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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생태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 5장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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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2-21 ㅣ No.733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22. 제5장 - 접근법과 행동 방식


① 인류 역사에서 가장 무책임한 시대로 기억될 것인가!



“시민 사회가 기울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환경에 관한 정상회의는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정상들에게 정치적 의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166항)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이 땅을 찾으셨을 때,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단 것을 두고 ‘정치적 중립’을 내세워 문제를 삼으려는 분들이 있었다. 참 점잖은 ‘이의 제기’라 할 수 있다. 물론 교종께서도 점잖게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고 대꾸하셨다.

2년 전 교종의 권고 「복음의 기쁨」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리고 이 회칙 「찬미받으소서」가 발표되었을 때 일부 사람들이 보인 격렬한 반발에 비하면 교종의 ‘노란 리본’은 사실 ‘사건’도 아니다. ‘공산주의자’, ‘막시스트’ ‘레닌주의의 아류’, 혹은 ‘경제의 문외한이 어설프게 쓴 책’ 따위의 비난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신성시하는 이들의 입에서 나온 비난이다. 마침내 회칙이 발표된 바로 그 날 미국 공화당은 아예 대변인을 내세워 발 빠르게 공식 기자회견을 열어 회칙과 교종을 비난하기까지 했다. 표현의 수위는 다르지만, 교회 안에서도 일부 인사들은 나름 ‘점잖게’ 교종의 태도와 권고와 회칙을 언급하며, 그 의미를 축소 혹은 왜곡하려 했다.

여기서 정말 궁금함이 생긴다. 왜 교종의 발언과 권고와 회칙을 비난할까? 독자께서 그의 권고와 회칙을 ‘시대적 맥락’ 속에서 읽어보면 그 답을 금세 찾아낼 수 있다. 교종의 행보로 보아 ‘폭압의 권력’을 탐하는 것 같지도, 그렇다고 ‘부의 축적’에 눈이 먼 것 같지도 않다. 그 행보가 ‘사회적 약자’ 편에서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음을 보면 교종이 어느 자리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는지 분명해진다. 그런데다가 교종은 지금의 경제와 금융 체제의 부작용과 미흡함을 문제 삼으며, 제발 제대로 된 ‘처방’을 내려주십사고 품위 있게 간청하지 않는다. 대신 교종은 신성하고 절대적인 그 체제(system) 자체에, 그리고 그 체제를 떠받치고 있는 이데올로기 자체에 근본적 이의를 제기한다. 그것도 분명하게 공개적으로 말이다. 지금의 경제 체제, 시장과 금융투기의 절대 자율을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와 그 이데올로기를 실현시켜주기 위해 충실히 봉사함으로써 사람과 사회와 자연을 황폐화시키는 경제와 정치의 부도덕함과 무모함과 무능을 공개적으로 문제 삼는다. 만일 외계인이 있다면, 자멸과 상호파괴의 길로치닫는 인류의 오늘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랄 것이라고까지 한다.

회칙은 그 부도덕함과 무모함과 무능함(회칙의 3장)이 불러온 재앙들(1장)은 통합의 생태(4장)와 철저하게 반한다고 밝힌다. 물론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에도 분명히 반한다(2장).

이제 교종은 회칙 제5장에서 병의 원인을 찾아내기 위한, 그리고 그 진단과 처방을 찾기 위한 ‘대화’와 ‘행동’ 노선을 제시하려 한다. 제5장은 의미심장한 진단을 내놓으면서 시작한다. “많은 어려움이 지난 세기 중반에 시작되었습니다”(164항). ‘지난 세기 중반’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를 말한다. 인류는 급속한 변화와 심각한 불균형에 내몰린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1965년 12월 8일)은 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면서 시작한다. 회칙에서 진단하는 내용으로 말한다면,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그에 부합하는 윤리와 도덕의 부재라는 불균형일 것이며, 사회적으로는 미국을 한 축으로 하는 서방세계와 소련을 주축으로 하는 동방세계 사이의 냉전을 꼽을 수 있다. 여기에다가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수백 년 지구 남반부 지역을 식민 지배함으로써 급속히 발전한 선진 국가들과 막 독립한 남반부의 수많은 나라들 사이의 심각한 경제적 불균형을 더할 수 있다.

맑은 정신으로 보면, 그 심각한 불균형의 문제를 못 볼 수가 없다. 교종은 그 부정적 결과들을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특정 생활양식과 생산소비 모델”이 낳았다고 밝힌다. 게다가 “그 해결책들이 단순하게 몇 나라만의 이해관계를 지키기 위해서 아리라, 반드시 지구촌 차원의 전망에서 제시되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밝힌다(164항 참조).

우리 모두에게 부정적 결과를 안기고 있는 특정 ‘생활양식과 생산소비 모델’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지구촌 차원의 전망’을 훼방 놓고 ‘자기 나라만의 이해관계’를 지키려는 나라는 어느 나라들일까?

교종은 그동안 환경에 관한 현안에 대해 괄목할 만한 대중적 토론과 시민으로부터의 헌신적이며 활발한 활동이 있었다고 긍정한다. 그렇지만 “정치와 기업(경제)의 영역에서는 그 도전의 급박성을 놓고 볼 때, 그 대응방식에 있어서나 시의성에 있어서도 훨씬 뒤쳐졌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말한다. 정치와 경제가 이제라도 올바른 몫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산업화 이후의 시기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무책임한 시대 가운데 하나로 기억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165항 참조). [평화신문, 2015년 12월 20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23. 제5장 - 접근법과 행동 방식


② 환경에 관한 국제 공동체의 대화



“보다 더 힘이 세고 가장 많이 오염시키고 있는 나라들이 정직하고 용기를 내며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리가 숨기려 하고 있는 그 문제가 야기할 비극들을 몸소 겪어야 할 사람들은 (곧 사회적 약자와 미래 세대는) 이런 양심의 실패와 책무의 실패를 절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169항).

‘지난 세기 중반’부터 우리는 ‘하늘과 땅과 물과 뭇 생명’에서 중병의 증세가 심각하게 악화되었음을 깨달았다. 자연 환경의 악화가 무수한 사람의 삶의 질을 급격하게 떨어뜨렸고, 사회를 고장 나게 했고, 불평등은 심각한 수준으로 치달았으며, 그 범위가 지구촌 차원으로 확산되었음을 고통스럽게 목격하고 있다.

이처럼 자연 환경과 인간 환경과 사회 환경에서 중병의 증세가 심각하게 악화된 덕분에(?) ‘이성과 지성과 책임감’을 지닌 사람들이 점점 더 강하게 확신하게 된 것이 있다. “이 행성은 우리 모두의 고향이며, 인류는 하나의 공동 가정에 살고 있는 한 백성”이라는 확신이다. 또 “지구촌 차원의 환경 및 사회 문제들”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몇 나라만의 이해 관계”가 아니라 “지구촌 차원의 전망”에서 “하나의 공동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도 자각하게 되었다(164항 참조).

이 고통스러운 자각(19항 참조)은 ‘시민 사회’의 ‘대중적 토론과 헌신적이며 활발한 응답’을 이끌어냈지만, 세계 공동체의 ‘정치 및 경제 영역’에서는 그 대응 방식과 시의성에 있어서 시민 사회의 열망을 거의 담아내지 못하고 있음이 현실이다(165항 참조). 예를 들어, ‘1992년 리오 데 자네이로 지구 정상회의’는 ‘생태계를 돌보기 위한 국제적 협력’과 ‘오염 유발자의 비용 부담 책무’와 ‘환경 충격 평가의 의무’ 등을 명문화했다. ‘지구 온난화’ 추세를 되돌리려는 노력으로 ‘온실 가스의 대기 집중을 제한한다는 목표’를 설정했고 ‘생물 다양성에 관한 행동 계획을 갖춘 의제’를 채택했으며, ‘삼림에 관한 원칙’도 밝혔다. 그리고 20여 년이 흘렀다. 일부 분야에서 ‘긍정적인 결실’을 맺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그 성적은 ‘실망스럽기만 하다.’ ‘협정 이행 감시 장치’와 ‘정기적 조사’와 ‘협정 불복종에 대한 제재 수단’ 같은 ‘효율적이고 유연하며 실질적인 협정 이행 수단’을 아직까지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167-169항 참조).

‘효율적이고 유연하며 실질적인 협정 이행 수단’을 마련하지 못한 원인, 곧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지 못한 원인은 무엇일까? 교종은 ‘공동의 책임’과 함께 다음과 같이 ‘차등의 책임’을 분명히 밝힌다. “보다 더 힘이 세고 가장 많이 오염시키고 있는 나라들이 정직하고 용기를 내며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지구촌 차원의 공동선보다 자국의 이해관계”를 앞세울 정도로 ‘보다 더 힘이 세고 [지구를] 가장 많이 오염시키고 있는 나라들’은 어느 나라를 말하는 것일까?(169항) 특정 국가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조금만 관심을 갖고 ‘조사하면 다 나온다.’

회칙의 언어를 빌면, 이들 나라의 태도는 정직하지 못하고 비겁하며 무책임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교종은 이를 “양심의 실패와 책무의 실패”라고 단언한다. 그런데 그 실패의 대가를 지불하는 데 있어서, 말을 만든다면, 일종의 ‘역차등의 고통’이 발생한다. “우리가 숨기려 하고 있는 문제들”이 야기할 비극은 누가 더 고통스럽게 짊어지고 있는가? “오늘날 국제 공동체에서 벌인 토의에서 우리가 경솔하게 미뤄놓았고, 그에 따라서 우리가 초래한 나쁜 결과들”의 고통을 누가 짊어질 것인가? 오늘날 사회적 약자이며, 내일의 세대다. 그래서 회칙은 단호하게 경고한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무책임한 시대”로 기억될 수 있으며, ‘부정직과 비겁함과 무책임과 실패’를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169항 참조). 일부 진영에서 교종을 격렬하게 비난한 배경을 짐작할 만하다.

우리가 일상에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차별적 언어가 있다. ‘선진국’과 ‘후진국’ 말이다. 흔히 경제적으로(물질적으로) 앞선 나라와 뒤쳐진 나라를 지칭한다. 그러면서 일부는 그 ‘선진국’을 동경하고 그 ‘후진국’을 무시한다. 그 나라 국적의 시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우리가 동경하고 닮으려 하는 그 ‘선진국’ 가운데 일부 나라는, 회칙의 문맥을 따르면, ‘정신적 도덕적 후진국’이라 부를 만하다.

회칙은 경고에 그치지 않고 경계와 고발로 이어진다. 그대로 옮겨놓는다. “‘탄소 배출권 거래 전략’은 새로운 형태의 투기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이 투기는 세계 차원에서 오염 가스 배출을 감소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전략은 일종의 ‘환경에 대한 책임이라는 가면’을 쓴 것일 뿐이며, 빠르고 쉬운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이 전략은 단순히 일부 나라들과 영역들의 과소비 유지를 허용하는 술책이 될 수 있습니다”(171항). 그런 전략들은 겉으로는 환경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더 나쁜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될 수 있다. ‘산업화된 나라’의 과소비를 유지하기 위해 그렇지 않은 나라들과 사회적 약자를 ‘궁지’로 내몰 수 있기 때문이다(170항 참조).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이 투기와 가면과 술책은 언제나 ‘더 나쁜 불의’다. [평화신문, 2015년 12월 25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24. 제5장 - 접근법과 행동 방식


③ 환경에 관한 국제 공동체의 대화 - 연대에 뿌리를 둔 윤리적 결정으로 ‘세계 공권력’의 확립이 시급히 필요하다



“21세기는…민족국가들의 약세 현상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경제 및 금융 영역들이 초국가적 성격을 갖고 정치 영역을 지배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보다 더 강력하고 효율적으로 조직된 국제기구들을 설치하는 것이 핵심이 됩니다”(175항).

오늘날 전 지구 차원에서 목격되고 있는 생태 재앙의 악화 일로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근본적으로 통합의 생태로 전환시킬 수는 없을까! 교종은 우리에게 그에 대한 문화와 지도력이 없기에 ‘법적 틀’을 마련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호소한다.

“문제는 우리에게 이런 재앙에 맞설 수 있는 문화가 아직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경로를 밟을 수 있는… 지도력이 없습니다. 분명한 경계를 세우며 생태계 보호를 보장할 수 있는 법적 틀을 구축하는 일이 불가결하게 되었습니다”(53항).

지난 호에서 다룬 것처럼, 교종은 통합 생태로 전환하는 그 길을 밟기 위해 ‘공동의 책임’과 함께 ‘차등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각 나라의 주권에 대한 존중’은 건전한 문화와 정의로운 지도력과 권위 있는 ‘법적 장치’의 마련 과정에서 바탕이 된다. 이는 모든 가톨릭 사회원리의 바탕에 ‘인간의 존엄함과 인권’에 대한 존중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교종은 그 막중한 책임을 이행하기 위해서 “모든 나라에 책무를 부과하고 용납할 수 없는 행위들을 방지하기 위한 있는 규범들”이 필요하며 이를 집행할 “구속력 있는 국제 협정들”의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구속력’을 강조한 배경에는 그동안 ‘환경에 관한 국제 공동체의 대화’가 그다지 결실을 보지 못했다는 성찰, 시민사회의 자각과 열망에 대해 정치 및 경제 분야의 미흡한 대응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있다(165, 166항 참조).

회칙은 ‘환경에 관한 국제 공동체의 대화’로서 다음과 같이 몇몇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1972년 스톡홀롬 선언, 1992년 리우데자네이루 지구 정상회의(167항), 생물 다양성 보호와 사막화와 관련한 현안들(169항), 지속 가능한 발전에 관한 유엔 컨퍼런스(169항), 기후 변화와 관련된 회의들(170, 171항), 대양의 통할 체계와 관련된 대회들(174항) 등이 그것이다.

교종은 물론 ‘위험 폐기물’과 ‘멸종 위기에 처한 동식물’과 ‘오존층 보호’와 관련해서 국제 공동체의 대화가 긍정적인 결실을 맺었다고 평가한다(168항). 그럼에도 전반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미흡하다고 평가한다. “정상회의를 통해 마련한 협정은 거의 이행되지 않았습니다”(167항). “의미 있는 진전은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169항).

그 이유는 무엇일까? 교종은 이에 대해, ‘정상들의 정치적 의지의 결여’(166항), ‘(협정 이행을) 감시하기에 적합한 기구와 정기적 조사와 불복종에 대한 제재의 결여’(167, 173항), ‘보다 더 힘이 세고 가장 많이 오염시키고 있는 나라들의 정직하지 못함과 비겁함과 무책임’, ‘지구촌 차원의 공동선보다 자국의 이해관계를 앞세운 나라들이 취한 행동들’ ‘양심의 실패와 책무의 실패’(169항), ‘새로운 형태의 투기와 술책’(171항), 가난한 나라의 ‘추문 수준의 소비와 부패’(172항), ‘산발적인 대화’(174항) 등을 꼽고 있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대목은 ‘민족 국가들의 약세 현상’과 ‘경제 금융 영역의 초국가화’에 대한 지적이다. 이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회칙이 밝힌 것처럼, 경제 금융 영역이 정치 영역을 ‘지배’(압도)하기 때문이다(175항). 이 같은 교종의 해석은 이미 앞에서도 제시되었다. 예를 들어 “과학기술-경제적 패러다임에 기초한 새로운 권력 구조들이 우리의 정치뿐만 아니라 자유와 정의를 압도할 수도 있습니다”(53항). “환경에 관한 지구 정상회담의 실패는 우리의 정치가 과학기술과 금융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경제와 과학기술 사이의 동맹은 그 동맹의 직접적 이해관계와 관련 없는 것은 무엇이나 퇴출시켜 버립니다”(54항).

이런 상황에서 교종은 교회의 가르침을 계승해 외교 활동을 강화하면서, “백성들 사이의 연대에 뿌리를 둔 윤리적 결정”(172항)으로 ‘세계 공권력’을 확립하는 것이 시급히 필요하다고 역설한다(175항 참조).

우리 사회를 성찰하며 묻게 된다. ‘우리는 자연과 경제와 사회와 문화 요소의 통합 생태를 위한 건전한 문화와 정당한 지도력과 권위 있는 법적 틀을 갖추려는 노력을 기울이는가?’ ‘우리의 권력 구조는 자유와 정의와 연대를 향한 시민 사회의 열망을 외면하고, 대신에 경제와 금융 동맹의 지배에 앞장서서 봉사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평화신문, 2016년 1월 1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25. 제5장 - 접근법과 행동 방식


④ 국가 및 지역 차원의 새로운 정책들을 위한 대화 - 정치, 할수 있는 일이 정말 많은데



“일부 지역에서는 재생 가능 에너지 자원을 이용하기 위하여 협동조합들이 개발되고 있습니다. 단순한 이 사례는 기존의 세계 질서가 그 책임을 떠맡는 데 무력한 반면에, 지역의 개인들과 시민 사회들은 실질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179항).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공동 가정인 ‘통합의 생태’를 보호하고, 그때까지라도 우리가 초래한 거센 ‘자멸의 소용돌이’(163항)라 할 만한 생태의 재앙 문제(인간과 사회와 자연의 위기 및 지구촌 차원의 불평등 심화)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그 일은 ‘급박하고 절실하며 광대한’ 도전이다(15항 참조). 그 때문에 반드시 국제 공동체 차원의 접근이 요구된다.

이에 교종은 국제 관계의 윤리(51항 참조) 회복, 국제 질서에서의 공동 및 차등의 책임(170항)과 우주적 연대에 뿌리를 둔 각국의 윤리적 결정(172항), 구속력 있는 국제 협정들(173항)과 보다 더 효율적으로 조직된 강력한 국제 기구들과 세계 공권력의 확립(175항)을 모색하는 ‘대화’를 긴급하게 호소한다(제5장 I ‘환경에 관한 국제 공동체의 대화’).

그렇다고 해서 국제 공동체의 실효적인 대응책이 마련될 때까지 모두가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는 국제 공동체의 효과적인 대응이 실망스러울뿐더러, 실천적으로나 이론적으로 각 나라와 지역 차원에서 짊어져야 할 ‘공동 및 차등의 책임’이 엄연히 존재하며, “할 수 있는 일이 정말로 많기 때문이다”(180항).

회칙은 국가의 책임과 임무로 자국 내의 ‘계획 수립과 조정과 감독과 집행’을 꼽는다. 인간이 자기 능력들을 오용할 가능성이 실제로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국가가 그 임무를 수행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권위’다. 국가의 권위는 어디에서 생기는 것일까? 특정한 소수의 폐쇄적 지배 집단의 위력에서 생기는 것도 다수의 합의로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 권위는 ‘도덕적’이어야 한다. 회칙은 국가 권위의 도덕성을 참된 ‘법치’에서, 그리고 동시에 현재와 미래의 건전하고 성숙하며 위엄이 있는 사회를 건설하려는 ‘공동선’에서 찾는다(177항 참조). 가톨릭 사회교리는 정치 행위가 ‘인간 존엄’과 ‘인권’을 보호함으로써 공동체의 ‘공동선’을 증진할 수 있기 때문에 ‘차원 높은 애덕의 행위’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흔히 ‘근시안적인 권력의 정치’와 ‘선거의 이해 관계’에 몰두하는 정치는 즉각적인 결과물들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대중을 화나게 하는, 소비 수준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거나 외국인 투자에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 그런 조처를 꺼린다.” 그곳에서는 “어려운 시기에, 고상한 원리들을 유지하고 장기간의 공동선을 생각하는 참된 치국을” 기대하기 어렵다(178항). 정치 공동체(국가)의 참된 발전을 가로막는 것은 근시안적인 권력의 정치만이 아니다. ‘정치적 부패’도 빼놓을 수 없다. 정치적 부패는 “민주주의 제도의 가장 심각한 결함 가운데 하나”로서 “도덕 원칙과 사회 정의 규범을 한꺼번에 짓밟는다”(「간추린 사회교리」411항).

교종은 다음과 같이 시민 사회가 정치 권력을 압박하고 단속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밝힌다. “때때로 부패로 인하여 법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정부들(정치인들)이 결정적인 정치 행동을 취하도록 하려면 대중이 압력을 가해야 합니다. 사회는 반드시, 비정부 기구들과 중간 그룹들을 통해서, 보다 더 엄격한 규제들과 절차들과 단속(통제)들을 발전시키도록 정부들에 압력을 가해야 합니다. 시민이 정치권력을 - 국가, 지역, 그리고 자치도시의 정치 권력을 - 단속(통제)하지 않으면, [정치 권력과 기업이] 환경에 가할 손상을 통제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이웃한 공동체들 사이에서 동일한 환경 정책을 지지하는 합의들이 이루어진다면, 지역 차원의 입법이 보다 더 효과적일 수도 있습니다”(179항).

교종의 이런 발언에 불편함을 느끼거나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혹시 가톨릭 신자 가운데 그런 분이 계시다면 우리 신앙의 확신에서 발전한 가톨릭 교회의 교리를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교종의 가르침은 가톨릭 교회의 교리에 충실할 뿐이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는 ‘정치 공동체(국가)는 시민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이를 ‘정치 공동체에 대한 시민 사회의 우선성’이라고 한다. 가톨릭 교회의 이 가르침은 유별한 것도 아니다. 거의 모든 나라의 헌법에서도 볼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우리나라의 헌법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근시안적인 권력의 정치와 선거의 이해 관계에 몰두하는 정치, 정치적 부패와 민주주의 제도의 가장 심각한 결함, 그리고 정치 권력에 대한 시민 및 시민 사회의 통제와 참된 치국을 다시 생각한다. [평화신문, 2016년 1월 10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26. 제5장 - 접근법과 행동 방식


⑤ 국가 및 지역 차원의 새로운 정책들을 위한 대화 - 건전한 정치는 역사에 '사심 없는 책임 완수의 증명서'를 남겨놓는다



“모든 이가 그렇게 하는 것이 시급했고 또 필요했을 때, 행동을 취하는 데 있어 무능했던 것으로 기억될 뿐인데도, 모두를 그 권력에만 집착하도록 꾀려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57항).

근시안적인 권력의 정치, 선거의 이해 관계에 몰두하는 정치(178항)와 정치적 부패(179항)는 건전하고 성숙하며 위엄이 있는 사회가 부과할 수 있는 법과 규칙을 내놓지 못하게 한다. 그렇게 되면 개인이나 사회 단체의 악행을 억제하지도 못하고, 선행과 창의력과 주도성을 촉진시키지도 못한다(177항). 그런 정치는 환경 관련 의제들을 지연시키기 일쑤고(178항), 공동선의 증진은 요원해진다(179항). 기후 변화와 환경 보호와 관련된 정책의 ‘연속성’은 실종되고, “시급히 조처를 해야 할 때에도 통치 기간에 가시적 결과를 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개입하지 않으려는” 비겁함마저 보인다(181항).

회칙이 제시하는 접근 및 행동 노선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정치 권력에 대한 대중이나 시민 단체의 통제와 압박이다. 회칙은 다음과 같이 밝힌다. “정부들(중앙정부, 지방정부)이 중요한 정치적 행동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대중이 압력을 가해야 합니다. 사회는 반드시 비정부 기구들과 중간 단체들을 통해 보다 더 엄격한 규제와 정차와 단속을 발전시키도록 정부들에 압력을 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치 권력이] 환경을 훼손하는 행위를 통제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179항).

회칙이 제시하는 다른 하나의 접근 및 행동 노선은 ‘건전한 정치’의 회복이다. 건전한 정치란 “예방과 안전, 규제 규범들, 시의적절한 법 집행, 부패 척결, 생산 과정에서 발생한 부작용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들, 잠재적 혹은 불확실한 위험이 있을 경우의 적절한 개입”과 관련한 규칙을 내놓음으로써, 개인과 시민 단체들의 “악행을 억제하고 선행과 창의력과 주도성을 촉진하는” 정치다(177항). 건전한 정치란 “어려운 시기에서도 고상한 원리들을 유지하고 장기간의 공동선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국가를 바로 세우는” 정치다(178항). 건전한 정치란 “오늘날 경제와 정치를 지배하는 단기 소득과 단기 결과의 사고방식과 충돌하더라도, [정치인으로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자기의 존엄을 용감하게 입증하고 ‘사심 없는 책임완수 증명서’를 남겨놓을 정치”, “제도를 개혁하고 조정할 역량, 선행을 촉진시킬 역량, 부당한 압력과 관료주의적 타성을 극복할 역량”이 있는 정치이다(181항).

회칙은 국가와 지역의 차원에서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구체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시민과 시민 단체들이 정치권력을 압박할 때 그 올바른 지향을 밝힌다. 국가 차원에서 건전한 정치는 “에너지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원료 사용을 줄이는 상업 생산 형태를 장려하는 일, 에너지 효율성이 떨어지거나 더 많이 오염시키는 상품을 시장에서 퇴출하는 일, 운송 체계를 향상하는 일, 에너지 소비와 오염 수준을 감축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건축과 개축을 권장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지역 차원에서 건전한 정치는 “소비를 조절하는 일, 폐기물 처리 및 재활용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일, 특정 종들을 보호하는 일, 다양화된 농업 및 작물 순환 계획을 수립하는 일”을 할 수 있다.

회칙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교종의 자세를 여기서도 볼 수 있는데, 바로 ‘가난하고 취약한 존재의 우선성’이 그것이다. 교종은 ‘보다 더 열악한 지역의 농업’과 ‘소규모 생산자들’과 ‘생태계’를 잊지 않는다. “보다 더 열악한 지역의 농업은 비도시 기반 시설들, 지역이나 국가 차원의 시장 조직화, 관계 체계들, 지속 가능한 농업 기술 개발에 투자함으로써 향상될 수 있습니다. 소규모 생산자들의 이해관계를 방어하고 지역의 생태계들을 보존하기 위해서 새로운 형태의 협동과 공동체의 조직화가 장려될 수도 있습니다”(180항). 회칙은 구체적인 한 사례로 에너지 ‘협동조합’을 소개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재생 가능 에너지 자원을 이용하기 위해서 협동조합들이 개발되고 있습니다. 이 협동조합들은 지역 내에서의 에너지 자급자족과 심지어는 남은 에너지의 판매까지 보장합니다”(179항).

우리 사회는 어떤가? 정부가 바뀔 때 정책의 연속성은 유지되는가? 대중과 시민 단체들의 정부에 대한 압박은 활발한가? 우리의 정치는 시민과 사회 단체의 ‘악행을 억제하고 선행과 창의력과 주도성을 촉진하는가? 고상한 원리는 유지되고 공동선은 증진되고 있는가? 제도를 개혁하고 조정할 역량과 부당한 압력과 관료주의적 타성을 극복할 역량은 있는가? 에너지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일을 하고 있는가? 소규모 생산자들의 이해관계를 방어하는가? 생태계 보호를 위해 새로운 형태의 협동과 공동체를 조직화하는 일을 하는가? 혹시 ‘단기 소득과 단기 결과’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남아 있다. ‘고상하고 관대한 사회의 바탕이 될 훌륭한 목표와 가치’는 질식시키고 ‘오로지 경제 성장’만을 꾀하려는 것은 아닌가? ‘참되고 뜻깊은 인본주의’는 배제하고 고삐 풀린 무자비한 ‘자본주의’만 발전시키려는 것은 아닌가?(181항 참조). [평화신문, 2016년 1월 17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27. 제5장 - 접근법과 행동 방식


⑥ 대화와 의사 결정의 투명성



“우리는 환경을 구하겠다는 [과학 기술적] 개입들에 관해서 궁리하는 일을 멈춰야 합니다. 모든 이해당사자들이 [환경충격평가] 토론에 참여하여 [의견 일치로] 개발한 그런 정책들을 마련하기 위해서 말입니다”(183항).

우리에게는 ‘환경영향평가’라는 제도가 있다. ‘영향’에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업을 시행하기 전에 ‘환경영향평가’ 과정을 의무화한 배경에는 그 영향이 ‘나쁜 것’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의도를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도 회칙처럼 ‘환경에 가할 충격에 대한 평가’(환경충격평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

회칙은 국제 공동체 차원에서 그리고 국가 및 지역 차원에서 어떤 사업이 환경에 가할 충격을 평가할 때, ‘대화와 의사 결정의 투명성’을 원칙으로 제시한다. 자유로운 의견 교환과 투명한 정치적 과정이 없다면, 환경에 가할 충격을 은폐하는 형태의 부패가 횡행하고, [평가 주체와 대상 사이의] 호의를 교환함으로써 정보의 왜곡과 형식적 토론으로 허울뿐인 협정서만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183항 참조).

우선, 환경충격평가에 있어 회칙이 제시하는 접근 및 행동 노선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환경충격평가는 특정 정책과 계획과 사업을 구상하는 처음부터 그 집행과 사후 전 과정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평가 방식은 학제 사이에 협력하는 방식, 투명한 방식, 어떠한 경제적 혹은 정치적 압력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방식이어야 한다. 셋째, 그 평가는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지역 경제와 공공의 안전과 노동조건에 관한 연구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넷째, 추가 투자의 필요성 여부도 조사해야 한다. 다섯째, 상이한 이해관계자 사이의 의견 일치와 지역민이 그 토론에서 특히 중요하다. 여섯째, 의사 결정 과정과 후속 활동과 감시 활동까지 포함하는 전 과정에 이해 당사자들이 참여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위험 요소들과 가능성에 관한 정보가 충분히 제공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과학적이며 정치적인 토의에는 반드시 정직과 진리가 있어야 한다(183항 참조).

둘째, [평가의] 의사 결정은 어떤 사업이 불러올 ‘위기와 혜택’을 대조한 것에 토대를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 환경의 위기는 현재와 미래의 공동선에 나쁜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단기 소득과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우선시하는 소비주의 문화에서는 제대로 검토하지도 않고 허가서에 승인 도장을 찍거나 정보를 은폐하는 일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184항).

셋째, 제안된 모험 사업에 관한 평가 토의에서는 반드시 그 사업이 ‘참된 통합적 발전’에 기여할 것인지를 식별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그 사업으로 성취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왜? 어디서? 언제? 어떻게? 누구를 위해서? 위기는 무엇인가? 치러야 할 대가는 무엇이며 그 대가를 누가 그리고 어떻게 치를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식별을 위한 이런 물음이 모두 같은 수준의 비중을 갖지는 않는다. 우선순위가 있다는 뜻이다. 회칙은 하나의 예로서 ‘물과 관련된 사업’에 있어서 물이 희소하고 불가결한 자원이라는 점과 모든 사람의 물에 대한 권리는 다른 요소들보다 우선하는 식별 요소가 된다고 강조한다(185항).

넷째, 충격평가 토의에서 예방의 원리를 지켜야 한다. 이는 상처받기 가장 쉬운 이들을 보호하고 또 자신의 이해관계를 방어하고 반박할 수 있는 증거를 모을 수 있는 능력이 별로 없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만일 환경에 심각하고 또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입힐 것이라는 ‘객관적인 정보’가 있다면, 비록 명백한 증거가 없는 경우라 하더라도 사업은 반드시 중단되거나 변경되어야 합니다.” “제안된 활동이 환경이나 그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에게 심각한 해를 유발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입증할 의무”는 사업 주체에게 있기 때문이다(187항).

다섯째, 충격평가에서 대화와 의사 결정의 투명성을 강조하는 것은 “이익만이 계산의 유일한 기준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중요한 새 정보가 드러날 때, 반드시 모든 이해 당사자들이 참여하는 평가가 다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87항). 무엇보다도 “특정 이해관계 집단이나 특정 이념이 공동선을 손상하지 않도록 정직하고 공개적인 그런 토론을 도모하기” 위함이다(188항).

우리의 경우를 성찰한다. 환경에 가하는 충격평가가 경제적 수익 계산 뒷전으로 밀려나 있는 것은 아닌가? 특정 이해 관계 집단이나 특정 이념을 앞세워, 혹은 국책사업이나 법을 앞세워 ‘공개적이며 정직한 토론’ 대신에 형식적 토론만 하는 것은 아닌가? 사업이 초래할 위기는 축소하고 그 혜택은 과장하지는 않는가? 지역민의 의사를 존중하는가? 예를 들어 새만금 간척 사업, 핵발전소 건설 사업, 4대강 사업, 케이블카 설치 사업, 혹은 신도시 건설 사업 따위를 생각할 수 있다. 사업을 구상하고 계획하고 시행하고 그 후속의 활동, 즉 사업의 전 과정에 이해 관계자와 지역민이 참여하여 ‘정직과 진리’에 기반을 두고 공개적인 환경충격평가 토론을 통해 그 의사 결정을 하였는가? [평화신문, 2016년 1월 24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28. 제5장 - 접근법과 행동 방식


⑦ 경제 성장과 발전,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



경제는 효율성만을 내세우는 무차별적이며 획일적인 패러다임의 명령에 복종해서는 안 됩니다. 수익 극대화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이 미래 세대에 떠넘길 상처를, 즉 환경에 입힌 손상을 반성하기 위해 스스로 발걸음을 멈출 것이라 희망하는 것이 과연 현실주의적입니까?(190항)

한국 천주교회에는 그다지 소개되지 않았지만, 사실 프란치스코 교종의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교회 안팎에서 신랄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일부 전문가들은 세계적인 경제 전문 잡지나 방송을 통해서 그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마침내 회칙이 발표되던 날 미국 공화당은 공식적으로 기자회견을 열어 교종을 비판했다. 그들이 교종을 신경질적으로 비판한 이유는 바로 오늘날 세계 질서를 선도하고 있는 ‘체계(system)’와 발전 모델과 도그마 자체에 공개적으로 도전하였기 때문이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세계를 쥐락펴락한 절대 지배권을 행사한 신자유주의(시장자유주의) 이데올로기, 혹은 ‘(금융)자본주의 경제체계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이었다. 그들에게 교종의 도전은 “특정 이해관계(집단)들이나 특정 이념들이 공동선을 손상시킨다”(188항)는 고발로 들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완성을 위한 대화에서의 정치와 경제’(189 ~198항)라는 소제목에서 이미 엿볼 수 있듯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정치와 경제는 인간의 완성을 위해 정직하게 대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치는 경제에 복종”했으며, “경제도 효율성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과학기술 패러다임의 명령에 복종”했다(189항). 그에 따라 발생한 극단적 사례가 바로 ‘2007~2008년의 금융 공황’(189항 참조)과 같은 사태와 정치 자체에 대한 악평과 불신이다(197항 참조). 건전하지 못한 경제와 정치의 대가를 “환경과 가장 약한 사람들”(198항)이 극단의 고통으로 치러야 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의 경제체계에 대해 회칙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미래라고는 없고 새로운 재앙을 잇달아 불러일으킬 뿐이며, 그 재앙의 회복은 더디고 치러야 할 희생은 막대하고 그 회복마저도 겉으로 보이는 것에 불과한 금융체계의 절대 권력”, “우리의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구시대의 쇠퇴한 기준들”, “환경에 불필요한 충격을 가하며, 역내 경제들에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 생산 [방식]”과 “더 많은 거품을 내려는 금융 거품”(189항). “시장이 마치 마법을 부릴 수 있다는 식의 개념”, “오로지 수익 극대화만 꾀하는 곳”(190항). “존경할 만하지도 창의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더욱더 천박한 일”(192항).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연출된 탐욕스럽고 무책임한 성장”(193항). “경제의 불량 기능과 그릇된 적용”과 “지나간 자리에 더 나은 세상과 더 높은 수준의 통합적 삶의 질이라는 흔적을 남길 수 없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경제 발전”과 “사회와 환경에 대한 기업들의 책임”마저 “일련의 마케팅과 이미지 제고의 수단들로 환원시키는 방식”(194항). “수익 극대화의 원리”가 초래한 “경제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그릇된 이해”와 “윤리적이라고 인정”받을 수 없는 경제 활동(195항).

사실 “전체 체계의 철두철미한 개혁과 재검토”를 위한 “새로운 길들을” 닦을 절호의 기회가 있었지만(189항), 우리는 (경제와 정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금융의 거품은 더 많이 나도록 했고, 실물 경제에 대한 열정은 식게 하고 있다. 금융시장이 점점 더 강렬하게 실물시장을 압도하는 형국이다. 기업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중소기업은 무너지며 고용의 기회는 바늘구멍보다 작아졌다. 사정이 이런데도 여기저기서 ‘지속 가능한 성장’에 관한 구호는 무성하다. 그러나 회칙은 이를 두고 “생태의 가치들과 언어들을 금융과 과학 기술주의의 범주들 안에” 흡수시킴으로써 사람들의 “주의를 흐트러뜨리고 핑곗거리를 내놓는 한 방식”일 뿐이라고 비판한다(194항).

한마디로 회칙은 지금의 경제 체계와 발전 모델 자체(실재)와 그것을 떠받치고 이끌어가고 있는 이데올로기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며 재검토와 철저한 전환을 촉구한다. 우리는 “환경은 시장의 힘들로는 적절하게 보호하거나 증진시킬 수 없는 재화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190항). 그리고 “합리적인 한계를 둠으로써, 그리고 더 늦기 전에 우리가 걸어온 발걸음들을 거슬러 올라가 조사함으로써 성장 억제와…후퇴 성장까지도”(193항), “생산과 소비의 속도를 떨어뜨리는 것”(191항)까지도 검토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진보(발전)에 관한 우리의 관념을 다시 정의해야 하며, 지구촌 차원의 현재의 발전 모델을 바꿔야” 한다(194항). 경제는 더 큰 그림을 보아야 하며 창의력과 진보에 관한 이상들을 끌어내는 ‘개방성’을, 상이한 가능성에 대한 개방성을 갖춰야 한다(191항).

우리의 경제를 성찰한다. 경제는 사람과 사회의 삶의 질을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 자연 환경과 사람과 사회를 경제의 수단으로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 우리가 눈만 뜨면 외치는 ‘성장’과 ‘발전’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 지난 수십 년 동안 분명히 경제는 몸집이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건강한가? 그만큼 우리는 ‘잘’ 살고 있는가? [평화신문, 2016년 1월 31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29. 제5장 - 접근법과 행동 방식


⑧ 정치가 없는 경제론은 정당화될 수 없다



“어떤 지역에서는 국가가 그 책임을 수행하지 않아서, 일부 기업 그룹들이 전면에 나설 수 있습니다. 이들은 시혜자의 가면을 쓰고 실질적 권력을 행사하면서, 자신들이 특정 규율로부터 면제된다고 여깁니다”(197항).

교종은 경제 분야에서 ‘수익 극대화의 원리’가 “생산을 증대시키는 동안 앞으로 치를지도 모를 비용에 대해, 곧 미래 자원 및 환경의 건강 관련 비용에 대해 거의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비윤리적인 경제 개념을 불러일으켰다고 지적하며 기업 활동의 윤리성 회복을 강조한다. 지금 세대의 우리가 자원을 다 써 버린 대가로 지불해야 할 사회·경제적 비용을 다른 민족이나 미래 세대가 알아내고 지불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시장이든 국가든 자원을 할당하고 이용할 때도 마찬가지다(195항).

이어서 회칙은 인간 완성을 위해 정치가 경제에 종속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며(189항), 건강한 정치의 역할을 호소한다. 그렇다면 허약한 정치는 무엇일까? 첫째, 경제에 종속되거나 아예 경제와 무관한 정치다. 그리되면 국가 그 자체보다도 더 큰 권력을 행사하는 일부 경제 영역들은 더 큰 책임감을 짊어지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의 재앙과 환경 문제 해결에 있어 경제적 접근 외의 다른 접근법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며, 사회적 약자를 포용하는 일에도 관심을 두지 못할 것이다(196항). 둘째, 무능하거나 부패한 정치다. 그리되면 건전한 공공 정책들을 법제화하는 일이 보류되거나 일부 기업 그룹들의 사악한 논리를 무너뜨릴 수 없게 된다(197항). 셋째, 빈곤과 환경의 타락이 발생했을 때 그 책임을 경제에 떠넘기고 대신 자기들의 권력을 움켜쥐거나 확장시키는 일에만 관심을 두는 정치다(198항).

건강한 정치란 우선, 사회의 각 수준에 현존하는 역량들을 개발할 자유를 부여하며, 공동선에 대한 보다 더 큰 책임감을 요구하는 보조성의 원리를 따르는 정치다. 건강한 정치는 현존하는 재앙과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해 경제적 접근 외에도 다양한 접근 방식을 함께 모색할 것이며 사회적 약자를 포용하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196항). 둘째, 실질적 변화를 가져올 전략을 세우기 위해, 멀리 내다보며 새롭고 통합적이며 학제 간 제휴하는 자세로 지금까지의 ‘과정 전체’를 재고할 용기를 가진 정치다(197항). 셋째, 공동선을 향해 경제와 대화하며 상호작용할 수 있는 형식들을 찾는 정치다(108항).

정치와 경제는 그 목적도 토대도 인간이며 사회다. 정치와 경제는 궁극적으로 참된 인간화와 참된 사회화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이며 수단이다. 이를 위해 각각 윤리적인 경제와 건강한 정치가 요구되며 그 상호작용의 형식들도 찾아내야 한다. 그 실패는 금융 소득에만 관심을 두는 경제와 권력 쟁취와 확장에만 관심을 두는 정치를 키울 것이며, 그 대가는 무수한 사회적 약자의 양산이며 고통이다(198항). 이를 교회의 사회교리는 ‘죄의 구조들’이라고 한다. “하느님의 뜻과 상반되고 이웃의 선익에 위배되는 행동과 태도들, 또 그러한 행동들에서 비롯되는 구조들은 오늘날 두 가지 범주로 나타난다. 한편에서는 이득을 향한 강렬한 욕망이며, 다른 편에서는 자기의 의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부과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오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다”(「간추린 사회교리」 119항).

교종은 정치와 경제가 자기들 각각의 실수를 깨달아 알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 잘못이란 일부 정치 영역에서 보이는 경제에 종속되어 무능하거나 부패한 정치이며, 일부 경제 영역에서 보이는 비윤리적이며 무책임하며 사악한 논리에 사로잡힌 경제를 말한다. 교종은 동시에 건강한 정치와 윤리적인 경제가 공동선을 향해 상호작용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198항).

우리가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는 말이 있다. 규제 완화, 규제 철폐, 규제 개혁 따위의 말이 그것이다. 그 내용은 ‘시장에 너무 많은 규제가 있어서 기업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고, 그래서 경쟁력이 떨어지고 발전하지 못하므로, 과감하게 규제를 없애야 한다’는 뜻이다. 때로는 아예 노골적으로 우리나라 기업의 경제적 역량은 세계 최고 수준인데, 우리의 정치 수준이 한참 뒤떨어져 그 역량을 뒷받침하기는커녕 오히려 장애가 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마침내 정치의 목적이 마치 경제에 봉사하는 데 있다고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사람과 사회와 자연 곧 생태를 보호하고 개선하는 그 일은 오로지 지금의 경제(시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그 시장과 경제를 섬기는 것이 정치의 몫이어야 한다는 주장과 같다. 이는 시장 혹은 경제의 절대 자율이 만능의 신이라는 믿음과 마찬가지다. 가히 경제의 독재라 부를만하다. 정치가 제 몫을 다하지 못할 때 현실 세계에서 이를 견제할 힘은 어디에 있을까? [평화신문, 2016년 2월 7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30. 제5장 - 접근법과 행동 방식


⑨ 과학(학문)과 대화하는 종교들



“오늘날의 생태적 재앙이 갖는 엄중함은 우리 모두에게 공동선을 향해 길을 나서라고, 언제나 ‘실재들은 관념들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인내와 자제와 관대함을 요구하는 대화의 행로로 나서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201항).

정치와 경제가 사람과 사회와 자연 곧 생태를 보호하고 개선하는 그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때, 오히려 오늘날 생태 재앙을 일으킨 과학기술 만능과 왜곡된 인간 중심주의에 종속될 때, 이를 바로 잡을 힘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교종은 ‘생태적 전환’(216항 이하)을 위한 “과감한 문화적 혁명의 길”에서 우리가 “속도를 줄이고 다른 방식으로 실재를 볼 것”(114항)을 촉구한다. “오늘날 생태 재앙이 근대성의 윤리ㆍ문화ㆍ정신적 재앙을 드러낸 하나의 작은 표지에 불과한 것”(119항)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생활양식과 생산ㆍ소비 모델과 기축 권력의 철저한 변화뿐만 아니라(4항) 대중과 시민사회의 건전한 압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204항 참조).

회칙은 ‘나침반을 잃어버린’ 인류(200항)를 걱정한다. 우리에게 ‘인문학의 고사’라는 말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심지어 대학에서 철학과를 폐지한다는 소식부터 대학이 취업을 위한 직업훈련소가 되었다는 자조적인 탄식도 들린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사회가 ‘학문’조차도 철저하게 ‘돈벌이’가 될 수 있는 분야와 그렇지 못한 분야로, 정직하게는 ‘경제’ 혹은 ‘기업’에 활용 가치가 있는 분야와 그렇지 못한 분야로 나누어 버렸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사회에서는 “미학적 감수성이나 시나 혹은 사물들의 궁극적 의미와 목적을 파악할 이성의 능력조차도 설 자리가 거의 없게 된다. 윤리적 원리들조차…순수하게 추상적인 형태”로만 자존하여 공허해진다(199항). 우리에게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알려 주는 나침반이 있는가?

이런 맥락에서 회칙은 ‘종교’ 혹은 인문학의 가치와 임무를 재확인한다. 특히 ‘종교’는 “새로운 지평을 열고, 사상을 자극하고 마음과 정신을 확장하는 영구적인 힘”을 갖는다. 게다가 종교의 언어들은 “모든 맥락을 고려하는 윤리적 원리들”을 담을 수 있다(199항). 종교는 나침반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조화롭게 살 수 있게 하고, 희생할 수 있게 하며, 다른 것들을 잘 다루게 할 수 있는 위대한 동기들”을 잊지 않게 한다(200항).

그렇다고 해서 교종은 종교가 제 임무와 역할을 언제나 올바르게 실천한 것이 아님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며 각 종교가 그 원천에 충실할 것을 권고한다. “만일 [종교의] 원리들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자연을 학대한 것을 정당화하고, 창조에 폭압을 행사하고, 전쟁과 불의와 폭력을 자행하는 것으로 이어졌다면, 우리 믿는 이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종교적] 지혜의 보고들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각 종교들이 갖는 원천들에로 끊임없이 되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게다가 원천 곧 지혜의 보고에 충실하지 않은 믿는 이들의 삶은 곧 “자기들의 신앙과 일치”하지 않는 방식의 삶, “자기들의 행동으로 그 신앙을 부정한” 삶, “하느님의 은총에 개방되어” 있지 않은 삶, “사랑과 정의와 평화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한 삶이기도 하다(200항).

‘원천으로 돌아가기’는 ‘현대 세계에의 적응과 쇄신’과 함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요한 정신 가운데 하나다. 마땅히 교회는 초대 교회 신앙 공동체의 삶(성경)을 존재와 생활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교종은 한국 교회의 현실 진단과 미래의 방향 찾기에서 언제나 그 기준은 사도 시대의 이상적 교회 모습을 드러낸 우리의 초대 교회의 삶이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5장을 마무리하면서 회칙은 종교 사이의 대화, 학문 사이의 대화, 생태 운동 사이의 대화를 호소한다. ‘대화’는 ‘교회의 끊임없는 정화와 쇄신’ ‘현대 세계의 복음화 사명’과 함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 목표 가운데 하나였다. 교종은 “자연 보호, 사회적 약자의 방어, 존경과 형제애의 관계망 구축”을 위한 종교들 사이의 대화를 촉구한다. 다양한 학문 사이의 대화도 소극적으로는 지식의 고립화와 절대화를 막기 위해서, 적극적으로는 환경 문제를 효과적으로 대면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빈번하게 이념적 충돌이 벌어지는 생태 운동들 사이에서도 개방적이며 존경심을 갖는 대화가 필요하다(201항).

우리의 경우를 성찰한다. 종교는 우리 사회의 ‘나침반’으로서의 임무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가? 자기만족과 자기 몰두의 내재주의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교회는 ‘원천(성경)’을 기준으로 삼아 끊임없이 쇄신하며 복음화와 대화의 길로 나서고 있는가? 우리 사회의 학문은 사물들의 궁극적 의미와 목적을 파악할 이성의 능력을 발휘하는가? 아니면 거꾸로 고립화와 지식의 절대화를 꾀하는 가운데 스스로 ‘경제’에 종속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평화신문, 2016년 2월 21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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