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기도의 섬 일본 고토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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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1-30 ㅣ No.2207

[특집] ‘기도의 섬’ 일본 고토를 가다 (상)


아픈 신앙의 역사 기억하듯 오늘도 동백꽃은 붉게 피었다

 

 

- 고토의 자연 풍광.

 

 

“우리도 신부님과 같은 마음입니다.”

 

1865년 3월 17일 12시30분경 나가사키 오우라본당 주임 프티장(B. Petitjean) 신부에게 10명 정도의 일행이 말을 걸어왔다. 그들은 우라카미 ‘가쿠레 기리시탄’(隠 れキリシタン, 잠복 그리스도인) 즉 박해를 피해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던 신자들이었다. 성당 바닥에 무릎을 꿇은 이들은 프티장 신부에게 기리시탄임을 고백했다. 이 극적인 만남은 ‘기리시탄의 발견’ 혹은 ‘기리시탄의 부활’이라고 표현된다. 소식을 들은 비오 9세 교황은 ‘기적’이라고 불렀다. 이를 계기로 고토와 아마쿠사, 히라도 등지에서 숨어 살며 나름의 방식으로 신앙을 지켜오던 가쿠레 기리시탄들이 속속 가톨릭 신앙으로 돌아왔다.

 

나가사키현 서쪽에 있는 고토 열도(五島列島)는 가쿠레 기리시탄의 흔적이 깊게 배어있는 곳이다. 1월 17~19일 고토시 문화관광과와 나가사키현 관광연맹 초청으로 고토시를 찾아 숨겨진 신앙의 역사를 마주했다.

 

고토시 꽃나무 동백나무.

 

 

남은 자들 - 동백꽃잎에 숨겨진 신앙

 

나가사키로부터 약 100㎞ 정도 떨어진 고토시는 고토 열도 남서부 후쿠에섬에 자리 잡고 있다. 기후도 온화해서 방문 일정 동안 곳곳에서 붉은 동백꽃을 만날 수 있었다. 동백나무는 고토시의 꽃나무일 만큼 ‘고토’를 대표하는 식물이다. 고토시의 후쿠에 공항 별칭도 고토 동백 공항일 정도다.

 

고토 열도는 리아스식 해안선을 따라 푸른 동중국해와 어우러진다. 그 가운데 점점이 박힌 듯한 동백꽃의 인상은 아름다운 풍광을 더한다.

 

‘인간은 이리도 슬픈데 주님, 바다는 너무도 파랗습니다’라는 엔도 슈사쿠 「침묵」의 한 구절처럼, 고토에 뿌려진 복음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시린 듯 투명하게 푸른 바다와 동백꽃잎에 스며있는 몇 백 년 전 가쿠레 기리시탄들의 신앙은 아프고 처연하다.

 

일본교회에 신앙이 전해진 것은 1549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1550년 나가사키·히라도섬을 시작으로 시마바라, 아마쿠사 지방 등으로 퍼져갔다. 당시 무역의 도시였던 나가사키는 선교 거점이 되면서 그리스도교 신자가 증가했고 많은 성당과 시설이 세워졌다. 하지만 1614년 금교령이 내려지고 박해가 시작됐다. 현상금 제도와 성화 밟기(후미에), 불교 입적 제도 등으로 탄압이 가해졌다. 신앙인들은 불교 신자로 위장해야 했고 마음의 짐을 지닌 채 성화를 밟아야 했다. 집에 와서는 ‘콘치리상’(통회의 기도)을 외우며 용서를 청했다. 성화를 디뎠던 짚신은 태워서 그 재를 마시며 속죄했다. 이처럼 겉으로는 불교 신자로 생활하면서도, 감시의 눈이 먼 곳에서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몰래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세례를 받고 기도(오라쇼, oratio)를 바쳤다. 주님 부활 대축일과 성탄을 알리는 1년 전례력을 만들어 하느님을 섬겼다. 오우라성당에 찾아온 신자들은 그렇게 200여 년 사제를 기다리며 지낸 7대째 자손들이었다.

 

- 세계 유산에 등재된 에가미 천주당.

 

박해 기간 하느님을 밖으로 말할 수 없었던 신자들은 자신들만이 알 수 있는 표식으로 신앙을 드러냈다. 불상에 가깝게 성모 마리아상을 빚기도 하고, 음식을 담는 그릇 바닥이나 물병 등에 장식처럼 십자가를 새겨놓기도 했다. 쌀 포대를 새끼로 묶을 때 십자 매듭을 지어 십자가로 썼다.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던 동백꽃도 가쿠레 기리시탄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됐다. 죽어서 묻힐 때 동백 꽃잎으로 십자가 모양 장식을 했고, 꽃이 피지 않을 때는 그 나뭇 가지를 이용해 십자가 형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인도로 사제가 올 날을 기다렸다.

 

 

기도의 섬

 

고토 열도에는 1566년 영주 우쿠 스미사다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의사이기도 했던 선교사 루이스 드 알메이다와 일본인 로렌소 료사이를 초청하면서 복음의 싹이 텄다. 완쾌한 영주는 포교를 허락했고, 이후 25명이 세례를 받으면서 기리시탄이 탄생했다. 이후 신자가 2000명에 달할 정도로 커졌으나 박해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고 가혹한 탄압 속에 신자들은 숨어들었다.

 

 

- 성당 내부에 쓰였던 동백꽃 문양 장식. 

 

 

에도 시대 말기 1797년 오무라령 소토메(현 나가사키)에서 고토 개척을 위해 108명이 이주해 왔다. 계속해서 모두 3000여 명이 옮겨왔는데, 대부분 가쿠레 기리시탄이었다. ‘마비키’(생활고로 장남을 제외한 신생아를 죽이는 일)와 후미에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바닷가에서 그물을 치고, 자갈투성이 산비탈을 일구는 고된 삶이었지만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기는 좋은 환경이었다. 이들은 ‘조카타’(공동체 책임자)와 ‘미즈카타’(세례 담당), ‘도리쓰기야쿠’(행사 보조와 연락 담당) 등 신자 대표들을 만들어 공동체와 신앙을 지켰다.

 

1865년 가쿠레 기리시탄의 발견 이후에도 금교령이 풀리지 않으면서 고토의 신자들은 핍박과 박해를 받았다. 1868년 일어난 ‘고토쿠즈레’가 대표적으로, 히사카지마섬에서 23명이 붙잡힌 것을 계기로 섬 안의 신자 200명이 20㎡ 크기의 감옥에 약 8개월 동안 갇혀 지내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들은 아침저녁 작은 고구마 한 조각으로 연명했으며, 굶주림과 압사 등으로 42명이 순교했다. ‘다카노스 6인 참수’라는 일반 무사에 의한 그리스도교인 참살 사건 등도 발생했다. 이런 참상은 여러 나라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마침내 1873년 금교령이 해제됐다.

 

1877년 두 명의 사제가 도착하고 수도원이 설립되면서 숨죽였던 신앙은 봉오리를 펼치기 시작했다.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신자들은 자진해서 재산과 노동을 바쳐 성당을 세웠고 내부를 장식했다. 대다수 성당 지붕과 창문에서 동백꽃 문양을 볼 수 있다. 동백꽃은 고토의 신앙을 대변하는 상징이 됐다.

 

고토 열도의 다섯 개 섬에는 49개 성당이 있다. 나가사키현 내에 성당 수가 129개인 것을 감안하면 기리시탄 역사 속에 전수되고 쌓여온 고토 지역 기리시탄들의 신앙 저력이 느껴진다.

 

‘나가사키와 아마쿠사 지방의 가쿠레 기리시탄 관련 유산’은 2018년 세계 유산에 등재됐다. 여기에는 ‘에가미 천주당과 그 주변’을 포함한 고토의 네 곳이 포함됐다.

 

 

 

[가톨릭신문, 2024년 1월 28일, 일본 고토 이주연 기자]

 

 

[특집] ‘기도의 섬’ 일본 고토를 가다 (하)


마음껏 믿는 기쁨으로 쌓아올린 성당들, 신앙의 증거가 되다

 

 

- 항구에서 바라본 옛 고린성당(왼쪽)과 새 고린성당(오른쪽).

 

 

신앙 자유의 고백

 

고토 열도에 건너와 고난의 잠복 시기를 거치며 필사적으로 신앙을 지켰던 기리시탄들은 금교령 해제로 하느님을 마음껏 믿을 수 있게 되자 그에 대한 고백으로, 신앙을 얻은 기쁨으로 자신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성당을 지었다.

 

금교령이 철폐된 1873년 그해, 정확한 일자는 알 수 없으나 나가사키 오우라성당 오돌 프레노 신부가 고토의 잠복 기리시탄을 찾아와 후쿠에지마 섬 도자키 해변에서 종교 자유를 기념하는 미사를 봉헌했다. 당시 2000여 명의 신자가 미사에 참례했다고 알려진다.

 

이후 도자키에는 1877년 고토 열도 전체를 담당하는 사제가 상주해 본당이 됐으며, 1880년 마르만 신부에 의해 임시 성당이 세워졌다. 현 도자키성당은 1908년 개축한 것이다.

 

후쿠에 항에서 북쪽으로 7㎞ 정도 떨어진 바닷가의 성당은 정면이 바다를 향하고 있다. 신자들이 배를 타고 와서 미사에 참례했기 때문이다. 붉은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은 일본식 기와를 지붕에 얹었다. 20세기 초 건축 기술을 보여주는 건축물로도 의미가 있는 성당은 1974년 나가사키현 문화재로 지정됐다.

 

내부에 들어서니 고딕 양식 건축물답게 리브 볼트 천정으로 마감된 모습이 눈에 띈다. 훗날 일본교회 건축의 대가로 성장한 데쓰카와 요스케가 견습 목수로 건축 공정에 참여했다고 한다.

 

고토 지역 성당 건축의 모델이 됐던 성당은 1977년부터 고토 섬의 기리시탄 역사자료관으로 쓰인다. 제대 중앙에 고토 출신으로 26위 성인 중 한 명인 성 요한 고토의 유해가 모셔져 있고, 성인 관련 자료 및 잠복(가쿠레) 기리시탄의 여러 자료가 전시돼 있다. 포교 시대부터 박해를 거쳐 금교령 해제 이후 사목 활동이 일목요연하게 펼쳐져 있었다.

 

성당 바깥은 기리시탄 기념 정원으로 조성돼 있다. 1977년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아 꾸며졌다. 1566년 처음으로 고토에 그리스도교가 전해진 날의 장면을 조각으로 형상화한 ‘알메이다의 선교비’, ‘성 요한 고토의 순교’ 동상, 신앙의 자유가 찾아와 260년 만에 목자와 대면하는 아이들 모습을 담은 ‘마르만 신부와 페르 신부와 아이들’ 동상 등이 세워져 있다. 이 정원은 만남과 수난, 부활에 이르는 고토 기리시탄 450년 역사의 요약이라 할 수 있다.

 

선교사들은 이 본당을 중심으로 고아들과 가난한 아이들을 돌보는 복지 사업을 했다. 이는 현재 ‘오쿠우라 자혜원’과 ‘오츠게노마리아수도원’으로 계승돼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도자키성당은 고토 섬 내 본당 제도가 정비될 때까지 고토 기리시탄 부활의 거점이자 가톨릭교회의 원점 역할을 했다. 아울러 복지 사업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하느님 믿는 행복의 표현

 

성당 건축은 절대 풍족하지 않은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정성과 노력을 바쳐 하느님을 믿는 행복의 표현이었다. 신자들은 직접 돌을 자르고 쌓고, 여성과 아이들까지 벽돌이나 기와를 옮기며 현장의 힘든 일을 도맡았다. 대부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의 지도로 이뤄졌는데, 지금까지 초기 형태를 간직한 것이 대부분이다.

 

- 미즈노우라성당.

 

 

특히 외형적으로 유럽식 교회 모습을 보이지만, 일본 재래의 자재와 공법이 사용됐다. 일본 목수들의 수준 높은 목조건축 기술이 잘 구현돼 건축미와 내구성이 어우러졌다.

 

히사카지마 섬 동쪽 나루시마 섬이 마주보이는 해안의 고린 마을에는 옛 고린성당과 새 고린성당이 나란히 붙어있다. 지금도 차로는 갈 수 없는 외진 곳이다. 옛 고린성당은 인근 하마와키성당을 재건축할 때 생긴 교회 부재를 뗏목으로 옮겨와 지었다. 일본식 목조에 기와 지붕으로 완전한 일본 가옥 형태의 외관이 독특하다. 첨두아치형 창문에 고딕풍 제단, 리브 볼트 천정으로 구성됐다. 붉은 커튼으로 가려진 고해소가 한눈에 들어온다. 초기 교회 건축 양상을 엿볼 수 있다는 면에서 1999년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됐다.

 

옛 고린성당은 약 50년간 고린 지구와 와라비코지마 섬 신자들의 신앙 못자리였지만, 1985년 새 고린 성당이 신축되면서 성당 역할을 마무리했다. 그때 해체 이야기가 있었음에도 ‘귀중한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보존하자’는 의견에 그대로 남았다. 새 고린성당 신자는 4세대 9명이 전부로, 작고 소박한 모습이다.

 

나루시마 섬 나루항에서 차로 20분 정도 들어가 만나는 에가미 마을에는 데쓰카와 요스케의 목조교회 가운데 최고봉으로 평가되는 에가미천주당이 있다. 성당 역사는 1881년 3월 가쿠레 기리시탄 4가족이 세례를 받은 것에서 시작된다. 신자 집에서 미사가 봉헌되다가 1906년 현 위치에 작은 성당이 세워졌고 1917년 지금의 성당이 건축됐다. 신자들은 ‘가비나’라고 부르는 샛줄멸잡이로 건설 자금을 마련했다. 2008년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성당은 하얀 벽과 파란색 창문으로 푸른 나무들 사이에서 돋보인다. 기둥에는 손으로 그린 나뭇결무늬, 창문에서는 꽃을 그려 넣은 투명 유리 장식 등을 볼 수 있다.

 

기리시탄들은 교회를 주로 마을 어디에서나 잘 보이는 언덕 등에 지었다. 수려한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성당들은 지역의 새로운 광경을 만들었고 기리시탄들의 역사를 고백하는 상징이 됐다. 후쿠에지마섬 북부 미즈노우라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건립된 미즈노우라성당은 좋은 사례다. 이 성당은 금교령이 철폐되고 7년 후인 1880년 세워졌다. 성당은 세찬 갯바람에 노후화되면서 1939년 개축됐다.

 

고토 열도 각지의 형태가 좋은 돌이나 진귀한 암석을 모아 루르드 성모 동굴을 쌓은 이모치우라성당도 독특하다. 1897년 성당을 지은 페르 신부는 1899년 신자들에게 루르드 성모 동굴 건립을 신자들에게 호소했다. 완성 후 페르 신부는 루르드 기적의 샘물을 부어 넣었고 프랑스에서 들여온 성모상을 안치했다. 이후 이 성당은 고토의 루르드로 많은 이들이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청하는 장소가 됐다.

 

이런 고토의 성당들은 역사를 따라가며 가쿠레 기리시탄 신앙 선조들의 삶과 그 마음을 기억하고 되새기게 한다. ‘신앙이란 과연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던져진다.

 

미즈노우라본당 주임 쿠마가이 유지 신부는 고토의 신앙을 ‘순교자의 정신’으로 정의했다. 유지 신부는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신자들의 후손들이 교회를 지탱해 주고 있다”며 “가난한 생활 가운데서도 하느님을 중심에 두고 잠복을 견뎌낸 기리시탄의 신앙을 증거하며 고토교회를 이어왔다”고 밝혔다.

 

남편을 가쿠레 기리시탄의 후손이라고 소개한 가이드 우메키 시호(베르나데트)씨는 “고토에 49개 성당이 존재하는 자체가 고토 교회 역사 속에 하느님이 함께하셨음을 보여준다”고 전하고 “선조들의 신앙을 ‘이제는 내가 드러내야겠다’는 사명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도자키성당.




- 도자키성당 기리시탄 기념 정원에 세워진 성 요한 고토 동상.




- 이모치우라성당 ‘루르드 동굴 성모상’.

 

[가톨릭신문, 2024년 2월 4일, 일본 고토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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