의 교구에 주교 15명(추기경 1명 포함), 사제 약 700명, 수녀 약 1200명, 평신도 약 30만 명이 있으며 본당 수는 700여 개가 전국에 분포되어 있다. 타이완 전체 인구에서 천주교 신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약 1%정도로 아주 미약하다. 하지만 학교, 병원, 사회복지 등 각 분야별로 사회 안에서 천주교가 미치는 영향은 의외로 크며, 천주교회에서 운영하는 곳이라면 신뢰가 간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되고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많은 나라가 그렇듯이 타이완 또한 서구세력과 함께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전교를 시작했는데, 대부분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신자들로 인한 발전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타이완 자체 신자들이 있었지만 그 숫자는 아주 미미하였다. 그러다가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수많은 주교, 사제, 수도자 그리고 신자들은 양적으로 또는 질적으로 타이완 천주교회를 발전시켰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중국 대륙 신자들의 영입뿐만 아니라 또 한 가지 중요한 발전 요인은 많은 수의 원주민들의 입교이다. 1950년대에 들어서 많은 선교사들이 원주민들의 부락으로 들어가서 선교를 시작했는데, 현재 원주민 부락에서는 주민수의 반 이상이 천주교 신자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도시로 내려와서 사는 원주민들로 인해 평지에 있는 성당에도 그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오늘에 이르러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1세대 신자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신앙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을 뿐아니라 후대에게 신앙을 전하는 일에 소홀했기에 그들의 죽음으로 천주교 신앙은 단절되어 더이상 후대로까지 이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이는 전체 타이완 천주교회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 주는 안타까운 현실이 되고 있다.

 

한국과 타이완은 비슷한 역사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교회의 역사는 아주 다른 모습으로 발전되어 왔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타이완에서 선교활동을 하며 자주 드는 의문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본국인 성소계발의 차이에 있다. 1950년대 전쟁을 겪으며 가난을 겪었고 서방교회의 많은 원조를 받았으며 수많은 선교사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발전을 이루어 나가는데까지는 비슷한  경로였는데, 한국의 경우는 서방에서 온 선교사들의 노고에 감사하면서 본토 성소계발의 중요성을 깨닫고 성소계발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타이완은 한국보다 더 빠른 경제발전을 이룩해 나가면서도 신앙의 중요성을 간과한 채 교회는 여전히 서방 선교사들의 손에서만 꾸려져 가고 있었다. 게다가 초창기 선교사들은 이제 은퇴해야 할 시기에 접어 들었고 그들의 뒤를 이어갈 사제의 수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재 타이완 교회가 처한 가장 큰 문제이다.

 

 

과도기를 지내고 있는 타이완 천주교회

 

2009년 타이완은 선교 150주년을 지냈다. 이를 기념하면서 타이완 천주교회는 가시적인 큰 행사뿐만 아니라 내적인 변화를 위한 발걸음도 떼기 시작했다. 선교 역사 150년을 지내면서 타이완 교회는 자신들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정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래를 향해 본토 성소계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지난 봄, 타이완 청년들을 인솔하고 한국성지순례를 갔을 때 대구대교구 전임 교구장 이문희 대주교님을 만나 뵈었다. 그때 함께 간 신자 한 분이 “한국교회의 모습들 안에서 역사문물을 정리하고 보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는 것이 아주 놀랍다.”고 하자, 이대주교님께서 “한국 교회는 200주년을 준비하면서 순교역사와 지나간 발자취를 찾고 발굴하기 시작했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선교 150주년이라는 짧은 역사를 가진 타이완도 한국교회와 같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정리하고 그 안에서 다른 돌파구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과도한 행사성 프로그램이 많다는 문제점을 드러냈다. 이 모든 것이 과도기를 지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선교 200주년을 보낼 즈음의 한국교회를 되돌아보면 지금 타이완 교회가 그 시기를 보내고 있는 듯하다.

 

타이완 남부에 도미니코수도회가 첫발을 내디디면서 시작된 타이완 천주교회는 미미한 발전을 보이다가 중국 본토인들이 정착하면서 기하급수적인 발전을 했다. 하지만 그 당시 타이완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 빠른 시간 안에 다시 중국대륙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타이완 본토 선교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몇 년 전까지도 대부분의 교구는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주교님들이 책임을 맡고 있었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 부터 점차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다. 현직 주교님들 중에서 이제 몇 분만이 대륙에서 넘어오신 분들이고, 대부분은 본토인으로 바뀐 것이다.

 

이렇게 지금 타이완은 과도기를 지나고 있다. 중국대륙으로 가기 위한 가교로만 생각했던 것이 이제는 진정 타이완을 위한 교회를 만들고 있다. 그렇기에 분명히 시행착오도 있을 것이고 현실이 열정을 따라가지 못해 실망하고 주저앉고 싶을 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성령의 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다. 다만 그 바람이 어디로 불지 우리는 알 지 못할 뿐이다.

 

* 이 글은 선교의 소임을 떠난 수도자가 전해온 대만교회의 소식으로, 2회에 걸쳐 소개할 예정이다.

 

[월간빛, 2011년 1월호, 김 마리안나 수녀(예수성심시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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