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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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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4 ㅣ No.493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 5,9)

 

 

‘평화’는 일반적으로 화해를 뜻합니다. 구약성경과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에게 평화는 구원의 완성을 뜻했습니다. 평화의 결핍은 악이나 불의입니다(이사 48,22: “악인들에게는 평화가 없다”). 평화와 의로움이 상응(相應)하는 것입니다.

 

 

평화의 존재로 창조된 인간

 

일치와 평화의 존재로 창조된 인간은 최고 존재에게 복종해야 하위의 것들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육신은 영혼에게, 영혼과 육신은 하느님께 복종하는 자연법이 심어진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근원적 의로움이 자리합니다. ‘각자에게 자기 것을 부여하는 것’이라는 정의의 의미가 지켜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원죄로 이 질서를 파괴하여 평화가 파괴되었습니다. 여러 욕구와 충동이 무질서하게 싸움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이에 암브로시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눈앞에 죄가 왔다 갔다 하고 항상 생각 중에 괴롭히는데, 어찌 우리 마음속에 평화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 죄는 고요하던 사람을 흥분시키고 건강하던 사람을 슬픔에 잠기게 만들고, 기쁘게 살던 사람을 근심에 차게 만들고 온순하던 사람을 거칠게 변화시키고, 잠 잘 자던 사람을 온통 깨우게 만듭니다.” “죄인들은 고요한 것같이 보이고 평화를 누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 양심의 가책의 가시가 마음을 늘 찔러 대는데 어떻게 영혼이 평화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여러 가지 욕정들이 싸움을 벌이고 있고 갈등과 흥분 등의 흔들림이 있는 판에 어떻게 평안하다 하겠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는 평화 안에 완덕이 있다고 봅니다. 평화 안에 적대적인 것이 없고, 암브로시우스의 지적처럼 평화의 회복은 인간 내부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모든 활동을 이성에 복종시키고 육의 충동을 지배하는 이들이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고,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또 평화는 선한 의지를 가진 이들이 받는 것이고, 완덕의 절정에 있는 현인의 삶입니다. 평화를 이루는(세우는) 사람들은 분쟁이 무서워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머물고 하느님의 나라가 펼쳐지도록 일하는 사람입니다.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드러나지 않게 일치하면서 구원의 신비에 들어가는 것을 받아들이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본받으면서 자기 안에 그분의 모상을 새겨 넣습니다.

 

 

슬기의 은혜가 동반하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아우구스티누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이 슬기(sapientia)의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슬기를 통해 이성에 반역하는 충동이 없어지며, 모든 것이 인간의 영에 순종하고, 영혼은 하느님께 순명하여 질서정연해지기 때문입니다. 참된 최고의 지혜는 모든 것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사랑의 첫째 계명에 있으므로, 지혜는 하느님 사랑 자체이고 성령을 통해 부어 주신 선물입니다. 지혜는 단순한 인식이 아니라 사랑이고 소유이며 향유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부분적이고 평화와 행복도 불완전합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욕정이 지혜를 정복하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싸움이 날마다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선이 악을 다스리기 위한 전투이며, 평화를 간직하기 위한 충돌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정화의 삶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보존하고 간직한 채 눈으로 보게 될 것에 시선을 고정하는 삶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뵙고자 그분을 찾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충만한 만족감으로 먹고 마시게 될 것을 미리 맛보도록 초대됩니다.

 

 

자유를 누리는 하느님의 자녀들

 

평화를 이루는 이들은 “악에서 구하소서”와 연결됩니다. 이런 해방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그분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의 사랑을 믿고 그 약속에 희망을 두면서 주님 안에서 기뻐하도록 합니다.

 

이에 대해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은혜에 감사드리기 위하여 어떤 적절한 것을 찾을 수 있을까요? 이 넘치는 은총을 찬양하기 위하여 어떤 언어, 어떤 생각, 어떤 심사숙고가 있을까요?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본성에서 탈출합니다. 죽음에서 죽지 않음으로 되고, 사라짐에서 사라지지 않음으로, 하루살이에서 영원으로 됩니다. 요컨대 인간에서 하느님이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되기에 적합하다고 심판 받은 인간은 확실하게 자신 안에 아버지의 품위를 가질 것이며, 그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게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란 칭호는 특별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임금이, 미래에 오실 메시아가 그렇게 불렸습니다.(시편 2,7 참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도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로 불린다는 것은 선택되고 부름 받은 존재임을 말해 줍니다. 또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존엄성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동참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미래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비록 불완전한 평화이지만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자녀로 살고 있습니다.

 

온전하고 참된 평화는 그리스도께서 선사하신 것으로, 험난한 항해를 마치고 항구로 무사히 돌아와 쉬는 배와 같이 세상 여정이 끝난 후 성인들의 안식처에서 누리게 될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34).

 

암브로시우스는 말합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그곳으로 피해가야 합니다. 그곳에는 모든 괴로움과 고생이 없는 참 평화와 안식이 있고, 그곳에 가면 안식의 큰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의 공동 상속자로서 평화라는 예복을 입고 천상 잔치의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삶이 어렵고 힘들지만, 로마 8,17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기 위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임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 변종찬 신부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교부학과 고대 · 중세 교회사를 가르치면서 학생들과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산다. 이 글은 ‘하느님께 오르는 사다리 - 진복팔단’이라는 제목의 강의 내용을 편집부에서 재구성한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4년 11월호(통권 464호), 변종찬 마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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