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전례ㅣ교회음악

성가의 참맛: 가톨릭 성가 99번 고요한 밤, 거룩한 밤(Stille Nacht, heilige Nac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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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2-26 ㅣ No.3154

[성가의 참맛] 가톨릭 성가 99번 「고요한 밤, 거룩한 밤」(Stille Nacht, heilige Nacht)

 

 

전쟁이 시작된 지 8개월. 참호 너머에는 전우들이 맨땅에 누워 편안히 쉬고 있다. 커다란 소음을 계속 들은 탓에 양쪽 귀도 잘 들리지 않게 되어 세상은 꽤 조용하다. 어둔 밤하늘을 문득문득 비추는 저 환한 빛과 멀리 종소리처럼 들려오는 폭발음들. 그때마다 얼굴로 튀어오르는 진흙들을 꽁꽁 언 손으로 훔쳐낸다. 하릴없이 어머니 생각이 난다. 품속에 있던 사진을 잃어버릴세라 잠깐 보고서는 다시 갈무리한다. 아기를 안고 있던 어머니의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문득 참호 너머로 고개를 살짝 드니, 백 미터 저편에도 제리(Jerry) 한 명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서로 만날 수 없는 단절의 공간. 바닥에는 여전히 전우들과 독일 군인들이 손을 잡고 누운 채 쿨쿨 자고 있다. 갑자기 궁금증이 생긴다. 왜 이렇게 마음이 편안해졌을까? 불현듯 다시 건너편을 바라본다. 눈을 찡그리며 자세히 본다. 아까 전의 그 제리 장교가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소음 속에서 명확히 들리는 노랫소리 - “Stille Nacht, heilige Nacht, Alles schläft, einsam wacht...” - 독일군 장교였으며 페라극단의 테너였던 발테 키얼치호프 이야기

 

천오백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제1차 세계 대전. 전쟁이 막 시작되었던 1914년에 착좌한 베네딕토 15세 교황은 이 전쟁을 “유럽의 자살”이라 칭하며, 8년의 짧았던 재임 기간 중 평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해 12월 7일, 교황은 “천사들이 노래하는 거룩한 밤에라도 모두 총소리를 멈춰 보자.”며 성탄절에는 휴전하자고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평화를 위한 그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셨을까요? 성탄절이 다가오자 최전방에서 이상한 보고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정말로 총소리가 멈추고 프랑스군, 영국군, 독일군 가릴 것 없이 서로 사선을 넘어 담배를 나눠 피우며,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도록 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런던 제5소총여단의 소총수 그래엄 윌리암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처음에는 독일군 쪽에서 캐롤을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우리도 한 곡 불렀죠. 서로 돌아가며 부르다가 딱 나온 곡이 바로 <어서 가 경배하세>예요. 우리가 이 곡을 부르니까 독일군도 원곡 가사인 <오라, 모든 신실한 이들이여>(Adeste Fideles)로 함께 따라서 부르는 겁니다! 한참 전쟁 중에 말이죠. 진짜 제 인생에 이처럼 특별한 일은 없었던 것 같네요.”

 

이 곡이 처음 쓰인 1816년과 1818년, 항상 홍수로 큰 피해를 입던 오스트리아 오베른도르프 사람들의 마음을 담은 성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백 년 후 1914년 벨기에 접전지역에서 이 성가를 불렀던 군인들에게도, 200년 후 2022년 팬데믹의 여파를 겪는 우리에게도 한결같이 평화롭게 다가옵니다. 시대와 공간, 나라와 언어를 뛰어넘어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사랑이며 생명이신 주님의 문화’를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일치감에서 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아직 서로 화해하지 못한 이들에게도 이제는 넌지시 속삭여 주고 싶습니다. ‘천사들이 노래하는 이 밤만이라도’ 멈추어 서서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전해주라 말이에요.

 

고요한 밤, 거룩한 밤,

하느님 사랑을 오늘 우리게 베푸시니

천하 만민은 화해하네.

지극한 사랑이여, 지극한 사랑이여!

 

[2022년 12월 25일(가해) 주님 성탄 대축일 의정부주보 7면, 까뮤(이새론 안토니오, 최슬기 마리아, 고윤서 마리스텔라, 이운형 마리아, 김구환 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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