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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인물과 영성 이야기17-19: 칼 라너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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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4-30 ㅣ No.798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17) 칼 라너 신부 (상)


일상 속에서 영적 신비를 만나다

 

 

- 칼 라너 신부.

 

 

신학자 칼 라너

 

독일 출신의 예수회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 신부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가톨릭 신학자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칼 라너 신부는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태어나서 갓 스무 살 나이로 예수회에 입회하였습니다. 예수회원으로서의 양성과정과 함께 학문의 길에도 정진해서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철학박사 과정을 마치고, 이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서 신학박사 및 교수 자격을 획득하였습니다. 그는 1984년 인스부르크에서 선종할 때까지 신학교수로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자문역으로서, 또한 공의회 이후 교회상에 대한 토론에 있어서 실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자로서 많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또한 대학의 영역을 넘어서 교회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현재 새롭게 출판 작업 중인 방대한 「전집」(독일 헤르더 출판사)에 담긴 그의 수많은 저서, 논문, 기고 등과 그가 주도적으로 참여한 현대 신학의 정수를 담고 있는 여러 사전들과 학술지, 편람 등을 통해 오늘날에도 그는 교회의 신학과 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또한 칼 라너 신부 자신이 그의 저술들의 근본 동기가 ‘사변적 관심사가 아니라 현대사회에서의 복음선포라는 사목적 열망에 있다’고 밝히고 있듯이 그는 교회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교회가 지속적으로 쇄신되기를 원하는 많은 교회 내 구도자들과 활동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생각합니다.

 

칼 라너는 교의신학과 기초신학 분야에 있어서 탁월하고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지만, 그에 못지않게 사목신학과 교회일치 신학, 타종교와의 대화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종교신학 분야들에 있어서도 큰 획을 긋는 연구를 남겨놓았고 귀중한 통찰들을 전해주었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그의 초기 저작들인 두 편의 종교철학에 관한 저서, 「세계 내 정신」과 「말씀의 청자」 역시 오늘날까지도 높이 평가되는 의미 있는 유산입니다. 이 두 편의 작품을 통해서 그는 현대 신학의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이른바 신학의 ‘인간학적 전환’을 대표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신학을 인간학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청자’인 인간의 주관적 측면과 경험을 깊이 고려함으로써 계시의 깊은 의미에 다가서는 시도이며, 역사와 현실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에 대한 살아있는 이해를 추구하는 구도의 여정을 뜻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인간의 초월자를 향한 본성적인 열망과 정향에 대한 자기 이해와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인간이 자신을 실현하는 장인 세상에 대한 근원적인 긍정을 통해 새롭게 그리스도교 세계관을 정립하려는 노력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종교철학적, 기초신학적 기초 수립을 위해 칼 라너는 ‘마레샬 학파’가 지향했던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초월 철학을 그리스도교 교의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간학과 접목시키려는 시도를 긍정적으로 수용하였고, 당시 가장 주목받던 현대 철학이었던 철학자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이 개진하는 인간학을 받아들였습니다.

 

 

일상과 신비

 

이러한 그의 관점은 사변적이고 학술적인 차원을 넘어서 현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초월’을 향한 부름을 세상에서의 도피나, 소수의 사람들에게 유보된 관상적 삶의 양식에서만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신, 평범한 사람들의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발견하고 응답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 초월은 신비를 의미하며, 신비에 다가서고 응답하는 것이 바로 영성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이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신비가’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는 것이 라너 신부의 생각이었습니다.

 

20세기 중반기를 풍미한 프랑스 문화계의 거물, 작가이자 드골 시대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는 “21세기는 영성의 시대가 되거나 아니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사람들은 새로운 세기에 온 인류가 정신적이고 영적인 차원에 대한 새로운 각성과 추구가 없다면 물질문명과 폭력, 국가주의 속에서 세상의 미래가 암울해질 것이라는 염려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라너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합니다. “미래의 그리스도인은 신비가가 되거나, 아니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을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며 신비와 만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하느님 체험의 본질이며, 이것 없이 외적인 제도와 형식 ‘소시민적인’ 자기만족의 방편으로서의 종교 생활만이 남을 때 그것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아니다”라는 라너 신부의 교회와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고언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라너 신부는 신비체험이 그리스도인이 보편적으로 추구해야 하며 또한 도달할 수 있는 목표이자, 모든 인간 안에 존재하는 초월을 향한 본원적 갈망에서 유래하는 것이라 말하지만, 그가 말하는 신비주의는 우리가 쉽게 연상하게 되는 특이한 은사체험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체험들과 사건들 안에서 신비체험의 본질을 보려 합니다. 라너 신부는 영성에 관한 독립된 대작을 내어 놓지는 않았지만, 그의 수많은 피정 강의를 위한 글들과 묵상서들 속에서 라너 신부가 스스로 살아왔고, 신앙의 벗들에게 권해주는 영성의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오랜 세월 동안 전 세계 많은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아왔고 우리나라에서도 일찍이 장익 주교의 아름다운 번역으로 출간된 「일상」(분도소책 1, 1980)입니다. 이 책에서 라너 신부는 “너의 일상이 초라해 보인다고 탓하지 말라. 풍요를 불러낼 만한 힘이 없는 너 자신을 탓하라”는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어구를 머리말로 삼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일상이 먹고 마시고, 살아가기 위한 하루하루의 노고와 잡다함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럼에도 일상의 영적 의미에 대해 차분한 마음으로 시간을 가지고 묵상해보도록 권유하고 있습니다. 일상의 일들에 대해 관조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각자의 신앙에 있어 매우 긴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 일상을 받아들이고 그 하찮음과 성가심까지도 부드러운 마음으로 대면하라고 권고하면서, 그러는 가운데 비로소 우리는 신비와 접점을 가지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담박하고 성실하게 받아들여진 일상은, 바로 일상으로 머무는 이상, 우리가 하느님과 그의 숨은 은혜라고 부르는 저 영원한 불가사의와 무언의 신비를 담고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인간다운 삶이란 ‘더없이 진지한 자유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포착되는 영원한 하느님의 무게를 지닌 삶’인데, 이러한 영적이고 정신적인 삶의 실현은 관념과 자아성찰에서가 아니라 일상 안에서 체험하는 구체적인 행위들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일상은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노래하듯, ‘영원의 전조’를 담고 있는 작은 물방울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5월 1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18) 칼 라너 신부 (중)

 

일하고 걷고 먹고 웃는… 일상의 은총체험

 

 

일하는 것, 걷는 것, 보는 것….

 

칼 라너 신부의 묵상집 「일상」의 원제는 ‘일상의 것들(Alltagliche Dinge)’입니다. 말 그대로 이미 우리가 매일 아침 일어나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살아가면서 행하고 체험하는 일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제목이 뜻하듯, 이 책에서 라너 신부는 독자들에게 영성적 묵상에 어울린다 싶은 별스러운 영적 체험과 장소를 찾아다니기에 앞서서 우리가 거의 습관적으로 수행하며 반복하는 일들과 익숙한 삶의 자리에서 신비와 만날 것을 권유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목차를 대하면서 우리가 갈망하는 신비 체험의 계기들이 놀랍게도 우리의 일상사에 함께 묻어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일하는 것’ ‘걷는 것’ ‘앉는 것’ ‘보는 것’ ‘웃는 것’ ‘먹는 것’ ‘자는 것’, 이 모든 것들 안에서 신비의 현현을 볼 수 있는 눈을 갖는 것이야말로 일상의 영성입니다.

 

라너 신부는 먼저 이러한 일상적인 일들을 차분하게 관찰하고 묘사합니다. 그러면서 혹시라도 우리가 이러한 익숙한 행위들이 품고 있는 소중한 의미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음을 던집니다. 그 물음은 조금씩 사소하고 반복적인 일상사가 반영하는 ‘신비’에 대한 깊은 차원의 성찰로 이어지고, 이렇게 ‘의식된’ 일상은 영적 체험의 자리가 됩니다. 라너 신부가 이 소책자 안에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일상적 행함에 대한 새로운 성찰들 중에서 몇 가지를 옮겨 봅니다.

 

“일은 우리가 평일 또는 일상이라고 부르는 것의 특징적 내용이다… 일의 신학이 해야 할 첫마디는, 바로 일은 그대로 일이라는, 또 언제나 그러리라는 말이다. 즉, 고달프게 단조로운 것, 자기 포기를 요구하는 것, 일상적인 것이다.(‘일하는 것’)”

 

 “우리는 걷는다. 그리고 이미 이 신체적인 걸음만으로도 여기가 우리 정처가 아님을, 우리는 길을 가고 있음을, 어디엔가 정말로 이르러야 할 몸임을, 아직도 목적을 찾고 있는 나그네임을, 두 세상 사이의 방랑자임을, 길손임을 말한다.(‘걷는 것’)”

 

 “앉는다는 몸짓은 부정도 표명도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평정과 고요와 항구의 복된 향유에서, 잃을 두려움 없이, 한마디로 평정한 앉음에서이다.(‘앉는 것’)”

 

 “일상의 보는 행위로 되돌아가자. 이 행위 자체도 이미 인간이 하나의 전체로서 어떠하여야 하는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곧 인간은 열려 있고, 두루 살피고, 멀리 있어 좌우할 수 없는 것에도 마음을 둘 줄 알며, 자기 자신을 내보이고, 내심을 드러내고, 남이 나를 있는 그대로 알기를 용납할 용기와 순진을 갖춘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보는 것’)”

 

 “일상에는 일의 심각성뿐 아니라 바라건대 웃음도 어우러져 있다.… 이런 웃음은 모든 것과 모든 이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만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볼 줄 아는, 탁 트인 호감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다.(‘웃는 것’)”

 

 “인간 실존의 위대하고 숭고한 그 무엇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드러내려면 회식이 그 우선적 상징이 됨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회식은 먹는 이들 상호 간의 사랑과 신뢰로 이루어지는 일치의 상징, 아니, 실행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생존의 기반인 신체적 식사에서 서로를 용납하고 함께 나눔으로써 자신을 서로 베풀어 주기 때문이다.(‘먹는 것’)”

 

 “잠은 인간 세계가 근본적으로는 올바르고 안전하고 선함을 신뢰하는 행위, 천진의 행위, 자기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는 현실을 수락하는 행위이다.(‘자는 것’)”

 

 

세계 긍정에서 시작되는 일상의 영성

 

라너 신부는 여기서 우리에게 일상의 경험 자체에 대해 환상을 갖거나, 그것을 미화하고 신비화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일상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바라보는 모범을 보여줍니다. 다만, 그는 우리가 일상에 배인 수고와 고뇌와 어려움을 회피하거나 부정하기보다는 그것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깊이 이해하면서도 그것까지도 포함하여 나에게 주어진 세계를 받아들이라고 초대합니다.

 

그는 이처럼 일상의 세계를 긍정하는 결단을 감행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세계’를 제대로 경험할 수 있다고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내면 깊은 데서부터 ‘세계긍정’이라는 태도를 가질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계를 온전히 경험한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신비와의 만남입니다. 라너 신부는 우리가 세상에서 도피하지 않으면서 굳건하게, 진정한 의미에서 정신적이고 영성적 차원에서 나의 일상의 세계를 만나는 삶의 목표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그가 속한 예수회의 창시자인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가 가르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라”는 경구가 담은 의미이기도 합니다.

 

한편 라너 신부의 영성이 현대인들에게 갖는 의미를 높이 평가하는 베네딕도 수도회 수도승이자 저명한 영성가인 안셀름 그륀 신부는 라너 신부의 ‘일상의 영성’이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제시한 신학의 정식인 “경험을 통한 하느님 인식(Cogito dei experimentalis)” 경구와 깊이 상통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라너 신부의 신학과 영성은 교회 전통에서 열매 맺은 신학과 영성의 정수를 오늘의 언어와 상황에 맞게 되살린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칼 라너 신부의 묵상집 「일상」.

 

 

라너 신부의 이 묵상은 상당히 오래전에 쓰여진 글이지만, 오늘날 사람들에게 많은 공감을 얻고 있는 ‘삶의 기예’의 철학과 비교해 볼 때도 적지 않은 의미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기예’라는 말은 고대 헬레니즘 철학에서 유래한 용어이지만, 특별히 최근에 들어 삶에서 동떨어진 것으로 보여지는 현학적이고 사변적인 철학에서 벗어나 일상에 깊이 뿌리박고 우리가 현명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며, 성공적으로 삶을 이끌 수 있는 윤리학과 인간학을 추구하는 철학들에서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다. 라너 신부의 일상에 대한 묵상들을 이러한 경향의 철학들과 비교해보면 사실 서로 적지 않은 접점들을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만큼 그의 묵상이 오늘날에도 시의성을 지니고 있고 현대인들에게 큰 호소력이 있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러나 보다 깊이 살펴보면 그가 보여주는 일상의 영성과 신학은 ‘삶의 기예’들과 근본적인 차이를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라너 신부는 우리가 일상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삶의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올바른 길을 안내하는 ‘삶의 기예’가 가지는 가치를 인정하고 선용하면서도, 그것을 궁극적인 영성의 대안으로 삼을 수 없다는, 그리스도교적 식별의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가 ‘은총체험’을 일상의 영성의 근거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라너 신부의 묵상 마지막 장에서 감동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삶의 기예’를 넘어 ‘은총체험’으로 향하는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통해 그의 신학의 근본적 주제인 ‘초월’에 대해 접근하게 됩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5월 8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19) 칼 라너 신부 (하)

 

“일상의 신비란 요란스럽지 않은 성령의 체험”

 

 

- 라너 신부에 의하면 이처럼 일상 안에서 은총 세계를 지각하고, 영에 따른 결단을 하는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 실존의 중심을 이루는 ‘일상의 신비’를 사는 삶이라고 말했다. 출처 www.karl-rahner-archiv.de

 

 

정신, 초월, 은총 - 신비 체험의 삼중적 구조

 

칼 라너 신부의 묵상서 「일상」의 마지막 장인, ‘일상에서의 은혜(은총) 체험(Von der Erfahrung der Gnade im Alltag)’은 ‘일상의 신비’를 일깨우는 라너 신부의 영성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감동적인 글입니다. 여러 번 읽고 숙고하며 이해하고 자신의 경험과 비교하는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글은 사변적이고 학문적인 의도가 아니라 평범한 독자들의 영성생활에 도움을 주기 위한 영적 강화와 같은 성격의 글이지만, 읽을수록 기초신학, 성령론, 은총론과 관련된 라너 신부의 심오한 신학과 철학 사상이 깊이 배어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라너 신부는 이 글에서 ‘일상의 신비’를 추구하는 신학과 영성이란 일상에 깊이 뿌리내리되 일상의 삶이 필연적으로 기울어지게 되는 피상성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매일매일의 구별되지 않는 ‘모든 날’(독일어로 ‘일상’의 문자 그대로의 뜻 All-tag)에서 ‘하느님의 날’로 상징되는 ‘영원’의 의미를 발견하는 노력임을 삼중의 구조 속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일상의 영성’은 우리가 즉자적이고 자기애적 차원에서만 일상의 경험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정신적 존재로서 체험하고 살아가는 결단을 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를 라너 신부는 다음과 같이 인상적으로 묘사합니다.

 

“우리는 자기를 변명하고 싶은데도, 부당한 취급을 받았는데도, 침묵을 지킨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무런 보상도 못 받고 남들은 오히려 나의 침묵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데도 남을 용서해 준 적이 있는가… 우리는 순전히 양심의 내적인 명령에 따라, 아무에게도 말 못할, 아무에게도 이해 못 시킬 결단을, 완전히 혼자서, 아무도 나를 대신해 줄 수 없음을 알면서, 자신이 영영 책임져야 할 결단일 줄 알면서 내린 적이 있는가… 의무를 행하면 자기 자신을 참으로 거역하고 말살한다는 안타까움을 어찌할 수 없는데도,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는 기막힌 바보짓을 않고서는 할 수 없을 것 같은데도 의무를 행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무런 감사도 이해도 메아리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몰아적’이라든가 떳떳하다든가 하는 느낌의 갚음마저도 없이 누구에게 친절을 베푼 적이 있는가.”(칼 라너, 「일상」, 장익 옮김, 분도출판사, 41-42쪽)

이어서 라너 신부는 이러한 정신적인 것의 체험은 다름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영원’과 관계 맺고 그리로 자신을 투신하는 모험이라고 규정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활 체험 가운데서, 바로 내게 일어난 경험들에서 정신을 찾아보도록 하자. 그와 같은 일이 내게 있었다면 정신을 체험한 것이다. 그것은 곧 영원의 체험이다. 정신은 이 시간적 세계의 일부 이상이라는 경험, 인간의 의의란 이 세상의 의의나 행복으로 다할 수 없다는 경험, 현세적 성공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아무 근거도 없이 그저 믿고 뛰어드는 모험의 경험인 것이다.

 

…실로 정신으로서의 인간이란, 단지 사변적으로뿐 아니라 실존적으로 신과 세계, 시간과 영원의 접경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자신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는가를, 정신이 혹 인간적 생활양식의 수단에 그치지나 않고 있는가를 재삼 확인하려는 것이다.”(같은 책, 43쪽)

 

우리가 라너 신부의 전체적인 신학을 염두에 둔다면 여기서 말하는 영원에 대한 내적 의식은 다름 아니라 그의 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초월의 경험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정신적이고 초월적 차원의 경험은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모든 선을 추구하고 일상의 깊은 의미를 길어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열려 있기에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라는 라너 신부의 기본 사상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정신적이고 초월적인 근본 체험을 은총의 사건으로 체험하는 특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일상의 신비란 궁극적으로 영 안에서의 자유를 체험하는, 결코 요란스럽거나 특정한 은사에 매이지 않은 성령의 체험을 의미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가 이처럼 정신을 체험한다면, 적어도 믿음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사실상 이미 ‘초자연적인 것’을 경험한 것이다… 정신의 이런 체험에 있어 우리가 자신을 아주 내맡긴다면, 손에 잡히는 것, 내보일 수 있는 것, 즐길 수 있는 것이 다 사라지고 모든 것이 죽음 같은 암묵에 잠겨 죽음과 멸망의 맛을 띠게 될 때면, 아니면 모든 것이 마치 희고 무색이고 잡히지 않는, 무어라 형언 못할 열락 안에 녹아 버릴 때면, 우리 안에 작용하는 것은 정신뿐 아니라 성령임을 우리가 아는 때가 온 것이다. 자신을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무섭도록 깊은 심연이, 그의 무한성이 우리에게 임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다 내주어 더는 자기에 속하지 않을 때, 자신을 거부하여 더는 임의로 처신하지 않을 때, 만사와 자아가 우리로부터 한없이 멀리 물러났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 자신의 세계, 은혜와 영생의 하느님 세계에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같은 책, 44-45쪽)

 

 

신비 안에 존재하는 인간, 일상 안에 살아가는 인간

 

라너 신부에 의하면 이처럼 일상 안에서 은총 세계를 지각하고, 영에 따른 결단을 하는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 실존의 중심을 이루는 ‘일상의 신비’를 사는 삶입니다. 이는 자기 자신을 초월에 개방하는 정신적 태도 표명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라너 신부는 이미 자신의 초기작 「말씀의 청자」에서 인간을 인간이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절대적이며 ‘자유로우신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정신’으로 규정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과 세계의 의미를 인간의 관점에서, 편에서 예단하거나 조작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자유로우신 하느님의 계시를 ‘듣는 이’로서 존재하며, 초월과의 만남으로 자기 자신을 개방하고,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조건 없이 긍정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가능성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결코 이러한 근원적인 초월 경험 없이 획득될 수 없습니다. 이는 드물지 않게 삶 가운데 의미의 부재 속에서도 인내로이 그 시간을 견디는 자세를 요구합니다. 라너 신부가 「말씀의 청자」에서 전하는 통찰을 음미하며 일상 안에서 신비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기로 다짐해봅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름 아니라 성령에 따른 삶이자 성령 안에서 자유로이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을 생각합니다.

 

“만일 자유로운 분이신 하느님께서 계시하지 않고 침묵하길 원하신다면 하느님의 침묵에 귀를 기울이는 데에서 자신의 정신적 및 종교적 실존의 궁극적인 최고 자기실행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칼 라너, 「말씀의 청자」, 김진태 옮김, 가톨릭 대학교 출판부, 2004) [가톨릭신문, 2016년 5월 15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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