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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가 장애되지 않는 사회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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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mugeoul] 쪽지 캡슐

2001-01-13 ㅣ No.192

21세기를 눈앞에 둔 지금은

이 땅의 장애인들에게 있어서 아주 의미 있는 시기이다.

1981년 ’세계장애인의 해’를 시작으로 하여

1983년에서 1992년까지의 ’세계장애인 10년’과

그로부터 2002년까지 이어지는 ’아시아 태평양 장애인 10년’이 계속되는

이 시기는 장애인운동의 최종 목표인

사회에 대한

장애인의 완전 참여와 평등(Full Participation and Equality)을

달성하기 위한 최적의 시기이다.

하지만 2002년을 ’월드컵’이나 ’부산아시안게임’ 개최 년도 외에

’아·태 장애인 10년’이 마무리되고

’아·태 장애인경기대회’가 부산에서 개최되는 해로

기억하고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그만큼 장애인문제는 관심 밖이다.

UN의 발표에 의하면 인구의 10%는 장애인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장애인의 삶은

권리의 차원이 아닌 시혜와 동정의 수준에서 거론되고 있다.

장애인이 되면 재활치료는 말할 것도 없고

배움의 기회나 직업을 갖는 것조차 어려움을 겪을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일반인 위주로 되어 있는 사회의 법과 제도,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와 닿는 편의시설의 미비로 인해

사회접근이 근원적으로 차단된다.

특히 노동의 소외로 인한 경제적 기반의 상실은

장애인을 빈곤과 장애의 결합에 의한 이중의 질곡으로 몰아넣으며

그 악순환의 과정을 악성적으로 답습토록 한다.

결국 ’냉철한 자본의 천국’인 이 사회에서

경제적 토대의 허약함은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이다.

장애인에게 경제적 기반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제1차적 복지기관’인 가정에 정주토록 하는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재가장애인에게 국가가 복지적 측면의 뒷받침을 해주어야 할 까닭이

거기에 있건만 아직 우리의 복지정책은 시설위주이다.

전시행정의 산물이다.

장애인현실의 슬럼화의 근본원인이 여기에 있다.

그들이 막다른 곳(수용시설)으로 밀려나기 전에

’지금 그곳’에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손길이 필요하다.

그것이 경제적 기반의 확충을 위한 안정된 직업의 보장이다.

직업을 갖고서 일을 한다는 것은 장애인에게 삶의 힘을 소생시켜

성취, 습득, 자립, 자기개념에 이르게 하며,

무엇보다 심리적 안정의 치료 효과와 함께

자신도 가족이나 일반사회의 복리에 기여한다는 자부심을 갖게 한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 장애인의 직업을 통한 생활보장은

참으로 힘들기만 하다.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형태를 갖추고 제도화되어야 할 것이다.

선진국가에서 보듯 장애인의 고용은

국가책임주의적 정부 개입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장애인을 더욱 절망케 하는 것은 사회가 지닌 편견과 차별의식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장애인 먼저 운동’을 펼치고 있지만

’먼저’보다 더 ’먼저’ 시급한 것이 ’함께’이다.

결국엔 편견을 초래하고 마는 ’특별한 혜택’보단

오히려 사회 속에서의 갖가지 ’특별한 차별’을 우선 철폐하라는 것이다.

장애인 스스로 이 사회 속에서

일반인과 다를 바 없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만큼

’밑바닥에서부터의 사회복지’가 온전히 이뤄져 있다면

장애인을 위한 특별한 대우나 ’특별법’을 굳이 요구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즉 장애인현실의 일반화작업이 시급하다.

예를 들어본다면 빈민장애인의 문제는 빈민법으로,

직업을 얻지 못한 장애인은 실업인법으로,

치료가 필요한 장애인은 의료법으로,

장애아동들은 영유아법으로,

교육을 받지 못한 장애인은 교육법으로,

장애인의 노후보장은 노인연금법으로,

그런 식으로 장애인문제를 접근해 가며

장애인의 생애주기(Life Cycle) 역시 일반화시킬 때,

장애인을 이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일원으로 여김과 동시에

궁극적으로 장애인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는

현재의 법률들에 복지적인 측면을 보다 더 강화해야 함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영유아보육법의 경우라면

영유아에 대한 보육비를

아무리 어려운 중증장애아동들이라도

보육의 혜택을 충분히 입을 수 있을 정도까지 현실화하는 식이다.

그것은 한 사회의 문화수준은

최중증(最重症)장애인의 거동반경에 비례한다는 주장,

곧 가장 장애가 심한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반경이 크다면

건강한 일반인의 환경이야 두 말할 나위 없지 않느냐는 인식과 일맥상통한다.

그렇게 장애인운동도

이제 장애인들이 이 사회의 떳떳한 한 구성원으로서

자리매김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키 위해 사회통합과 주류화를 꾀하는

시민권적 권리회복의 차원에서 펼쳐져야 한다.

하지만 이처럼

’사회가 지닌 장애들’로 인해

기본적 인권조차 보장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장애인들이 밑바닥으로 밀려나게 됨은 당연하다.

그럼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이제껏 우리 사회가 장애인문제를

사회시스템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여겨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업사회의 병폐들로 인한 각종 재해 및 성인병의 발생,

교통사고와 환경오염의 문제,

사회면을 어지럽히는 갖가지 사건들에서 보듯

’인간환경’이 극도로 악화되고 있는 이 사회에선

누구나 언제든지 장애를 입을 가능성이 있는 까닭에,

실제로 장애인 중 90% 이상이

후천적 요인으로 장애를 입었다는 통계자료만 보더라도

장애발생은 확률로서 결국 모두는 예비장애인인 것이다.

하여 장애인의 문제는 더 이상 ’소수의 장애인 그들’만이 아닌

모두가 관심을 갖고 껴안아야 할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제 장애인복지의 얼굴도 바꾸어야 한다.

복지분야의 중심이 시설에서 지역사회로 옮겨가고 있듯,

장애인복지도 ’for them’이나 ’to them’식의

대상화되고 수혜적 차원이 아닌

’with us all together’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특히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삶의 터전인 지역사회에다 뿌리내릴 수 있는

장애인정책의 연구 및 대안 제시를 통해,

지역사회의 장애인문제는 지역사회가 해결한다는 전제로

자기 권리를 찾아가는 시민운동차원으로 나아감으로써

장애인운동의 지평을 넓혀야 할 것이다.

그를 위해 지역사회 중심의 부양 서비스를 확충하고,

장애인복지정책의 기획과 결정이나 시행과정에는

반드시 그 주체요 대상인 장애인들이 참여토록 하여

실질적인 도움이 돌아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도시 전반의 편의시설 확보는

장애인의 사회접근권과 사회통합을 위해,

더 나아가 그 지역의 문화수준과

도시공간의 인간화 실현의 차원에서 시급한 실천과제이다.

또한 지역에다 공동체 문화운동을 뿌리내리는데도

장애인들이 한 몫을 해야 할 것이다.

문화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요소로서,

인간은 문화를 매개체로 한 심정적인 만남을 통해

인간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만 일어나는 진정한 일치를 이룰 수 있기에,

편견과 차별의 벽을 허무는 장애인들의 사회통합의 과정은

우선적으로 ’문화의 옷’을 입고서 이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여성(Female)·감성(Feeling)·가상(Fiction)의 ’3F’의 정보화시대는

다름 아닌 문화의 시대로써

이제껏 지배질서 체계에 의해 가려졌던

저변의 문화들이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더불어 사는 시민사회를 창출하고 형성하는 시민운동에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의 약자들이 주체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그와 함께 장애인 문제를 사회구조적으로 접근하면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고찰을 통해 이론화하여

사회정책으로 일관되게 정착화시켜 나아가는 작업과 그를 뒷받침할

장애인들의 주체적 역량의 조직화 작업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어차피 사회변혁의 흐름은 ’세력 투쟁(power game)’의 성격을 띠게 마련이다.

제 목소리를 결집해 실천적 역량으로 조직화할 수 없는 집단은

결국 도태될 수밖에 없고

또 현실적 조건의 타개 역시 그만큼 지체될 수밖에 없는 것이 냉엄한 현실이다.

때론 장애인들의 이른바 ’성공(?)수기’를 읽으며 놀라는 것은

장애극복과 재활을 위해 쏟는 노력이 가히 ’초인적’이라는 사실이다.

또 사회 자체가 그러한 인간승리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도록 몰아가고

심리적으로도 압박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슈퍼맨이 되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라면

결코 바람직한 사회가 아니다.

거기에다 그들이 필사적으로 의지를 불태우며 쟁취한 삶의 내용이란

일반인들이 당연히 누리는 그 수준조차도 못되는 실정이다.

따라서 이 사회의 그러한 유인책은 그릇되고도 죄악스럽고,

거기엔 사회구조적 모순을 개인차원의 문제로 함몰시키려는

의도가 그 이면에 깔려 있다.

진실로 장애인문제는 당사자만이 극복해서 될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고민하고 극복해야 할 문제이다.

장애인들이 슈퍼맨이 되지 않고도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회,

아니 최소한 그런 삶을 꾸려 나가는데 장애가 되지 않는 사회야말로

올바른 복지사회이다.

무엇보다 장애라는 말 자체가

교통, 통신, 주거, 의료, 교육, 취업, 사회, 언어, 문화 등

환경과 관련하여 정의되는 상대적 개념이다.

예를 들어 계단 없는 시설,

리프트나 엘리베이트가 설치된 지하철,

장애인이 능력에 따라 일할 수 있는 직장,

장애인과 일반인을 구별하지 않아

장애인이 장애를 느끼지 않고도 살아갈 수는 사회라면,

그런 사회 시스템 속에선 장애인은 더 이상 장애인이 아닌 것이다.

진정 장애인은 만들어진 것으로

곧 환경적 장애를 무수히 지니고 있음으로 해서

장애인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이 사회가

바로 한 인간을 장애인으로 ’낙인’ 찍었던 것이다.

사실 장애는 그 자체로 인정되어야 하는 하나의 ’개성’이다.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듯 장애도 하나의 ’다름’으로 파악해야 한다.

무엇보다 치료나 재활훈련으로 모든 장애인이 비장애인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획일화된 잣대로 장애를 ’모자람’으로 쉬 판단하는

편견과 무지에서 벗어나,

그 자체를 ’다름’의 고유한 삶으로 받아들이는 깨어 있는 인식이

특히 다양성을 존중하는 정보화시대엔 요구된다.

따라서 장애인법의 모범이라고 하는

’미국장애인법(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 of 1990;ADA)’은

장애인문제를 차별금지라는 시민권적 인권의 개념을 통해 풀어 간다.

’사회적 장벽(Social barriers)’의 제거를 통한 장애인에 대한 적절한 배려는

장애인의 권리인 동시에 사회전체의 의무로

장애는 결국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환경의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곧 사회에의 적응인 재활이 아닌

사회통합을 위한 정상화(Normalization) 내지 주류화(Mainstreaming) 개념이다.

인권의 관점에서 제기되지 못한 장애인복지정책은

생존권 차원의 수준에 머묾으로써

노동·통신·여가·문화와 같은 생활권 보장으로 나갈 순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장애란 불완전한 인간존재의 분명한 표상이다.

우리 사회가 ’장애인’, 아니 ’장애’ 앞에

보다 겸손해져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인간은 공동체적 존재이다.

그러기에 한 지체(肢體)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아파한다는 말 그대로

한 인간의 장애는 공동체 전체의 것으로 공유되어져야 마땅하다.

그럴 때 비로소 장애인을 비롯한 약자에 대한 배려는

단순한 베풂이 아닌 공동선(共同善)의 차원이 된다.

하여 장애인복지는 사회복지의 한 부분으로만 그치지 않고,

사회의 공동체성 곧 전체성을 가름하는 바로메터가 된다.

그 누가 말했던가.

네 잎 클로버는 분명 장애를 가진 클로버이지만

우리들은 오히려 그를 ’행운의 네 잎 클로버’라고 부른다고.

그러한 의식의 전환을 통해

우리 사회가 장애인들이 편한 마음으로 사회 속으로 나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온갖 차별의 문턱을 낮춘다면

그것은 숱한 자선금을 안겨다 주는 것보다 더 의미롭고 가치 있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장애인의 문제는 ’약자’의 문제이다.

장애인문제가 안고 있는 기본적 틀은,

’부익부 빈익빈’식의 빈부격차, 인종차별, 성차별,

제3세계와 제1세계간의 남북문제,

지역·계층·산업간의 불평등에서 비롯되는 사회민주화문제,

민족통일문제, 심지어는 지구생태계의 환경문제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의 바탕에 깔려 있는 ’인식의 틀’과 놀랍도록 동일하다.

그것은 한마디로

기득권(대개는 경제적 이권)자들이 약자와 더불어 살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그들의 관점에서 봐 비정상적인 것

(예를 들어 백인에 있어 흑인, 이른바 정상인에 있어 장애인 등)에 대한

편견과 왜곡을 의도적으로 창출해 내면서

그들의 폐쇄적 삶과 차별의식을 정당화하고 제도적으로 고착시킨다.

그에 힘입어 ’약자’에 대한 편견의 틀은 유지될 수 있고

’약자’들의 삶의 주변화는 더욱 가속화되는 것이다.

누가 이 사회를

서로가 서로를 밀쳐 내는 ’팔꿈치 사회’라고 적절히 표현했지만

이처럼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회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는 없다.

인간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혼자서는 결코 살아갈 수 없는 공동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실 ’요람’과 ’무덤’이야말로 인간의 공동체성을 나타내 주는 상징이다.

그 어떤 인간일지라도 ’요람과 무덤’을 제 손으로 만들 순 없으니,

인간은 타인이 만들어 놓은 요람에서 삶을 시작하고

타인이 만들어 주는 무덤 속으로 들어가 삶을 마감한다.

그러기에 사회라는 울타리를 벗어났을 때

인간에게 찾아오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다.

진정 ’혼자 살기’는 ’혼자 죽기’이다.

따라서 인간 삶의 공동체성과 약자에 대한 배려의 당위성은

아주 현실적인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곧 남을 살림으로써 자신도 살리는 상호부조인 보험의 원리이다.

보험이란 누가 피보험자가 될지 아무도 모르나

누구라도 피보험자가 될 수도 있는 산술적 확률의 게임으로써,

그러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각자 적립해 두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당장 혜택을 입는 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에 대한 준비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도 정보화시대로 접어들면서

사회전체 시스템의 모든 면이 데이터베이스화하여

체크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토지·금융거래는 전산화작업에 의해 거의 투명하게 손에 잡히고 있다.

심지어는 전국민의 개인정보가 디지털화하여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에 입력되는 전자주민카드마저 논의되고 있다.

사실 선진사회,

특히 그를 뒷받침할 시민의식은

지극히 ’영리한’ 현실적 차원에 바탕을 두고 있으니

곧 성숙된 자는 자신이 펼치는 행동이

결국은 부메랑처럼 자신에게로 피드백해옴을 아는 눈을 지녔기에,

자신을 위해서라도 ’공동선’을 추구한다.

이른바 보살핌의 윤리(anethic of care)의 현실적인 효용가치와

인권의 공동체성에 새삼 주목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복지문제도 그런 관점에서 모색되어져야 한다.

그런데 소위 OECD 회원국이라며 소리 높이는

이 나라의 GDP 대비 사회복지 예산비율이

후진국 수준인 이 ’어리석은’ 현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국가경영의 차원에서라도 국민의 행복증진 곧 인간복지는 실현되어야 하고,

모든 국가정책은 그 어떤 것일지라도 사회복지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다 기존의 자선적 차원의 ’베푸는 복지’는

이제 그만 끝났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

특히 대규모 수용시설의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는 복지사업은

어떤 면에서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일방적인 관계만을 낳는 것으로

일종의 메씨아니즘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참된 복지는

밥상에서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를 강아지에게 주듯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갖고 난 기본적 권리를

스스로 누리도록 구조적으로 지지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선의 손길을 펼치는 ’주는 자’가 비록 없을지라도

각자가 자신의 몫을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사회시스템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익명의 돕는 자’가 되도록 구축해 놓는

사회제도적 차원으로 사회복지가 한 단계 올라가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복지 혜택자의 인격을 고스란히 지켜주어야 할 것이다.

결국 장애인운동은 ’인간’의 문제로 귀착되고 만다.

인간다운 사회에서만이 장애인 같은 ’약자’들도

인간답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인간’은 필경 21세기의 지배적 담론이요 징표가 될 것이다.

사실 새로운 문명은 언제나 그 사회 속의 ’약자’(민중)에게서

그 창조적 에너지를 공급받게 된다.

이는 ’약자’야말로 새시대를 낳는 신천지요 처녀지임을 말해 주고 있다.

산업혁명의 시대가 종막을 고하고,

탈근대(Post Modernism)의 흐름 속에 맞는

문명사적 대전환기인 21세기는

이제껏 사회 속의 ’약자’들이 문명의 주역으로 나서는 개벽시대가 될 것이다.

그것은

서구에서 아시아로,

남성(부성)에서 여성(모성)으로,

중심에서 주변으로,

물질에서 인간복지로,

파괴에서 변형으로,

정복과 지배에서 연대와 협력으로,

개발에서 보전으로,

대립과 갈등에서 평화와 공존으로의 시대이다.

바로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에다 공동체적 삶의 연대망을 구축하는데 첨병이 되어

궁극적으로 사회의 전체성을 회복시킬 때,

장애인복지의 공간도 온전히 확보될 것이다.

결국 장애인운동은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죽음의 문화’를 극복하는

생명문화운동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 인간으로서의 고유한 존재가치를 인식치 못하고

장애인을 열등한 존재로 치부하고 비인격화하는 차별의식은

약육강식적 물질주의에 기초한 천민자본주의의 산물이다.

그러기에 장애인운동은

다양성을 존중하는 정보화시대의 열린사회를 향한 생명연대운동이다.

장애인운동은 사회민주화와 복지국가를 꾀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한민족(韓民族)공동체의 통일을 실현시키는데

하나로 이바지 할 것이고,

더 나아가 인류문명의 대안적 사회변혁운동으로의 역할도 다할 것이다.

진정 장애인복지는 인류 최후의 복지과제로서,

장애인문제는 우리 사회의 선진지표로의 방향성

그 중추적 핵심에 닿는 문제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2002년을

우리 사회가 진정한 선진사회가 되는

장애인복지 선진화의 신년으로 삼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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