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평양의 순교자들14: 최항준 신부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7-09 ㅣ No.1714

[평양의 순교자들] (14) 최항준 신부


순교 각오하고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

 

 

- 앞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최항준 신부이다.

 

 

뛰어난 성적과 유머로 인망 두터워

 

최항준 신부는 1920년 평안북도 선천군 운종면 신미리 706번지에서 태어났다. 1952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선천군 운종리에 포함된 ‘신미도’가 최 신부의 출생지로, 이 섬은 육지에서 12㎞(30리)나 떨어진 섬이었다. 부친은 최시화(요한), 모친은 오덕화(엘리사벳)였고, 6남 3녀 중 막내였다. 

 

하지만 최 신부가 4세 때 아버지가 선종했고, 이에 앞서 3세 때 큰 형수가 선종해 어머니가 조카를 키우는데 더 애를 쓰는 바람에 넷째 형 최항민(아우구스티노)의 뒷바라지 속에서 자랐다. 운종학교(4년)와 삼봉보통학교(2년), 평양 성모보통학교(신학교 예비과정 1년)를 다녔고, 성모학교 재학 시절엔 천주교 조선 전래 150주년(원래는 1934년이지만 1935년에 개최) 기념행사로 열린 교리경시대회에서 소년부 1등을 했다. 

 

1941년 동성상업학교 을조(소신학교)에 다닐 때는 라틴어 수업을 따라가기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3학년 때는 1등을 차지했다. 학업 성적은 늘 우수했고, 다방면으로 재주가 많았다. 독서를 즐겼고,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1941년 덕원신학교로 진학한 뒤에도 성적은 뛰어났고, 유머도 풍부해 동료 신학생들을 즐겁게 했다. 방학 때면 고향 신미도공소로 돌아와 청년들을 10여 명씩 모아 교리 공부를 시키곤 했다. 그의 교리 교육은 얼마나 재미가 있었는지, 청년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의 강의를 경청했다. 운동은 별반 잘하지 못했지만, 섬 출신이어서 수영은 남달리 잘했고  체구 또한 단단했다고 한다. 

 

이처럼 학업에서 뛰어났던 최항준 부제는 1948년 10월 10일 신축 중이던 평양 관후리 주교좌성당 지하 임시성전에서 동기 서운석 부제와 함께 평양대목구장 홍용호 주교 주례로 사제품을 받는다. 수품 직후 최 신부는 홍용호 주교의 비서 겸 대목구 경리 책임자로 임명됐다. 

 

하지만 1948년 말은 공산주의자들의 박해가 막바지에 이르던 시기였다. 평양대목구는 당시 관후리 주교좌성당 양도 문제로 평양시 인민위원회와 팽팽히 맞서고 있었고, 최 신부는 성당을 양도할 것을 요구하는 시 인민위원회 관계자들에게 부주교(현 교구 총대리) 김필현 신부와 함께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결국은 1949년 5월 14일 홍 주교가 피랍돼 행방불명되고, 1949년 6월 10일엔 김필현 신부, 기성회 담당 강유선과 함께 최 신부가 평양시 인민위원회에 출두했다가 체포됐고, 보위부로 이송돼 그 후 행방불명됐다. 사제수품 8개월 만에 피랍된 최 신부는 다른 사제들과 함께 평양 인민 교화소 특별 정치범 감옥에 갇혔다가 1950년 10월 20일 국군의 평양 탈환 직전에 다른 정치범들과 함께 총살된 것으로 보인다.

 

 

최항준 신부는

 

■ 1920년 평안북도 선천군 운종면 신미리 706번지 출생  

■ 운종학교ㆍ삼봉보통학교ㆍ성모학교 거쳐 1941년 서울 동성 상업학교 을조(소신학교) 졸업

■ 1948년 덕원신학교(대신학교) 졸업

■ 1948년 10월 10일 평양 관후리성당 임시 성전에서 평양대목구장 홍용호 주교 주례로 사제 수품

■ 1949년 6월 10일 부주교(현 총대리) 김필현 신부, 평양대목구 사업기성회 이사 강유선 등과 함께 평양시 인민위원회에 출두했다가 체포돼 보위부로 이송된 뒤 행방불명

■ 소임 : 평양대목구장 비서 겸 대목구 경리 책임자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7월 9일, 오세택 기자, 자료=평양교구 사무국 제공]



1,902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