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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기억하고 싶은 인물2: 토마스 퀸란의 빛 - 그의 복음에 대한 순수한 열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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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6-05 ㅣ No.1568

[기억하고 싶은 인물 · 2] 토마스 퀸란의 빛 : 그의 복음에 대한 순수한 열정 (2)

 

 

계속되는 의료 선교 활동

 

많은 사람들, 특히 가난하고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퀸란 주교는 참된 아버지 역할을 하였다. 앞서 언급했던 춘천 골롬반의원(1956년 개원)은 의료 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전쟁 직후의 상황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 되었다. 골롬반의원 외에도 퀸란 주교는 삼척(1962년 개원)과 강릉(1965년 개원) 두 곳에 의료 시설을 세웠다.1) 1961년에 작성된 퀸란 주교의 한 편지에는 앞으로 세워질 두 병원에 대한 구상이 드러나고 있다.

 

감사하게도 그 의료원은 이미 진행 중에 있습니다. 성탄 무렵에는 개원할 준비가 될 것입니다. 십만 달러 프로젝트인 이 의원은 삼척에 있습니다.…그 의원은 동해안의 사제들에게는 하나의 축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강릉에 또 하나의 의원을 지을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푸른 수녀들’(‘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수녀들’을 뜻함 ―필자 주)이 그 의원을 담당하기로 반 약속을 해 놓고 있습니다. 그것이 실현되면 동해안은 의료적으로 기틀이 잡히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2)

 

당시 삼척의 성 요셉의원, 강릉의 갈바리의원 설립은 춘천교구의 재정적 상황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퀸란 주교는 직접 나서서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편지와 문서3)를 통해, 때로는 해외 방문 기회를 이용해서 도움을 호소했다. 그리하여 미국, 영국, 아일랜드, 독일 등지의 후원자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다음 편지에서는 강릉 갈바리의원 설립 예산을 확보하려는 퀸란 주교의 노력과 의지가 생생하게 드러난다.

 

세 번째 의원을 위해서는 아직까지 그렇게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위해 아일랜드에서 2만 달러가량 모금했습니다. 보스턴에서부터 이곳(네브래스카)까지는 1만 달러를 모금했습니다. 이곳과 샌프란시스코 사이에서 제가 다시 같은 액수를 모금하기는 어려우리라고 봅니다. 저는 여전히 독일 주교들이 세 번째 의원을 위해 도움이 되리라고 희망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제가 적립금으로 다른 걸 갖게 될 때까지 그 계획을 연기해야 할 것입니다.4)

 

 

성심여대 설립을 위한 노력

 

퀸란 주교는 1960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최를 위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전 세계 2,200여 교구 가운데 중앙 위원으로 임명된 이들은 모두 74명(추기경 35명, 총대주교 4명, 대주교 25명, 주교 7명, 수도회 총장 3명)이었는데, 퀸란 주교는 바로 그중의 한 명으로 한국 대표로서 선교 분야를 위해 위촉을 받은 것이었다.5) 한편, 1962년 3월 교황 요한 23세는 한국에 교계제도를 설정하였고, 6월 29일 명동 성당에서 한국 교계제도 설정식이 거행되었다. 이로써 그때까지 존재하던 11개 대목구(서울, 평양, 함흥 춘천, 대전, 인천, 청주, 대구, 부산, 광주, 전주)는 정식 교구가 되었고, 3개의 관구(서울, 대구, 광주)가 생기게 되었다. 춘천교구에서는 퀸란 주교가 초대 교구장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교황의 위임 대리로서가 아니라 자기 고유의 권한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퀸란 주교는 교육 사업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가톨릭 학교를 설립하는 문제가 어려웠지만, 그는 국내외 학교를 운영하는 수도회를 알아보며 관련 수도회의 진출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1961년 퀸란 주교는 좋은 기회를 포착하였다. 1956년 한국에 진출한 성심 수녀회가 춘천에 여자대학(성심여자대학)을 설립하겠다고 동의해 온 것이다.6) 강원도로부터 4만 평의 땅을 기증받기로 하고 또 춘천교구에서 재정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퀸란 주교는 이 여자대학 설립을 위해서도 건축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직접 이리저리 모금 활동을 하며 아낌없는 협조를 기울였다.

 

여자대학교는 건설 중에 있습니다. 저는 수녀들이 학교 내에 거주하면서 내년 3월 학생들의 입학 준비를 위해 올 때인 11월에 이곳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저는 학교를 위해 제가 수녀들에게 약속했던 10만 달러를 다 기부하지 못했습니다. 5만 달러를 주었고, 9월에 2만 5천 달러를 더 주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잘 진행된다면, 11월까지 나머지를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7)

 

작년에 해외 포교성성은 춘천 여자대학을 위해 1년에 2만 5천 달러씩 분할로 10만 달러를 제게 약속했습니다. 저는 그 대학을 위한 저의 마지막 기여로서 올해 수녀들에게 10만 달러를 지불하는 것에 헌신해 왔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5만 달러를 지불했지만 그들은 지금 제게서 잔금을 받기 위해 조바심을 내고 있습니다. 제가 올해 건축을 시작할 수 없을 교회들을 위한 회계장부에는 거의 4만 달러(골롬반회 돈)가 있습니다. 지금 제가 이 금액을 빌려 수녀들에게 지불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실 수 있습니까? 저는 포교성성이 저에게 돈을 보내는 즉시 그리고 제가 다른 출처에서 조달할 수 있다면 더 일찍, 그 돈을 건축 기금으로 갚겠다고 엄숙히 약속합니다.8)

 

1963년 12월 본관 건물이 준공되었고 대학 설립 인가를 받았는데9) 바로 그전에 작성한 편지에서 퀸란 주교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여자대학은 그 첫 번째 건물이 거의 완공되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기부를 해야 할 유일한 건물입니다. 저는 그것을 위해 모두 17만 달러를 내었습니다.”10)

 

 

춘천교구 분할과 원주교구 설정

 

전후 복구 시기를 지나고 교구가 안정되면서 교우 수가 많이 늘게 되자, 퀸란 주교는 강원도 사목을 위해 춘천교구의 분할을 계획하게 되었다. 1963년 아일랜드 골롬반회 본부를 방문할 때 퀸란 주교는 총장 신부와의 면담을 통해 교구 분할에 관한 논의를 시작한다.11) 총장 신부는 당시의 면담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오늘 저녁에 퀸란 주교님과 면담하였습니다. 주교님은 당신께서 맡고 있는 … 교구의 가능성 있는 분할에 관해 내 입장을 물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한국인이 관리하도록 양도한다면 내가 아는 한 반대가 있으리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또한 그 문제는 우리 참사회에서 다룰 질문이 될 것이라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주교님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대로 편지를 써서 공식적인 의사를 밝히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주교님은 현재 당신의 교구에 있는 대부분의 한국인 신부들을 (새 교구로) 보낼 것을 궁리하고 있었습니다.12)

 

또한 총장 신부는 얼마 후에 본부에서 열린 참사회의 결과에 대해 모든 이들이 그 분할 계획에 대해 찬성하였음을 알린다.13 총장 신부의 애초 예상과는 달리, 한국인 성직자들이 주가 되어 관할하는 퀸란 주교의 분할 구상에 대한 참사회의 전적인 승인을 통보해 온 것이다. 퀸란 주교는 한국에 있는 골롬반회 신부들과 교황사절도 분할 계획에 찬성하고 있음을 알린다. “평의회는 교구 일부를 한국인 사제들에게 주는 것을 찬성하고 있습니다. 교황사절도 찬성합니다. 다만 그분은 일을 천천히 추진할 것을 충고했습니다. 그분은 골롬반 신부들 중 일부가 한동안 한국인 사제들을 도와주기를 기대할 것입니다.”14)

 

원주교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간 중인 1965년 3월 22일 공식적으로 설정되었다. 1965년 5월, 퀸란 주교는 분리되는 새 교구를 배려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원주에 관해서는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저는 원주의 한국인 주교가 될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지만, 그것을 마음대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꼭 들어맞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자립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저는 올해 말까지 새 교구의 교리교사들과 수녀들의 월급을 지불하려고 합니다. 그 후에는 (새 주교가) 그들을 부양해야 합니다. 호의의 표시로서 올해 동안 제가 그에게 한국인 사제들의 생활비를 넘겨주는 것을 허락해 주시기를 요청하고자 합니다. 그 후에는 그가 그들을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건물들과 가구, 의장품들은 모두 있는 그대로 남게 될 것입니다. 골롬반회 사제들은 떠날 때가 되면 그들의 개인 소지품만 가지고 갈 것입니다.15)

 

곧이어서 퀸란 주교는 5월 11일에 교황공사로부터, 교황청에서 지학순(池學淳) 다니엘 신부를 새 교구의 첫 번째 주교로 임명했다는 전갈을 받았다고 밝힌다.16 1965년 6월 29일에 거행된 지학순 주교의 서품식을 치르고 나서는, “그 교회와 원주를 위해 좋은 날이었습니다. 모두가, 이교도들까지도 ‘우리 사람’을 얻게 되어 기뻐했습니다. 좋으신 성모님은 그 교회를 책임지도록 나라의 자녀들을 제대로 투입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나라를 더욱 생기 있게 만들고 그저 ‘외국인 교회’일 뿐이라는 모든 의혹을 없애줍니다.”라는 소감을 피력하였다.17)

 

1965년 8월 1일 퀸란 주교가 골롬반회 총장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는 원주교구에 관한 보고를 하면서,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는 원로 주교에게 밀려오는 벅찬 감격과 감사 그리고 열정을 표현하고 있다.

 

새 교구는 총인구 75만 명에 가톨릭 인구가 1만 5천 명인 5개 군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교구에는 사제관을 갖춘 14개 본당이 있고, 8개 본당에는 작은 수녀원이 있습니다. 공소는 58개이고 그중 33개 공소에는 아담하고 멋진 경당이 있습니다. 삼척의 ‘성 요셉의원’도 새 교구에 속합니다. 요셉의원은 영혼들을 교회와 하느님께로 끌어들이는 하나의 자석이 될 것입니다. 골롬반 사제 10명과 한국인 사제 8명이 사람들을 복음화하는 일에 있어서 새 주교를 도울 것입니다.…친애하는 킬트 신부님, 당신은 수년간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줌으로써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느님을 따라서 당신은 새 교구가 생겨나도록 도왔습니다. 25년 전 교황청의 요청으로 골롬반회 신부들이 강원도를 복음화하기 위해 그곳을 떠맡았을 때 강원도에는 많은 것이 없었습니다. 3백만 인구 중에 가톨릭 신자 수는 9천 명이었고, 벽돌 성당 3개와 진흙과 욋가지로 만들어진 성당 6개가 있었으니, 그게 전부였습니다. 우리는 25년간 이루어진 발전에 대해 하느님과 당신에게 겸손하게 감사함을 느낍니다. 그간 우리는 두 번의 전쟁을 겪었고, 한 번의 전쟁에서는 많은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살해되거나 흩어졌습니다. 우리에게는 두 교구가 더 만들어질 수 있는 충분히 넓은 지역과 많은 이교도가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교황청이 강원도에 또 하나의 교구를 우리에게 주기 위해 은혜로이 설계할 수 있도록 당신이 계속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우리를 재촉합니다.”18)

 

 

하느님의 품으로

 

퀸란 주교는 1966년 일흔 살이 되던 해에 건강상의 이유로 교황청에 교구장 직분 사임을 청하였고, 이것이 수락되어 같은 해 2월 12일 교구장직을 사임했다. 1965년 7월에 총장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미 그가 사임을 결심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저는 올해나 내년에 교황청에 의해 짐을 덜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당신은 가능한 한 후계자들에 대한 조언을 요청받을 수도 있습니다. 물러나게 되면 저는 현장의 어느 구석에서 쓸모 있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면서 한동안 아마 이곳에 머물 것입니다.”19) 은퇴한 퀸란 주교는 효자동 주교관 옆에 자신이 세운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수련소에서 기거하였다. 거기서 “지내는 동안, 그의 방문 앞에는 헐벗고 불쌍한 남녀노소들이 그칠 사이 없이 드나들었는데, 그때마다 (퀸란) 주교는 갖가지 가능한 도움을 주었다.”20) 1968년에는 지병인 심장병의 악화로, 삼척 성내동 성당 내에 자신이 세우고 골롬반 외방선교 수녀회가 운영하는 성 요셉의원에 입원하였다. 그곳에서도 환자들을 위해 봉사하며 말년을 보냈다. 퀸란 주교의 요셉의원에서의 삶을 증언하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구 주교님은 자신을 위해서는 두 벌 옷도 갖기를 꺼리셨습니다. 남을 돕고 기쁘게 해주는 일밖에 모르셨습니다. 가난한 이, 헐벗은 이를 보시면, 있는 대로 다 주시었습니다. 심지어 돌아가시기 3일 전까지도, 당신을 찾아온 어떤 노인에게, 병원 옷으로 갈아입으시라고, 벗어서 빨아둔 당신의 상하 내의마저도, 그 후한 내왕(來往) 여비와 아울러 내주셨습니다. 돌아가시게 되어 병상에 누우시기 전날까지도, 병원 환자들을 돕기 위해 편지를 외국에 보내시느라고, 고령으로 손이 부들부들 떨리면서도 매일 쉬지 않고 하루 종일 타이프를 치시며(납북되었을 때, 다쳐 오른손은 수전증이며 두 손가락은 펴지지 않았음) 지내셨습니다. 한마디로 정말 가난한 이들의 벗이요 어버이시던 주교님은 언제나 남의 필요나 아쉬움만 크게 눈을 뜨시고 남을 도울 기회만을 찾으셨습니다.21)

 

퀸란 주교는 극도의 심장 허약 증세 끝에 1970년 12월 31일 밤 선종하였는데 마지막 순간까지 웃음을 머금었다고 한다. 주교의 유해는 1971년 1월 4일 삼척 성내동 성당 뒤뜰에 안장되었다가, 이듬해 4월 춘천 죽림동 주교좌 성당 구내의 성직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헌신한 그의 일생은 성령께서 복음에 대한 그의 순수한 열정으로 빚어낸 작품이 아니었을까. (끝)

 

…………………………………………………………………………

 

1) 춘천 성 골롬반의원과 삼척 성 요셉의원은 골롬반 외방선교 수녀회에 의해 운영되었고, 강릉 갈바리의원은 호주 관구에 속한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에 의해 운영되었다.

 

2) 『골롬반 문서』 7, 퀸란 주교가 게리(Gerry) 신부에게 보낸 1961년 9월 26일 자 서한, 7-38.

 

3) 가령, “『The Far East』(골롬반 외방선교회 회지―필자 주) 독자들에게 병원은 사제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고, 동해안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에게 위로를 줄 것이라고 호소하였다”(여진천 신부, 「구 토마스[Thomas F. Quinlan] 주교의 사목활동」, 『구 토마스, 박 토마스 주교의 사목활동』, 주교좌 죽림동 예수 성심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 교회사연구소 학술 심포지엄 자료집, 2020년 6월, 66쪽).

 

4) 『골롬반 문서』 7, 퀸란 주교가 킬트(James A. Keilt) 총장 신부에게 보낸 1963년 4월 18일 자 서한, 7-52.

 

5) 『경향잡지』 1109호(1960년 8월호), 23~24쪽 ; 『골롬반 문서』 7, 퀸란 주교가 코널리(T. Connolly) 총장 신부에게 보낸 1960년 7월 1일 자 서한, 7-25.

 

6) 『춘천교구 50년사』, 천주교 춘천교구, 1989, 45쪽.

 

7) 『골롬반 문서』 7, 퀸란 주교가 킬트 총장 신부에게 보낸 1963년 7월 13일 자 서한, 7-58.

 

8) 『골롬반 문서』 7, 퀸란 주교가 킬트 총장 신부에게 보낸 1963년 8월 2일 자 서한, 7-60.

 

9) 여진천 신부, 「구 토마스 주교의 사목활동」, 72쪽.

 

10) 『골롬반 문서』 7, 퀸란 주교가 데니스(Denis) 신부에게 보낸 1963년 11월 14일 자 서한, 7-66.

 

11) 『죽림동 예수 성심 주교좌 본당 100년사, 1920~2020』, 천주교 춘천교구 죽림동 주교좌 본당, 2020, 256쪽.

 

12) 『골롬반 문서』 7, 킬트 총장 신부가 1963년 3월 14일 작성한 문서, 7-50.

 

13) 『골롬반 문서』7, 킬트 총장 신부가 퀸란 주교에게 보낸 1963년 4월 19일 자 서한, 7-53.

 

14) 『골롬반 문서』 7, 퀸란 주교가 킬트 총장 신부에게 보낸 1963년 7월 13일 자 서한, 7-58.

 

15) 『골롬반 문서』7, 퀸란 주교가 킬트 총장 신부에게 보낸 1965년 5월 6일 자 서한, 7-75.

 

16) 『골롬반 문서』7, 퀸란 주교가 킬트 총장 신부에게 보낸 1965년 5월 17일 자 서한, 7-77.

 

17) 『골롬반 문서』7, 퀸란 주교가 킬트 총장 신부에게 보낸 1965년 7월 1일 자 서한, 7-82.

 

18) 『골롬반 문서』 7, 퀸란 주교가 킬트 총장 신부에게 보낸 1965년 8월 1일 자 서한, 7-86.

 

19) 『골롬반 문서』 7, 퀸란 주교가 킬트 총장 신부에게 보낸 1965년 7월 27일 자 서한, 7-84.

 

20) 주재용, 『태백의 인물』, 강원일보사, 1973, 275쪽 ; 『죽림동 예수성심 주교좌 본당 100년사』, 258쪽에서 재인용.

 

21) 주재용, 『태백의 인물』, 275쪽 ; 『죽림동 예수성심 주교좌 본당 100년사』, 258쪽에서 재인용. 위의 글은 퀸란 주교 선종 후, 삼척 성 요셉의원 원장 안 수녀가 주재용 신부에게 1971년 7월 12일에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교회와 역사, 2023년 5월호, 전경미 체칠리아(한국교회사연구소 특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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