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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한국 근대 미술에 나타난 그리스도교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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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1-27 ㅣ No.228

[學位論文紹介] 정성은, <한국 근대 미술에 나타난 그리스도교의 영향>*

 

 

鄭聖恩이 서술한 〈한국 근대 미술에 나타난 그리스도교의 영향 - 1920~60년대 회화를 중심으로〉는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의 한국 근대 그리스도교 미술 작품을 중심으로, 주요 미술가 분석과 주제별 분석으로 나누어 그 특성과 의의를 분석 · 고찰함으로써 한국 근대 미술에 나타난 그리스도교의 영향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와 평가를 시도하였다. 

 

종교는 인간의 정신 문화 양식의 하나로 인간의 내적 생활에 큰 영향을 준다. 이러한 영향력을 지닌 종교 중 그리스도교는 봉건적인 사회 체제가 급속히 붕괴되기 시작하던 조선 후기에 수용되어 한국 근대사의 여러 격변들을 거치면서 함께 성장하여 왔다. 이것은 그리스도교가 한국 근대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 동시에 어떠한 형태로든 한국 민족사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또한 이것은 단지 하나의 외래 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만이 아닌 그리스도교를 터전으로 한 가치 체계의 수용이었고, 문화 양태의 수용이었다. 즉,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적 가치 의식에 기초한 삶 자체를 초래하고 사회의 변화를 촉구하게 되며 문화 활동에도 변천을 가져다주게 되는 영향력을 그 사회에 투영하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동양과 서양의 미술의 만남을 가져왔고, 이를 계기로 과학적이며 사실적인 서양 화법의 수용과 성화를 통해서 서양 미술에 대한 한국인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이를 통하여 한국 근대 미술에서 그리스도교 미술이 존립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점은 회화상의 근대화를 예시한 것으로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 근대 미술에 있어서 그리스도교가 차지하는 의미는 실로 자명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 근대 미술에 나타난 그리스도교의 영향에 관해서는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이해 수준에서 머물은 채 교회사와 미술사에서 부분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것은 작품의 대부분이 각 지역 교회에 흩어져 소장되어 있었고 다수의 작품들이 소재를 확인할 수 없거나 소실되었으며, 일반 전시회에는 거의 작품을 출품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미술 작품들이 동시대의 화단에서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것과 관련이 있다. 또한 한국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이 예술적 성격을 띠기보다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전파를 목적으로 들어온 것이라는 생각과 십계명 중 제2계명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을 범할까 우려하는 등 한국 근대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교 문화에 대한 인식이 전반적으로 부족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가 한국 근대 화단에 미친 영향은 부진하고 비전문적이며, 그리스도교회의 예배를 위하여 제작된 종교 미술 작품이라는 범주에 속해 있다고 평가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본 논문은 그동안 알려져 있지 않거나 산재해 있던 1920~60년대 그리스도교 미술 작품에 관한 자료를 한국 근대 그리스도교 미술에 있어 주요 역할을 담당한 미술가들의 저술과 신문 기사, 작품 사진 및 도판 사진을 중심으로 주요 미술가와 주제별로 수집 · 분석하여 그리스도교가 한국 근대 화단에 미친 영향을 규명함으로써 한국 근대 미술사뿐만 아니라 교회사적인 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논문이라 할 수 있다. 

 

이 논문의 전체적인 구성은Ⅰ. 서론, Ⅱ. 그리스도교의 수용과 전파, Ⅲ. 한국 근대 미술에 반영된 그리스도교, Ⅳ. 한국 근대 미술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의미, Ⅴ. 결론으로 되어 있다. 

 

한국 그리스도교는 전래 초기부터 미술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미술이 그리스도교를 시각적으로 표현하여 알기 쉽게 전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종래의 중국풍의 숭상 및 관념적 전통주의로의 회귀 현상과 관련하여 그리스도교를 통해 유입된 서양화와 그 화법에 대한 관심이 끊어지며, 을사박해로부터 시작된 정부의 가혹한 그리스도교 박해로 인해 그 像本들의 전래가 불가능해졌음은 물론이고 그리스도교를 통한 한국 근대 미술의 형성에 대한 근거 자료 역시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 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를 기점으로 성화 제작 및 그리스도교적 도상이 이전보다 자주 등장할 수 있는 시대적 여건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張勃, 金殷鎬, 張遇聖, 金基昶, 裵雲成 등 한국 근대 작가들을 통해 예술 작품으로서의 그리스도교 미술이 형상화되었다. 즉, 이들의 가족 관계 및 주변 환경 등을 통해 각각의 삶의 저변에 깔려 있는 신앙적인 요인들이 작품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크게 반영되어 그려졌다. 

 

물론 근대기 이후 그리스도교 예술의 영역이 좀 더 심화되고 다각도로 변화되어 오늘날에는 개인의 신앙심을 더욱더 다양한 주제로 자유롭게 표현한 그리스도교 미술이 많다. 하지만 한국 근대기에 그려진 그리스도교 미술의 주제를 분석한 결과는 크게 (1) 성인 · 사도들의 초상, (2) 성모자화, (3) 그리스도의 초상과 생애로 집약할 수 있었다. 

 

초기 한국 그리스도교 미술은 예술이 어느 시대, 어느 특정 지역, 특정 유파의 작품 양식을 그대로 고집하기보다는 새로운 표현법을 추구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이며 관습적인 도상을 따랐다. 하지만 이들은 곧 아무 의미가 없는 옛 상징이나 형식을 고수하는 오류에서 벗어나 변화하는 시대 감각과 조형미를 갖춘 표현 양식을 모색하여 새롭게 미술 양식을 해석하고 종교적으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즉, 한국 근대 미술가들은 작품의 배경과 인물을 한국적으로 설정하거나 복잡하고 관습적인 도상과 상징물을 생략 또는 단순화시키면서, 토착화된 그리스도교 미술을 제작하였다. 하지만 한국적 풍경 속에서 ‘갓 쓴 그리스도’, ‘한복 입은 마리아’와 같이 성서의 인물을 갓 쓰고 한복 입은 한국인으로 변형시키는 것이 토착화 형식의 거의 유일한 예였던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기에 이들이 이룩한 성과는 그 자체로서 기념비적인 역할을 지니며, 그리스도교 미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준 것으로 큰 의미가 부여된다. 따라서 한국 근대 미술에서 그리스도교 미술 영역이 이루어낸 예술적 성과는 한국의 근대 미술사를 정립하는 데 있어서 소홀히 취급될 수 없는 부분이며 그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받아야만 한다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 한국 근대 미술에서 그리스도교가 어떠한 모습으로 구현되었으며, 어떠한 문화적 결실로 영향을 주었는지에 관해서 기술한 것에 의의를 두고자 하였다. 

 

새로운 외국 문화가 유입되었을 경우 외래의 문화는 재래의 문화에 의해 대체되던가, 또는 재래의 문화와 공존하던가, 그렇지 않으면 재래의 문화와 융합하여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그런데 외래의 문화가 재래의 문화와 대체 혹은 공존하거나 융합되는 것은 문화를 받아들이는 쪽의 시대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Ⅱ장 1절 ‘시대적 배경’에서는 그리스도교 문화가 수용될 수 있었던 국내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 기술하였다. 격동의 시기였던 조선후기 사회를 산업적인 면, 정치적인 면, 학문과 사상적인 면, 종교 사회적인 면에서 살펴본 후,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 그리스도교 문화가 조선에 전래되고 수용될 수 있었음을 서술하였다. 

 

나아가 2절 ‘정착과 전개’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정착과 성화의 전래 과정 및 그 후 들어온 낯선 문화 체계인 서양화에 대한 반응과 서양 화법의 수용 양태를 살펴보았다. 조선후기 사회를 자극했던 서양 문물의 유입은 그 대다수가 그리스도교와 그 선교사들을 매개로 이루어졌으며, 우리나라의 서양화 유입 경로 역시 대부분이 매년 3~4회씩 북경을 왕래하는 赴燕使行員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어 서양화를 처음으로 접했던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반응은 양면적인 태도, 즉 서양화의 圖上과 畵格에 대해서는 거부 반응을, 실물과 똑같게 보이도록 그려진 사실적 화법에 대해서는 충격과 함께 대단한 경이감을 나타냈다. 그리하여 조선후기 회화에서도 서양 회화와의 접촉으로 점차 이러한 화법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Ⅲ장에서는 ‘한국 진출 그리스도교 선교회의 미술 성향’, ‘한국 근대 미술 속의 그리스도교 도상의 등장’, ‘한국 그리스도교 미술 분석’ 등 3절로 구성하였다. 

 

먼저 1절 ‘한국 진출 그리스도교 선교회의 미술 성향’에서는 한국 진출 그리스도교 선교회가 성당 · 성화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은 같았지만 설립 목적과 선교 방침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미술에 관한 태도는 각각 차이가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그리스도교 미술은 교회 건축과 마찬가지로 그 지역을 관할하는 외국인 성직자들로 구성된 각각의 선교회의 성격에 따라 미술 작품의 유형이 결정되는 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에 진출한 프랑스의 ‘파리외방전교회’, 독일의 ‘베네딕도선교회’와 미국의 ‘메리놀선교회’의 미술 성향을 비교 분석하여 한국 근대 화단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았다. 

 

먼저 한국에서 가장 오랜 기간 광범위한 활동을 한 파리외방전교회의 경우 대체로 엄격한 보수적 경건주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성속분리주의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문화에 있어서도 역시 우월적인 사고로 접근하였기 때문에 유럽 교회의 문화 전통을 그대로 이식시키려고 하였다. 이는 중림동 성당과 명동 성당이 서양의 전형적인 고딕 양식으로 설계되어 우리의 전통 건축 양식과 확연히 달랐으며, 79위 순교 복자 제작이 서양인 작가에 의해 서양 성화의 양식과 유화 기법으로 제작된 것으로 알 수 있다. 

 

베네딕도회의 경우 포교 활동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 활동에 있어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수사들에 의해 각 지역의 문화발전에 도움을 준 점을 주목하였다. 특히 베네딕도회가 우리나라에 진출하면서 한국 근대 미술에 보이론(Beuron) 미술을 전하게 되는 통로가 된 것으로 보았다. 

 

다음으로 평양교구를 관할하며 활동을 전개한 메리놀선교회의 경우 파리외방전교회나 베네딕도회와 달리 서구 문화를 중심으로 선교지의 문화를 판단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최선을 다하여 그 나라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고 적응하려 한 것으로, 토착화를 가장 대담하게 시도한 단체였다. 특히 메리놀선교회의 이러한 방침은 한국 근대 화가들이 제작한 ‘갓 쓴 그리스도’, ‘한복의 마리아’ 등과 같은 토착화 양식의 그리스도교 회화에 영향을 주었다. 

 

2절 ‘한국 근대 미술 속의 그리스도교 도상의 등장’에서는 한국 근대기에 들어와서 그리스도교로 인해 서양화의 유입과 서양 미술에 대한 관심이 생기면서 새로운 그리스도교적인 도상이 한국 화단에 등장하게 되었음을 언급하였다. 여기서는 1920년 이전까지 그리스도교 미술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이 시기 다수의 성경과 교리서들이 국문으로 번역되어 출간되는 등 기초 작업이 이루어지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미술 작품은 소수에 불과했으며, 교회 건축이 세워짐에 따라 몇몇 그리스도교 도상이 담긴 회화를 볼 수 있을 뿐이었다. 

 

3절 ‘한국 근대 그리스도교 미술 분석’에서는 먼저 1920년대 이후부터 유채로 많은 성화를 그린 가장 대표적 미술가인 장발을 기점으로 김은호와 장우성, 김기창, 배운성 등 주요 미술가에 관하여 기술하였다. 이들은 한국 근대 미술사에서 수많은 연구와 평가가 이루어져 왔지만, 이들이 한국 근대 미술사에 남긴 그리스도교 미술에 대한 연구는 부족하였기 때문에 이 절에서는 이들 각각의 삶의 저변에 깔려 있는 그리스도교적인 요인들이 작품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어떠한 연관 관계가 있는지 밝히고, 그들의 업적 중 그리스도교적인 면모를 중점적으로 고찰하였다. 

 

먼저 장발은 미술가로서 활동한 초기부터 깊은 신앙심에 기반하여 순수한 신앙적 동기로 성화 제작에 뜻을 두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 미술이라는 독립적인 범주 안에서 작품 활동을 종교적으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하였던, 선구적이며 탁월한 작가로 〈14사도〉, 〈성모영보〉, 〈79위 시복자도〉 등 근대기에 기념비적이라 할 수 있는 성화 작품들을 남겼다. 그는 한국 근대 미술의 여명기에 자신을 성미술가로 표방한 유일한 전문 성화가로서 예술적 깊이를 가진 그리스도교 미술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사실만으로도 큰 의미가 부여된다. 

 

다음으로 김은호는 전통적인 먹 및 채색으로 성화를 그린 최초의 화가로, 일반 화단에 성화를 최초로 선보여 그리스도교 미술의 대중화의 초기 단계를 마련한 인물로 남다른 의미가 있다. 그의 대표적인 그리스도교 미술 작품은 〈부활후〉와 〈기독상〉이 있다. 그리고 장우성은 전통 화법의 답습이 아닌 暈染法의 필치를 응용함으로써 토착화 시도와 더불어 시대에 걸맞는 새로움을 추구하였다. 그는 1949년 로마 바티칸에서 성모 성년을 기념해 열린 국제 성화 미술전에 〈순교자의 모후 3연작〉을 출품하면서 그리스도교 미술과 인연을 맺어 〈한국의 성모자상〉, 〈한국의 성모자상과 순교자〉, 〈성모자〉, 〈김대건 신부〉 등의 성화를 남겼다. 김기창은 작품마다 각각 다른 소재와 표현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예수의 생애〉는 성서 가운데 기록된 주요한 사건 위주로 총 30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작품은 미술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조선시대의 인물들이 등장한 풍속화로서 빠른 운필과 무대 화면과 같은 구성 요소, 고담한 설체 등은 회화 그 자체로서 큰 가치를 지닌다. 〈예수의 생애〉 외에 크리스마스 〈씰〉의 도안이나 〈성당과 수녀와 비둘기〉 등 그의 작품들은 그가 일생 의지하고 믿어온 그리스도교에 그 뿌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배운성은 독일에서 수학하면서 접한 북유럽의 그림에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동서양의 마리아〉, 〈한국의 마돈나〉 등 한국 그리스도교 미술의 토착화를 시도한 성모자상을 다수 남긴 그의 작품세계를 비추어볼 때 배운성의 작품 속에서 그리스도교 미술의 연계가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어서 한국 근대기에 그려진 그리스도교 미술의 주제를 (1) 성인 ? 사도들의 초상, (2) 성모자화, (3) 그리스도의 초상과 생애로 크게 나누어, 그 특성을 1920~60년대의 회화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먼저 ‘성인들의 초상’은 한국 근대 그리스도교사에서 대표적 순교자인 김대건 신부, 골롬바와 아녜스 자매와 소년 유대철 등을 주제로 다룬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성인들의 삶을 보고 느끼고 본받게 하기 위해서 작가들이 사용한 표현 방법은, 일반 미술에서는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지만 종교 예술에 있어서 엄숙한 정신과 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주로 사용되는 정적인 표현과 상징적인 기본 도상을 사용하였음을 도출해 볼 수 있다. ‘사도들의 초상’은 장발의 〈14사도〉를 중점적으로 분석했는데,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전통에 충실한 구성과 정확한 배열법을 따르고 있고 각 사도의 상징과 도상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또한 장발이 이해한 보이론적인 특징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작품으로 파악하였다. 

 

다음으로 ‘성모자화’에 있어서는 채용신, 배운성, 장우성의 한국 근대기 작품들이 서양 그리스도교 미술의 주제 중 하나인 성모자 도상을 동양적인 소재로 표현하거나 인물화 속에 차용함으로써 동서양의 조화를 모색하여 토착화시켰다. 이들 작품들은 전체적으로는 전통적이며 관습적인 도상을 따르는 듯 하지만 배경을 한국의 현실적 풍경으로 설정하거나, 복잡하고 관습적인 도상과 상징물을 생략하고 단순화시키며 한국인으로 표현하는 방법 등으로 한국성을 반영한 성화들이었다. 특히, 한국 근대기의 성모자화에서는 성모를 인간적이며 일상적인 혹은 세속적인 공간 속에 있는 한국인으로 많이 표현하여 숭고한 종교적 분위기보다는 한국의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토속적이고도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점이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그러나 사실적이며 현실적인 재현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종교적 신비감이 결여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들이 한국 근대기 성모자화에서 나타나는 전체적인 특징으로 파악된다. 다만 장발의 경우 고전주의적인 사실기법에 반대하여 평면적인 구성과 형체의 직선적이고 기하학적인 단순미로 표현함으로써, 새로운 예술 형식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이로 보아 그리스도교 미술의 토착화 과정에 있어서 첫 번째 단계는 외래의 형태를 모방하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우리의 심성 즉 전통과 절충하는 것이며, 세 번째 단계는 창작의 단계로 파악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초상과 생애’의 경우 1954년 김기창에 의해 성화가 발표될 때까지는 그리스도에게 한국의 옷과 한국인의 얼굴을 입히지 않았다. 이어 김기창의 〈예수의 생애〉에서 수태고지, 아기 예수 탄생, 동방박사들의 경배, 아기 예수 이집트로 피난, 요한에게 세례받음, 최후의 만찬, 십자가에 못박힘, 승천, 물 위를 걷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 게쎄마니 동산의 기도, 어린이들을 축복하다, 수난당하다 등의 작품들에 대해 분석하였다. 이 작품이 중요한 가치를 부여받고 있는 점은 첫째, 새로운 회화상의 기법이나 모색이 이루어졌기 때문이기보다는 예수의 생애를 옛 우리의 풍속으로 해석했다는 사실이다. 둘째, 김기창이 풍속화에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배경을 이스라엘에서 조선 시대로 탈바꿈시킴으로써 외래종교인 그리스도교를 더욱 친근하게 전환시키고자 했다는 사실이다. 셋째, 김기창의 작품은 다른 한국 화가들이 성경의 이야기를 전통 한국화의 기법을 활용하여 표현하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는 데도 큰 의의가 있다. 

 

한국 근대 미술에서 그리스도교 미술 영역이 이루어낸 예술적 성과는 한국의 근대 미술사를 정립하는 데 있어서 소홀히 취급될 수 없는 부분이며 그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Ⅳ장에서는 한국 근대 미술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의미에 관해서 서술하였다. 한국 근대 화단에 나타난 그리스도교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리스도교를 매개한 근대 미술의 시초자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고, 한국 근대 그리스도교 장르를 개척한 사실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사적으로는 한국 근대 그리스도교 미술이 부진하고 비전문적이며 그리스도 교회의 예배를 위해 제작된 종교 미술 작품이라는 범주에만 속해 있다고 평가받는 데 그치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기에 이들이 이룩한 예술적 성과는 그 자체로서 시대적인 하나의 모범이 되며 현대의 그리스도교 예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준 것으로 보았다.

 

* 이 글은 정성은의 석사학위논문인 〈한국 근대 미술에 나타난 그리스도교의 영향 - 1920~60년대 회화를 중심으로〉(성균관대학교 대학원, 2006)를 소개하기 위한 목적으로 게재한다.

 

[교회사연구 제28집, 2007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백병근(한국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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