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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신앙] 미사를 통한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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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1-08 ㅣ No.2005

[조찬 세미나] 미사를 통한 회개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드릴 말씀은 ‘미사를 통한 회개’라는 주제입니다. 여러분은 경제인이고 저는 신학을 전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공통점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바로 2천년전 나자렛에 사셨던 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구세주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메시아, 그리스 말로는 그리스도, 우리말로는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으로 모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그리고 그분이 어떤 삶을 사셨는지를 잘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을 구세주 주님으로 모시는 우리 신자들이 예수님에 관한 공부를 게을리하는 것 같습니다. 이 시간이 여러분에게 예수님에 대해 좀 더 충실히 알게 되는 그런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30년간 숨어 계시던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첫 번째 하신 말씀은 마르코복음 1장 14절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디에 중심을 두고 사셨는지 이 한 말씀에 다 요약이 되어 있습니다. 때가 차서 그분에게 제일 중요한 건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분의 자비가 아주 충만한 곳, 그래서 사람들이 그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 변화됨으로써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는 갑자기 온 것이 아니라 때가 차서 온 것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는 바로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용서하시고 병자들과 마귀도 고쳐주시면서 ‘바로 하느님의 자비가 이런 것이다.’ 하며 우리가 느끼게 해주셨습니다. 죄지은 사람은 벌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용서해 주심으로써 다시 새로운 기회를 주시고, 병자와 마귀 들린 사람들, 즉 세상에서 버려진 사람들도 고쳐주심으로써 그들이 다시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이 바로 하느님 자비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그 하느님 자비를 믿고 변화되라는 말씀입니다. 이를 통해 너희 이웃에게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너희는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이것이 예수님 말씀의 아주 핵심이며 이 말씀을 실현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3년간의 공생활을 사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회개란 무엇일까요? 회개란 자기중심으로 살다가도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로 돌아선다는 것은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선 자체이시며 하느님을 등진다는 것은 우리가 악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회개는 나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마음과 행동에 주파수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과정입니다. 우리의 모든 주파수를 하느님의 마음과 생각으로 맞추는 것 그것이 바로 회개인데 그러다 보면 서로가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를 잘할수록 하느님과 닮게 되며,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시니, 그분을 닮게 된다는 것은 우리 역시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로 회개해서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사랑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우리가 정말 알고 감사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사랑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되면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정말로 많은 사랑과 자비를 입고 사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그 은혜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부모의 사랑을 잘 모르다가 나이가 들면 그 사랑을 깨닫고서야 효도에 대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처럼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되면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깨닫게 되어 그에 응답하기 위해서 하느님이 원하시는 이웃사랑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우리는 일생동안 이런 회개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요즘 회개라는 말을 사람들이 잘 안 쓰는 것 같은데, 저는 지금이야말로 다시 강조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회개를 통하여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되면 질서가 잡히고 하느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어서 그 사람을 통해서 세상이 조금씩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시스템이나 하드웨어 측면은 대단히 발전되어 왔으나 그 시스템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과거의 사람들보다 나아졌는지 생각해 봅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는 생각도 가끔 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한국의 가톨릭교회가 초점을 두어야 할 부분은 시스템과 구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개개인의 회개를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역점 사업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사를 통한 회개’라는 주제를 설정하였습니다.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구체적인 회개를 우리는 미사 안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여러 기도를 통해서, 또 미사를 통해서도 계시지만, 그중 가장 분명하고 밀도 있게 현존하시는 곳은 바로 미사인 것입니다. 미사에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 현존하십니다. 2천 년 전 미사에서 ‘때가 차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말씀하신 그 예수님이 여전히 현존하시면서, 우리에게 그 말씀을 계속 건네고 계십니다. 그래서 미사의 부분 부분마다 회개란 바로 이런 거구나 하고 우리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미사이며 성찬례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신자들이 주일 미사에 기쁘게 참여하기보다는 그냥 억지로 마지못해 미사에 가는 경우를 종종 느꼈습니다. 그래서 미사에 대해서 좀 풀어서 설명하는 특강을 했더니 반응이 괜찮아서 그것을 모아서 2008년에 책으로 엮어냈습니다. 그 책이 생활성서에서 출판된 ‘미사, 마음의 문을 열다’입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리는 내용들이 구체적으로 들어 있기에 참고로 소개해 드립니다.

 

여러분, 하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 즉 회개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을 우리는 매일 미사에서 볼 수 있습니다. 미사는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고 앞뒤로 시작 예식과 마침 예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미사의 시작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유는 삼위일체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구약 신약의 역사를 거쳐 오늘날까지 우리 구원을 위해서 온전히 계신 그런 분입니다. 하늘 높은 곳에 계시지만, 끊임없이 잘못을 범하는 비천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삼위일체 하느님이 역사하셨고, 그 하느님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사랑과 관심과 배려, 또 자비를 입고 산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한 겁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시는가는 많은 성경 구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49장 15절에는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여러 사람 중에 가장 끈질긴 사랑은 부모와 자식간에, 특별히 어머니와 자식 간의 사랑입니다. 어머니는 달 동안 뱃속에서 힘들게 아기를 기르다가 고통과 함께 아기를 낳기 때문에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사 여인이 자기가 낳은 아기를 잊는다 하더라도 하느님은 우리를 잊지 않겠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사랑은 인간의 사랑을 훨씬 더 뛰어넘는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에서는 “너희는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라고 하십니다. 저는 우리 신부님들에게, 여러분들은 자식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온전히 선한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고 사랑하시기에 그런 하느님 사랑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받을 때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무개에게 세례를 줍니다.” 하며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그분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요? 하느님에게 예쁘다고, 마음에 든다고 사랑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거둬버리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반면 잘나고, 예쁘고, 능력 있고, 나한테 잘하고 그런 사람에게 관심과 사랑을 베풀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랑을 걷어버리는 것이 보통인 인간적인 사랑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도 무조건적인 것 같지만 자식이 속을 썩이면 부모가 사랑을 잠시 거두는 경우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가려서 사랑하는 그런 분이 아니라 각자 나름대로 사랑해주시는 그런 분입니다.

 

닥종이 작가 김영희라는 분이 계십니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재혼하여 전부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이분께서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라는 책을 쓰셨는데 그 내용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억납니다. ‘공부 못하는 아이는 건강한 것만으로도 고맙고, 공부 잘하는 아이는 신통해서 고맙고, 말썽꾸러기 아이는 그 힘찬 고집이 고맙다.’ 오늘날 부모들은 공부 잘하는 아이를 더 예뻐하는 경향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공부 잘하는 사람은 잘하는 대로 예쁘고, 못하면 못 하는 대로, 건강한 사람은 그런대로 우리를 예뻐하십니다. 우리 자신이 이런 좋으신 하느님의 보살핌을 통해 살아간다는 걸 확신한다면 자책하거나 낙담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은 잘난 사람에게 초점을 두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다 제쳐 놓지만, 하느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마치 부모가 잘못 사는 자식에게 더 마음을 쓰는 것처럼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회개하면 하느님이 정말 그런 분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세상 평가 기준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남들이 나를 못생겼다, 능력이 없다고 흉보고 욕해도 자책하거나 낙담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그런 힘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을 갖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이 약하면 하느님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것을 얻을 수 없지만, 신앙이 깊어지면 하느님께 대한 이런 확신이 분명하게 생기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평가에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전교자들의 수호이시며 자신의 성소가 ‘사랑’이라고 하셨던 소화 데레사 성녀가 쓴 글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께서 착복식 하는 날에 어떤 손님 수녀님이 그녀를 보시고 “아이고 참 얼굴 참 통통하고 몸도 든튼하며 살쪘네.”라는 말을 듣고 수녀님은 기분이 나빠졌답니다. 기분이 상해서 부엌으로 들어갔는데 또 다른 손님 수녀님이 소화 데레사 수녀님께 “데레사 수녀 왜 이렇게 말랐어. 얼굴이 왜 이렇게 초췌해. 아이고 그러면 수도 생활 못 해. 많이 먹어 튼튼해야 해”라며 정반대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부터 그녀는 인간들의 의견이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으며 서로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짧은 시간 내에 깨닫고 난 후부터 사람들이 뭐라 하든 거기에 큰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제가 주교가 되고 나니 제 얼굴 표정 하나하나를 가지고 사람들이 굉장히 이야기해대더군요. 언젠가 교구 행사로 조규만 주교님의 송별 미사를 하는데 그 당일에 제가 안경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안경에 적응하느라 눈이 침침하여 얼굴을 펼 수가 없었습니다. 그 표정을 보고서 별 소문이 다 났는데 ‘손 주교님이 걱정이 많다. 총대리 될까 봐 걱정한다.’ 등등 사실과 다른 소문들이 돌게 되었습니다. 정말 사람들의 말이라는 것이 이렇게 저렇게 다르구나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남의 평가에 쉽게 기뻐하거나 쉽게 마음이 상합니다. 더구나 우리가 마음이 약하면 그런 말과 평가에 더욱 휘둘리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 신앙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한결같은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신다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눈길은 한결같은 사랑이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산다면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 절망과 실망에 빠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릴 때마다 심한 좌절감에 또 열등감을 느낄 때마다 의도적으로 ‘나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서 그분의 사랑과 보호 속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마음에 반복해서 새기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소위 종교개혁을 일으켜서 교회를 두 쪽 내고, 여러 가지 비난을 받았지만, 사실 그는 아우구스티노의 수사 신부로서 굉장히 열심히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세례 성사의 의미는 똑바로 새기고 있었습니다. 자기 책상에 라틴어로 ‘나는 세례 받았다’라는 문구를 새기고서 자신이 정말 우울감에 빠질 때마다 침체되는 기분이 들 때마다 자기가 새겨놓은 그 말을 주문처럼 외우면서 다시 힘을 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우리가 본받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서 그분으로부터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받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기초가 됩니다. 개는 주인과 함께 있을 때 편안하고 마음이 넉넉하지만, 혼자가 되면 예민해져서 마구 짓어댑니다. 사람도 똑같습니다. 내 뒤에 나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해 주고 받아주는 누군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안심하고 편안해지고 사람이 넉넉해지고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하느님이라는 든든한 백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변화될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께로 돌아서면 회개가 가능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누구든, 설사 큰 죄인이라고 해도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하느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지만 결코 우리를 있는 그대로 버려두시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죄인이면 죄인인 대로, 의인이면 의인대로 그대로 받아들이시지만 그대로 내버려 두는 분은 아니십니다. 우리가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하느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신다.’라고 생각하며 여기에만 만족합니다. 자기는 죄 속에 살면서 하느님은 자비로우시니까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니까 거기에 만족하고 거기에 딱 머물려고 합니다. 이것은 반쪽 만족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있는 그대로 어떤 조건도 따지지 않고 당신 사랑 안에 받아들이시지만, 그 사랑을 통해서 우리가 변화되기를, 회개해서 변화되기를 원하시는 그런 분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여인아 너를 단죄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 하셨더니 여인은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 돌아가라 그리고 더 이상 죄짓지 마라.”라고 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달라지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예수님이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변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곳에 관심 두며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느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서 그분의 자녀가 되었으면 예수님을 우리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고 다른 곳을 기웃거립니다. 여러분은 경제인이니까 부의 창출에 대한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겠지요. 그런데 어떤 일의 판단 기준에 ‘부의 창출이냐, 하느님이냐.’ 하는 것을 판단할 때, 그 기준이 하느님 쪽으로 가지 않는다면 그건 하느님을 등지는 일인 것입니다. 경제인으로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실까? 그 기준에 따라서 때로는 내가 손해도 보고, 바보같다는 이야기를 듣더라도 하느님을 따라가는 것이 신자인데, 그렇지 않고 세상의 논리대로만 간다면 과연 우리가 참된 신앙인이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다 똑같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분의 자녀가 되어서 살아가면서 하느님을 등지고 사는 경우들이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미사 시작의 고백 기도를 바치는 겁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많은 죄를 지었으며 또한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이 기도문은 굉장히 좋은 기도문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겉으로만 보이는 행동을 가지고 잘했는지 잘못했는지를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 마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행동만이 아니라 생각과 말과 행동이 모두 들어가 있습니다. 깨어 있는 하루 동안 우리 마음속에 오가는 생각들이 스크린에 쫙 비춰진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마도 여러분이나 저나 부끄러워서 쥐구멍이라도 찾아야 할지 모릅니다. 깨어 있는 그 시간에 우리는 부정적인 생각, 안 좋은 생각을 할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가 비록 세상 앞에 죄인이 아니지만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안 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앞에서 죄인인 것입니다. 그에 더하여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또한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라고 하느님 앞에 고백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정말 무상으로 많은 것을 받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고 살기 때문에 우리가 적어도 미사 때 하느님 대전에 나설 때는 “생각과 말과 행위로 많은 죄를 지었으며 또한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하느님의 은총도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자기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하고 뉘우치는 것, 그것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무한 은총을 베풀어주시는데, 그 은총을 받을 만한 준비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 교만한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은총이 튕겨져 나갑니다. 저는 요즈음 이스라엘에서 존경받는 다윗 성왕의 위대함을 다시금 생각합니다. 다윗 왕은 우리야의 아내를 자신의 후궁으로 만들어 버리는 하느님 앞에서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나탄 예언자가 그것을 지적했더니 “내 탓이오”라고 하면서 다윗이 바로 무릎을 꿇고, 내가 하느님 앞에 죄를 지었다고 고백합니다. 그 당시에 왕들의 절대 권한을 생각한다면 자기의 잘못을 바로 인정한다는 것이 굉장히 위대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아무리 작은 잘못도 인정하기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CEO들 많으시지만, 부하직원 앞에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여러 신부님들 상대하면서 인사 실무도 담당해 보았는데 제일 대면하기 어려운 사람이 자기 잘못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본인의 잘못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신부님을 보면 하느님의 구원을 받기가 힘들겠다는 생각까지도 들곤 합니다. 근데 자기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면 아주 쉽게 풀립니다. 잘못을 인정한 후부터는 하느님의 자비를 이야기할 수 있고, 기회를 다시 한번 줄 수도 있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마음이 완고한 사람, 목이 뻣뻣한 사람’이라는 표현이 바로 이런 사람일 것입니다. 아마도 제가 지금 하느님 앞에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자기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한다는 것, 이것이 회개의 가장 중요한 제1차적인 모습입니다. 하느님 앞에 자기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이웃 앞에서도 자기 잘못을 솔직히 인정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이웃도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요즘 사회에서 자기 잘못, 자기 실수를 인정하게 되면 종종 바보 취급을 받곤 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적어도 우리가 가정 안에서나 성당 안에서는 잘못을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신앙인이기 때문에 ‘내 탓이오’ 하고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인간관계를 풀어가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결국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이 정말 자비로운 분이라는 것을 굳게 믿으면서 그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우리가 올바로 응답하지 못했다는 걸 솔직하게 인정하고 하느님 앞에 “제 탓이요.” 또 다른 사람 앞에서도 “내 탓이요.”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첫 번째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회개를 너무 뿌옇게 생각하지 마시고 회개의 여러 가지 구체적인 모습이 있는데 그중 첫 번째가 바로 자기 잘못을 하느님 앞에 이웃 앞에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회개의 모습은 말씀 전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일 미사의 경우 본기도 후에 구약의 내용인 제1독서의 말씀을 듣고 시편의 한 대목인 화답송을 합송합니다. 제2독서의 말씀 후에 복음환호송인 ‘알렐루야’를 합송한 후 복음 말씀과 신부님의 강론을 듣습니다. 그 후에는 모두 일어나 사도신경으로 고백을 합니다. 여러분, 말씀 전례의 순서에 집중해 보십시오. 먼저 듣고 입을 떼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또 한 번 듣고 다시 하느님을 알렐루야 찬미하고 또 한 번 복음과 강론 말씀을 들은 다음에 신앙고백을 합니다. 듣고 말하기를 무려 세 번에 걸쳐 하는 것입니다. 이 구조에서 드러난 것은 하느님 앞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먼저 그분 말씀을 귀담아 듣고 입을 떼서 그분을 찬미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구원 업적에 대해서 잘 듣고, 입을 떼서 그 구원 업적을 찬양하는 것, 그것이 회개한 사람의 모습이고 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회개한 사람의 두 번째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에게는 말하기에 앞서 듣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사도 바오로가 로마서 10장 17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음으로써 우리 믿음이 생성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성서를 읽고 우리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만큼 성서를 읽을까요? 제가 볼 때 실제로 성서 공부하는 숫자는 중복되는 사람들이 많기에 전체 신자의 0.5%~1%밖에 안 된다고 봅니다. 미국의 어떤 신부님은 성경을 책장에 꽂아두지 말고 베개 위에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전에 또 자고 난 후에 성경을 한 장씩 읽으라는 의미랍니다. 성경을 읽고 하느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신앙의 가장 기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기본을 제대로 지키지 않기 때문에 사실 우리의 신앙이 너무 약합니다.

 

과거에 우리 순교자들을 생각해 보니 그분들이 당시 신부님 만나서 미사에 참여하고 고해성사도 보고, 그런 것이 1년에 한두 번 될까 하는 정도였습니다. 어떤 신자들은 평생 신부님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순교한 분들도 있었습니다. 과연 그분들은 어디서 영적인 힘을 얻어서 그렇게 순교의 길로 갈 수 있었고 형장에 기쁨의 얼굴로 나아갈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기록을 보면 바로 기도와 성경 말씀 읽기였습니다. 당시에는 성경이 번역이 안 됐기 때문에 이분들이 성경을 접할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였는데, 나중에 기록을 보니 중국에서 주일 복음만 뽑아놓고 영적 묵상을 수록한 책들이 있었습니다. 성경 직해 이런 책이 있었는데 당시에 신자들은 전부 선비들이었기에 한자를 아니까 그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 평민들은 한자를 모르니 번역하였고 그 제한된 하느님 말씀이 담긴 책을 신자들은 열심히 읽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기도와 성경 말씀에서 힘을 얻어서 순교까지 갈 수 있었다고 저는 그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만큼 하느님 말씀을 먼저 듣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고 그것이 회개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여기서도 회개의 1차적인 모습과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연결됐다는 걸 생각한다면, 하느님 앞에서 그 말씀을 먼저 잘 듣고 찬미하는 사람이라면, 사람들 앞에서도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먼저 그 사람의 말을 잘 듣고 그다음에 입을 떼서 얘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귀가 둘이 있고 입이 하나인 이유를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많이 듣고 적게 말하라는 것이지요. 요즘 세상은 많이 똑똑해졌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피곤하고 각박해졌습니다. 왜일까요? 남의 말을 전혀 안 듣고 자기 말만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즘 대화와 소통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역설적으로 대화와 소통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대화와 소통의 기본은 남의 말을 귀담아듣는 것입니다. 그저 듣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귀담아듣고 그 말을 통해서 자기 생각과 입장을 변화시킬 게 있다면 변화시키는 것이 진정으로 듣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매스컴에 나와서 토론하는 것을 보면 다 자기 말만 일방적으로 얘기하고 남의 말을 안듣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말을 진정으로 귀담아듣는 신자들은 상당히 적다는 것입니다.

 

프랑스와 모리아크라는 프랑스의 가톨릭 작가는 “한 사람의 벗은 한 쌍의 귀를 의미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친구는 두 귀로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란 것입니다. 우리가 두 귀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루카복음 8장 15절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서 열매를 맺는 사람이 돼라”고 하였습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먼저 듣고, 들은 말씀을 간직해서 새기는 겁니다. 즉 루카복음 8장 15절의 말씀은 인내로서 열매를 맺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회개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말을 들을 때에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들어야지 삐딱한 마음으로 들으면 그 말이 안 들립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경제인으로서, 한 신자로서, 또 본당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하는 분으로서, 먼저 다른 사람의 말을 인내롭게 잘 들어주시는 분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남의 말을 잘 들어준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자기 마음을 비운다는 건 너무 대단한 경지이고, 자기 생각을 어느 정도 옆으로 밀어놓고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남의 말은 절대로 안 들립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참고 들어주는 그 자체도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심리상담가들이 상담을 할 때 한 번에 듣는 시간을 50분 정도로 정해 놓는다고 합니다. 듣는 게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남의 말을 더욱 잘 들어주신다면, 여러분 주변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은 지위가 높을수록 더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 중에 한 분이 어떤 국무총리를 지명한 것을 두고 여러 사람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 국무총리께서 부하직원의 말들을 잘 들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분 자신이 말씀하기를 당신은 어느 자리에서도 80%는 듣고 20%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미사의 전반부인 말씀의 전례가 끝나면 성찬 전례가 이어집니다. 성찬 전례의 여러 부분 중 감사송이 있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사랑하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 옵니다. 이 감사송은 미사의 핵심 정신 중의 하나인 감사와 찬미를 잘 드러냅니다. 우리가 미사하면 보통 희생 제사를 먼저 생각합니다. 물론 미사에 가장 중요한 것이 예수님이 2천 년 전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신 그 사건을 새롭게 기억하고 현존하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당신을 희생하신 그 예수님을 기억하며 우리도 희생하자는 의미에서 미사를 희생 제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미사는 또 동시에 감사의 제사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거행하셨던 최후 만찬은 미사의 기원입니다. 그러면 이 최후 만찬이라는 것이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졌느냐 하면 파스카 만찬의 양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유다인들은 먼 옛날 하느님께서 모세를 보내주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종살이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셨던 그 구원사건을 기억하며 1년에 한 번 파스가 만찬을 거행합니다. 파스카 만찬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의 조상들을 구원해 주신 그 하느님을 기억하고 그분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파스카란 말은 ‘지나가다’라는 뜻이며, 죽음에서 해방으로 건너갔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날 밤 최후 만찬을 파스카 만찬으로 하셨다는 것은 당신이 곧 수난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구원의 하느님을 기억하면서 그분께 감사와 찬미를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미사의 핵심 정신 중에 또 하나가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세례를 받게 되면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주일 미사 참여가 의무 사항입니다. 미사에 참석해서 십자가에서 희생되신 그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린 예수님을 구세주로 보내신 하느님을 기억하고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그런데 미사가 끝난 직후 집에 와서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삶을 산다면 잘못된 일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한 사람은 하느님과 이웃에게 많이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올해가 최인호 작가가 침샘암으로 세상 떠난 지 10년이 되었습니다. 당시 서초동 본당 신부님말씀에 의하면 어느날 최인호 씨가 성체조배실에서 성체조배를 하고 있더랍니다. 이 당시 이미 그의 병은 많이 깊어 거의 말도 하지 못한 상태였었고, 그가 신부님에게 “신부님 성체가 너무 고파서 왔어요”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성체가 고프다는 표현이 작가다운 표현이어서 제 기억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최인호 작가가 세례받은 지 얼마 안 되어 열심히 이곳저곳 개인 피정을 다니는 도중에 어느 남자 수도원에서 피정을 하게 되었답니다. 거기에서 병원으로 한 달 동안 봉사 실습을 하고 온 어느 수사님을 만났답니다. 그 수사님은 한 달 내내 변을 보기 힘든 환자들의 관장만 해주었다고 하였답니다. 그 수사님은 봉사 이후에 자기 발로 화장실 가서 일 볼 수 있는 것만 해도 정말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했답니다. 우리가 건강할 때 절대 느낄 수 없는 감사함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 알고 감사한 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상적이고 평범하고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 하나하나가 따지고 보면 다 감사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코로나를 3년 동안 겪으면서 일상적인 생활이 얼마나 고마운지, 얼마나 은총이 가득한지 깨달았습니다. 형제님들, 친구들하고 어울려 치맥 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 아니었나요? 자매님들 카페에서 차 한 잔 마시면서 친구와 수다떠는 것이 당연한 거로 생각했었지만 결코 당연하지 않은 것이었어요. 미사를 주일날 원하는 시간에 볼 수 있다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 곁들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감사할 것을 찾노라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사실은 그걸 하나하나 찾아서 여러분들이 감사하게 되면 정말 회개한 사람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일본의 가톨릭 작가 소노 아야코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아프리카를 많이 알게 되면서 인간이 평생 지닐 수 있는 것에 대해 대단히 겸허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하면서 이런 글을 썼습니다. 먼저 “일생 동안 어찌 되었든 비와 이슬을 막아주는 집에 살 수 있고, 매일 먹을 것이 있는 생활이 가능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기본적으로 성공이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만일 그 집이 깨끗하고 목욕탕과 화장실이 있으며 건강을 해칠 정도의 더위와 추위에서 보호되고, 매일 뽀송뽀송한 이불에서 잘 수 있고, 누추하지 않은 옷을 입을 수 있으며, 영양이 골고루 섞인 맛있는 식사를 하며, 전란에 휘말리지 않고 병이 들었을 때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지구 수준에서 보더라도 대단한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만일 그 사람이 자신이 좋아하는 공부를 하면서 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사랑도 알게 되며 인생의 한 부분을 선택할 수 있고, 자유스럽게 여행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독서를 하며 취미생활도 할 수 있고, 가족이나 친구들로부터 신뢰와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인생은 그야말로 대성공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 대부분이 대성공 속에 살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회개한 사람이라면 하느님의 은혜, 일상생활에 숨겨둔 하느님의 은혜를 밝은 눈으로 바라보고 많이 감사할 수 있고, 그러면 여러분 자신이 달라지게 되어서 얼굴이 밝아지고 주변 사람을 너그럽게 대할 수 있습니다. 많이 감사하면 몸 안에 부정적인 생각들이 사라지고 사람들이 굉장히 긍정적인 모습을 지닐 수 있고 그래서 내 주변 사람들 마음을 살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높은 이상과 계획을 갖고 있더라도 찡그리는 얼굴을 하고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는다면 결코 세상을 좋게 바꿀 수 없습니다. 높은 이상이 있고 아주 좋은 계획이 있어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야만이 그것이 실현 가능한데 찡그리고 비판하고 성질내면 다른 사람 마음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한 사람의 세 번째 모습은 많이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다음에 성찬 전례의 마지막은 영성체입니다. 성체를, 성체 안에 계신 그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매우 어렵습니다. 사람은 자기중심적으로 살게 돼 있기 때문에 하느님 뜻으로 돌아서는 게 그게 쉽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자기를 점검하지 않는다면 하느님 중심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체를 영하면서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고 다시 한번 마음을 굳히게 되면 그런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성체를 통해 오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하라는 명령을 내리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회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그런 분입니다. 회개한 사람들이 많은 공동체는 다릅니다. 천국의 분위기가 납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신 황일광 시몬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백정이었습니다. 조선시대 백정은 사람의 취급도 못 받고 짐승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천주교를 알게 되면서 신자들과 사귀게 되었고 양반인 천주교 신자들도 그 백정 출신의 황일광을 다른 신자들과 똑같이 대해주었습니다. 그분이 나중에 한양으로 왔을 때 정약용 집안하고 알게 됩니다. 그 엄청난 양반 집안이 모든 신자가 똑같이 앉아서 밥 먹고 같이 기도하니까 그 사람이 입버릇처럼 하는 얘기가 “나에겐 천국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이승 너머의 천국과 또 하나는 바로 여기다. 양반이 천한 신자인 나를, 금수와 같은 나를 이렇게 점잖게 대해주니 여기가 천당이 아니고 무엇이냐.”라고 하였답니다. 회개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는 바로 천국의 분위기를 내는 그런 공동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길 원하시고 회개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천국의 분위기가 나는 그런 공동체 만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회개의 목소리를 듣고 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는 가장 좋은 장소가 바로 미사입니다. 여러분들이 그걸 마음에 새기시고 여러분 스스로가 사회적으로는 큰 죄인은 아니지만,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앞에 다 죄인입니다. 사실은 정말 꾸준히 회개하는, 죽을 때까지 회개하는 삶을 사시어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몇 가지 그런 모습을 드러내신다면 분명히 여러분을 통해서 여러분 주변이 좀 더 밝아지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활짝 열 수가 있을 겁니다. 우선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이 계신 일터, 여러분 성당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시면 참 좋겠습니다.

 

조찬 세미나 : 2023년 8월 22일, 명동 로얄호텔 3층 그랜드볼룸

 

[평화가 넘치는 샘물(전국가톨릭경제인협의회 발행), 2023년 가을호(Vol. 33), 손희송 총대리주교(천주교 서울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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