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성극ㅣ영화ㅣ예술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천경자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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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11-15 ㅣ No.102

[백형찬 교수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천경자 데레사 (상)


뱀에서 느낀 생명력, 예술로 이끈 힘이었다

 

 

천경자. 출처=「찬란한 고독, 한의 미학」

 

 

“나는 그대로 나의 슬픈 눈망울만 내놓은 채 사막을 달리고 싶었다. …그렇다. 사막의 여왕이 되자. 오직 모래와 태양과 바람, 그리고 죽음의 세계뿐인 곳에서 아무도 탐내지 않을 고독한 사막의 여왕이 되자.”(천경자의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에서)

 

한 문화평론가는 천경자(데레사, 千鏡子, 1924~2015)를 ‘정(情)과 한(恨)의 화가’, ‘불타는 예술혼으로 자신을 해방시킨 화가’, ‘인생을 축제처럼 살다 간 축복받은 화가’라고 했다.

 

 

연극 배우 꿈꾼 끼 많은 어린시절

 

천경자는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마을에 곡마단과 유랑 극단이 들어오곤 했다. 나팔 소리가 집 안방까지 들렸다. 그 소리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렸을 때 동경했던 것은 연극배우였다. 스타 배우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키가 컸다. 학예회에서 주인공은 늘 키 작은 아이가 뽑혔다. 성탄절 교회 연극에서도 키가 커서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미친 척 해가며 아버지 속이고 일본 유학

 

성당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을 거쳐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학교에 들어가서 그린 그림이 ‘읍내에서 제일’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림은 교실 벽에 붙여졌다. 그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을 무척이나 예뻐했던 선생님이 떠나자 그 슬픔에 집 마루 벽에 온통 크레용으로 선생님의 모습을 그렸다. 저녁에 이를 본 어머니는 천경자를 때리고 집 밖으로 내쫓았다. 그 후, 천경자는 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로 진학했다. 시험 때인데 물리 문제를 풀지 못했다. 백지를 낼 수 없어 펌프로 물을 깃는 여인을 그려서 냈다. 제일 좋아한 숙제는 단체 영화 관람 후에 영화배우 얼굴을 그려서 내는 것이었다. 미술 수업에서는 늘 ‘갑’을 받았다. 이렇듯 천경자는 그림 그리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일본으로 유학 가서 훌륭한 화가가 되고 싶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선생님이 일본 유학을 도와주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의학을 공부하라고 했다.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히자 그 앞에서 갑자기 미친 시늉을 했다. 다듬잇돌 위에 앉아 히쭉히쭉 웃었다. 그러다가 울음을 터트리며 대성통곡했다. 그렇게 연극을 해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현 동경여자미술대학)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딸에게 속은 것을 알고는 학비를 보내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패물을 팔아 딸의 학비를 댔다. 일본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그 결과로 ‘노점’, ‘조부’, ‘노부’의 대작을 그렸다. ‘조부’와 ‘노부’는 방학 때 집에 와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델로 해서 그린 그림이다. 몸이 불편했던 할아버지는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모델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는 긴 곰방대를 물고 책을 읽었다. 아버지와 동생을 모델로 짚신 파는 영감을 그린 작품이 ‘노점’이다. 이 작품으로 선전(조선미술전람회)에 처음 출품했는데 낙선하고 말았다. 그러나 ‘조부’와 ‘노부’는 입선했다.

 

 

생활력 없는 유학생 남편 대신 생계  꾸려

 

학교를 졸업하고는 동경 미쓰코시 백화점에 취직했다. 천에 그림을 그리는 일을 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집안이 몰락했다. 논밭 그리고 집까지 팔았다. 어서 귀국해 부모를 돌봐야 했다. 귀국할 배표를 구하려고 애쓰다가 한 한국인 유학생 도움을 받았다. 그는 문학작품의 주인공 같은 신비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천경자는 그를 배필로 생각했다. 그러고는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조촐하게 예식을 올렸다. 그런데 그 남자는 생활력이 없었다. 그래서 생활은 어렵기만 했다. 천경자는 이런 삶이 슬펐다.

 

그러다가 모교에서 미술 교사로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미술 교사가 되어 생계를 꾸려나갔다. 어머니는 아기가 젖 먹을 시간이 되면 아기를 업고 학교로 왔다. 천경자는 숙직실에서 젖을 먹였다. 쉬는 시간에도 그림을 그렸다. 전남여고 강당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리고 광주여중 강당에서도 개인전을 열었다. 성과는 없었다. 6ㆍ25 전쟁이 일어났고, 그 남자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천경자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서울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회는 성공적이었다. 관람객도 많았고, 그림도 많이 팔렸다. 미술계의 호평도 이어졌다.

 

- 작품 ‘생태’. 출처=「찬란한 고독, 한의 미학」

 

 

결핵으로 여동생 잃고 아버지도 세상 떠나

 

그 무렵, 천경자는 광주여중 개인전에서 만났던 한 신문기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남자는 유부남이었다. 첫째 남자에 이어 둘째 남자도 천경자를 힘들게 했다. 그런 와중에 여동생이 악성 결핵에 걸렸다. 그토록 사랑한 동생이 죽어가고 있었다. 동생의 약값을 구하려고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결국 동생은 죽고 말았다. 병든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스케치북 들고 뱀집 찾아가

 

힘들게 살아가던 어느 날, 갑자기 뱀이 생각났다. 어렸을 때, 사립문에서 능구렁이를 보았고, 지붕에 두 마리 뱀이 올라가 참새 새끼에게 덤벼드는 것을 보았고, 동네 친구와 산에 나물 캐러 갔다가 그 친구가 꽃무늬 허리띠 모양의 뱀을 집어 들다가 물려 죽은 것도 보았다. 그 후부터 뱀은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서울에서 개인전을 마치고 광주로 내려가는 삼등 열차에서 갑자기 환상이 떠올랐다. 두 마리 실뱀이 햇빛에 꽃 비늘을 반짝이며 찔레꽃을 스쳐 가는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천경자는 스케치북을 들고 뱀집을 찾았다. 역 앞에 있는 한옥이었다. 그곳에서 비단뱀과 독사를 보며 묘한 생명력을 느꼈다. 다음 날도 뱀집을 찾았다. 주인은 뱀 한 마리를 꺼내 그리기 쉽게 목을 쥐었다. 다음 날에는 아예 뱀을 넣을 유리 상자를 만들어 가져갔다. 주인은 수십 마리의 독사와 꽃뱀을 상자에 넣어주었다. 독사에게 살기가 느껴졌다. 그렇게 뱀과 한 달을 보냈더니 독사가 아름다운 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커다란 화폭에 뱀을 가득 그렸다. 하도 많이 그려 셀 수가 없었다. 뱀 머리마다 성냥개비를 하나씩 놓았다. 합쳐보니 서른세 마리였다.

 

 

징그러운 뱀 그림 팔리지 않아 생활고

 

두 번째 남자는 뱀띠였다. 그 남자의 나이에 맞춰 두 마리를 더 그려 35마리를 만들었다. 그 그림이 유명한 ‘생태’이다. 천경자는 이 그림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그 후에도 뱀을 소재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 천경자는 뱀이 자신의 생명과 예술을 연장시켜 주었다고 믿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징그러운 뱀 그림을 사지 않았다. 다시 생활고에 시달렸다. 부산의 한 다방에서 대한미협전이 열렸다. 그곳으로 ‘생태’를 비롯해 ‘개구리’와 ‘닭’을 들고 갔다. 주최 측은 ‘생태’가 너무 자극적이라고 전시에서 제외했다. 천경자는 ‘생태’를 주방 구석에 두었다. 이를 시인 오상순이 발견했다. 오상순이 이상한 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그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생태’ 때문에 주방이 졸지에 전시장이 되었다. 마침 국제기구에서 천경자의 ‘개구리’ 그림을 구입했다. 이것이 극장 뉴스에 나왔다. 천경자 그림은 인기가 치솟았다.

 

 

시련과 고통, 운명처럼 받아들이다

 

천경자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때가 많았다. 도움을 줄 사람도 없고, 혼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저녁에 먹을 쌀을 살 것인가? 아니면 그림 그릴 장미 꽃다발을 살 것인가?’ 늘 이런 고민을 했다. 결론은 늘 장미 꽃다발이었다. 먹는 것보다는 그림 그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힘들 때마다 자신이 전생에 ‘어느 왕조의 황후’였다고 상상했다. 그러곤 현실의 시련과 고통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어쩌면 ‘심청전’의 심청이가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부친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 석에 인당수에 몸을 던지고 황후로 다시 환생해 부친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는 그 심청이. 천경자는 황후의 꿈을 간직했고, 황후의 기품도 지녔다.

 

 

‘길례 언니’ 실존인물에 상상 더한 작품

 

‘길례 언니’는 천경자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주인공은 노란 원피스에 하얀 챙이 달린 모자를 썼다. 모자 위를 색색의 장미로 장식했다. 그 장미 위에 파란 나비가 앉았다. 손으로 턱을 괴고 앞을 가만히 바라본다. 눈동자에는 깊은 우수가 담겨있다. 미소를 머금은 듯한 표정은 무슨 말을 들려줄 것만 같다. 길례 언니는 집이 가난해 한센병 환자들이 사는 소록도에서 간호사가 되어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다. 천경자가 보통학교에 다닐 때 학교에서 박람회가 열렸는데 구경 온 멋쟁이 언니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아 상상력을 발휘해 그린 그림이 바로 ‘길례 언니’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11월 12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44) 천경자 데레사 (하)


그림 그릴 때 가장 행복했던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 화실에서. 「출처=미완의 환상여행」

 

 

천경자(데레사, 千鏡子, 1924~2015)는 그림 못지않게 글을 많이 썼다. 12권의 수필집과 기행문 그리고 화집을 냈다. 수필집으로 「여인소묘」, 「유성이 가는 길」, 「캔 맥주 한잔의 유희」,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 「탱고가 흐르는 황혼」 등이 있다. 자서전으로는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가 있고, 기행문으로는 「천경자 남태평양을 가다」, 「아프리카 기행화문집」이 있다. 천경자가 지은 책은 출판되면 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글이 워낙 진솔하고 개성이 강해서 독자들이 좋아했다. 그래서 천경자 개인전에는 책을 들고 사인받으려는 사람들로 넘쳤다. 천경자는 글 쓰는 일은 ‘푸닥거리와 같은 것’이라 했다. ‘맺힌 한을 풀어 버리고 싶어’ 글을 쓴다고 했다.

 

천경자는 자신이 그린 그림이 흩어지지 않고 시민들에게 영원히 남겨지길 원했다. 그래서 93점의 작품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시민들과 후학들이 자신의 작품을 쉽게 만나 볼 수 있도록 기증한 것이다. 서울시립미술관에는 ‘영원한 나르시스트, 천경자’라는 주제로 천경자의 작품이 상설로 전시되고 있다.

 

- 책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표지

 

 

황후의 기품 서려 있는 자화상

 

작품 중에 나의 시선을 강하게 끈 것은 ‘페루 이키토스’였다. 천경자는 아마존 열대우림을 여행하기 위해 페루 이키토스로 향했다. 그곳에 밤 12시 넘어 도착했다. 아르미스 광장의 성 요한 성당을 보았다. 밤에 본 성당은 환상적이었다. 밤을 강조하기 위해 그림의 채도를 낮췄다. 성당은 빨간 지붕과 노란 벽면이 대비를 이루었다. 달빛 주변으로 검은 새들이 날아간다. 또 하나 눈에 들어온 작품은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였다. 이 그림은 천경자의 대표적인 자화상이다. 여인은 뱀을 화관처럼 머리에 쓰고, 붉은 장미 한 송이와 함께 우수에 찬 눈빛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다. 눈동자를 노란색으로 표현했고 푸른색으로 눈자위를 칠했다. 그래서 분위기가 신비롭다. 야윈 얼굴, 긴 목, 꼭 다문 입에 황후의 기품이 서려 있다.

 

천경자는 시인 김현승의 ‘플라타너스’를 좋아했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천경자는 김현승을 페루에 사는 야마나 알파카처럼 ‘순수한 휴머니스트’라고 했다. 천경자의 집에 쌀이 떨어졌다. 어느 날 저녁에 한 중학생이 쌀자루를 매고 찾아왔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갖다 드리래요” 했다. 김현승은 아들에게 쌀자루를 매게 하고 뒤따라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후에도 김현승은 천경자가 어렵게 사니까 천경자에게 선물 받았던 수국(水菊) 그림을 돌려주면서 팔아 쓰라고 했다.

 

천경자는 시인 서정주와도 친분이 깊었다. 어느 잡지사에서 주관한 세계 여행 대담 자리에서 서정주를 만났다. 천경자가 말했다. “브라질 가서 돈 많이 벌어 찍고, 바르고 온 오빠 같네요.” 이러한 인사말을 건넬 정도로 가까웠다. 어느 해 겨울에 우편으로 서정주가 보낸 시집이 왔다. 천경자는 인왕산 기슭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다. 몸도 만삭이었고, 국전에 출품한 작품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깊은 좌절감에 빠져있었다. 시집을 펼쳐보았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 시가 깊은 좌절감에 빠져있던 천경자를 구해주었다.

 

 

새벽 5시~오후 2시까지 작업실서 그림 그려

 

천경자의 작업실은 2층으로 마당이 내려다보였다. 방에는 대표작들이 걸려 있다. ‘생태’, ‘이탈리아 기행’,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등. 새벽 5시쯤 눈을 뜨면 곧장 방으로 와서 오후 2시까지 그림을 그렸다. 이후에도 그곳에서 책을 읽고 쉬기도 했다. 그 방에 있는 시간이 가장 편안하고 행복했다. 아래층에 밥 먹으러 내려가는 것이 귀찮을 때는 도시락을 싸서 올려달라고 했다. 그림을 그릴 때는 늘 모델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가족 중에 누군가가 모델이 되었다. 그림은 바닥에 엎드려 그렸다. 평생 그런 자세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고 나면 무릎이 아파 물파스를 발랐다. 저녁에는 영화를 즐겼다.

 

천경자는 그림에 대해서는 완벽주의였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몇 년이고 다시 그렸다. 또한 완성된 작품이더라도 액자를 떼어 다시 그렸다. 그림 그리는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그래서 작품을 서둘러 완성하기보다는 즐기며 천천히 그렸다. 천경자는 자신이 아끼는 작품은 팔지 않았다. 어쩌다 아끼던 작품을 팔면 그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곤 다음 날 그 그림을 다시 찾아왔다. 이처럼 작품을 자식처럼 아꼈다. 외출했다 돌아오면 그림을 보고 “집 잘 보았냐?”하고 인사를 건넬 정도였다.

 

- 조병화 시인(왼쪽)과 함께 명동에서. 출처=「찬란한 고독, 한의 미학」

 

 

천경자의 어머니는 ‘요안나’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던 어머니의 모습을 ‘장미꽃 조화가 달린 면사포를 두른 어머니의 표정은 참 아름다웠다’고 기억했다. 아버지도 ‘베드로’로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부모가 모두 천주교 신자인데도 천경자는 종교를 갖지 않았다. 이유는 신앙을 갖게 되면 마음을 종교에 빼앗기게 되어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림 그리는 작업을 신앙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그렇던 천경자는 자신에게 산기(産氣)가 왔을 때, 부모가 세상을 떠날 때, 사랑을 체념하지 못할 때 하느님을 불렀다. 천경자는 ‘하느님을 잘 모르지만 우주에는 신이 있다’고 믿었다. 눈부신 햇살과 소슬바람 속에서 ‘신의 웃음’을 보았고, 어머니의 위대한 사랑과 일에 미쳐 뜨거운 감격에 젖을 때 ‘신의 숨결’을 느꼈고, 정직과 근면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신의 힘’을 보았고, 운명과 맞서 싸워 이겼을 때는 ‘신의 승리’를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어머니가 살아있을 때 집으로 성당 신자들이 찾아오곤 했다. 어머니는 거동이 불편했다. 신부가 집으로 와서 병자 영성체를 거행해 주기도 했다. 결국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천경자는 그때 성당 신자들이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연도를 바쳐준 것과 성당에서 신부와 신자들이 장엄하게 장례 미사를 봉헌해 준 것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천주교 신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세례를 받으려면 교리 공부를 해야 했다. 집 근처에는 후에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장을 지낸 시인 홍윤숙(데레사)이 살고 있었다. 홍윤숙이 입교를 도와주었다. 그래서 천경자는 서울 분도 피정의 집에서 김영근 신부의 주례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데레사’였고, 대모는 홍윤숙이었다.

 

 

미인도 진위 논란에 충격…절필 선언

 

천경자의 ‘미인도’를 놓고 ‘진짜냐 가짜냐’의 논쟁이 심하게 붙었다. 그것이 바로 ‘미인도 사건’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미인도’를 천경자는 자신이 그린 작품이 아니라고 했고, 반대로 미술관 측은 진품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싸움에 전문가들이 개입해 ‘진품’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 사건은 당시 세상 사람들에게 커다란 관심거리였다. 천경자는 이 사건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과 함께 엄청난 상처를 받았다. 이 때문에 절필을 선언했다. 식사도 할 수 없었고, 담배만 계속 피워 정신과 육체가 모두 피폐해졌다.

 

천경자는 어서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딸이 사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도 건강은 좋지 않았다. 잠시 귀국했다. 서울시립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천경자는 뇌내출혈로 쓰러졌다. 다행히 의식을 되찾았다. 그러나 건강은 급속히 나빠졌다.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었다.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는 끝내 미국에서 그 삶을 마무리했다. 뉴욕에 있는 성당에서 장례 미사를 봉헌했다. 유골은 천경자가 즐겨 산책하던 뉴욕 허드슨강에 뿌려졌다.

 

참고자료 : ▲ 천경자 「꽃과 영혼의 화가 천경자」 랜덤하우스. 2006 ▲ 천경자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자유문학사. 1984 ▲ 천경자 「탱고가 흐르는 황혼」 세종문고. 1995 ▲ 유인숙 「미완의 환상여행」 이봄. 2019 ▲ 정중헌 「정과 한의 화가 천경자」 스타북스. 2021 ▲ 최광진 「찬란한 고독, 한의 미학」 미술문화. 2016 ▲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11월 19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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