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일)
(홍) 성령 강림 대축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대중문화와 성: 그리스도인에게 성이란?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2-21 ㅣ No.891

[경향 돋보기 - 대중문화와 성] 그리스도인에게 성이란?


성윤리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우리나라에서 성이란?” 하고 물었다. 학생들 몇몇은 한국인에게 성은 “터부시되고 숨겨진 것”이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열려있기도 한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친구들은, 대중문화 안에서 만나는 성의 이미지는 “상품화되어 쉽사리 팔리는 성”이며, 연예인들에게 성은 “코드화된 섹시함을 강요받는 성”이라고 했다. 성은 한편으로는 “숨기고 싶은 영역”이지만, 동시에 “우리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가장 일상적인 영역”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은 분명히 소중하지만 막연하게 취급되기도 했고, 숨겨져 있으나 무분별하게 방치된 것도 사실이다. 성의 문화 안에는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상반된 특징이 담겨있는 듯하다. 그래서 성은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신비스러운 생명의 영역이되, 인간이 채워나가야 하는 구체적인 일상의 영역임을 동시에 고백하게 한다.


인간의 성

성 또는 섹스라는 단어는 우선적으로 성별을 구분할 때 사용하며, 남녀 또는 부부 간에 잠자리 관계를 가리킬 때 사용한다. 섹스라는 말의 어원은 라틴말 ‘세카레(secare)’에서 왔다. ‘세카레’는 문자적으로 ‘절단하다(to cut off)’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온전하던 전체에서 떨어져 나와 단절되었음을 뜻한다. 성경에 나오는 포도가지의 비유에서 그 뜻을 찾아볼 수 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요한 15,4). ‘섹스된(sexed)’ 상태, 곧 단절된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은 떠나온 본향을 끊임없이 그리워한다. 하나로 붙어있지 않고 혼자 떨어져서는 꽃을 피울 수 없으며, 온전한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섹스라는 표현 외에, 넓은 의미에서 성을 잘 표현하고 있는 외래어로 섹슈얼리티가 있다. 인간의 섹슈얼리티는 깊은 내면으로부터 완전함을 추구하는 강렬한 에너지이다. 사회적인 존재인 인간은 홀로 살아가지 못하고, 끊임없이 이웃과의 만남을 통해 그 완전함을 성장시켜 나간다. 그 만남이 주는 기쁨들, 즐거움과 유머가 곧 섹슈얼리티의 소통에 해당한다. 예술가들의 창조적인 활동을 비롯하여, 친구와의 우정, 공동체 안에서의 친교도 모두 섹슈얼리티의 작용이라 말할 수 있다.

영성신학자 로날드 롤하이저(Ronald Rolheiser)는 포괄적이고 넓은 의미의 섹슈얼리티를 설명하면서, 부부간의 성관계, 곧 부부행위는 인간 섹슈얼리티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녀출산을 위한 섹스에 한해서 성을 생각하고, 그 범위 안에서 성의 이미지를 떠올리곤 한다.

그래서 성교육도 주로 성행위와 관련된 ‘행동’에 집중해서 말해왔다. 이제는 넓은 의미에서 인간의 성을 말하기 시작할 때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이웃과의 친밀함 속에서도 인간 섹슈얼리티는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가르침

성에 대한 교회의 대표적인 가르침은 「성윤리에 관한 질문들에 대한 선언」(신앙교리성, 1975년)이 있으며, 비오 11세 교황의 회칙 “Casti Connubii”(1930년)와 비오 12세 교황의 “이탈리아 가톨릭 산과의협회에서 한 훈화”(1951년), 그리고 바오로 6세 교황의 「인간생명」(1968년) 등을 꼽을 수 있다. “어떠한 부부행위든지 인간생명을 출산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예로 들면서, 이 교회의 가르침들이 성의 범위를 혼인과 자녀출산에 지나치게 국한하여 다룬다고 지적하는 윤리신학자들이 있다.

하지만, 성에 대한 이 가르침들의 공통된 특징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부부애 안에 나타나는 “인격적 사랑”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특징은 혼인에 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서 이미 잘 나타난 바 있다. 사목헌장은 혼인에 대해 “두 인격이 맺은 풀릴 수 없는 계약의 성격 자체와 자녀의 행복은 부부의 상호 사랑이 올바르게 표현되고 또 진보하고 성숙하도록 요구한다.”(50항)고 했다.

이는 1983년 「교회법전」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난다. “혼인 서약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그 본연의 성질상 부부의 선익과 자녀의 출산 및 교육을 지향하는 평생 공동 운명체를 이루는 것”(제1055조 1항)이라고 했다. 혼인에 담긴 “공동 운명체”의 특징을 강조하는 이 가르침들은, 인간 섹슈얼리티가 지향하는 바, 인간 상호 간의 완전한 일치를 향한 친교와 사랑을 그대로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인간의 섹슈얼리티가 행복한 인간관계를 향한 모든 노력을 포함한다고 할 때, 이러한 성의 특징은 인간이 본성으로부터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을 재확인시켜 준다. 우리는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공동체와의 친교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 관계하는 인간의 특징을 공의회 문헌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인간은 그 깊은 본성에서 사회적 존재이므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도 없고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도 없다.”(사목헌장, 12항).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와의 만남을 필요로 하고, 삶을 소통하는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자아를 만난다. 교회의 가르침이 혼인과 부부사랑 안에서 인격적 사랑과 상호소통을 유독 강조하는 이유는 “두 인격이 맺은 풀릴 수 없는 계약의 성격”(사목헌장, 50항)이 인간 섹슈얼리티 특징을 잘 표현해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곧, 사목헌장이 “혼인은 온 생애의 공동생활과 친교로서 지속된다.”(50항)라고 했듯이, 부부간에 떨어질 수 없는 특별한 ‘믿음’을 뜻하는 신의의 덕이 부부 관계 안에서 잘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성윤리에 관한 질문들에 대한 선언」은 혼인 이전에 이루어지는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오늘날 혼인 이전에 성적인 일치를 이룰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 이 의견은 모든 성행위는 결혼이라는 범주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교회의 문헌들과 반대된다.” 이 가르침이 당부하는 바는 혼인 밖에서의 사랑이 “성실함과 신의 안에서 상호 관계성”(7항)을 충분히 보증해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혼인 밖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에서 생겨날 수 있는 한계들, 곧 생명에 대한 무책임한 결정들은 인간 섹슈얼리티가 지향하고 있는 상호소통의 특징을 와해시킬 수 있다. 인간의 섹슈얼리티는 인격적 만남에서 발생하는 일치와 소통을 끊임없이 희망하지만, 책임을 소홀히 한 만남들은 인간 섹슈얼리티가 가지고 있는 특징, 곧 진실되고자 하는 인간 관계성에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입히기 때문에 그렇다.

「인간생명」은 시대의 요청에 따라 올바른 산아조절에 관해 발표했던 바오로 6세 교황의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부부가 ‘인간생명’을 전달할 중대한 임무를 받았음을 강조한다. “인간 사회 안에서 여성의 인격과 위치, 결혼에 있어서 부부애의 가치, 이 부부애에 관련된 부부행위 등에 대한 견해”(2항)가 바뀜에 따라, 새로운 문제들이 야기되었는데 이 문제들은 “사람들의 생명과 행복에 직접 관계되는 일들이기에 교회가 무관심할 수는 없다.”(1항)고 한다.

이 가르침은 한편으로 부부행위는 항상 인간생명을 출산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부부행위가 이루어질 때마다 새 생명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지적하고 있다. 부부행위에는 “부부의 결합을 표시하고 견고케 하는 목적을 내포”(11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부행위를 통해 부부는 상호일치의 소통과 신의를 표현하고, 견고한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부부애가 지닌 상호일치에로의 목표는 사목헌장에서 이미 언급된 바 있다. “혼인은 출산만을 위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다. … 그러므로 가끔 간절히 바라는 자녀가 없더라도 혼인은 온 생애의 공동생활과 친교로서 지속된다”(50항). 이는 혼인의 “두 인격이 맺은 풀릴 수 없는 계약의 성격 자체” 때문이며, “부부의 상호 사랑이 올바르게 표현되고 또 진보하고 성숙”(50항)할 때 유지될 것이다. 이 가르침을 통해 교회는 한편으로 무분별한 산아조절을 경고하면서도, 동시에 부부애에 담긴 ‘인격적 일치’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스도인의 삶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점과 인간의 섹슈얼리티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성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인간의 존엄성과 부부애 안에 나타나는 인격적 상호소통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 가르침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인 그리스도인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인에게 섹슈얼리티는 하느님과 소통이다. 섹슈얼리티가 깊은 내면으로부터 불완전함을 극복하고 다시 하나가 되려는 에너지라면, 그리스도인에게 섹슈얼리티는 하느님을 향한 목마름이다. 인간의 섹슈얼리티는 하느님에게서 받은 아름다운 선물이다. 하지만 우리 몸은 에덴의 동산에서 떨어져 나왔던 단절의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한편으로 에덴의 동쪽에서 불완전하게 살아가는 인간임을 고백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의 완전함을 희망하며 살아간다.

그분과 일치된 삶을 살았던 에덴동산에서는 벌거벗었어도 부끄럽지 않았고, 온전히 기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았다. 이 본향의 정원에서 “떨어져 나온” 이후 불완전한 세상에서 살게 되었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그분과의 소통을 다시 희망한다. 하느님을 향한 일치에로의 희망은 이웃사랑의 형태로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인에게 섹슈얼리티는 이웃과의 소통이다. 섹슈얼리티가 사랑이 체험되는 ‘인간관계’ 안의 상호소통을 뜻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세례 받는 장면에서도 이 소통의 순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세례 사건으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체험했던 예수님은 이웃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 사랑을 세상에 선포하셨다.

그리스도인의 목표라 할 수 있는 이웃사랑의 실천은 인간 섹슈얼리티의 체험과 다르지 않다. 이 노력들을 통해서 신앙 공동체 안에 자리 잡은 사랑의 소통은 점차 사회로 번져갈 것이다. 믿음과 사랑의 통교가 지역사회에 옮아갈 때마다 무책임하던 성의 문화들은 조금씩 변모하게 될 것이다.

세상과의 소통을 이루려고 하는 ‘윤리신학의 문화화’라는 주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서 강조한 바 있다. 사목헌장은 어느 때보다 급변하는 현대에는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여러 학문에 정통한 이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현대의 다양한 말을 경청하고 식별하고 해석하며 이를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 판단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계시 진리가 언제나 더 깊이 받아들여지고 더 잘 이해되고 더욱 적절히 제시될 수 있다”(44항).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성교육이 이루어질 때도 이런 문화적 접근이 필요하다. 과거 사람들은 인간생명이 태어나는 데에 여성의 역할은 미미하다고 여겼다. 따라서 여성이 지닌 인격적 가치와 존엄성이 다소 소홀히 여겨진 것도 사실이다. 남자의 정자 안에 작은 인간이 숨어 있다가 여성의 몸에 떨어져 비로소 인간이 된다고 생각했다. 1850년대가 되어서야 자녀출산에 여성의 난소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과학적으로 알 수 있었고, 가임기가 있다는 사실은 1920년대에 알려졌다. 1960년대에는 배란억제 형태의 피임약이 발표되었으며, 2010년에는 의료치료와 연구를 위한 인공난소가 발명되었다.

성의학과 생물학의 발전에 따른 시대적 요구는 날로 급변하지만, 성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 구체적인 현안에 바로바로 반응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교회의 성에 대한 가르침은 한결같이 인간생명의 소통과 인격적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해 왔다는 점을 주지한다면,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과학이 발전하더라도 인간 섹슈얼리티의 핵심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성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안에는 생명의 완전함을 향하고자 하는 인간 섹슈얼리티의 특징이 잘 담겨있다. 반면에, 오늘날 만연하고 있는 성문화는 생명과 인간관계의 통교를 거슬러 남녀 간의 섹스가 섹슈얼리티의 모든 것인 양 강요한다. 이는 지나치게 좁은 범주에서 인간의 성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좁은 의미의 성행위에 대한 성교육에서 벗어나, 넓은 의미에서 ‘인간 섹슈얼리티’를 이해하고 성문화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현 시대의 방법론적 변환은 “동시대인들에게 교리를 전달하는 더 적절한 방법을 찾도록 요청”(사목헌장, 62항) 받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잘 반영하되 인간존중의 가치가 세상과 잘 소통되기 위해서는,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과 성에 대한 ‘이미지’ 쇄신의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인간의 존엄성과 인격적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성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잘 반영하는 일이며, 근본적으로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인격적 ‘소통’을 지향하는 노력일 것이다.

* 최성욱 토마스 아퀴나스 - 부산교구 신부, 미국 산타클라라대학교 예수회 신학대학원에서 윤리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특수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경향잡지, 2011년 12월호, 최성욱 토마스 아퀴나스]


2,144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