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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15: 귀국 후 첫 성사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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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1-12 ㅣ No.1590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15) 귀국 후 첫 성사 집전


최 신부, 중병의 다블뤼 신부에게 큰 힘과 위로 돼 줘

 

 

- 다블뤼 신부는 1850년 손골과 배티를 중심으로 소신학생을 양성했다. 사진은 다블뤼 신부의 신학생 시절 모습.

 

 

1849년 12월 하순 혹한을 뚫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 땅을 밟은 최양업 신부는 한달음에 서울에 도착했다. 최 신부와 그를 수행한 조선 교회 밀사들은 의주 관문을 통과한 후 별 어려움 없이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최 신부는 서울에서 하루를 묵었다. 최 신부는 다음 날 충청도에 머물고 있던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를 만나러 길을 떠나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중병을 앓고 있던 다블뤼 신부(훗날 제5대 조선대목구장 주교가 됨)에게 가서 병자성사를 줘야 했다. 

 

“최양업 신부가 고국 땅을 밟던 그때에 다블뤼 신부는 이 대목구의 어느 매우 외진 곳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최 신부가 우선적으로 한 일은 다블뤼 신부에게 달려가 병자성사를 베풀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병에서 회복됐으나, 몸이 약한 동료 다블뤼 신부는 성사를 베풀기 위한 교우촌 방문을 감당하기 어려워, 몇 명의 예비 신학생을 돌보고 있습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제가 무거운 짐을 다 짊어져야 했을 텐데, 최 신부의 입국으로 하느님께서 저에게 얼마나 큰 도움을 주셨는지 신부님도 잘 짐작하실 것입니다”(페레올 주교가 1850년 11월 17일 자로 파리외방전교회 홍콩 극동대표부 경리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처럼 최양업 신부가 조선 교회에서 사목자로서 첫 번째로 한 일이 바로 다블뤼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주는 것이었다.

 

 

병사성사 후 조금씩 건강 회복

 

병자성사와 최양업과의 만남은 다블뤼 신부에게 큰 위로와 기쁨이 됐다. 다블뤼 신부는 병자성사를 본 후 최 신부에게 프랑스어로 적힌 편지 한두 통을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부모가 보낸 편지였다. 다블뤼 신부는 부모의 편지조차 읽을 힘이 없을 만큼 위독했다. 최양업의 방문과 병자성사는 분명 그에게 큰 힘이 됐다. 조금씩 건강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최양업과 다블뤼 두 신부는 늘 죽음을 곁에 두고 형제애를 쌓아갔다.

 

다블뤼 신부는 페레올 주교, 김대건 신부와 함께 1845년 10월 12일 조선에 입국했다. 그는 서울 근교 산골에 터 잡은 교우촌에서 사목을 시작했다. 1846년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순교로 병오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페레올 주교와 함께 충청도 수리치골 교우촌에서 박해가 잦아질 때까지 은신하다 중병에 걸렸다. 그는 1847년 봄부터 극도로 쇠약해졌다. 특히 한식이 전혀 맞지 않아 위장병을 심하게 앓았다. 그 자신도 한식에 대해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음식”이라고 고백했다. 또 풍토병이 그를 괴롭혔다. “1846년부터, 김 안드레아 신부가 잡히면서 거세진 박해 동안 주교님은 상당히 오랫동안 축축하고 비위생적인 곳에 숨어 계셨습니다. …습기가 다블뤼 주교님께 완치할 수 없는 고질병을 줬습니다. 오른쪽 무릎의 힘줄들이 늘어나서 자주 탈골이 됐습니다. 이 무렵부터 주교님은 먼 거리 방문은 하실 수 없게 됐습니다”(페롱 신부가 1874년 10월 24일자로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신자들은 궁핍함 속에서도 다블뤼 신부의 건강 회복을 위해 몸에 좋다는 인삼과 녹용, 각종 보약과 탕약을 구해 먹이며 정성으로 간호했다. “이틀 동안 사람들은 완전히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밤에는 교우들이 제가 죽으리라고 믿고 제 방 가까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지긋지긋한 이상한 약물(탕약)이 제때에 주어져서 저를 난국에서 빠져나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긴 회복기가 필요했습니다. 대략 두 달 동안 저는 미사를 드릴 수 없었고, 그 후에도 매우 오랫동안 가끔 미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다블뤼 신부가 1850년 9월 말 부모에게 쓴 편지에서).

 

- 최양업 신부가 귀국후 조선 교회에서 첫 번째로 성사를 집전한 곳으로 추정되고 있는 손골성지.

 

 

첫 성사 집전한 곳은 손골로 추정

 

최양업 신부가 다블뤼 신부를 찾아가 조선 교회에서 처음으로 성사를 집전한 곳은 어디일까? 페레올 주교가 ‘매우 외진 곳’이라 표현했던 이곳에 대해 누구도 명확한 답을 주는 이는 없다. 다만 교회사학자들은 이곳이 ‘손골’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한다. 당시 다블뤼 신부의 주요 사목 활동지가 경기 용인 교우촌 ‘손골’이었기 때문이다. 

 

건강이 좋지 않던 다블뤼 신부는 페레올 주교의 배려로 1849년 후반부터 소신학생 양성 일을 맡아 했다. 다블뤼 신부는 그의 거처에서 마흔 살가량의 젊은이 황석두(루카)와 이 바울리노 등을 개인적으로 선발해 라틴어를 가르쳤다.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다블뤼 신부는 1850년 10월 배티에 방 두 개짜리 집 한 채를 매입했다. 그는 이때부터 1854년 배론으로 옮기기 전까지 매해 10월부터 다음 해 4월까지는 배티에서, 5월부터 9월까지는 배티에서 약 200리 떨어진 곳에서 신학교를 운영했다. 학자들은 다블뤼 신부가 말한 배티에서 200리 떨어진 여름 신학교 터를 ‘손골’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에 손골성지 담당 윤민구 신부는 “손골에서 1850년부터 이러한 교육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적어도 1850년에 다블뤼 신부가 병중에도 어린 소년들을 가르칠 장소, 더 나아가서는 신학교를 세울 장소를 찾아다닐 때 손골 교우촌을 방문했던 것은 틀림없다”고 말했다.

 

손골은 1839년 기해박해 전후로 형성된 교우촌으로 서울뿐 아니라 지방과도 연락이 원활하며 비교적 안정된 곳이어서 조선에 입국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이곳에서 우리 말과 풍습을 익히는 등 중요한 선교 거점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평화신문, 2016년 11월 13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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