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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신학서원56-58: 교회 안의 교육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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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4-04 ㅣ No.694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56) 교회 안의 교육과 문화 1


비판적 사유 속에서 마음으로 응답하고 몸으로 실천하는 과정 필요

 

 

- 지난해 12월 수원교구가 사제들의 인성·영성·지성의 성숙과 사목적 쇄신을 위해 신설한 중견사제연수원에서 교구장 이용훈 주교가 개원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사제 양성 교육과 문화에 대한 정직한 진단과 새로운 노력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가톨릭신문사 자료사진

 


쇄신은 어떻게?

 

쇄신은 제도와 구조의 개혁과 사람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제도와 구조의 변화는 정치적 노력과 운동을 통해 가능하다. 사람의 변화는 교육과 문화 속에서 이루어진다. 물론 정치와 교육·문화의 영역은 때때로 서로 겹치면서 상호보완적이다. 제도와 구조의 개혁이 단기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을 포함한다면, 사람의 변화는 교육과 문화를 통한 여정이기에 장기적인 성격을 지닌다. 교회의 변화와 쇄신 역시 제도와 구조의 변혁을 통해 촉진할 수 있지만, 최종적으로는 교회 구성원들의 변화가 담보되지 않는다면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제도와 구조의 변화는, 사람의 변화를 동반하지 않는다면, 늘 일시적이고 미봉적일 위험이 있다. 사람이 제도와 구조를 만들지만, 제도와 구조가 사람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다. 제도와 구조의 개혁과 사람의 변화는 함께 가야 한다. 그래서 변화와 쇄신이 어렵다. 정치적 운동과 교육·문화적 노력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일까.

 

 

변화를 위한 교육과 문화

 

교회의 변화와 쇄신을 이야기할 때 제도와 구조에 대해 말하기 쉽다. 성직주의와 교계제도에서 발생하는 위계적 시스템과 문화가 교회 변화와 쇄신의 걸림돌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사실, 하늘 아래 모든 제도와 구조는 변할 수 있고 또 변해야 한다. 변치 않는 분은 주님뿐이다. 하지만 제도와 구조의 개혁을 말하기 전에 먼저 교회의 제도와 구조가 갖는 발생학적 원인과 목적론적 지향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절실히 요청된다. 진정한 의미의 교계제도는 위계와 서열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교회 복음화 사명 수행을 위한 일종의 목적지향적 제도다. 교회의 모든 제도와 구조는 교회의 사명을 위해 존재한다.

 

사람의 변화가 제도와 구조의 변화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진정한 교회의 변화와 쇄신은 교회 구성원들의 변화와 쇄신에 달려있다. 성직자의 쇄신과 신자의 변화가 더 절실히 요청된다는 의미다.

 

사람의 변화는 교육과 문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사람은 교육 환경과 문화적 배경 속에서 신념과 태도와 행동 방식을 습득한다. 물론 개인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사건들과 실존적 경험들이 그 사람의 신념과 태도와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전체적 맥락에서 보면 인간은 교육과 문화를 통해 형성된다. 사람의 성장 과정에서 배움이 이루어지는 장이 교육과 문화의 장이다. 제도와 구조의 문제 역시 문화적 차원에 포함된다. 어떤 교육을 받았고 받고 있는지, 어떤 문화 속에 살았고 살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거듭 말하지만, 교육 환경과 문화적 맥락을 뛰어넘어 개인적이고 주체적인 노력으로 자신을 형성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교육과 문화 속에서 자신을 형성해간다. 사람의 변화를 위해서는 교육과 문화의 자리를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2021년 발표된 유네스코 국제미래교육위원회의 보고서 「함께 그려보는 우리의 미래: 교육을 위한 새로운 사회계약」은 매우 시사적이다. 서론에서 교육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교육, 즉 우리가 평생 동안 가르침과 배움을 수행하는 방식은 오랫동안 인간사회 전환의 기반이 되어왔다. 교육은 우리를 세계와, 또한 서로와 연결시키고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며 대화와 행동을 위한 우리의 역량을 높여준다. 하지만 평화롭고,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교육 그 자체도 변혁이 필요하다.” 어쩌면 변화와 쇄신을 갈망하는 오늘의 교회가 깊이 새겨야 하는 통찰과 화두인지도 모르겠다.

 

 

사제 양성 교육과 문화

 

가끔 사제들끼리 한탄하면서 하는 이야기가 있다. 점점 훌륭한 신부를 찾기가 어렵다고, 사제 생활의 연륜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더 좋은 사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신학교에 입학했던 시절이 가장 순수했다고 말이다. 비판적으로 보면, 이러한 현실은 신학교 교육, 지속 양성 교육, 성직자 문화가 그리 건강하고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의 증거일 수도 있다.

 

교육은 전인적 방식으로, 자율적 방식으로, 상호관계적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머리와 마음과 몸 모두를 훈련해야 한다. 자율적이고 비판적 사유 속에서 마음으로 응답하고 몸으로 실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규범과 규율은 일시적으로 몸을 강제할 수는 있다. 하지만 비판적 성찰을 통한 마음의 수용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몸은 언제든 새로운 환경에서 배반할 수 있다. 목적과 지향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성찰하면서, 마음과 영성의 수련 속에서 내면적 견고함을 키운다고 해도, 편안함과 욕망을 추구하는 몸의 성향을 극복하고 단련하기가 쉽지 않다. 하물며 비판적 성찰과 내면의 훈련이 없는, 단순히 규범과 규율을 통한 양성은 일시적 순응과 은폐를 낳을 뿐이다.

 

비판적 성찰과 새로운 상상력을 키우지 못하는 교육은 죽은 교육이다. 비판적 성찰이란 단순히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고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다. 목적과 지향을 기억하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유 방식이다. 전통적인 신학교 교육은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의 말을 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좋은 교육은 정신의 세 가지 능력인 이성, 기억 그리고 상상력을 포함하고 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또한 다른 이들과 더불어 비판적, 창의적으로 생각하도록” 이끄는 것이다.(토마스 그룸 「신앙은 지속될 수 있을까」) “배움이란 익숙한 세계관을 뒤흔드는 내면의 불편함과 좋은 질문을 수반하는 것이다. 진정한 배움의 전제는 비판적 성찰의 일상화다.”(심성보 「프레이리에게 변혁의 길을 묻다」)

 

교육은 상호관계적이다. 가르침과 배움은 상호순환적이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 가르침으로 이루어지는 교육은 없다. 교육은 교사와 학생의 상호 교류 속에서 발생한다. 교육은 인격과 인격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 위계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신학생과 성직자들은 상대방을 동등한 인격으로 대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경향이 있다. 위계적 문화가 교육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교육은 학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학교 선생들끼리 하는 농담이 있다. 학기 중에 열심히 훈련시켜 놓지만, 방학만 지나고 오면 모든 게 되풀이된다고 말이다. 신학생은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본당과 가정에서 교육되고 형성된다. 특히 본당 사제들의 문화 속에서 깊은 영향을 받는다. 젊은 사제들 역시 그가 속한 사제단의 문화 속에서 물들어 간다. 정직하게 고백하면, 오늘날 성직자 문화가 공부와 성찰과 수행의 문화라고 말하기 어렵다. 또한 성직자 문화가 자율적이고 창의적이며 인격적이고 상호관계적 문화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교회의 변화와 쇄신은 무엇보다 성직자의 변화와 쇄신을 요청한다. 사제 양성 교육과 문화에 대한 정직한 진단과 새로운 노력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시노달리타스는 교회의 교육과 문화의 장에서도 실현되어야 한다. [가톨릭신문, 2023년 4월 2일,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57) 교회 안의 교육과 문화 2


신앙은 대화와 만남과 체험의 교육 방식으로 전수돼야 한다

 

 

- 수원교구 군포 부곡동본당이 청소년·청년 신자들을 대상으로 생각의 폭을 넓히고자 열고 있는 아르스쿨링 프로그램 중 본당 주임 이정철 신부(가운데)와 학생들이 각자의 생각을 나누고 있다. 신앙의 전수는 대화와 만남과 체험의 교육 방식이어야 한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사람의 특성과 교육과 문화

 

사람의 특성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사람의 기질적 특성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일까. 사람은 교육과 문화라는 후천적인 요인들을 통해 근본적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 사람의 정서적·문화적 특성은 성장기에 형성되는 것일까. 사람의 문화적 감수성은 초·중·고 시절에 형성되는 것일까. 성인이 되고 나면 사람은 잘 변화되지 않는 것일까. 어떤 한 사람에게 있어서 그 자신의 사유하는 틀과 방식, 다른 사람과 세상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 어떤 것을 선택하고 수행하는 행동 방식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하늘 아래 명쾌한 대답은 없다. 사람의 특성은 내적 요인들과 외적 요소들에 의해 형성되어 갈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적 요인들에 의해 더 많이 좌우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외적 요소들에 의해 더 깊은 영향을 받기도 할 것이다. 한 사람의 기질과 특성이 어떤 요인들에 의해 형성되고 발전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단지 추론해 볼 수 있고 동의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만나고 관계하는 사람들이, 그리고 그 사람이 살아가는 자리의 교육과 문화적 환경이 그 사람의 사유와 태도와 행동 방식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신앙과 신앙인의 모습

 

종교와 교파에 따라 신앙을 수행하는 방식과 신앙적 특성이 조금 다르다. 물론 같은 종교와 교파에 소속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사람의 성향과 기질과 특성에 따라 신앙을 고백하고 표현하고 실천하는 방식은 다르다. 신앙을 수행하는 방식의 특성을 일률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한국 사회에서 가톨릭신자와 프로테스탄트 신자의 신앙 수행 방식과 특성이 약간 구별되고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천주교 신자들은 타율적이고 소극적이며 관습적인 신앙생활에 익숙하다. 반면에 개신교 신자들은 조금 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듯하다. 성경 말씀을 강조하고, 고백적 믿음(신앙적 신념)을 중요시하고, 감정과 정서를 고양(高揚)하는 예배 형식이 개신교 특유의 신앙 모습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지나친 성경 문자주의가 초래하는 교조주의적 모습,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신앙 고백주의가 낳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모습이라는 개신교 신앙의 또 다른 이면이 있지만 말이다.

 

신앙 수행의 특성은 신앙인의 삶의 방식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다. 정직하게 말하면, 성당과 예배당의 자리에서는 모르겠지만, 직장과 일상적 삶의 자리에서 자신의 신앙적 신념을 고백하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신자는 개신교 쪽에 더 많은 것 같다. 물론 가톨릭 안에도 선우경식 선생 같은 분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박해시대의 순교자들을 제외하면, 삶의 자리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실천하는 신자의 비율이 개신교가 더 높은 것 같다고 말하면 잘못된 판단일까. 가끔 우리끼리 하는 농담이 있다. 평균적 수준으로 측정하면, 가톨릭 성직자와 신자들의 모습이 더 괜찮아 보인다고 말이다. 극단적이고 배타적이며 편협한 모습을 보이는 많은 개신교 성직자들과 신자들에 비추어보면, 가톨릭 성직자들과 신자들의 평균 수준이 조금 더 나은 것 같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삶의 모든 자리에서 신앙을 충실하게 고백하고 실천하는 신자의 숫자는 개신교가 더 많은 것 같다고 말이다.

 

단순화와 도식화의 위험은 있지만, 개신교 신앙 수행의 방식은 성경 공부, 동적인 예배, 일상에서의 신앙 고백적 태도로 규정될 수 있다. 천주교 신앙 수행 방식은 교리 공부, 정적인 전례, 교회법과 윤리 규범에 따른 관습적 태도로 규정되기도 한다. 개신교 신앙의 모습은 부정적으로는 교조적, 문자적, 배타적 성향을 보이지만 긍정적으로는 신념적, 헌신적 특성을 드러낸다. 천주교 신앙의 모습은 부정적으로는 형식적, 습관적 특성이 있지만 긍정적으로는 관용적, 포용적 성향을 나타낸다. 물론 이러한 견해는 피상적이고 인상 비평에 근거한 것이지만 말이다.

 

 

신자들의 신앙 교육과 문화

 

신앙의 모습과 특성은 주로 신앙 교육과 교회 문화 속에서 형성된다. 가톨릭신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신앙을 교육받고 어떤 교회 문화 속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벼려가는 것일까. 오늘날 본당의 신앙 교육 현실을 냉정하게 진단하면 그리 낙관적 전망을 가질 수 없다. 본당의 신앙 교육은 예비신자 교리 교육, 미사를 중심으로 하는 전례 생활, 본당 신심 행사 참여와 봉사 활동, 레지오마리애와 구역·반 모임 등 신심 단체 참여, 성경 공부 모임, 신자 재교육 차원에서 시행되는 특강들을 포함한다. 언뜻 보면 다양한 프로그램이 제공되는 것 같지만, 실제 현실에서 보면 신자 대다수는 미사 전례 참여가 전부인 경우가 많다. 물론 종교 생활에서 전례가 핵심이다. 전례 안에서 신앙의 형성과 교육이 다 이루어진다.

 

전례의 모습이 신앙의 모습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 가톨릭 전례 성사가 역동적이고 신자들의 자율적 참여가 보장되는 방식으로 작동되는 것일까. 가톨릭 신앙의 수동성과 피동적 특성이 혹시 전례의 모습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전례 교육만으로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전례 참여를 유발할 수 있을까. 전례 성사의 신학적 의미와 구원적 효과에 대한 의문이 아니다. 오늘의 전례가 신자들이 실제 현실에서 신앙을 살아가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절실하게 요청된다는 뜻이다.

 

전례뿐만 아니라 본당의 신앙 교육 역시 수동적이고 타율적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강의 중심의 교육은 진정한 교육이 아니다. 강의는 공부 형식이라기보다는 소비 형식에 더 가깝다. 지식과 정보의 전달로서의 강의, 자극과 동기부여를 줄 수 있는 강의가 필요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일방적 가르침과 전달 중심의 강의는 신앙의 자율성과 역동성을 키우지 못한다. 함께 참여하는 공부, 대화 중심의 교육 방식으로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신앙의 전수는 단순히 교리적 지식의 전달이 아니다. 신앙의 전수는 인격적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대화와 만남과 체험의 교육 방식이어야 한다.

 

신앙은 머리와 마음과 몸, 모든 영역에서 작동되어야 한다. 오늘의 가톨릭 신앙 교육은 자칫 교리적 지식과 규범만을 가르치고 몸의 형식적 참여만을 강조하는 데 그치는 경향이 있다. 참다운 신앙적 신념이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몸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 신앙 교육은 신앙적 비전과 신념, 마음과 영혼의 열정, 몸의 의지적 실천을 끌어낼 수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신앙은 신앙의 방식으로만 교육되고 전수될 수 있다. 신앙의 방식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방식, 인격적 방식을 뜻한다. 위계적 문화 속에서 타율적 방식으로 수행되는 신앙 교육은 참다운 신앙을 형성하지 못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방식으로 교육”(토마스 그룸)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가톨릭신문, 2023년 4월 16일,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58) 교회 안의 교육과 문화 3


신앙, 아는 것 아니라 사는 것… 모든 삶의 자리가 신앙 교육의 장

 

 

- 2020년 2월 의정부교구 남양주 별내본당 어린이가족 졸업미사에서 함께 기도하고 있는 가족들. 삶으로서의 신앙, 총체적 신앙을 교육하고 전수하는 방식은 단순히 앎과 지식을 교육하고 전수하는 방식과는 달라야 한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신앙 교육의 현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신앙은 어떻게 교육되고 전수되고 있을까. 신앙을 교육하고 전수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예비신자 신앙 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신자들을 위한 지속적 신앙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교회 안의 신앙 교육은 주로 교리교육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가톨릭교회 교리서」의 내용에 따라 전개된다. 즉, 신앙 고백적 명제들에 대해, 전례와 성사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에 대해, 기도와 영성에 대해 ‘교리적’으로 배운다. 신앙을 배우는 것과 교리를 배우는 것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지만, 뉘앙스와 강조점의 차이가 있다. 교리는 신앙에 대한 명제적 진술이며, 신앙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이다. 교리를 배우는 일은 신앙 교육의 핵심이다. 하지만 신앙 교육이 교리교육으로 축소 환원될 수는 없다.

 

교리의 내용 안에는 성경과 교회 전통이 다 포함되어 있다. 성경을 공부하는 것과 교리서를 공부하는 것은 미묘한 차이가 있다. 성경은 이야기다. 교리서는 딱딱한 명제들의 연속이다. 이야기를 통한 자연스러운 가르침과 배움.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명제들을 통한 규범적이고 지식적인 가르침과 배움. 무엇이 신앙 교육에 더 적합할까. 신앙은 이론과 앎이라기보다는 삶이다. 삶은 이야기를 통해 더 잘 전달된다. 그런데 오늘날 예비신자 신앙 교육은 교리 중심적으로 이루어지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앎과 삶은 연결되어 있고, 신앙과 교리 역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렇지만 교리와 지식을 통한 신앙 전수보다 신앙적 삶과 체험을 통한 신앙 전수가 더 중심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예비신자 신앙 교육 과정을 수료하고 세례를 받은 초보 신자들이 자주 호소한다. 세례 이후의 후속 교육이 없어서 신앙생활을 이어가기가 힘이 든다고, 또 주변 신자들의 지속적인 관심이 없는 경우에는 성당 생활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이다. 솔직히 진단하면, 예비신자 신앙 교육 과정만으로는 신앙적 신념을 잘 갖지 못한다. 세례 이후의 의례적인 전례 참여만으로는 신앙을 성숙시켜 나가기 힘들다. 본당의 신심 단체, 친교 단체, 봉사 단체에 소속되어 신앙생활을 이어가지만 정작 신앙을 성숙시키고 심화시켜가기 힘든 경우가 많다. 교회 안에 지속적인 신앙 교육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공부하는 신앙 문화가 잘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행 예비신자 교리교육이 믿을 교리와 전례와 성사에 관한 지식적 가르침에 집중되어 있어서, 신앙을 실천하고 살아내는 신자들을 제대로 양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성이 있다. 예비신자 교리 과정에 사회교리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예비신자 교리교육 과정 안에 인식적 차원의 지성적 동의를 강조하는 믿을 교리에 대한 교육뿐만 아니라 신앙적 행동을 추동할 수 있는 사회교리에 대한 교육도 포함되어야 한다. 하지만 믿을 교리든 사회교리든, 교리에 대한 ‘교리적’ 교육만으로 정말 신앙을 살아내게 할 수 있을까.

 

 

신앙의 방식으로 교육하기

 

신앙은 하느님을 알고, 느끼고, 닮고, 따르는 일이다. 신앙 교육은 하느님을 알게 하고, 느끼게 하고, 닮게 하고, 따르게 하는 일이다. 교리, 전례와 성사, 기도에 대해 교육하는 것은 교리를 삶의 모든 자리에서 실천하게 하기 위해서, 전례와 성사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주님의 현존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기도의 수행을 통해서 주님과 통교하게 하기 위해서다. 교회의 신앙 교육이 이러한 목적과 지향을 자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칫 이론적 지식과 종교적 규범을 전달하는 교육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점검해야 한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느끼고, 닮고, 재현하는 일이다. 신앙 교육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체험하게 하고, 닮게 하고, 재현하게 하는 일이다. 신앙 교육의 핵심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다. 신앙 교육의 방식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교육 방식을 닮아야 한다. 예수의 말과 행동과 태도, 즉 예수의 삶이 신앙 교육의 내용이며 방식이어야 한다. 사실, 예수의 신앙 교육 방식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가톨릭 교육학자 토마스 그룸의 「신앙은 지속될 수 있을까?」의 1장은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가르치고 배우기”를 다루고 있다. 프로테스탄트 학자인 트레비스 디킨슨은 자신의 책 「Logic and the Way of Jesus」에서 예수의 교육 방식과 논리에 관해 탐구하고 있다. 예수의 신앙 교육 방식에 대한 탐구와 그 적용 방법을 찾아내는 일은 종교 교육 전문가들의 몫이다. 교회 안의 교육 전문가들은 더 많은 목소리를 내야 한다.

 

진정한 교육은 사람을 통해, 사람의 삶을 통해 이루어진다. 사람의 말과 행동과 태도를 통해 교육이 이루어진다. 신앙 교육 역시 인격적이고 관계적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신앙은 신앙을 수행하는 삶을 통해 교육되고 전수된다. 신앙은 이론적 교리교육이나 신학적 지식의 교육보다는 인격적 체험과 만남과 대화를 통해 더 뚜렷하게 전수된다. 현행 신앙 교육은 이 사실을 자주 망각한다. 가정과 본당과 학교의 장에서 신앙을 교육하는 부모와 사목자와 교사들이 과연 신앙적 삶의 모습을 통해 신앙을 전수하고 있는 것일까.

 

 

신앙의 총체성에 관한 교육과 전수

 

신앙은 신비이며 총체적이다. 신앙은 단순히 지식과 앎으로 환원될 수 없다. “신앙에는 ‘믿음, 관계, 헌신’이라는 세 가지 차원이 분명하게 존재한다.”(토마스 그룸) 신앙은 생각하고 동의하는 일이며, 느끼고 체험하는 일이며, 행동하고 실천하고 수행하는 일이다. 신앙은 신념과 행동과 태도를 포함한다. 신앙은 단순히 아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는 것이다. 삶은 모든 자리에서 일어난다. 삶으로서의 신앙 교육 역시 어느 특정 환경과 공간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모든 자리가 신앙 교육의 장이다. 삶으로서의 신앙, 총체적 신앙을 교육하고 전수하는 방식은 단순히 앎과 지식을 교육하고 전수하는 방식과는 달라야 한다.

 

신앙인의 내면에 신앙적 신념을 확고하게 자리 잡게 할 수 있는 교육의 방식은 무엇일까. 신앙인이 물질적 유혹의 환경 속에서도 굳건하게 신앙적 행위들을 실천하며 살아가도록 할 수 있는 교육 방식은 어떤 것일까. 어떻게 교육을 해야 사람과 세상을 향한 복음적 태도가 신앙인의 온몸과 온 마음에 배게 할 수 있을까. 그 교육은 분명 앎과 지식 중심의, 수동적이고 타율적인 교육은 아닐 것이다.

 

신앙 교육의 목적과 지향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닮게 하는 일이다. 신앙은 삶 안에서 인격을 통해 전수된다. 신앙 교육의 내용만큼이나 신앙 교육의 방식도 중요하다. 이것을 끊임없이 기억하면서 신앙 교육이 이루어지길 희망한다. [가톨릭신문, 2023년 4월 30일,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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