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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문헌ㅣ메시지

공동의 집을 돌보는 것에 관한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회칙 찬미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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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4-26 ㅣ No.767

공동의 집을 돌보는 것에 관한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회칙 찬미받으소서

 

 

1. “세계는 자살로 향해 가고 있다.”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교회의 선교에 관한 ‘권고’ 「복음의 기쁨」에 이어 2015년 6월 16일 환경 위기 극복에 관한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를 반포하셨습니다. ‘권고’는 말 그대로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초대’하는 것이고, ‘회칙’은 교회의 수장으로서 모든 신자에게 내리는 ‘명령’에 가깝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교황님은 그만큼 환경 문제를 모든 교회가 ‘의무적으로’ 힘을 합하여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회칙이 2015년 6월에 반포된 이유가 있을까요? 교황님은 2015년 12월 파리에서 열리기로 계획된 ‘유엔 기후협약 당사국 총회(COP21)’를 끊임없이 염두에 두고 계셨습니다. 교황님은 이번 회의가 지구 파괴를 막을 ‘마지막 기회’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또 회칙 반포 이후 60개 국의 시장을 바티칸에 모이게 해 온실가스 감축정책을 만들도록 촉구하셨습니다.[경향신문, 2015 ‘인물로 본 10대 국제 뉴스’ 참조] 그리고 같은 해 9월 미국을 방문하셨을 때 오바마 대통령과 만나 기후 문제를 심각하게 의논하였고, 이에 오바마 대통령도 “세계는 자살로 향해 가고 있다.”는 교황의 의견에 동의하며 세계 온난화 문제를 해결하는데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어디를 가시든지 “기후 변화 위협은 IS(이슬람국가)의 테러리즘과 비슷하다.”고 강력히 말씀하시며, 세계의 이목이 12월에 있을 195개국이 만나는 ‘유엔 기후협약 당사국 총회(COP21)’에 쏠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막상 협의문에 동의를 얻어내는 데는 진통이 있었습니다. 미국은 선진국들이 온실가스 감축을 주도‘해야 한다.’(shall)는 대목이 법적 강제성을 띄는 것으로 해석되니 더 완곡한 표현인 ‘should’로 바꿀 것을 요구했고, 다른 참가국들도 잇따라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합의문을 고치려 했습니다. 이때 또 직접 나셨던 분이 교황님입니다. BBC에 따르면 교황님은 특별히 니카라과 대통령인 다니엘 오르테에게 전화하여 협정을 꼭 타결해야 한다고 간청하셨다고 합니다. 결국 협의서는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습니다.[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 ... 막판 타결 도와’ 참조]

 

교회는 지금까지 시대에 뒤떨어져 항상 뒷북을 쳤다는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찬미받으소서」 회칙을 ‘미리’ 준비하여 기후 협약 이전에 미리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준비하셨습니다. 세계가 기후 때문에 멸망하지 않게 된다면 가장 큰 공헌을 하신 분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되실 것이고 가장 영향을 준 책이 「찬미받으소서」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될 것입니다. [2016년 1월 17일 연중 제2주일 수원주보 3면, 전삼용 요셉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2. 환경 회칙인가 생태 회칙인가?

 

인터넷 글 등에서 이번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어떻게들 소개하나 봤더니, 어떤 분들은 ‘환경 회칙’이라 소개하고 또 어떤 분들은 ‘생태 회칙’이라 소개합니다. 분명 지구의 환경 오염에 관한 ‘환경 회칙’이란 말이 당연하게 들리겠지만, 또 어떤 분들은 환경이란 말을 거부하며 굳이 ‘생태 회칙’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환경’ 대신 ‘생태’란 용어를 써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가 존재하는 것일까요?

 

독일어로 ‘환경’이라고 하면 ‘움벨트(Um-welt)’라 씁니다. 직역하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우리 일상의 주변 환경을 생각하면 됩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제 앞에는 책상이 있고 컴퓨터와 책꽂이, 창문, 탁자, 의자도 있습니다. 일을 하기에 좋은 환경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을 환경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움벨트’의 의미처럼 환경을 뜻하지만 조금은 다른 뉘앙스를 풍기는 ‘미트벨트(Mit-welt)’란 단어도 있습니다. 직역하면 “나와 ‘함께’ 존재하는 것들”이란 뜻입니다. 남편이 없으면 아내일 수 없고 자녀가 없으면 부모가 될 수 없듯이, 하나가 없으면 다른 것도 의미가 있을 수 없다는 더 존재론적인 의미의 환경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황님이 쓰신 「찬미받으소서」에서 말하는 환경은 움벨트에 가까울까요, 미트벨트에 가까울까요? 움벨트가 주위 ‘환경’을 의미한다면 미트벨트는 우리 생명과 직결되는 ‘생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개구리는 물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릇에 담긴 물에 개구리를 넣고 조금씩 열을 가하면 감각이 둔해서 물의 온도가 높아지는 줄도 모르고 계속 머물러 있다가 결국 서서히 죽게 된다고 합니다. 개구리에게 물은 환경일까요, 생태일까요? 분명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좌우하는 생태인 것입니다.

 

우리 주위 환경이 나쁘다고 인간이 죽지는 않습니다. 책상이 편하지 않다고 해서 혹은 컴퓨터가 느리다고 해서 조금 불편할지언정 죽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태계가 파괴되면 인간은 죽습니다. 나쁜 환경은 견딜 수 있지만, 생태계 환경이 나빠지면 인간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단순히 환경이 우리를 보조해 주는 의미가 아니라, 지금 당장 죽어가는 환경을 살려내지 못하면 우리 또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굳이 어떤 분들은 ‘환경 회칙’ 대신 ‘생태 회칙’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교황님은 지금이 아니면 결코 지구온난화를 막을 기회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시며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세계는 지금 자살의 경계(at the limits of suicide)에 서 있습니다.” [2016년 1월 24일 연중 제3주일 수원주보 3면, 전삼용 요셉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3. 「찬미받으소서」란 제목의 의미는?

 

교황님께서 왜 생태 회칙 제목을 「찬미받으소서」라고 정하셨을까요? 회칙의 제목 ‘찬미받으소서’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누이이며 어머니인 대지로 찬미받으소서”[성 프란치스코, 피조물의 찬가]라며 자연을 통해 주님을 찬미한 ‘태양의 찬가(Cantico delle creature)’의 후렴구 첫 마디에서 따 온 것입니다.

 

책의 제목은 책의 전체 내용을 함축하고 있어야 하는데, 교황님께서는 프란치스코의 이 노래가 그 모든 주제를 다 담고 있다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우선 교황님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통합생태론’을 기쁘고 참되게 실천한 가장 훌륭한 모범이라고 말씀하십니다(10항 참조). 통합생태론은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시각에서 출발합니다. 교황에 당선되시며 당신 이름을 ‘프란치스코’로 정한 것은 그 성인의 ‘가난’을 본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이번 회칙의 이름을 프란치스코 성인의 노래로부터 빌려왔다는 뜻은 현재의 환경 위기가 인간의 이기적인 부의 축적과 무관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시려는 의도가 다분합니다. 이렇게 인간의 이기주의와 자연파괴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시각이 ‘통합생태론’인 것입니다.

 

또한, 프란치스코 성인은 자연을 바라보시며 마치 친누이처럼 사랑에 빠지고 또 그 선물을 주신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확실히 인간은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 창조자를 알 수 있습니다”(지혜 13,5).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로마 1,20 참조). “이러한 이유로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수도원 정원의 일부를 언제나 손대지 않는 상태로 놓아두어 거기에 들꽃과 목초가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본 사람들이 그러한 아름다움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신 것입니다”(12항). 이렇듯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모든 피조물은 사랑의 유대로 자신과 결합된 누이였습니다. 그래서 성인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돌보아야 한다는 소명을 느끼신 것입니다”(11항). 이는 우리가 자연을 보살펴야 하는 이유가 단지 ‘자연이 살아야만 인간도 살 수 있다.’는 단순한 이유에 머무는 것이 아닌 ‘주님께서 맺어주신 형제와 같은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내 형제에 대한 책임이 나 자신에게 있듯 자연에 대한 책임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렇듯 “세상은 해결해야 할 문제 이상의 것으로, 감사와 찬미로 관상해야 하는 기쁜 신비입니다”(12항). 교황님께서는 자연이 곧 그것을 선물하신 주님을 만나 뵈올 수 있는 하나의 ‘신앙’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2016년 1월 31일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수원주보 3면, 전삼용 요셉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4. 죄와 환경파괴 원인은 같다

 

죄란 무엇일까요?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는 하느님께 속한 무언가를 의미합니다. 그것을 허락없이 따 먹었다는 뜻은 하느님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이 주(인)님인데 인간이 주인이 되려는 것을 ‘죄’라고 부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자리에 앉는 것이 죄인 것입니다. 사실 선악과만 하느님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에 있었던 모든 것이 하느님 것이었습니다. 인간들이 그것을 인정하는지 시험하기 위해 당신 것으로 한 그루만 남겨놓으라 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도 똑같이 시험하십니다. 우리가 벌어들이는 소득 중에 일부를 당신을 위해 떼어놓으라고 명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약탈하면서 ‘저희가 어떻게 당신을 약탈하였습니까?’하고 말한다. 십일조와 예물이 아니냐!”(말라 3,8)

 

이렇듯 ‘봉헌’은 모든 것의 주인이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매우 중요한 신앙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의 주인이 하느님이심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연도 하느님의 것이라 인정하지 못합니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하는데 뭐가 문제냐?’며 오히려 화를 냅니다. 먼저 포획하는 사람이 주인이라며, 자기 나라는 물론 남의 나라 영해를 침범하면서까지 물고기를 싹쓸이해 갑니다. 하느님의 것을 약탈하는 사람이 인간의 것을 약탈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이렇듯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믿는 죄는 자연까지 파괴하는 힘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교황님은 인간들이 자연을 훼손하는 이유를 우리가 “지구를 마음대로 약탈할 권리가 부여된 주인과 소유주를 자처하기”(2항)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자연을 보호해서 성인이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성인이시기 때문에 자연을 형제요 누이로 보는 시각을 가지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들부터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이라면 하느님 것인 세상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지은 죄의 결과는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박탈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것이었습니다. 죄가 만연하다면 인간도 하느님의 소유인 자연 속에서 살 수 없음은 명확합니다.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려는 민족들이 이 모든 것으로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그 땅도 부정하게 되었다. 나는 그 죄 때문에 그 땅을 벌하였고, 그 땅은 주민들을 토해 내었다”(레위 18,24-25). [2016년 2월 7일 연중 제5주일 수원주보 3면, 전삼용 요셉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5.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된 유기체

 

어떤 영화에서 인간을 지구에 기생하는 바이러스로 묘사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몸에 열이 나는 것이 자신에게 침투한 나쁜 바이러스와 싸우기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지구가 더워지고 있는 것도 지구에 사는 인간들이 지구를 해치는 나쁜 바이러스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라는 발상입니다. 지구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인간을 파멸시키려 하고, 그런 현상들이 자연재해로 인해 수많은 인명피해를 내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바이러스가 줄어들면 지구도 다시 정상 체온을 되찾게 된다는 상상으로 영화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지구에 기생하는 바이러스로 규정하는 것은 인간 존엄성을 무시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면서도 이 영화의 발상이 전혀 틀리지만은 않다고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요?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은 1978년 저서 「지구상의 생명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통해 가이아 이론(Gaia theory)을 발표하였습니다. ‘가이아’(Gaia)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부른 대지의 여신 이름으로서, 지구를 은유적으로 나타낸 말입니다. 이것에 착안해서 러브록은 지구와 지구에 사는 생물, 대기권, 대양, 토양까지 하나의 신성하고 능동적인 생명체를 표현하기 위해 가이아를 다시 사용했습니다. 가이아 이론은 지구를 단순히 기체에 둘러싸인 암석덩이로 생명체를 지탱해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물과 무생물이 상호작용하면서 스스로 진화하고 변화해 가는 하나의 생명체이자 유기체임을 강조합니다.

 

이렇듯 지구를 신성시하는 것은 분명 오류이지만 지구와 인간, 하느님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은 사실 그리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이번 회칙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을 빌려 “‘우주’에서 차지하는 상호 연관을 고려”(5항)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다음과 같은 생각도 인용하셨는데, “교황님께서는 세상을 그 일부 요소들만 따로 떼어 분석할 수 없다고 보셨습니다. ‘자연이라는 책은 하나이고 나눌 수 없는 것으로’ 환경, 생명, 성, 가정, 사회관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 훼손은 실제로 인간 공존을 실현하는 문화와 긴밀히 관련’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6항)라고 하십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은 ‘공생(共生)’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죽으면 그도 죽고 그가 살면 나도 사는 것입니다.

 

가이아 이론이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지만, 지구온난화 현상과 최근의 지구환경 문제와 관련해 ‘자연을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로 여겨야 한다.’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책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2016년 2월 14일 사순 제1주일 수원주보 3면, 전삼용 요셉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6.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무석 교수의 [자존감]이란 책을 보면, 불행한 가정에서 자란 ‘G’라는 사람의 상담사례가 나옵니다. 그는 아내가 이혼하자고하기에 자기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상담하러 온 것입니다.

 

G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도박에 빠졌다가 집까지 잃게되어 외가댁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불안감에 밤마다 이불에 오줌을 쌌고, 학교에 들어가서는 돈 많은 아이들 틈에서 항상 주눅이 들어 살았습니다. 모든 불행이 ‘돈’ 때문이라고 느낀 G는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에 들어갔고, 좋은 직장에 취직해 아파트도 사고 커다란 피아노까지 들여놓았습니다. 그리고 학벌과 집안, 미모까지 겸비한 아내와 결혼했는데, 주위에서는 “개천에서 용났다.”며 비아냥댔습니다.

 

신혼 첫날밤 G는 아내에게 포도주 한 잔 함께 하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몸이 안 좋다고 하자 G는 또 무시당했다는 마음이 들었고, 그는 혼자 밤새 술을 마시다 아침에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이혼하자고 했습니다. 아내는 밤새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가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후로도 G는 불안한 마음에 직장에서건 집에서건 항상 일등만 강조했고, 자녀들의 흐트러진 꼴도 보아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겐 돈을 적게 주며 자기에게 종속시키려 했습니다. 결국 우울증에 걸린 아내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이혼하자는 말을 꺼낸 것입니다.

 

우리는 G의 문제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불만족하여 「찬미받으소서」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불만족은 여기서 ‘열등감’으로 표출됩니다. 열등감은 타인을 ‘이용’해 자신의 부족한 면을 채우게 만듭니다. 그렇게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누구도 이용당하는 것을 좋아할 리 없습니다. 그렇게 버림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인간과 자연 안에서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이 “자연환경을 놓고서 즉각적 이용과 소비에 유익한 것 말고는 다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듯”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연을 이용하여 자신을 채우려고 한다면 인류는 집단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성철 스님은 생전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깨달음을 설파하였습니다. 이 말은 사람이 온전하지 못하면 산도 돈으로 보이고 물도 돈으로 보이지만, 온전한 인간이 되면 산은 그냥 산으로 보이고 물은 그냥 물로 보이게 된다는 뜻일 것입니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고 합니다. 아직도 자연이 있는 그대로의 자연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곧 이혼 통지서를 받게 될 것입니다. [2016년 2월 21일 사순 제2주일 수원주보 3면, 전삼용 요셉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7. 속도 제일주의 세상

 

살다보면 한두 번 정도는 버스나 전철 등을 잘못 타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시골에서만 살다가 서울로 대학 수업을 가던 첫날, 저는 복잡한 지하철에서 헤매다 결국 첫 수업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고, 방향이 맞는다면 조금 느려도 괜찮습니다. 자연 파괴의 주범들이 모인 이 세상은 방향보다는 속도를 중시합니다. 앞으로 달리는 것만이 유일한 가치라 믿기에 자신들이 발을 딛고 사는 지구가 훼손되고 있는 상황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는 무작정 달리기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잘 표현했습니다. 기상 이변으로 빙하기가 시작되자 유일하게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공간이 바로 끊임없이 달리기만 하는 기차 안입니다. 앞으로 달리기만 하는 것은 기차만이 아닙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도 더 편한 위 칸으로 가기 위해 발버둥 칩니다. 마지막 칸에 타고 있던 ‘커티스’라는 젊은이는 자신들만 비참한 생활을 해야 하는 불의한 구조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켜 결국 맨 앞 칸까지 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접하게 된 것은 더는 갈 곳이 없다는 ‘절망’뿐입니다. 기차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절망의 늪으로 떨어질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한 사람만 유일하게 앞이 아닌 옆으로 나 있는 창을 통해 밖을 볼 줄 알았는데, 그는 얼음이 서서히 녹고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 그는 옆문을 열어 자신의 딸을 탈출시킵니다. 그리고 기차는 사고가 나 그 안에 탄 사람들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이렇게 끝나버릴 수 있습니다. 교황님도 이 ‘속도 제일주의’를 우려하시며 “인류와 지구의 변화가 지속해서 가속화되면서 오늘날 삶과 노동의 속도도 더욱 빨라지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현재의 급속한 발전이 전혀 ‘자연적이지 못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더 나아가 “변화가 바람직한 것이지만 세상과 많은 인간들의 삶의 질을 악화시킨다면 근심거리가 됩니다.”(18항)라고 하시며 느긋한 ‘자연의 속도’와 무작정 달리기만 하는 ‘인간의 속도’의 차이가 과연 하느님의 뜻인가를 물으십니다.

 

혜민 스님이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란 책을 냈는데 많은 부수가 판매되었습니다. 불가에서는 방향도 모른 채 물동이를 이고 열심히 걸어가는 아낙네를 ‘어리석음’이라 표현합니다.

 

어쩌면 우리도 이렇게 어리석게 멸망을 위해 내달리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위해 달립니까, 지옥을 위해 달립니까? 공존을 위해 달립니까, 자멸을 위해 달립니까? [2016년 2월 28일 사순 제3주일 수원주보 3면, 전삼용 요셉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8. 타인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

 

요즘 뉴스에 부모가 자녀에게 가한 학대 때문에 자녀가 목숨까지 잃는 경우가 보도되고 있습니다. 부모는 때리면서도 ‘그게 뭐가 아파?’라며 오히려 달게 매를 참아내지 못하는 자녀를 탓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모습을 보며 어렸을 때 동네 형이 축구화를 신은 채 고양이를 밟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 형은 뼈가 부서지는 아픔에 신음하는 고양이의 고통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 보였습니다.

 

저 또한 이웃의 아픔을 내 몸의 아픔처럼 통감하지 못함에 가슴이 아픕니다. 그리고 왜 상대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지 못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이 더 아프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가시가 손가락을 찔렀는데 이후 돌에 발을 찧으면 가시의 아픔은 돌의 아픔 속으로 사라져버립니다. 내가 일등을 하려고 달리고 있을 때 뒤처져 넘어진 아이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앞만 보며 달려야 하는 상황이 고통인지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일등을 하고나면 과연 기분이 좋을까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또 다른 무엇으로 자신을 증명하려 하게 되고 또 다른 누군가를 아프게 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교황님은 아직도 사람들이 아파 신음하는 지구의 고통을 함께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병자가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우선 병자 자신이 병자임을 인정해야 하듯이, 지금 우리와 세상이 병들어가고 있음을 통렬하게 자각할 필요가 있습니다(19항 참조). 그저 우리는 “우리의 공동의 집이 심하게 손상되었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61항). 이미 “우리는 급속한 변화와 훼손으로 상황이 한계점에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표징들을 볼 수 있습니다”(61항). 개구리를 물에 넣고 조금씩 물을 끓이면 개구리는 그 뜨거워짐을 느끼지 못한 채 익어서 죽고 만다고 합니다. 이렇게 무감각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감각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요? 행복해야 합니다. 만족해야 합니다. 만족하지 않기 때문에 눈에 불을 켜고 다른 무언가를 찾으려 하다가 이웃도, 자연도 죽어가고 있음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만족하게 할 유일한 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보며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흘러나올 때 비로소 주위의 아픔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 아픔을 감싸주어야만 그도 살고 나도 살게 됩니다. 우선 신앙인들부터 십자가의 사랑을 보면서도 무언가 부족한 듯 세상의 이것저것을 정신없이 찾아 헤매는 그런 사람들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016년 3월 6일 사순 제4주일 수원주보 3면, 전삼용 요셉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9. 자연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싸움

 

제가 전에 억지로 어떤 일을 빨리 진행하려 했을 때, 누군가로부터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뭐든지 자연스러운 것이 좋은 것이다.”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이에 저는 ‘인간은 그냥 인간 아닌가? 자연스러운 것이 인간적인 것보다 더 나은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연스러운 것이 더 좋은 것일까요, 아니면 인간적인 것이 더 나은 것일까요?

 

‘자연스럽다.’란 말을 국어 사전에서 찾아보니 “1. 억지로 꾸미지 않아 어색한 데가 없다, 2. 사람의 힘을 더하지 않은 저절로 되는 현상” 등으로 나와 있습니다. ‘인간적이다.’라는 말은 “인간의 마음이나 됨됨이, 하는 행동 등을 나타낸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 저는 실수나 빈틈을 보여줄 때 사람들로부터 “인간적이어 좋다.”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찬미받으소서』는 인간적인 것과 자연스러운 것 중에 어느 것을 더 좋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이 회칙에서는 인간이 자연을 따르고 배워야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연은 분명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때 넣어주신 그 법칙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간은 “생산과 소비의 과정 끝에 나오는 쓰레기와 부산물의 처리나 재사용 능력을 개발하지 않았지만”(22항) 자연은 본래부터 순환법칙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식물은 초식 동물들이 먹는 영양분을 합성합니다. 그다음에 초식 동물들은 육식 동물의 먹이가 됩니다. 이렇게 하여 상당히 많은 양의 유기 배설물이 배출되어 새로운 식물들이 자라나게 됩니다”(22항).

 

하지만 인간이 자연의 법칙과 어긋나게 살아가기 때문에 자연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각은 자연을 보호하자는 노력까지도 자연스럽지 못하게 합니다. 예를 들면 아마존 밀림을 보호하기 위해 그것을 빼앗아 공동소유로 하자는 제안이 그렇습니다(38항 참조). 자연에는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그 자연을 사유화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자연을 창조하신 분은 당연히 하느님이십니다. 자연 안에는 그 창조의 법칙을 거스르는 존재가 없어서 순수한 하느님의 법칙이 살아 숨 쉽니다. 따라서 자연은 인간이 참으로 하느님을 닮기 위해 배워야하는 살아있는 ‘책’입니다. 인간은 겸손하게 인간적인 것보다 자연적인 것이 더 우위에 있음을 인정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결국 자연과 구별되는 무엇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이 개인의 이익을 위해 자연스럽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향을 받는 자연 또한 그 자연스러움을 잃어가는 것입니다. [2016년 3월 13일 사순 제5주일 수원주보 3면, 전삼용 요셉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10. 사자는 본래 초식동물이었다

 

성경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육식동물을 창조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물론 뱀도 맹독을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모두 초식동물로 창조되었습니다(창세 1,30 참조). 그렇지만 지금의 뱀에게는 독이 있고 사자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그렇게 변질하였을까요? 바로 노아의 홍수 이후부터입니다. 노아의 배 안에서는 짐승이 서로 잡아먹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노아의 홍수 이후에 짐승을 잡아먹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고, 그 이후부터 짐승들이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창세 9,2 참조).

 

사람이든 짐승이든 두려워지면 ‘자기방어를 위한 공격성’을 지니게 됩니다. 두려운 개가 짖어대지 두렵지 않은 개는 짖지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 인간의 공격성이 자연의 공격성을 만들어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 모든 짐승이 물로 죽임을 당하였는데, 이는 인간의 탓이었지 짐승의 탓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인간의 죄 때문에 자연까지도 쓸어버리셨던 것입니다. 이에 교황님은 “인간환경과 자연환경은 함께 악화된다.”(48항)고 말씀하시며, ‘인간이 곧 자연을 만들어낸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자연을 이용해서 자기 이익만을 챙기려는 이기주의에서 벗어나고 이웃과 자연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자연엔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이사야는 그날이 오면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이사 11,7-8)라고 하며 동물들의 공격성도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인간이 동물을 잡아먹음으로써 동물이 인간을 공격할 수 있게 사납게 바뀌었다면, 인간이 자연을 착취함으로써 자연도 인간을 공격할 수 있게 변형되어 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인류가 종말로 향할 수록 죄가 더 커지는 까닭에 그에 비례하여 전쟁과 자연재해가 많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마태 24,6-7 참조).

 

그렇다면 우리가 자연보호를 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 데 대해 고해성사를 보는 편이 더 빠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이 부족해진 인간들은 가난한 이들을 돌보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가난한 이들과 함께 자연까지도 하느님께 부르짖어 그 값을 모든 인류가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49항 참조).

 

음식을 버리는 것이 곧 가난한 이들에 대한 폭력이기에(50항 참조) 세상에 가난한 이들이 많다는 증거는 인간이 그만큼 폭력적이라는 증거이고, 그렇다면 인간은 그만큼 많은 폭력을 되받아야만 합니다. 주는 만큼 받는다는 것은 사람에게나 자연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2016년 3월 20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수원주보 3면, 전삼용 요셉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11.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창세 3,4)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땅이 비좁다는 이유로 삼촌 아브라함을 떠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두 집안 모두 가축이 많았기 때문이었는데, 그런 빡빡한 삶을 견디기 힘들어한 것은 롯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을 떠나 요르단 강 건너편 비옥한 지역으로 갔고 결국 소돔 땅에 정착합니다. 그런데 소돔 사람들은 악했고 주님께 있어 큰 죄인들이었습니다. 결국 소돔은 유황불로 멸망하고 맙니다. 반면 아브라함이 머물고 있었던 곳은 베텔이라 불렸는데, 곧 ‘하느님의 집’이란 뜻입니다(창세 13,1-18 참조). 롯은 자신의 관심을 하느님의 집이 아닌 물질적 부(富)에 두었기 때문에 결국 스스로 파멸로 들어가고 만 것입니다.

 

롯이 그러했듯 현대의 사람들이 하느님을 떠나는 이유도 구원에 관심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세상 것에 더 큰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면 저것은 안 보이게 되고, 이것을 들으면 다른 것은 덜 들리게 됩니다. 마치 하와가 뱀을 보고 뱀과 이야기할 때는 주님이 보이지도 않고 그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뱀은 틀렸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남으로써 참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무관심한 사람들은 하와를 유혹한 뱀처럼 타인의 관심도 무디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지구 온난화로 장차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될 것이란 통계가 부지기수로 나오고 있지만, “우리는 현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실히 모른다.”고 하거나, “오염과 훼손에 관한 몇 가지 피상적 표징을 제외하고는 상황이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고, 지구도 한동안 현재 상태를 유지할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며 마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중요한 결정을 미루게 하고 “인간의 자기 파괴적인 악행들을 조장”하고 있습니다(59항 참조).

 

지금 우리는 “자살 일보 직전”이라는 교황님의 절박한 목소리와 “괜찮다, 이전에도 위기는 있었다.”고 말하는 또 다른 목소리 중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과연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까요? 만약 교황님을 통한 주님의 목소리에 관심이 있다면, 지금 우리 삶은 전기를 절약한다거나 에너지 소비가 적은 제품을 선호하거나 재활용을 실천해야 합니다. 만약 그런 노력이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하와나 롯이 그랬듯이 점점 어둠속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관심과 믿음을 ‘뱀’이 아닌 ‘하느님’께 두어야 합니다. [2016년 3월 27일 예수 부활 대축일 수원주보 3면, 전삼용 요셉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12. “지배하여라”(창세 1,28)라는 말은 “길들이고 책임지라”는 뜻

 

가끔은 선한 의지로 한 말이라도 그 뜻이 왜곡되어 좋지 않은 결과를 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종교 분쟁이 그런 이유에서 발생하는데, 각 종교가 가진 경전에서는 자비와 사랑, 평화를 말하지만, 그것들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해석하여 착취와 전쟁과 미움을 정당화합니다.

 

그리스도교 내에서도 이런 일들은 자주 발생하였는데, 요한 바오로 2세 성인 교황님이 역사 안에 있었던 교회의 과오와 잘못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사과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가장 심각히 해석을 재고해야 할 성경구절이 있다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맡기시며 그 땅을 “지배”(창세 1,28)하라고 하신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사실 지금의 온난화나 자연파괴를 가져온 주범들의 종교를 말하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발달된 산업국가에서 믿는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믿는 성경에는 ‘자연과 생물과 동물들을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셨고 지배하라는 권리를 주셨다.’라고 나옵니다(66항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창세기에 나오는 “지배”(창세 1,28)하라는 말이 결코 무분별한 착취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밭을 일구듯이 돌보고 감독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자기 식량을 생산하는 밭을 갈취하고 오염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렇듯 ‘지배’하라는 말 안에는 “인간과 자연이 서로 책임을 지는 관계”를 원하신 주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67항 참조).

 

야생마가 한 마리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 땅의 주인이 누군가에게 자신의 땅에 있는 야생마를 ‘지배’하라고 하였다면, 그것이 ‘야생마를 잡아 먹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땅의 주인은 땅도 사랑하고 그 위에 뛰어노는 야생마도 사랑합니다. 주인은 잠시 그 땅을 맡기며 그 위에 사는 야생마를 ‘길들여’ 좋은 관계를 맺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길들이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합니까? 그리고 말을 길들였다면 그 말을 보살펴야 할 ‘책임’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린왕자」에서 여우는 왕자에게 ‘관계’에 대해 말합니다. 관계는 닭장에 닭을 키우듯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길들인다는 것이고 또한, 충분한 시간과 인내를 통해 길들였다면 그것에 대한 책임이 생긴다고 말합니다. 이 말이 어린왕자를 신이 길들인 장미꽃이 피어있는 본래의 별로 다시 돌아갈 마음을 품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땅과 길들임의 관계를 맺지 못하고, 세속적 의미의 지배관계를 지속한다면 우리는 이 삶의 터전과의 관계를 스스로 끊고 있는 것입니다. [2016년 4월 3일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수원주보 3면, 전삼용 요셉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13. 소유는 가능한가?

 

한 사람의 생이 다해갑니다. 마지막 순간을 눈앞에 두고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은 ‘숨 쉬는 힘까지도 나의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나와 한몸이라 여겼던 아내는 나의 아픔을 대신 겪어줄 수 없고, 나의 자녀라 여겼던 이들은 각자의 뜻대로 살아갈 것이며, 또 나의 소유라 여겼던 재산은 누군가의 손으로 넘겨질 것입니다. 다리가 말을 듣지 않고, 손도, 눈도, 입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나의 것을 모두 잃는다는 마음에 눈물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애초부터 나의 것이란 있을 수 없었음을 알았더라면 마지막 순간의 그 충격은 훨씬 덜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상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을 거저 받았음에 항상 감사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나의 것을 빼앗아 가시는 것이 아니라, 잠시 빌려준 것을 때가 되어 다시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무언가를 나의 소유라고 고집하는 이들은 그것 때문에 망하게 됩니다. 오래된 일인데 버스가 계곡으로 굴러 승객 모두가 사망한 사고가 있었습니다. 며칠 뒤 그 자리에서 한 남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그 버스에 타고 있던 아내를 잊지 못하여 결국 아내를 따라간 것입니다. 애절하고 애틋하기도 하지만 냉철해질 필요도 있습니다. 그는 애초부터 아내가 자신의 것이 아니었음을 기억해 냈어야 했습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무엇을 빌려 쓰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었다고 믿어버리기도 합니다. 하느님께도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당신 것이었던 생명을 거두어가려고 하셔도 우리는 빼앗기기 싫어 발버둥을 칩니다. 그러나 만약 무언가를 ‘나의 것’이라고 말한다면 참다운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주인이라고 하면서 하느님을 ‘주(인)님’이라 부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인간이 스스로 주(인)님이 되려는 교만 때문에 자연환경이 훼손된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환경을 보존하는 행위는 세상의 참 주인이 누구인지 고백하는 신앙의 척도가 됩니다. 성경에도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신명 10,14)은 주님의 것이라 하고,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내 곁에 머무르는 이방인이고 거류민일 따름이다.”(레위 25,23)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절대적 소유에 대한 인간의 청구를 모두 거절하십니다.”(67항 참조)

 

하느님께서 욥의 자녀들과 재산, 그의 건강까지도 모두 빼앗아 갔을 때도 그는 주님을 찬미하였습니다(욥 1,21 참조).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 고백하는 욥의 신앙이 자연환경을 원래대로 회복시킬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2016년 4월 10일 부활 제3주일 수원주보 3면, 전삼용 요셉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14. 모든 존재하는 것의 창조자로부터 부여받은 존재할 권리

 

한쪽 얼굴에 모반을 가지고 태어나 부모에게 버려져 보육원에서 키워지고 다 자라서는 반대쪽 얼굴에 암이 생겨 뼈를 다 깎아내야만 했지만, 예쁜 두 딸의 어머니가 되어 그녀를 사랑해주는 남편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김희아 씨가 있습니다. 김희아 씨는 TV에 출연해 자신을 낳아주고 생명을 준 어머니에게 감사드리고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부모는 자기 자식이 쓸모없어 보여 버렸지만, 자녀는 자신을 세상에 존재하게 해 준 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존재는 그 유용성과 함께 평가될 차원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이유만으로 고유한 존재 가치를 지닙니다.

 

하지만 세상의 가치관이 너무도 변질되어 유용하지 못한 것은 존재할 필요도 없다고 여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모든 “피조물은 저마다 고유한 선과 완전성을 지니고 있고 … 저마다 고유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무한한 지혜와 선의 빛을 반영한다.”고 하며, 그 “유용성보다는 존재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찬미받으소서』 69항 참조).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신 주체가 존재 자체이신 하느님이시고, 그 존재 이유를 평가할 수 있는 권한도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아닌 창조주 하느님이셔야 합니다. 만약 개나 고양이가 싸우면서 서로 너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주인은 기가 찰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 과학 잡지 「스켑틱」에 따르면 인간의 자연파괴 등에 의해 “매년 생명체 14만 종이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한 피조물인 인간이 주인의 허락도 없이 다른 피조물들을 멸종시키는 주범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래 전 개봉되었던 「화성침공」이란 영화에서 외계인들의 지구침략을 이길 수 있게 했던 것은 지구 어디나 존재하는 쓸모없어 보였던 ‘박테리아’들이었습니다. 아기를 제왕절개로 낳거나, 모유 수유를 하지 않거나, 처음부터 너무 깨끗한 공기만 접하게 되면 면역체계가 덜 발달한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악과 고통까지도 우리에게 유용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도 하나의 피조물로서 존재 자체이신 분이 존재하게 만든 모든 존재하는 것에 대한 파괴를 당장 멈추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존재자는 하느님께서 이미 존재해야 한다고 판정을 내리셨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피조물인 인간이 심판자나 된 듯이 사형선고를 내려 그 존재자들을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2016년 4월 17일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수원주보 3면, 전삼용 요셉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15. 카인의 징벌을 피하는 법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에 ‘유리조각’이란 단편으로 소개된 사연입니다. 태수는 어렸을 때 집을 나와 지하철에서 소매치기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동생에게서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병원에 올라갈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밖에서 담배만 피우다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데 한 여자가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뽑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그 돈을 소매치기하여 얼마간을 또 술로 살았습니다. 어머니가 수술비가 없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태수는 세상을 탓하며 자기가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 이유가 세상이 그렇게 무자비하기 때문이라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동생은 자신의 여자 친구가 어머니 수술을 위해 결혼자금까지 찾아오는데 소매치기에게 털려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고 말했습니다. 태수는 동생의 여자친구가 소매치기당한 시간과 장소를 듣고는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를 찌른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지구가 점점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해가는 것이 나의 책임인가?’

 

이와 비슷한 질문을 카인도 했었습니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하느님의 질문에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라며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서로 관계를 맺고” “우리 자신의 삶과 자연”과의 관계도 서로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병들어가는 지구를 바라보며 나의 책임이 아니라고 믿어버리는 사람은 ‘카인의 후예’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70항 참조).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비유’에서 부자가 지옥 간 이유는 라자로의 가난이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와이 말 ‘호오포노포노’는 ‘바로잡다. 오류를 정정하다.’라는 뜻인데, 하와이 민속신앙에서 비롯된 이 사상을 휴렌 박사가 체계화하였습니다. 이 사상의 핵심은 ‘세상에 대한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온전치 못함으로 온전치 못한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의사인 그가 정신질환이 있는 범죄자들을 가두는 정신병원에 발령받았을 때 그는 의사로서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는 그들을 직접 만나는 대신 그저 그들의 차트를 보며 자신의 탓이니 용서해 달라고, 그리고 감사하고 사랑한다고만 되뇌었습니다. 그랬더니 몇 년 사이에 그 병원은 문을 닫아야만 했습니다. 아무도 다가가기 원치 않았던 그 무서운 정신병원의 모든 환자가 다 정상인이 되어 퇴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난한 이, 헐벗은 이, 병든 이, 갇힌 이, 병들어가는 지구까지 모두 나의 책임임을 인정합시다. 책임을 인정하는 것만이 카인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2016년 4월 24일 부활 제5주일 수원주보 3면, 전삼용 요셉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16. 희망을 되찾는데 한 사람으로 충분하다

 

남미 태생이면서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교육자인 하이머 에스카란테는 본래 유명한 컴퓨터 회사에 다녔지만, 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남미계 학생들이 다니는 가필드 고등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였습니다. 가필드 고등학교의 학생들은 공부를 포기하고 갱단에 가입하는 등, 선생님들도 함부로 말을 걸지 못할 정도로 무서운 아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이머는 공부가 싫어 도망치는 학생을 잡으려다 얼굴에 주먹을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배워야 한다, 배워야 성공한다. 그래야 인간이 된다.”

 

이런 하이머 선생의 열정에 탄복한 아이들은 처음엔 비록 구구단도 외우지 못했지만, 마침내 전국 고등학교 학생의 2%만 지원할 수 있다는 고등수학 시험에 18명 전원이 합격했습니다. 그러나 가필드 고등학교의 수준을 아는 위원회에서는 아이들이 부정행위를 했을 것이라며 아이들의 합격을 모두 취소했습니다. 하이머는 재시험을 요청했고 결국 더 어려운 문제와 철저한 감독 하에 재시험을 치른 결과, 다시 전원 합격해 전국에 대서특필되었습니다. 하이머의 노력으로 가필드 고등학교는 학생의 수가 점차 늘어 문제아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이제는 명문대 합격자를 꾸준히 배출하는 명문 고교가 되었습니다.

 

‘내가 혼자 에너지를 절약한다고, 내가 혼자 계단을 이용한다고, 내가 혼자 작은 차를 탄다고 세상이 바뀔까?’

 

바뀝니다. 그리고 내가 하지 않으면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노아 한 사람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열었던 성경 내용을 인용하며 “희망을 되찾는 데에는 의로운 한 사람으로 충분합니다.”(71항)라고 하십니다. 사실 온 세상에 죄가 들어온 것도 한 사람 때문이었고, 온 세상에 구원이 온 것도 한 사람 때문이었습니다(로마 5,18 참조). 이런 의미로 어쩌면 세상이 자연 파괴로 사라지게 된다면 그 책임은 ‘한 사람’으로서 나서지 못했던 나의 책임이 될 것이고, 반대로 우리 후손들에게 좋은 땅을 물려줄 수 있게 된다고 해도 나 한 사람의 작은 실천 덕분일 수도 있습니다.

 

한번 웃어보십시오. 세상이 당신을 향해 웃을 것입니다. 울어보십시오. 세상이 다 슬퍼할 것입니다. 자연을 안아주십시오. 자연도 당신을 안아 줄 것입니다. 온 인류의 구원이 한 사람으로 충분하였다면 교황님 말씀대로 희망을 되찾는 것 또한 한 사람으로 충분합니다. 물론 하느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구원을 위해 예수님의 협조가 아니었다면 아버지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한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십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내가 아니면 누구도 아닐 것입니다. [2016년 5월 1일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 수원주보 3면, 전삼용 요셉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17. 하느님의 선물인 자연

 

저는 사제라는 이유로 신자들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습니다. 받지 않으면 상대방이 자신의 성의를 무시한다고 생각할 수 있어서 일단 받아둡니다. 그런데 일정 시간이 지나면 뜯어보지도 않은 선물들이 선반 위에 빼곡히 올려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급기야 누가 선물한 것인지조차 생각이 나지 않을 때는 매우 죄송스러워집니다.

 

사실 사람들은 부담 갖지 말라며 선물을 하지만 그 이면에는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요구가 들어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자신이 준 선물을 다른 사람이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왜냐하면, 선물은 단순히 물질이 아니라, 주는 그 사람이 선물 안에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배고픈 대학생 때 돈을 아끼기 위해 점심까지 거르고 2천 원을 남겨 성당에 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이 함께 봉사하는 형의 생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돈으로 그 형을 위해 선물을 샀습니다. 그 선물은 주걱처럼 생긴 금색 책갈피였습니다. 그런데 그 형이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사람들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퍼 먹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다시는 그 형에게 선물을 주지 말아야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제 자신이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취급되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내 자신을 선물 안에 담아 주는 것이기에 그 선물이 곧 나 자신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성령’이십니다.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시기 때문에 당신 사랑을 드러내 보이시려고 눈에 보이는 선물을 주십니다. 선물 안에 당신 존재와 사랑인 성령님이 함께 들어계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황님은 모든 자연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임으로, 그 자연 자체가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보여준다고 말씀하십니다(84항 참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도, 눈에 보이는 선물까지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에게 죄를 지으면 용서 받을 수 있지만, 당신이 주시는 선물인 성령을 모독한다면 더는 용서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루카 12,10 참조).

 

우리가 눈에 보이는 선물을 받아들이지도 않으면서 그 선물을 주시는 보이지 않는 분을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거짓인 것과 같습니다(1요한 4,20).

 

우리가 그 선물을 대하는 자세는 선물을 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응답이자 사랑의 증거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선물인 자연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2016년 5월 8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수원주보 3면, 전삼용 요셉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18. 만남의 이유

우리나라가 일본에 침략을 당하고 지배를 받고 강제 수탈과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물적 · 정신적 피해를 당해야 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요?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일본은 힘이 있었고 우리나라는 힘이 없었을까요? 그건 바로 한 가지 생각, 바로 ‘혼자서도 충분하다.’는 자만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은 이미 오래 전부터 외국 문명과의 교류를 통해 힘을 키웠고, 우리나라는 정체성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쇄국정책으로 일관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항공모함을 만들 수 있었을 때 우리는 조총을 들고 싸워야 했던 차이를 만든 것입니다.

교황님은 모든 피조물은 그 본성상 홀로 완전하지 못하여 상호 보완적으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치십니다(86항 참조).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신학 대전]에서 하느님은 당신의 “선하심을 드러내시고자 각 사물 안에 부족한 것이 다른 것들로 보충되기를 바라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340항에서도 “하느님께서는 피조물들이 서로 의존하기를 바라신다. … 이들은 다른 피조물에 의존하여 서로 보완하며, 서로에게 봉사하면서 살아간다.”고 가르칩니다.

요한 복음 9장엔 태어날 때부터 눈먼 소경이 나옵니다. 그것이 누구 탓이냐고 물어보는 질문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요한 9,3)이라고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이란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창조사업’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 또한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피조물로써 “그리스도의 충만으로 이끌려 모든 피조물을 그들의 창조주께 인도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83항) 인간이 자신보다 더 초월적인 하느님을 만나는 이유는 자신을 초월하여 하느님처럼 되기 위해서입니다. 더 초월적인 존재는 자기보다 덜 초월적인 존재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소명을 지닌 것입니다. 인간이 하느님과의 친교를 통해 자기초월의 소명을 띤 존재라면(81항 참조), 인간도 가난한 사람들과 자연을 섬기는 마음으로 자기초월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82항 참조). 예수님께서 섬김을 받으러 오시지 않고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 20,25-26 참조). 주님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마르 16,15 참조). 복음을 전하는 것이 곧 섬김을 통해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일입니다. 이용하고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과 자연을 만나야 할 것입니다. [2016년 5월 15일 성령 강림 대축일 수원주보 3면, 전삼용 요셉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19. 인간이 죄로부터 돌아서면 지구는 자연히 살아난다

유학시절, 잉카인들이 산꼭대기에 세운 돌의 도시 마추픽추와 자연이 만들어낸 이구아수 폭포를 동시에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산 위에 숨겨진 신비의 도시 마추픽추는 인간의 위대함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다음으로 이구아수 폭포를 보니 마추픽추는 보잘것없게만 느껴졌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훌륭한 건축물을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자연이 뿜어내는 웅장함 앞에서는 마냥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관광객들은 여기저기서 연신 “Oh, my God!”을 외쳐댔고, 그 자연의 위대함 앞에서 자신들도 모르게 창조주 하느님(God)을 발견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존재 자체이신 하느님을 계시하고, 모든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움 자체이신 하느님을 보여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을 반영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면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주님께 찬미를 드리고 피조물과 함께 주님을 흠숭하려는 마음을 품게 된다.”(87항)고 하시며, 자연이 하느님을 반영하고 그 자연을 통해 하느님을 만날 뵈올 수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자연을 보며 경탄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같은 자연 앞에서 어떤 이들은 피곤해하고 짜증도 내며 훼손까지 합니다. 부모님 사진도 함부로 훼손할 수 없는 것이 사람 심성인데, 하느님 얼굴을 반영하는 자연은 어떻게 훼손할 수 있었을까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 하느님은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느껴야만 했습니다. 하느님이 보이면 더는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죄를 지을 때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신 분입니다. 다만 그들이 하느님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아버렸던 것입니다. 모든 죄는 이렇게 함께 계신 하느님을 스스로 부정하는 단계를 거쳐야만 하는데, 자연을 훼손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자연 안에서 그 창조주를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는 스스로 하느님을 보기 원치 않아 눈을 감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자연 안에서도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들은 삶 안에서도 하느님이 곁에 없는 것이 편한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를 짓기 위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단절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반면, 일상 삶 안에서도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연 안에서도 그분을 발견합니다. 죄로부터 돌아서면 자연적으로 지구도 되살아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2016년 5월 22일 삼위일체 대축일 수원주보 3면, 전삼용 요셉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20. 사랑도 하나고 마음도 하나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셨을 때 백만 명에 가까운 인파가 시복식에 참여하기 위해 광화문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미사 후 광화문 거리를 찍은 사진에서는 마치 그 모든 사람이 거리를 청소하고 간 듯 쓰레기 하나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마음이 뿌듯하였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 그 모습에 감격하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가톨릭 신자들이 그 거리를 지저분하게 해 놓고 돌아갔었다면, 그래서 사람들에게 불편을 안겨주었다면 그러면서도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에 대한 배려가 없다면 하느님께 대한 배려도 없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1요한 4,20 참조). 자연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웃도, 하느님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도 하나고 그 사랑을 담는 그릇인 마음도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교황님은 “인신매매에 완전히 무관심하며, 가난한 이들을 배려하지 않고, 맘에 들지 않는 이들을 해치려는 마음을 지니면서, 멸종 위기에 놓여 있는 생물종들의 매매와 맞서 싸우는 것은 분명히 모순입니다.”(91항)라고 하십니다. 이렇듯 이웃 사랑을 하지 않으면서 자연보호를 외치는 것도 위선이고, 자연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 선물을 주신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도 모순입니다.

물론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도 가족은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은 그저 인간적인 것일 뿐 참 사랑이 아닙니다. 이는 마치 빛과 어둠이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내 마음이 빛이면 모든 것이 빛이 됩니다. 내 마음이 사랑이면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러면서도 또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내가 그 사람이 필요해서 좋아하는 것이지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사람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연을 훼손하려는 시도를 보인다면 믿지 말아야합니다. “이 세상의 다른 피조물들에 대한 무관심이나 잔혹함은 언제나 어느 모로든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92항).

자연을 사랑하고 있어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사랑의 정도만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바로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사랑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2016년 5월 29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청소년 주일) 수원주보 3면, 전삼용 요셉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21. 창조론과 진화론, 무엇을 믿을 것인가?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지구의 보존을 위해 ‘교육’을 통한 노력으로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212항 참조)고 하시며, 교육이 정보제공만이 아니라 “뜻깊은 동기”를 새겨주어 생활양식을 바꾸게 만들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211항 참조).

자연을 보호하게 만드는 ‘뜻깊은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지구를 창조하시어 우리에게 선물로 맡기셨다는 ‘창조론’을 교육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무엇을 만든다면 반드시 목적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어떤 목적을 위하여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마치 조각가가 어떤 모양으로 조각을 해야겠다고 미리 생각해 놓고 작품을 만들어내는 모습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성모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을 안고 있는 피에타상을 감상하면서, “미켈란젤로가 정으로 돌을 쪼다보니 저런 작품이 나왔다.”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창조된 세상이 하느님께서 미리 계획한 작품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자연을 함부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전에 바티칸 대성당에서 피에타상을 바라보던 한 조각가가 미켈란젤로에 대한 질투심에 망치로 피에타상을 훼손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바티칸은 유리벽을 세워 사람들이 피에타상에 접근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지구는 하느님이 만드신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걸작입니다. 저절로 생겨난 것처럼 이 걸작을 대했다가는 언젠가 유리벽이 쳐지는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창조론은 이렇게 지구를 사랑해야 할 ‘뜻깊은 동기’를 줍니다. 그러나 지금 학교에서 배우는 진화론은 자연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기에 주인도 없고 목적도 없어 우리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의식을 암암리에 심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지배적인 유럽에서조차 80%이상이 진화론을 믿고 있다는 발표도 있으니, 현 교육이 얼마나 지구에 대한 무책임한 정서를 조장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가톨릭 신자들조차도 아이들이 진화론에 대한 시험을 잘 보아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을 원하지, 창조론을 주장하다가 학교에서 어리석은 아이로 찍히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로 시작합니다.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심하는 순간부터 더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참으로 신앙인이라면 목숨을 걸고라도 진화론을 가르치는 세상의 흐름과 싸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2016년 6월 5일 연중 제10주일 수원주보 3면, 전삼용 요셉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22. 진화론을 믿는 이유

진화론은 ‘인간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창조론은 ‘인간이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창조론을 믿으면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종속됩니다. 그러나 진화론은 인간이 굳이 생겨난 목적을 찾지 않아도 됩니다. 이렇듯 진화론은 모든 것을 자신 뜻대로 판단하고 행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줍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렇게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의식 안에만 머무는 사람들은 자신의 불만족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더 탐욕적’이 되기 때문에 지구를 망가뜨리는 장본인이 된다고 말합니다(204항 참조). 결국 진화론을 더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교육의 결과가 지구를 망가뜨리는 원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창조론은 어리석은 환상이고, 진화론은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것일까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진화론 자체가 얼마나 자기 오류에 빠져있는 비이성적인 학설인지를 알게 됩니다.

파스퇴르는 세균조차 모체에 의해 번식하는 것이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밝혀냈습니다. 생명은 생명에게서만 나옵니다. 그런데 어떻게 무생물에서 생물이 생겨날 수 있겠습니까? 또 자연발생설이나 진화론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증명하지 못합니다. 모든 물질은 하나의 에너지입니다. 나무를 태우면 열에너지가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저절로 무엇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말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위반됩니다. 마지막으로 진화론은 열역학 제2법칙,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연 상태에서 그 질서나 에너지가 낮은 단계로 향한다는 법칙을 위반합니다. 절대로 모래가 저절로 시계가 될 수 없고, 무생물이 생명체가 될 수 없으며, 원숭이는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자연세계에서 저절로 더 복잡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진화론을 가르치고 진화론을 믿는 이유는 창조주를 배제하여 자립적이고 자존적이 되어 자기중심적으로 살고 싶은 인간 욕망의 결과인 것입니다. 교황님은 교육이 단순히 환경 위기 예방과 복구 차원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개인주의, 무한 경쟁, 물질론적 세계관’ 등을 변화시켜 ‘배려와 사랑, 공존’의 세계관으로 향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210항 참조). 자기 중심(진화론)에서 하느님 중심(창조론)으로 향할 때 지구도 회복되고 세상도 회복될 것입니다. [2016년 6월 12일 연중 제11주일 수원주보 3면, 전삼용 요셉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23.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우리는 ‘알파고’라는 인공지능(AI) 컴퓨터 바둑프로그램이 이세돌 9단을 이기는 뉴스를 접하며, 이제 기술의 힘이 인간의 통제를 넘어서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날이 올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교황님도 같은 것을 직감하시며,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통제할 능력이 부족한데 점점 엄청난 기술의 힘이 주어지고 있다고 경고하십니다(105항 참조). 그러면서도 ‘기술’이 곧 ‘힘’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스스로가 통제 불능임을 눈치채면서도 더 큰 힘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란 말이 있듯이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세상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대하는 방식으로 다른 피조물도 대하기 때문입니다(155항 참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을까요?

마더 데레사가 젊으셨을 때 어느 빈민굴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마더 데레사는 한 청년을 만났는데, 그는 실업자에다 돼지우리 저리 가라 할 만큼 어둡고 더러운 방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등잔이 있는데 왜 켜지 않느냐며 청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램프를 켜 놓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10년 정도가 지나 우연히 그 청년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깨끗하게 정돈된 집에서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청년은 “당신의 등불이 지금도 내 생활 속에 불타고 있다(Your light is still burning in my life).”고 전해달라 했습니다.

우리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은 주님께서 내 안에 넣어주신 ‘말씀의 빛’입니다. 그 말씀의 힘이 내 안에서 작용하고 있지 않다면 인간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나 자신을 통제하고 절제하고 정돈할 수 있다면 그러한 사람에 의해서 세상도 정돈되고 되살아나게 될 것이고, 반대로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세상은 망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인을 뽑을 때 무엇보다도 그 사람이 윤리적으로 자신과 가족을 잘 이끌어가는 사람인지를 먼저 살펴야만 하는 것입니다. 윤리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사람을 돈만 많이 벌게 해준다는 말에 속아서 뽑았다가는 금수강산이 다 망가질 수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세상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2016년 6월 19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남북통일 기원 미사) 수원주보 3면, 전삼용 요셉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24. 생태신학의 완성인 성체성사

환경보존을 위한 회칙 『찬미받으소서』 마지막 부분은 ‘삼위일체 신비’가 어떻게 환경과 생태신학에 도움을 주는지 묵상하도록 이끕니다. 삼위일체 신비 가운데 특히 ‘강생의 신비’는 거룩한 하느님의 신성이 성령의 힘으로 물질세계와 어떻게 한 몸을 이루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 성령으로 동정 마리아에게 잉태되신 이 강생의 신비는 하느님께서 물질세계를 거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피조물에 당신 신성을 입히심으로써 거룩하게 하길 원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이 강생의 신비는 또한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봉헌하는 빵과 포도주 안에 성령의 힘으로 머무시는 성체성사로 재현됩니다. 따라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피조물은 성찬례 안에서 가장 탁월하게 드높여집니다.”(236항 재인용)라는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강론을 인용하시며, ‘성체성사’가 궁극적으로는 피조물의 초월적 가치를 인식하게 하는 가장 큰 환경교육임을 알려주십니다. ‘성찬례’는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는 물론, 인간과 피조물과의 관계가 치유되는 재창조의 순간인 것입니다(237항 참조).

초등학생 때 수녀님이 제병을 먹으라고 나누어주신 적이 있습니다. 아직 축성하지 않은 제병이었지만 우리는 선뜻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제병은 그리스도의 몸이 될 가능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진정성 있는 마음으로 성사에 참여할 때마다 그 성사 안에 사용되는 물, 기름, 빵, 포도주와 같은 자연적인 것들 안에 하느님께서 들어오셔서 우리를 만나러 오신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그런 피조물들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235항 참조).

그리고 피조물로서 가장 먼저 거룩히 높여지셨고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의 별로 된 관을 쓴(묵시 12,1) 성모님께서는 이제 모든 피조물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꿰찔린 마음으로 핍박받는 가난한 이들과 인간의 힘으로 황폐해진 이 세상의 피조물 때문에 지금도 슬퍼하고 계십니다(241항 참조). 성모님은 피조물에 불과했던 당신 자신이 하느님과 한 몸을 이루어 신성을 입은 거룩한 존재가 되는 신비를 경험하셨기 때문에 그런 가능성이 있는 모든 존재를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실 수 있으십니다. 마찬가지로 성체성사로 피조물에서 하느님의 자녀의 경지에 오른 그리스도교 신자들 또한 참다운 본성의 들여 높여짐을 체험하고 자신과 같이 들여 높여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모든 피조물을 애처롭게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참다운 신앙인이 되면 십자가의 성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모든 사람과 피조물을 하느님을 대하듯 해서 결코 이웃과 자연에 해가 되는 일은 할 수가 없게 됩니다(234항 참조). [2016년 6월 26일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수원주보 3면, 전삼용 요셉 신부(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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