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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성미술ㅣ교회건축

춘천교구의 등록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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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8-11 ㅣ No.559

춘천교구의 등록문화재 (1)

 

 

근대문화유산인 춘천교구의 등록문화재 소개에 앞서

 

“지상에 세워져 있는 교회 건물은 그곳에 그리스도 공동체가 존재함을 증거 해야 하며, 이 세상 백성들 한복판 깊숙한 곳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고 종말론적 시야를 펼치며 사는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존재를 분명히 드러내는 모습이어야 한다.” ( 『성당 건축과 전례』 中)

 

한국 근대건축사와 서양식 건축물의 보존과 보수에 관해 많은 연구를 해온 건축가 김정신 교수는,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문화재 중에서 종교건축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에 그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가톨릭교회 근대건축물의 등록문화재 등록과 그 보존을 강조한 바 있다.

 

인류가 가지고 있는 문화유산 중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건축물, 특히 종교에 관련된 건축물들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종교 건축물들은 고대부터 현재까지 인류문화의 유산으로 남아 당시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면서 종교의 수용과 발전, 그에 따른 의식의 변화 과정 등을 살펴보는데 큰 역할을 해 왔다. 종교 건축물은 종교의 전례 행위를 담아내는 공간으로서의 기능 뿐 아니라, 건축물 그 자체만으로도 ‘선교’의 역할을 담당한다고 할 만큼 강한 상징성을 갖고 있는데 이는 서양건축의 역사를 통해 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근대문화유산의 보호제도인 문화재 등록 제도는 역사적으로 보면 근·현대시기에 시작된 것으로 ‘개화기’ 를 기점으로 하여 50년 이전까지의 기간에 건립되고, 역사성이 높거나 각 건축양식의 특징이 뚜렷한 건축물들이 주요 대상이 된다. 여기에는 ‘근대건축’ 뿐만 아니라 서양 건축의 중세, 고전양식, 절충식 등 다양한 건축양식을 모두 포함하게 된다.

 

우리 춘천교구는 교구 역사가 깊이 배어있고 그 역사의 의미만큼 소중한 가치를 지닌 여러 등록문화재를 신앙문화유산으로 가지고 있다. 앞서 언급한 기준에 의거해 주교좌 죽림동 성당(등록문화재 54호), 소양로 성당(등록문화재 제161호), 홍천 성당(등록문화재 162호), (구)포천 성 가브리엘 성당(등록문화재 271호), 임당동 성당(등록문화재 457호) 등이 국가에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으며, 60여 년간 춘천교구 신앙 교육의 요람이었던 교육원 건물도 현재 등록문화재 등재를 신청해 놓은 상태이다.

 

신앙 선조들이 피와 땀, 그들의 정신으로 신앙의 토대를 놓아준 것에 감사드리며, 앞으로 6주에 걸쳐 교구의 등록문화재에 대한 소개 글을 연재하고자 한다. [2018년 8월 12일 연중 제19주일, 춘천교구 교회사연구소]

 

 

춘천교구의 등록문화재 (2) 춘천교구 주교좌 죽림동 성당(등록문화재 제54호)

 

 

죽림동 주교좌 성당의 전신(前身)은 ‘곰실본당’이다. 곰실본당은 1920년 9월 22일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된 공동체이며, 활발한 전교 활동을 하기 위하여 현재의 자리로 본당을 이전하였다. 곰실에서의 전교가 국지적이고 한정적이었다면 죽림동에서의 사목활동은 춘천의 전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본격적인 전교의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죽림동 성당은 1949년 4월 5일 신축 기공식을 하였는데, 거의 완공단계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성당의 한쪽 벽이 무너지고 사제관과 부속건물이 대파되었다. 전란 중에도 복구 작업이 진행되어 1956년 6월 8일 죽림동 성당의 주보 축일인 예수 성심 대축일에 새로운 모습을 갖춘 주교좌 성당의 축성식이 거행되었다. 죽림동 주교좌 성당은, 우리나라 1950년대 석조 성당 건축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 인정되어 2003년 6월 25일 등록문화재 제54호로 등록되었다.

 

성당의 뒷마당에는 춘천교구의 순교자 묘역 성지가 있다. 지금은 회랑이 되어 있는 자리에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수녀회 자리와 주차장 자리에 있었던 성 골롬반 병원은 춘천지역의 의료봉사가 활발히 이루어졌던 장소로, 교우들뿐 아니라 시민들도 고마운 마음으로 기억하는 장소이다. 이는 요즘 공익방송으로 듣는 소록도의 천사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또 다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주교좌 죽림동 성당

 

· 주소 : 24355 강원도 춘천시 약사고개길 21

· 전화번호 : 033-254-2631

· 홈페이지 : http://cafe.daum.net/uf99

 

[2018년 8월 19일 연중 제20주일 춘천주보 2면, 춘천교구 교회사연구소]

 

 

춘천교구의 등록문화재 (3) 살신성인 기념 소양로 성당(등록문화재 제161호)

 

 

소양로 성 파트리치오 성당은 1950년 1월 5일 죽림동에서 분가되어 설립되었으며, 한국전쟁에서 순교한 고 안토니오 신부를 기념하는 성당이다. 고 안토니오 신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성체를 옮겨 놓고 신자들에게도 피신하라고 권고하며 사태를 지켜보았다. 6월 27일 죽림동성당으로 이동하던 중에 공산군에게 잡혀 심문을 받고 총살당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함께 하였던 김 가브리엘을 살리면서 자신은 죽음을 맞이하였다. 본당 설립 당시부터 계획하고 있던 성당 신축은 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956년 3월 착공되었고, 그해 9월 3일 낙성식을 하였다. 당시 구인란(具仁蘭, Thomas F. Quinlan) 토마스 교구장은 6·25 때 순교한 사제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 곳(소양로·성내동·묵호)에 성당 신축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소양로 성당이 첫 번째로 건축되었다.

 

춘천의 진산인 봉의산(301.5m) 자락, 춘천 시내와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던 빼어난 전망을 가진 소양로 성당이지만, 당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전쟁 직후라 신자들은 노력봉사로 건축기금 봉헌을 대신했다. 소매를 걷고 일손을 거들던 신자들은 성당이 형태를 갖춰갈수록 고개를 갸웃거렸다. “널찍한 터 놔두고 왜 성당을 반쪽만 짓는데….” “뾰족 종탑은 왜 안 세워. 종탑 없는 성당이 세상에 어디 있어.” 신자들이 수군거릴 만도 했다. 본당 설립 6년 만에 성당을 짓는다기에 예배당처럼 뾰족탑 높이 솟은 멋진 하느님 집을 기대했는데 형태가 이상야릇하니 말이다. 성당 건축을 맡은 제임스 버클리(James Buckley) 신부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반원형 평면 양식을 택했다. 위에서 보면 원을 반 뚝 잘라 놓은 반달형이다. 내부는 제대를 중심으로 회중석이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있다. 한국 전쟁 직전에 완공된 죽림동성당을 비롯해 시내에서 봐온 교회 건물이 모두 직사각형에 종탑을 얹은 전통 고딕양식이니 ‘이상하게’ 생긴 성당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유럽에서도 1960년대 이후에 드물게 나타나고,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된 형태인데 그 이유는 이 성당을 지은 버클리 신부에게 있었다. 버클리 신부가 1953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선포된 성모성년 때 로마 성지순례를 하는 중에, 현 소양로 성당과 비슷한 성당에서 기도를 바치며 선교지에 돌아가 성당 지을 기회가 생기면 꼭 이와 같은 성당을 짓겠다고 스스로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소양로 성당은 그 역사성과 건축학적 의미가 높이 평가되어 2005년 4월 15일 등록문화재 제161호로 지정되었다.

 

소양로 성 파트리치오 성당

· 주소: 24249 강원도 춘천시 모수물길 22번길 26

· 전화번호: 033-255-2117

·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csoyangro

 

[2018년 8월 26일 연중 제21주일 춘천주보 2면, 춘천교구 교회사연구소]

 

 

춘천교구의 등록문화재 (4) 홍천 원죄 없으신 잉태 성당(등록문화재 제162호)

 

 

홍천 성당은 1923년 6월 21일 춘천 고은리본당 관할 공소였던 송정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며 설립되었다. 본당으로 승격된 1923~1924년의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송정본당은 인제군 관대리와 부평리 및 홍천군을 포함하여 1개 본당 8개 공소를 관할하며 총 652명의 신자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송정리에 10여 칸의 한옥을 지어 교세를 확장하던 송정본당은 1936년에 현재의 성당이 있는 홍천읍 희망리로 이전하였고 본당의 명칭도 송정본당에서 홍천본당으로 변경하였다.

 

홍천 성당은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전국에서 전교활동을 하던 아일랜드 신부들이 감금되던 공간이기도 하였다. 한국 전쟁이 끝날 즈음 9대 주임으로 부임한 최동오(崔東五) 아타나시오 신부는 1953년 9월 전쟁으로 파괴된 목조 성당을 재건하였다. 이듬해부터는 여러 가지 재정적 · 물질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현 성당의 신축 공사를 시작하였고, 미군 공병대의 도움과 최동오 신부와 조선희 필립보(Philip J. Crosbie) 신부 그리고 신자들의 헌신으로 건립이 진행되었다.

 

홍천 성당은 삼마치 고개에서 채석해 온 돌에 홈을 파서 끼워 넣는 식으로 외벽을 축조한 것이 특징이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석조 건물 성당은 1955년 4월에 준공되었다. 특히 성당 바닥 나왕마루는 50년 세월이 흘렀는데도 멀쩡해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군데군데 삐꺽거리는 소리가 나기는 해도 비교적 상태가 양호하다. 그 비결은 마루 아래 공간이 유난히 넓은 데다, 습기를 방지하려고 그 안에 새끼줄 타래를 깔아 놓은 데 있다.

 

홍천 성당은 1950년대 석조 성당의 전형을 보여주는 건축물로 보존 및 연구 가치가 높아 2005년 4월 15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62호로 지정되었다. 그 후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받아 한 차례 보수작업을 벌였다. 정면과 측면 강화유리 문을 동판으로 교체하고, 창문에 부착된 스티커도 떼어 내고 스테인드글라스를 입혔다. 그대로 놔뒀던 제단 벽면 바로 아래 제대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사제가 벽을 바라보고 미사를 봉헌한 제대 - 를 철거하고 제단도 석조물로 새로 꾸몄다.

 

홍천 원죄 없으신 잉태 성당

· 주소: 25123 강원도 홍천군 홍천읍 마지기로 54

· 전화번호: 033-433-1026

· 홈페이지: http://cafe.daum.net/hccatholic

 

[2018년 9월 2일 연중 제22주일 춘천주보 2면, 춘천교구 교회사연구소]

 

 

춘천교구의 등록문화재 (5) (구)포천 성 가브리엘 성당(등록문화재 제271호)

 

 

서울대교구 덕정리 본당으로부터 분가한 포천 성당은 1956년 2월 21일 가브리엘 대천사를 주보로 하여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포천시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왕방산 자락에 위치한 포천 성당은 한국전쟁 후 군부대의 도움으로 건축되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6군단장 이한림 가브리엘은 야전공병단 소속 126공병대대 부대장의 설계와 지휘로 건축을 시작하였고, 1955년 7월부터 11월말까지 5개월간의 공사로 고딕 양식이 가미된 장방형 평면의 강당형 석조건물을 완공하였다. 소요된 돌은 덕정 방면에서 운반해 왔으며 돌을 쌓는 기술자는 서울에서 고용하였다.

 

포천 성당은 건물 중앙에 종탑을 두고 건축물을 외부에서 지탱해주는 버트레스(buttress) 장치를 한 것이 특징이다. 조적조의 포인티드 아치(pointed arch), 화강석의 조적구법(組積構法, 벽돌 등을 쌓아 올리는 건축 방법), 단일(單一) 홀(hall)의 강당형 평면 구성 등은 6.25 전쟁 전후로 건축된 석조 건축물의 전형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1990년 7월 11일 한 취객의 방화로 성당이 전소되었다. 이 방화로 벽체만 남긴 채 지붕과 제대, 성물이 모두 소실되어 성당을 헐고 새로 짓자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군의 원조를 받거나 군이 직접 지은 종교 건축물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이 포천 성당이었고, 비록 성당 안의 구조물들은 모두 소실되었지만 서쪽 벽의 감실과 신부들이 감실을 오르내리던 계단 등이 잘 남아있으며, 전쟁 이후 건축된 석조 건축물의 전형(종탑과 뾰족한 아치)을 보여준다는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포천 성당은 전소된 상태에서도 2006년 등록문화재 제271호로 지정되었으며, 여러 차례 복원작업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포천 성가정 성당

· 주소: 11141 경기도 포천시 왕방로 191

· 전화번호: 031-534-0057

· 홈페이지: http://www.pccc.or.kr

 

[2018년 9월 9일 연중 제23주일 춘천주보 2면, 춘천교구 교회사연구소]

 

 

춘천교구의 등록문화재 (6) 임당동 성 골롬바노 성당(등록문화재 제457호)

 

 

1866년 신자들에 대한 박해는 더욱 치열해져, 많은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영동지방까지 넘어와 교우촌을 이루고 토기업으로 근근히 생계를 이었다(경향잡지 1921.9.15.). 1868년 심능석 스테파노가 강릉 굴아위에서 잡혀 서울로 끌려가 순교하였는데, 강릉에는 이를 기념하는 심 스테파노 순례길(명주군 왕릉에서 시작하여 강릉 위촌리를 지나 송양초교까지 총 11km)이 있다. 심 스테파노는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안건으로 한국천주교회가 추진 중인 시복시성 대상자 중에 한 명이다.

 

임당동 성당은 1921년 7월 양양본당 보좌신부였던 이철연 프란치스코 신부가 금광리 교우촌에 머물며 사목을 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1923년 주문진, 1931년 강릉읍으로 본당을 이전하였다가, 1934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고, 처음에는 강릉본당으로 불리다가 1974년 11월 임당동본당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55년 준공된 임당동 성당은, 1950년대 강원지역에 동일한 기법의 고딕양식으로 건축된 성당(춘천 죽림동 주교좌 성당 · 삼척 성내동 성당, 동해 북평 성당 · 묵호 성당) 중에서 가장 대표적 건축 사례로 평가되는 성당이다.

 

임당동 성당은 외관의 뾰족한 종탑과 지붕양식, 첨두형 아치창호와 장식, 외벽에서 부축벽과 코니스(cornice, 건축 벽면을 보호하거나 처마를 장식하기 위해 벽면에 수평이 되도록 하여 띠 모양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부분)의 강조 등 고딕 성당의 건축 기법을 정교하고 세련되게 구사한 성당으로 평가 받는다.

 

내부도 벽체와 천장 접합부의 몰딩 장식, 제단부 주위 몰딩 장식, 고해실 상부 벽면 장식, 2층 신자석 발코니 평면 장식 등이 매우 정교하고 풍요롭게 구사되었는데, 이와 같은 기법은 성당 건축에서 흔치 않은 사례이다. 임당동 성당은 내부의 바닥과 창호를 보수하고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하는 등 보수가 이루어지기는 하였으나, 건축 당시의 외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0년 등록문화재 제457호로 지정되었다.

 

임당동 성 골롬바노 성당

· 주소: 25533 강원도 강릉시 임영로 148

· 전화번호: 033-642-0700(심 스테파노 길 순례 문의)

· 홈페이지: http://cafe.daum.net/iddc

 

[2018년 9월 16일 연중 제24주일 춘천주보 2면, 춘천교구 교회사연구소]

 

 

춘천교구의 등록문화재 (7) 신앙교육의 요람 천주교 춘천교구 교육원

 

 

천주교 춘천교구 신앙교육의 요람인 교육원은 1959년 강원도 지역을 담당하던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의해 지어졌다. 실제 건축 과정에는 주교관 건축을 담당했던 중국인 기술자 가(賈)씨가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교육원은 강원도 지역 선교를 담당할 수녀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수련소 지부로 건축되어 수녀원 수련소로 운영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춘천에 오래 거주한 이들은 이 건물 앞 도로를 ‘수녀원 골목’ 또는 ‘수녀원 길’이라 부른다.

 

구인란(Thomas F. Quinlan, SSC, 1896-1970) 주교는 교구의 재정이 그리 넉넉하지 않아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1959년 이 건물을 짓고, - 평양 서포에 본부 건물을 두고 선교하다가 북한에 의해 강제로 본부 건물을 빼앗기고 1950년 5월 임시 해산하는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를 춘천으로 초빙하기 위하여 수녀 2명(강 베드로, 최 후밀리따스)을 초대하여 1969년까지 지원자와 청원자들을 위한 수련소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1948년 대구교구장직을 사임하고 춘천교구 양덕원본당 주임신부로 사목하면서 교회사 연구에 몰두하였던 주재용(朱在用, 바오로, 1894-1975)신부가 1959년 구 주교의 요청으로 수련소 지도신부로 부임하였다.

 

1969년부터 1976년까지 예수의 까리타스 수녀회에 의해 여대생 기숙사로 운영되었으며, 1977년부터 기숙사를 폐쇄하고 가톨릭 교육원으로 개칭하였다. 이곳은 신앙교육인 꾸르실료 교육은 물론, 공동체 묵상회(MBW), 가톨릭 농민회, 야간학교인 ‘청솔학원’ 운영과 사제피정 및 연수, 대학생 연합회 활동의 중심지였다. 1979년 3월 박토마(Thomas Stewart, SSC, 1966-1994) 주교에 의해 착한 목자 수녀회가 입주하여 1985년 11월까지 미혼모 보호소인 ‘마리아의 집’을 운영하였다. 이후 일부 숙소를 가톨릭 대학생 기숙사로 사용하며 계속 신앙교육의 장소(카나혼인 강좌, 평신도 신앙학교, 성모신심 세미나, 레지오 교육, 성령기도회, 교리교사 양성학교, 신앙인 사회학교, 구반장 피정 및 교육, 가톨릭 서원, 예비신학생 및 주일학교 교육 및 피정 등)로 사용되었으며 비신자 이웃주민들과 함께 하는 ‘낙엽축제’와 춘천교구 사회복지회의 자선 바자회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1987년에 교육원 주방과 숙소, 그리고 성당 제대 뒷면 및 천정수리를 했고, 1992년에는 북쪽 창문을 교체하였다. 2003년 10월 말부터 2004년 2월 중순까지는 지붕을 기와에서 동판으로 교체하고, 2층의 바닥을 목구조에서 철골구조로 변경하였으며, 성당과 강의실 인테리어와 숙소, 사무실 등의 마감 교체를 하는 등 대대적인 중창공사를 하였다.

 

2018년 8월 여성 꾸르실료 81차 교육을 이곳에서 시행하였는데, 교구에서 행한 마지막 교육이었다. 9월 가톨릭 회관이 준공되면 교육원에서 행해졌던 교육의 역할은 가톨릭 회관으로 이양된다. 60년 전 외국의 많은 은인들의 도움으로 건축된 현 교육원을 대체할 교육의 장을 춘천교구의 많은 교우들의 협조로 공들여 짓게 되었다. 부디 새로운 교육의 장에서 가톨릭 신앙의 진수(眞髓)가 교육되어 선조로부터 전수된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여 현실의 삶 안에서 각자의 복음화를 통해 세상의 복음화에 밑거름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춘천교구는 교육원이 지니고 있는 건축학적 의미(춘천시내에 1950년대 건축되어 외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는 건물로 보존가치가 충분하다)뿐만 아니라, 그 안에 깃들여 있는 교구의 역사성 보존을 위해 2018년 2월 문화재청에 등록문화재 지정 신청을 하였으며 현재 심의 과정에 있다. 기도와 신앙교육의 공간으로 춘천교구와 역사를 같이 한 이곳이 교구 역사 전시실(박물관)과 사료실 및 교회 유물의 수장고로 활용됨으로써 다시금 신앙선조들의 삶을 기억하고, 그들의 삶을 닮아갈 수 있는 교육의 장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갖는다.

 

천주교 춘천교구 교육원

· 강원도 춘천시 청운길 41(효자동 397-1)

 

[2018년 9월 23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춘천주보 2 · 5면, 춘천교구 교회사연구소]

 

 

춘천교구의 등록문화재 (8) 천주교 춘천교구 주교관*(강원도 춘천시 효자 2동 400번지)

 

 

* 천주교 춘천교구 주교관은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지는 않았으나, 건물의 역사적인 가치를 고려하여 ‘춘천교구의 등록문화재’ 특집을 마무리하며 함께 소개합니다. 사회는 물론 교회 내에서도 많은 옛 건물이 구조적인 문제나 편의적인 문제로 해체당하고 없어지는 요즘, 문화재적 가치를 담고 있는 근대문화유산 격의 건물은 잘 보존하고 활용하였으면 하는 바람이 절실합니다. 1949년 가을에 시작하여 1950년 초에 지어졌던 죽림동 성당 뒤편의 옛 주교관이자 죽림동 사제관의 모습을 사진으로만 볼 수 있다는 것이 참 아쉽습니다.

 

천주교 춘천교구 주교관은 1939년부터 강원도 지역을 담당하던 아일란드계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의해 1958년에 건립되었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는 이 외에도 춘천시내에 죽림동 주교좌 성당과 소양로 성당 등 괄목할 만한 건축물들을 세웠다. 실제 건축 과정에는 중국인 기술자 가(賈)씨가 벽돌을 구워내는 등 주역을 맡았고 목공 일은 김태문 보나도가 도맡았다.

 

이 주교관은 춘천 주교의 거처이면서 2004년 까지는 성 골롬반회 선교사들이 교구 일을 돕거나 기거하는 거점과 교구청의 역할을 하였다. 이 집에서 구인란(Thomas F. Quinlan, SSC, 1955-1966) 주교와 박토마(Thomas Stewart, SSC, 1966-1994) 주교가 지냈고, 한국인으로 장익(張益, 십자가 요한, 1994-2009) 주교가 지낸 데 이어 현재는 김운회(金雲會, 루카, 2010-현재) 주교가 지내고 있다. 한국인 주교 때부터는 외국인 선교회의 거점 기능은 그치고 주로 주교관으로 쓰이고 있다.

 

주교관은 지상 2층 지하 1층 구조로서 건축면적은 282.25㎡이며 연면적은 729.76㎡이다. 현관에 들어서면 1층 왼쪽으로는 응접실, 식당, 주방, 화장실 · 샤워실이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 1969년부터 1994년까지 효자동 본당 사무실과 사제관으로 쓰이던 - 접수실과 사무실 그리고 두 곳의 숙소 겸 집무실이 있다. 2층으로 오르면 경당과 제의실, 화장실·샤워실, 손님방과 비서실, 작은 방 둘, 주교의 서재와 침실, 넓은 방 하나와 지하에는 기관실, 온돌방, 문서고, 창고, 기관실 수납공간 등이 있다.

 

주교관 건물의 노후에 대비하여 1995년부터 배전과 배관을 비롯 창호와 기관실 설비 교체 등이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다가, 2004년 3월에 새로운 교구청이 건립되자 그 해 여름에는 뒤이어, 종래의 외양과 내부 구조는 그대로 유지한 채, 현관문 · 방문 · 조명 교체, 단열과 내장 쇄신, 지붕 수리 등 전폭적인 개수(改修)를 하였다. 이 모든 과정에서 1966년부터 이곳 모든 시설의 관리는 줄곧 최시권 베드로가 주관해왔다.

 

이 주교관 건물은 당시의 전형적인 외국인 선교회 거점 풍으로 지어졌으며, 유별나게 서향으로 세운 점은 햇빛이 아쉬운 아일랜드 풍습의 영향으로 보인다. 특히 6·25 후 심하게 파괴된 춘천지역에 세워져 지역 건축사적으로 그 보존가치가 충분한 지역의 근대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2018년 9월 30일 연중 제26주일 춘천주보 2면, 춘천교구 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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