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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기억하고 싶은 인물1: 토마스 퀸란의 빛 - 그의 복음에 대한 순수한 열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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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5-01 ㅣ No.1564

[기억하고 싶은 인물 · 1] 토마스 퀸란의 빛 : 그의 복음에 대한 순수한 열정 (1)

 

 

한국에 오기까지

 

퀸란 주교는 그의 생애 동안 남한에서, 1953년 20만 아래의 가톨릭 인구에서 4천만이 넘는 총인구의 2.5%인 거의 백만 명에 이르는 가톨릭교회의 빠른 성장을 목격했다. 이런 성장의 이유는 복합적이다. 그러나 아일랜드 선교사들, 특히 퀸란(Thomas F. Quinlan, 具仁蘭, 1896~1970) 주교에 의해 행해진 역할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1)

 

한국 골롬반 선교의 영웅, 토마스 퀸란은 누구인가? 퀸란은 1896년 9월 13일 아일랜드 남서부 티퍼래리(Tipperary)주 팔라스(Pallas)에서 태어났다. 1970년 12월 31일 74세의 나이로 선종할 때 그는 춘천교구에서 제2대와 4대 지목구장, 초대 대목구장, 초대 교구장으로서, 또 한국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교황사절 서리로서 활동한 뒤였다.

 

1918년에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입회하여 1920년 2월 2일 사제품을 받은 퀸란에게 한국은 첫 선교지가 아니었다. 사제 서품을 받은 후 그는 골롬반 중국 선교2)의 첫 그룹으로 파견되어 후베이성(湖北省) 한양교구와 장시성(江西省) 난청(南城)에서 선교와 사목하였고, 1933년 고국으로 휴가차 돌아왔다.3) 다음 해에 퀸란 신부는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그보다 앞서 1933년 6월,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은 골롬반회에 한국의 전라남도 지역에서 일할 것을 정식으로 제의했다. 그 당시 파리외방전교회가 전라남도 지역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인적 자원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골롬반회는 교황청의 제의를 즉시 받아들였고, 10명의 회원이 1933년 10월 29일 최초로 한국에 파견되었다.

 

한국에 파견된 첫 그룹은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거주하고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의 안세화(安世華, F. Demange) 주교의 손님 신분으로 그곳에 거처를 정하고 6개월간 한국말 공부에 몰두하였다. 이듬해인 1934년 봄, 그들은 전라남도로 갔다. 그 당시 전라남도 인구는 약 250만 명이었고 6명의 한국인 사제가 3천 명 정도의 신자들을 대상으로 사목하고 있었다. 골롬반회는 목포, 노안, 순천, 광주, 제주, 서귀포 등지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4)

 

 

강원도 지역으로 가다

 

퀸란 신부는 1934년 6월 한국에 들어와서 광주지목구에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1938년 6월 9일 교황청이 골롬반회에 강원도 지역의 사목을 위임하여 그는 안(安) 브렌난(Patrick Brennan) 신부와 함께 그해 11월 춘천에 부임하게 되었다.5) 당시 퀸란 신부가 오드와이어(O’Dwyer) 골롬반회 총장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는 춘천 도착 후의 첫인상으로 희망찬 앞날에 대한 기대감이 잘 드러나 있다.

 

(강원도) 지방의 중심지인 춘천은 약 2만 명의 인구를 가진 적당한 크기의 소도시입니다. … 라리보 주교님(당시의 경성교구장 - 필자 주)은 이곳 교회의 성장을 예견하고 좋은 부지를 구입해 놓으셨습니다.…우리 숙소는 아담한 한국식 초가집이고 브렌난 신부와 저는 그곳에서 한국인 신부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신자 수는 300명이고 교리 수강생이 100명이 넘습니다. 춘천 주변에 있는 모든 마을에서 교회는 잘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도착한 다음 날 20리(6마일) 떨어져 있는 한 교회를 보러 갔습니다. 그곳에는 천주교인 200명이 있는데 많은 이들이 주일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6마일을 걸어옵니다. …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강원도는 회심에 있어서 제2의 한양(퀸란 신부가 그전에 사목했던 중국 교구 - 필자 주)이 될 것입니다. 저는 아직 이곳의 사람들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라리보 주교님은 그들을 높이 평가하고 있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순교자의 후손입니다.6)

 

1939년 4월 강원도 지역은 경성대목구에서 분리되어 춘천지목구가 되었다. 골롬반회 소속의 광주지목구장 맥폴린(Owen McPolin, 林) 신부가 초대 춘천지목구장을 겸직하다가, 1940년 12월 8일 퀸란 신부가 제2대 지목구장이 되었다. 책임을 맡기 전 춘천에 거주하던 퀸란 신부는 적절한 지휘권을 행사할 새 지목구장이 빨리 임명되기를 바라면서도 자신은 안 되기를 바라는 두려운 심정,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강원도에서 일하는 것이 진정으로 행복하다는 입장을 고백하기도 하였다.7) 다른 서한에서도 퀸란 신부는 일하는 것에서 오는 행복을 언급한다. “저는 매우 바쁘지만 행복합니다. 모든 동료가 그렇게 느끼리라 생각합니다.”8)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일하면서 행복한 사나이, 퀸란은 마침내 1940년 12월 지목구장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알리는 총장 신부의 전보를 받고 그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내심 두려워하던 그 직분을 순명으로 받아들인다. “그 직분을 위해 제가 최고의 적임자가 아님을, 심지어 좋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음을 하늘이 아십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저에 대한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는 제 단점을 채우시는 그분의 자비에 의지하는 법을 압니다.”9) 당시 퀸란 지목구장의 책임하에 11개 본당(춘천, 홍천, 횡성, 원주, 용소막, 대화, 강릉, 양양, 풍수원, 평강, 이천)이 맡겨졌고, 9,000여 명의 신자가 있었다.

 

 

도전과 시련을 넘어서

 

퀸란 신부가 춘천지목구장이 된 지 1년이 지났을 때 환란이 시작되었다. 중국을 침략한 일본이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공격하여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독일,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고 제2차 세계대전에 가담하였다. 이때 아일랜드 등 외국 신부들은 적성국(敵性國) 국민으로 분류되어, 강원도 춘천지목구 내에서는 지목구장인 퀸란 신부를 포함해서 14명의 아일랜드, 호주, 뉴질랜드, 미국 골롬반 사제들과 한국인 사제 김학용(金學用, 시몬)이 감옥에 갇혔다.10) 1942년 1월 교황청은 퀸란 신부가 연금된 상태에서 춘천지목구장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었기에, 경성대목구장에 임명된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대목구장에게 춘천지목구장 서리를 겸임토록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교황청은 퀸란 신부를 다시 춘천지목구장(제4대 지목구장)으로 임명하였다.11) 이때에도 퀸란 신부는 지목구장 직을 사양하면서 다른 신부를 추천하는 제안을 총장에게 제시하였다.

 

교회는 언제나 가장 좋은 사람을 가져야 마땅합니다. 진정으로 말씀드리건대 저는 춘천을 위해 가장 좋은 지도자가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패트릭 브렌난이 춘천에 이상적인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째, 미군과 그 장교들이 (미국 국적을 가진) 그에게 더 호의적일 것입니다. 둘째, 그는 학식과 성덕에 있어서 좋은 자질을 지니고 있고, 셋째, 사제들을 통솔하고 지도하는 재능을 갖춘 듯싶습니다.12)

 

몇 해가 지난 1948년 12월 편지에 보면, 강원도 춘천이 곧 대목구로 격상되리라는 가능성이 예측됨에 따라 퀸란 신부의 부담감은 가중되었던 듯하다.

 

제가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대목구장의 평생의 짐과 제가 부응할 수 없는 위엄을 갖추는 일입니다.…저는 제가 여기서 대목구장에 적임자가 아님을 확신합니다. 지위에서 물러나는 것은 저에게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저는 적합하지 않기에 책임지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 짐이 걱정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이들이 그 일을 더 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13)

 

해방 공간의 시기는 총체적으로 극심한 혼란의 소용돌이였기 때문에 사목을 위하여 특별한 노력이 필요했다. 퀸란 신부는 기금 마련을 위해 골롬반 본부에 끊임없이 요청하여 도움을 받아야 했다. 한편 이 시기에 교회를 찾는 사람이 증가하여 1949년에는 4개의 본당이 새로 설립되었다.14) 1950년 한국전쟁으로 춘천지목구는 큰 아픔을 겪어야 했다. 몇몇 골롬반 신부들은 총살당했으며, 퀸란 신부를 비롯하여 다른 두 골롬반 신부들은 체포되었다. 체포되기 전 6월 26일 오후에 미 군사고문단 하지(J.R. Hodge) 소령이 퀸란 신부에게 와서 피난갈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퀸란 신부는 “우리는 이곳에 머물겠습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신자들이 있는 이곳입니다.”라고 거절하였다.15) 체포된 퀸란 신부는 북한군에 의해 포로 수용소로 끌려다니며 갖은 수난을 겪은 후, 1953년 4월 중강진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본국 아일랜드로 생환하였다(이 시기, 이른바 ‘죽음의 행진’ 시기에 대해서는 김정현 특임연구원이 『교회와 역사』 7~8월호에서 자세히 다루게 될 것입니다. - 필자 주).

 

 

다시 한국으로

 

마침내 춘천지목구장 퀸란 신부는 1954년 4월 23일 한국에 도착한다. 이미 1953년 10월 5일 교황 비오 12세는 그를 주한 교황사절 서리로도 임명하였다. 교황사절 임무가 끝나던 1957년 12월까지 그는 주로 서울 교황사절관에 머물며 한국교회 전체를 위해 일하는 가운데 틈틈이 강원도를 돌보았다. 강원도의 전반적 업무는 직무대행 오(吳) 후베르토(Hubert J. Hayward) 신부를 통해 처리하였다. 퀸란 신부는 교황사절 서리 직무보다는 춘천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것 같다.

 

사제들과 저는 춘천에, 여러 일들을 현장에서 보고 결정을 내릴 거주자 지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1년에 두 번 강원도를 돌아보는데 그것으로 마음에 차지 않습니다. 한국 우체국은 매우 느리고, 문제가 있을 때마다 사절 대리가 서울로 뛰어 올라올 수도 없는 데다가 그는 혼자서 결정을 내리기를 꺼립니다. 만약 바티칸이 원하여 이곳에 새로운 교황사절 서리를 임명한다면 저는 강원도의 거주자 지목으로 기쁘게 돌아갈 것입니다. 체면은 제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서울에 너무 많이 머무름으로써 춘천에 소홀히 하는 듯이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제가 춘천에 자주 가면 여기 일이 어려워지고 다른 이들은 제가 그저 춘천만을 위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바티칸이 제가 아는 대로 최선을 다하기를 바라는 것을 기꺼이 할 것입니다만, 제가 더 좋아하는 것은 춘천입니다.16)

 

이 시기 퀸란 신부는 한국전쟁 이후 강원 지역의 열악한 의료 현실17)을 보면서 의료 선교 사업에 관심을 기울였다. 1955년 8월 편지에 보면, 그는 이미 의료 활동을 위해 골롬반회 수녀들을 초청하여 진료소와 거처를 마련하고 일할 수녀들이 한국에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사 수녀와 간호사 수녀 두 명이 그해 11월 춘천에 와서 환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고, 1956년 10월 3일 성 골롬반 의원이 정식으로 개원하였다.) 동시에 그는 한국에서 병원 선교를 열망하는 하느님의 성 요한 수도회 수사들에 관심을 표명하기도 하였다.18)

 

교황사절 서리와 춘천지목구장을 겸하고 있던 퀸란 신부의 격에 맞추어, 교황청은 퀸란 신부가 한국으로 귀환한 이듬해인 1955년 9월 20일 춘천을 대목구로 승격시킨다.19) 그리고 퀸란 신부는 포르노스 마조레(Fornos Maggiore) 명의(名儀) 주교로 대목구장에 임명된다.20) 지칠 줄 모르는 퀸란 주교의 사목적 열정과 노력 그리고 그를 통한 아일랜드와 미국, 호주, 뉴질랜드 은인들의 공덕에 힘입어 1955년 이후 춘천대목구는 큰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1952년도 신자 수는 8,000명이었으나, 1959년에는 31,031명이 되었다. 복음화를 위한 사도직의 성공은 다른 한편으로는 더 많은 사제(1956~1960년 사이에 26명의 젊은 골롬반 신부들이 연이어 들어왔다.)와 도울 인력, 더 많은 성당 건물과 공소 건물, 교리실의 필요를 의미했고, 이러한 것의 공급이 퀸란 주교를 통해 이루어졌기에 가능한 확장이었다.21)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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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골롬반 문서』 24, “Bishop Thomas Quinlan and the Growth of Roman Catholicism in Korea,” 24-1.

 

2) 골롬반 외방선교회를 창설(1916년)한 갤빈 신부와 블로윅 신부가 첫 선교지로 염두에 두었던 곳이 중국이었다. 준비 과정을 거친 후 마침내 1920년 3월 20일 퀸란 신부를 포함하는 골롬반 선교사 첫 그룹 16명이 아일랜드를 떠나 중국으로 향하였다.

 

3) 여진천 신부, 「구 토마스(Thomas F. Quinlan) 주교의 사목활동」, 『구 토마스, 박 토마스 주교의 사목활동』, 주교좌 죽림동 예수 성심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 교회사연구소 학술 심포지엄 자료집, 2020년 6월, 8쪽.

 

4) 오기백(Donal O’Keeffe, S.S.C.) 신부, 『한국 선교 60년』,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한국 지부, 1993, 9~10쪽.

 

5) 여진천 신부, 「구 토마스 주교의 사목활동」, 9쪽.

 

6) 『골롬반 문서』 5, 퀸란 신부가 오드와이어 총장 신부에게 보낸 1938년 11월 14일 자 서한, 5-80~5-83.

 

7) 『골롬반 문서』 5, 퀸란 신부가 오드와이어 총장 신부에게 보낸 1939년 11월 7일 자 서한, 5-107~108 참조.

 

8) 『골롬반 문서』 5, 퀸란 신부가 오드와이어 총장 신부에게 보낸 1940년 3월 14일 자 서한, 5-116.

 

9) 『골롬반 문서』 6, 퀸란 신부가 오드와이어 총장 신부에게 보낸 1940년 12월 8일 자 서한, 6-26.

 

10) 1942년 3월 아일랜드의 중립국 지위가 인정됨에 따라 골롬반 신부들은 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춘천과 홍천, 횡성 본당에 분산되어 연금 상태로 머물렀고, 사목을 비롯한 외적 활동이 일절 금지되었다. 아일랜드 외의 외국인 사제들, 곧 미국, 호주, 뉴질랜드 신부들은 강제 추방되었다(『죽림동 예수 성심 주교좌 본당 100년사』, 천주교 춘천교구 죽림동 주교좌 본당, 2020, 185쪽).

 

11) 『경향잡지』 943호(1942년 2월호), 11쪽 ; 979호(1946년 10월호), 42쪽 ; 여진천, 「구 토마스 주교의 사목활동」, 12쪽.

 

12) 『골롬반 문서』 6, 퀸란 신부가 오드와이어 총장 신부에게 보낸 1945년 9월 10일 자 서한, 6-53.

 

13) 『골롬반 문서』 6, 퀸란 신부가 오드와이어 전 총장 신부에게 보낸 1948년 12월 29일 자 서한, 6-114.

 

14) 『죽림동 예수 성심 주교좌 본당 100년사(1920~2020)』, 천주교 춘천교구 죽림동 주교좌 본당, 2020, 189쪽.

 

15) 여진천 신부, 「구 토마스 주교의 사목활동」, 13쪽.

 

16) 『골롬반 문서』 5, 퀸란 신부가 코널리(T. Connolly) 총장 신부에게 보낸 1955년 5월 23일 자 서한, 5-20.

 

17) “한국전쟁의 여파로 춘천 지역은 빈약한 의료 시설이 대부분 파괴되거나 제구실을 할 수 없었고, 1954년 당시 병원은 1개 시 10개 군에 5개의 도립 병원과 광산 병원이 있었다.” 여진천 신부, 「구 토마스 주교의 사목활동」 64.

 

18) 『골롬반 문서』 5, 퀸란 신부가 코널리 총장 신부에게 보낸 1955년 8월 18일 자 서한, 5-34 ; 코널리 총장 신부가 퀸란 신부에게 보낸 1955년 8월 5일 자 서한, 5-30~31.

 

19) 『골롬반 외방선교회가 한국에서 책임을 맡은 광주 지역과 춘천 지역 중에, 당시 교세가 더 강했던 곳은 광주 지역이었지만 춘천이 먼저 대목구로 승격하였다. 광주는 1957년 1월 21일에 대목구가 된다.

 

20) 『골롬반 문서』 5, 퀸란 신부가 코널리 총장 신부에게 보낸 1955년 10월 5일 자 서한, 5-46.

 

21) 『춘천교구 50년사』, 천주교 춘천교구, 1989, 36~38쪽.

 

[교회와 역사, 2023년 4월호, 전경미 체칠리아(한국교회사연구소 특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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