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18일 (수)
(홍)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성경자료

[인물] 성경의 세계: 솔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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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31 ㅣ No.3711

[성경의 세계] 솔로몬 (1)

 

 

솔로몬의 뜻은 평화다. 유대인의 인사말 샬롬(Shalom)과 어원이 같다. 예루살렘의 살렘도 같은 어원으로 평화를 뜻한다. 아랍인의 인사말 샬라마리쿰도 직역하면 당신께 평화가 있길 빈다는 뜻이다. 다윗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죽음의 고비와 수없이 대치했다. 이스라엘 역시 끊임없이 타민족 침입에 시달렸다. 평화가 염원이었기에 아들 이름을 솔로몬으로 지었을 것이다(1역대 22,9). 출생부터 평화와 연관된 인물이 솔로몬이다. 평화와 안정은 그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던 셈이다. 히브리어는 쉴로모(shlomo). 희랍어로 솔로몬(Solomon)이다. 훗날 구약 경전들을 희랍말로 번역해 사용했기에 공식용어가 된 것이다. 70인 역 성경이다. 라틴어는 솔로몬과 살로몬(Salomon)을 함께 사용한다. 아랍어는 술라이만(sulayman)이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세 번째 임금이다. 다윗이 심혈을 기울인 신도시 예루살렘에서 밧 세바의 막내로 태어났다. 사무엘기에 따르면 밧 세바의 첫아들은 죽었다. 상심한 그녀에게 다시 주어진 아들이 솔로몬이다(2사무 12,24). 주님께서는 예언자 나탄을 보내 아이 이름을 여디디야로 부르게 하셨다(2사무 12,25).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란 뜻이다. 유년시절에 대한 기록은 없다. 짐작건대 어머니 밧 세바의 배려로 화려한 엘리트코스를 거쳤을 것이다.

 

스무 살 전후에 왕위를 물려받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다윗은 서른 살에 임금이 되어 40년간 다스리다 70세에 죽었다(2사무 5,4). 왕이 되어 8년간 헤브론에 살았고 33년은 예루살렘에 머물렀다(1열왕 2,11). 따라서 예루살렘 점령과 정비를 마쳤을 땐 40세를 넘겼을 것이다. 이후 밧 세바에 빠져 아내로 맞이하고 첫아들을 얻었지만 죽었다. 나탄의 질책으로 회개한 뒤 다시 얻은 아들이 솔로몬이다. 그때 다윗은 50세 안팎이었을 것이다. 이런 추정으로 솔로몬은 스무 살 전후에 왕이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솔로몬 역시 40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다(1열왕 11,42). 60세경 죽었음을 알 수 있다. 뒤를 잇는 임금이 르하브암이다. 그가 왕이 되자 북쪽 지파는 독립한다. 기원전 931년의 왕국분열이다. 솔로몬은 이 해에 죽었을 것이다. 기원전 971년 임금이 되고 기원전 990년경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솔로몬 치세의 이스라엘은 안정을 누렸다. 이집트는 자국의 정치적 혼란으로 세력이 약해 있었고, 북쪽 아시리아 역시 큰 세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솔로몬은 팔레스티나 약소국가들을 정복하며 조공을 받기 시작한다. 전성기를 인식하자 숙원사업이던 예루살렘 성전건립을 시작했다. 재위 4년 때의 일이다(1열왕 6,1). [2017년 5월 28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청소년 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성경의 세계] 솔로몬 (2)

 

 

솔로몬은 왕이 되자 정적(政敵)을 없애고 측근을 요직에 앉혔다. 대사제 차독(Zadok) 임명이 하이라이트였다. 왕권강화를 위한 포석이 끝나자 성전건립에 착수한다. 열왕기는 이집트 땅에서 나온 지 480년 되던 해 기공식이 있었다고 전한다(1열왕 6,1). 재위 4년째다. 솔로몬의 즉위를 기원전 971년으로 보면 성전공사를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967년경이 된다. 따라서 히브리인이 이집트를 떠난 시기는 기원전 15세기 중반이다. 야곱의 열두 아들과 그들의 가족이 이 이집트로 갈 때는 70여 명이었다(탈출 1,5). 400년 뒤(창세 15,13) 또는 430년 뒤(탈출 12,40) 이집트 탈출 때는 60만 명이 넘었다(탈출 12,37). 물론 과장된 숫자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떠나왔다는 표현이다. 주님께서 함께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솔로몬은 즉위 4년 2월 성전건축을 시작해 11년 8월 완공했다(1열왕 6,38). 7년에 걸친 대역사였다. 장소는 예루살렘 모리야 산이다(2역대 3,1). 설계도는 주님께서 다윗에게 알려주신 것이었다(2역대 28,19). 역사에서 말하는 제1성전이다. 봉헌식 때 솔로몬은 황소 2만 2천 마리와 양 12만 마리를 제물로 바쳤다(1열왕 9,7).

다윗은 왕이 되자 12지파를 통합해 강력한 국가로 만들려했다. 하지만 순순히 따라주지 않았다. 당시 지파는 철저한 독립체였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들의 제사를 없애고 예루살렘 제사만 허용할 구상을 한다. 성전건립의 또 다른 이유다. 영적 구심점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중앙집권이 가능토록 한 것이다. 다윗 때는 이동식 성전이었다. 계약 궤를 모신 지성소 중심으로 설계된 천막성전이었다. 스켐과 실로로 옮겨 다니던 것을 예루살렘에 정착시킨 것이다. 실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기 전부터 신성시하던 땅이다. 이런 곳에서 제사를 못 드리게 했으니 다윗은 당연히 웅대한 성전을 지어야 했다. 훗날 히즈키야 왕은 아시리아 침공에 대비해 실로에 큰 못을 만들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실로암 못이다.

솔로몬의 성전건축 이후 예루살렘은 지파 연합을 상징하는 도시가 된다. 다윗의 계획이 이루어진 것이다. 솔로몬은 만족하지 않고 왕조의 위용을 드러낼 왕궁을 계획한다. 자신감 넘쳤던 그는 세속군주로의 진입을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예산이 부족했다. 재정마련을 위해 이스라엘을 12개 구역으로 나눠 세금징수를 의무화한다. 다윗이 와해시키려 했던 12지파를 다시 봉합시킨 것이다. 백성들에게는 부역을 의무화했다. 당연히 반발이 있었다. 자금이 달리자 티로 임금 히람에게 이스라엘 영토 일부를 팔기까지 했다(1열왕 9,11). [2017년 6월 4일 성령 강림 대축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성경의 세계] 솔로몬 (3)

 

 

솔로몬 시대 이스라엘은 풍요로웠다. 국가 경제 버팀목은 무역이었고 주력 수출품은 구리였다. 무역으로 연간 600 탈렌트 이상 금을 벌어들였다고 한다(1열왕 16,14). 일 탈렌트를 34㎏로 보면 20톤이 넘는 양이다. 돈으로 환산해도 9,000억이 넘는다. 순금 3.75g(1돈)을 17만 원으로 봤을 경우다. 솔로몬은 네게브 사막 남쪽의 아라바(Arava) 광야에서 대규모 구리광산을 개발했다. 팀나(Timna) 광산이다. 에돔 땅이었던 것을 다윗이 정복했고 솔로몬이 개발한 것이다. 현재는 이스라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집트를 탈출했던 모세 일행이 진을 치고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민수 33,35).

아라바 광야는 사해 남쪽에서 시작해 아카바(Aqava)만에서 끝난다. 사해를 아라바 바다라고 부른 이유다(신명 3,17). 이스라엘과 요르단 국경은 아라바 광야를 따라 남북으로 이어져 있다. 국경 끝에 홍해로 빠질 수 있는 항구가 있다. 이스라엘 유일의 항구 에일라트(Eilat)다. 솔로몬은 이곳에 구리 수출을 위한 무역항을 만들었던 것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에츠욘 게베르(Ezion Geber) 항이다(1열왕 9,26). 솔로몬을 찾아왔던 스바 여왕도 이 항구를 이용했다. 팀나 구리광산은 항구의 북쪽 골짜기에 있었다.

솔로몬은 구리를 제련해 성전 건축에 활용했다. 그러면서 에츠욘 게베르 항을 통해 수출했고 부를 축적했던 것이다. 항구에는 조선소도 세웠고 티로 사람 히람이 보낸 선원들과 함께 상선을 운행했다. 아프리카 오피르(Ophir)까지 배를 보내 금을 실어 왔다고 한다(1열왕 9,28). 시편에 등장하는 왕비의 장식품 오피르 황금이다(시편 45,10). 이후로도 구리광산은 유다왕국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재도 이곳에선 구리를 캐내고 있다.

솔로몬은 성전 구들을 대부분 청동으로 만들었다(1열왕 7,45). 전례용 기구들을 청동으로 만들자면 엄청난 양의 구리가 필요했을 것이다. 성경에는 당시의 청동 구조물이 기록되어 있다. 우선 성전 앞에 세운 거대한 두 기둥이다. 높이가 40암마다(2역대 3,15). 암마(Amma)는 이스라엘 길이 단위로 라틴어론 큐빗(Cubit)이다. 팔꿈치에서 가운뎃손가락까지 길이로 대략 50센티cm로 본다. 40암마면 20m가량이다. 그 밖에도 길이와 너비가 20암마(10m)인 청동 제단과 여러 가지 성전 기물들이 있었다. 솔로몬은 7년에 걸쳐 예루살렘 성전을 완공했다. 구리광산은 이 시기 가장 많이 발전했을 것이다. [2017년 6월 11일 삼위일체 대축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성경의 세계] 솔로몬 (4)



솔로몬은 인접 국가 외교를 강화했고, 세력이 강한 측은 혼인 관계로 끌어들였다. 왕궁엔 외국 여인이 많아졌고 그들 종교도 자리를 잡았다. 왕족 출신 아내가 칠백 명 후궁이 삼백 명이었다고 전한다(1열왕 11,3). 물론 전승 과정에서 부풀려진 숫자다. 이집트 공주도 시집왔다(1열왕 7,8). 파라오 왕조는 철저한 근친혼이었다. 여간해선 타국에 왕족을 보내지 않았다. 그런데 혼인 관계를 맺은 것이다. 솔로몬의 힘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당시 이집트는 21왕조가 지배했고 세력이 약했다. 공주를 보내면서 가나안 성읍까지 지참금으로 줬다(1열왕 9,16).

솔로몬은 지혜로웠다. 한 아기를 두 여인이 자기 아이라 우기자 모성에 따른 판단을 내렸다. 유명한 솔로몬의 판결이다. 지혜는 주님께서 주셨다(2역대 1,12). 핵심은 듣는 마음이다(1열왕 3,9). 말씀을 따를 때 지혜는 떠나지 않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이 들면서 솔로몬은 변한다. 외국출신 아내들에게 빠져 그들의 말을 따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아내들이 섬기던 모압과 암몬 신들을 위해 산당을 짓고 제물까지 바쳤다(1열왕 11,7). 완벽한 우상숭배였다. 주님께서는 두 번이나 경고를 하셨지만 외면했다. 지혜는 서서히 그를 떠났다. 모압은 현재의 요르단이고 암몬은 시리아의 전신이다.

이후 이스라엘은 약해진다. 솔로몬은 평범한 왕으로 죽었을 뿐이다. 통치 기간은 40년이었다. 그가 살아있을 때 북쪽 지파는 반란을 계획했고 동조하는 예언자도 있었다(1열왕 11,31). 솔로몬 사후 왕위는 르하브암에게 돌아간다. 그때 백성들이 청했다. 부왕께서 지우신 힘겨운 일과 멍에를 가볍게 해 주십시오(2역대 10,4). 세금과 부역이 가혹했다는 표현이다. 치세 말기에는 성경의 찬란했던 지혜는 없었던 것이다. 이끄심이 떠난 까닭이다. 빈부의 차는 극심했고 왕궁에는 이교 문화가 성행했다. 후궁마다 자국 종교를 신봉했지만 제재하지 않았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전성기를 이룩했지만 쇠퇴 원인도 분명 제공했다.

그는 세속 군주가 아니었다. 차독 대사제가 기름 붓고 성별한 메시아의 선조였다. 그런 까닭에 우상숭배에는 빠지지 말아야 했었다. 후대인들도 안타깝게 여겼다. 그토록 지혜로웠던 왕의 어리석은 노년을 아쉬워했다. 그러기에 많은 이들이 그의 이름으로 작품을 남겼다. 대표적인 것이 잠언이다. 표제는 솔로몬의 잠언이지만 그가 쓴 것은 아니다. 그의 시대가 한참 지난 뒤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사람의 합작으로 잠언이 기록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2017년 6월 18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성경의 세계] 솔로몬 (5)



솔로몬은 무역에 손댔고 성공했다. 이집트와 아라비아 사이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한 결과다. 홍해로 빠지는 아카바 바다에는 물류전담 항구를 만들었고 조선소까지 지어 무역선을 확보했다. 에츠욘 게베르(Ezion Geber)항구다(1열왕 9,26). 이 무렵 스바(Sheba) 여왕이 찾아왔다. 목적은 무역 협상이었다. 솔로몬 루트로 특산물을 판매하고 싶었던 것이다. 스바 왕국은 아라비아 남쪽 끝에 있었다. 지금의 예멘 인근이다. 기원전 10세기부터 800년 이상 존속했던 국가로 알려져 있다. 전성기에는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까지 포함했다고 한다. 여왕에 대한 기록은 이슬람 경전 쿠란에도 나온다. 빌키스(Bilqis) 여왕이다. 그만큼 구체적인 인물이다.

열왕기에 의하면 여왕은 향료와 보석을 바치며 면담을 청했다(1열왕 10,2). 향료는 왕실 필수품이었지만 전량 수입이었다. 제전예식에서는 반드시 있어야 했다. 향료가 없으면 제사가 성립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부자들은 부의 과시로 여겼던 물건이다. 여왕은 이러한 향료 교역을 독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라비아산 고급 향료를 이집트와 가나안에 공급해 부를 축적한 셈이다. 방문은 교역을 위해 솔로몬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려는데 있었다. 라틴어로 향료는 뻬르푸뭄(perfumum)이다. 직역하면 연기를 통해서다. 번제에서 제물을 태우면 살타는 냄새가 강하다. 이를 커버하기 위해 제물에 향료를 뿌린 뒤 태웠다. 연기와 향냄새를 함께 피웠던 것이다. 화장품을 뜻하는 영어의 퍼어퓸(perfume)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당시 스바 왕국이 독점했던 향료의 길(Spice Road)은 기원전 4세기 희랍의 등장으로 몰락한다. 아라비아 고급 향료 역시 지중해 값싼 향료에 밀려 고전하게 된다. 아기 예수님을 방문했던 동방박사들은 아라비아산 향료를 가지고 왔다. 신약성경은 유향으로 표기했다(마태 2,11). 향료는 향료나무(乳香樹)에 흠집을 내어 거기서 흘러내린 분비액을 고체화시킨 것이다.

솔로몬을 만난 스바 여왕은 이집트를 거쳐 에티오피아로 갔다. 구전에 의하면 여왕은 그곳에서 솔로몬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훗날 에티오피아 황제가 된 메넬리크(Menelik) 1세다. 메넬리크 왕조는 스바 왕국을 에티오피아 전신으로 여겼다. 홍해 양쪽 해안까지 자국영토로 삼았고 수도는 에티오피아 고원 악숨(Axum)에 건설했다. 19세기말 이탈리아 세력을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한 황제는 메넬리크 2세(1844~1913)다. 메넬리크 1세 이후 3000년이 지났건만 솔로몬 왕가의 이름을 택한 것이다. [2017년 6월 25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남북통일 기원 미사)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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