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3일 (월)
(백)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교회문헌ㅣ메시지

프란치스코 교황 생태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 2장 해설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8-30 ㅣ No.704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9. 제2장 - 1



1장에서 교황은 신뢰할 만한 과학적 사실들을 근거로, ‘지금 우리의 공동 가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소개한다. 이는 교황이 “지루하고 추상적”(17항)인 대화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실재가 관념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교회 사람들에게 ‘실재주의자’가 되자고 권한다. 1장은 ‘실재’를 놓고 모든 사람이, 특히 과학자 및 전문가들이 정직하고 진실하고 공개적인 토론을 해달라는 교황의 요청이라 할 수 있다(201항 참조).

교황은 인류가 직면한 사태(도전)의 급박함과 엄중함과 복잡함을(15항) “고통스럽게 자각”하여 “자신의 인격적 고통으로 변환”(19항) 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까지 아무리 “최악의 일”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다시 선한 것을 선택하고…진정한 자유에 이르는 새로운 경로”(205항)를 밟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을 전하며 ‘공동 가정을 돌보는 일’에 관한 실효적인 대화와 토론을 긴급히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화와 토론의 자리에서 이 회칙이 “모든 사람이 자신의 문화와 경험과 재능을 갖고 참여하고 협력”해서 구축해야 할 “새롭고 보편적 연대”에 기여하기를 교황은 바란다(14항).

‘창조의 복음’이라는 제목을 붙인 2장은 간단히 ‘유다-그리스도교 전통’(15, 76, 78항)에서 이해하는 ‘창조’ 혹은 ‘세상’이라 할 수 있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에서 이해하는 창조와 세상’으로 서술해도 될 것을 교황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 이유 하나는 모든 종교의 역할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 행성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가 스스로 믿는 이들이라 고백합니다. 이 (신앙)고백이 종교들 사이의 대화를 재촉해야 합니다. 자연 보호를 위하여, 사회적 약자를 방어하기 위하여, 존경과 형제애의 관계망을 구축하기 위해서 말입니다”(201항).
 
또 다른 이유는 회칙 전편에 걸쳐 엿볼 수 있는 것으로서 ‘지난 2세기에 걸쳐 세상을 이끌어 온 과학기술 패러다임의 행적’에 대한 반성(특히 3장 참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지난 200년 동안 우리의 공동 가정에 상처 입히고 학대한 것처럼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문제는 우리에게 이런 재앙에 맞설 수 있는 문화가…지도력이…법적 틀이 없다는 것입니다”(53항).

왜 그렇게 되었을까? 아마도 다음 진술에서 일단의 답을 찾을 수 있겠다. “정치는 경제에 복종해서는 안 됩니다. 경제도 효율성만 따르는 과학기술 패러다임의 명령에 복종해서는 안 됩니다”(189항). 3장에서 밝히고 있지만, 오늘날 재앙의 뿌리는 지난 2세기의 근대정신과 닿아 있으며, 그 근대성은 절대 주체로서의 인간관과 단순한 객체로서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여, 과학 기술적 패러다임을 절대화했다. 이 패러다임에서는 창조주 혹은 종교들을 밀어내버리거나 하위문화쯤으로 간주하고 있다(62항).

그러나 교황은 과학과 종교가 실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다른 접근법을 갖고 있을 뿐, 서로 생산적이며 심층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믿으며, 대화를 제안한다(62항). 회칙 제2장은 “인류와 세상에 유익한” 즉 “해방의 경로를 모색하는” 이 대화에서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자세와 확신을 제시한다(64항).

회칙 제2장의 소제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I 신앙이 비추는 빛(63~64항), II 성경의 지혜(65~75항), III 우주의 신비(76~83항), IV 창조의 조화 안에 있는 각 피조물의 메시지(84~88항), V 우주적(보편적) 친교(89~92항), VI 재화의 공동(보편) 목적(93~95항), VII 예수님의 눈길(96~100항). 이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자. [평화신문, 2015년 8월 23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10. 제2장 - 2 성경의 지혜



회칙 2장의 ‘성경의 지혜’(65~75항)와 관련, 우리가 진지하게 성찰할 내용 몇 가지만 소개한다.

1. (구약 성경은) 인간 실존과 그 역사적 실재를 ‘관계’로 이해한다. “인간의 생명(생활)은 하느님과 관계, 이웃과 관계, 대지(세상)와 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이 세 관계는 근본적인 것으로서 서로 밀접하게 엮여 있다. 이 세 가지 결정적 관계는 인간 안팎에서 파괴되며, 이 관계의 결렬이 죄다”(66항). 회칙은 성경에서 밝히는 이 관계의 참된 뜻이 무엇인지, 동시에 어떻게 그 관계들이 파괴되며,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소개하고 있다.

한 가지 예만 들어보면,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이웃과 관계가 파괴될 때, 어떻게 그것이 하느님과의 관계와 땅과의 관계는 물론 인류 전체에 악영향을 주는 것으로 이어지는지를 설명한다.

“이웃과 적합한 관계를 가꾸고 유지해야 할 의무를 경시하는 것, 즉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에 대한 돌봄과 보호를 경시하는 것은 나와 나 자신, 나와 다른 이들, 나와 하느님, 그리고 나와 대지와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성경은 이 모든 관계가 무시될 때, 즉 정의가 더 이상 땅에 남아 있지 않게 될 때, 우리의 생명(생활) 자체가 위협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노아의 이야기에서 봅니다”(70항).

2. “단호하게 배격해야 할 태도가 있습니다…[성경을 잘못 이해해서] 우리 인간만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고 [우리 인간에게만] 땅을 지배하라고 했으므로, 이는 다른 피조물들에 대한 인간의 절대 우월(지배)을 정당화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그것입니다”(67항). 이를 회칙은 ‘왜곡된 인간중심주의’(69항)라고 비판한다. 이 왜곡된 인간중심주의는 “창조주와 인류와 전체로서의 창조(피조물) 사이의 조화”를 붕괴시켰는데, “우리가 주제넘게 하느님의 자리를 취하려는 것”이며, “우리가 피조물로서의 한계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66항)에 다름 아니다.

3.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인류에게 새로운 시작(쇄신)의 기회를 주신다(71항). 하느님께서 재촉하시는 이 쇄신의 삶에는 “창조주의 손으로 자연에 새겨 놓은 리듬을 되찾고 존중하는 것”(71항),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찬미(72항), 하느님께 대한 관상으로 얻어야 할 새로운 힘(73항)과 희망(74항)이 포함되어 있다.

4. “성경에서 해방하시고 구원하시는 분과 창조하신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의 창조 행위와 구원 행위는 거룩한 행동 방식으로서 밀접하게 그리고 분리할 수 없이 결합되어 있습니다”(73항).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바로 하느님께서 창조주이시며 해방자이심을 기억하고 고백하며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 교회가 “지상의 권력들을 숭배하는 것을 종식시키는 방식”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자리를 강탈하는 것을 종식시키는 방식”이다(75항).

5.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우리 그리스도인과 교회 당국은 스스로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창조 질서의 보전과 참다운 해방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 정치ㆍ경제ㆍ문화 같은 사회의 제 분야와 그리스도교는 실효적인 대화를 나눌 용의가 있는가? 우리 사회의 다른 종교 혹은 종파와 대화를 나눌 의지가 있는가? 혹시 회피 내재주의의 쓴 독을 지금 마시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그리스도인이 ‘왜곡된 (이기적)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하느님(원천)께 돌아갈 때(전환과 회개), 그럼으로써 파괴된 관계(자신, 이웃, 세상)를 회복하여, ‘쇄신의 삶’을 살 때 인류와 세상에 유익하다. 물론 용기가 필요하고,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신뢰와 희망이 그래서 더욱 절실하다. 우리는 하느님을 신뢰하는가?

“무에서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개입하실 수도 있으며, 모든 형태의 악을 극복하실수도 있습니다. 불의는 무적이 아닙니다”(74항). [평화신문, 2015년 8월 30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11. 제2장 - 3 우주의 신비



III. 우주의 신비(76-83항)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성찰할 수 있다.

1. 창조(삼라만상)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계획과 관계가 있는 실재이기에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으로서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신 고유한 자리를 차지한다. 사물을 이용 대상으로만 삼을 것인지,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자비하심을 발견할 이웃으로 볼 것인지, 인간의 태도에 있어, 유다-그리스도교 전통은 훌륭한 길을 제시한다(76-77항).

2. 그러면서도 유다-그리스도교 전통은 자연을 ‘탈 신화화’하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부각시켰다. 인간은 “세상을 보호하기 위해서, 세상이 갖는 잠재력을 개발하기 위해서 자기들의 능력을 계발할 의무”를 갖는다. 이 책임과 의무는 ‘무제한의 물질적 진보’라는 근대의 신화와 양립할 수 없다(78항).

3. 인간은 자유롭게 지성을 적용하여 역사에서 자유와 성장과 구원과 사랑을 열매 맺을 수도, 타락과 상호 파괴를 향해 치달을 수도 있다. 이는 ‘개방되고 상호 소통하는 체계들로 되어 있는 우주관’을 전제한다(79항).

이는 동시에 오늘날 인류가 가고 있는 길이 생명을 향한 길인지 죽음을 향한 길인지 진지하게 물을 것을 요청한다.

4. 발전이 필요한 세상을 창조하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악들이나 위험들이나 고통”을 마치 “해산의 진통”으로 삼아, 당신 스스로를 제한하시면서 동시에 인간의 협력을 이끌어내시는 분이시다(80항).

여기서 두 가지 정도를 성찰하게 된다. 하나는 세상의 악들과 위험들과 고통 앞에서 보이는 교회의 패배주의가 그 하나이며, 모든 인간을 타자화시키는 자기 중심주의가 다른 하나다.

5. 살아 있는 다른 존재들을 인간이 임의로 지배할 수 있는 객체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게 본다면 “승자가 모든 것을 독차지하게 되며,…조화와 정의와 형제애와 평화라는 이상”은 설 자리가 없게 된다(82항). 인간의 참된 성소는 “모든 피조물을 창조주께 돌아가도록 인도하는 것”이지 “무책임하게 폭압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 신앙인이 성찰할 것 하나는, 신앙의 지나친 개인주의화 및 내재화라 할 수 있다. 사회와 역사와 미래보다는 현재의 자신의 마음(정신) 상태로 신앙을 제한하려는 태도가 그것이다. 둘째는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승자 독식’ 현상이다. 이를 우리는 ‘무제한의 치열한 경쟁’이라는 중립적 용어로 그 악을 은폐한다. 셋째 모든 피조물을 무책임하게 폭압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현상인데, 우리는 이를 언제나 ‘성장’이라고 포장하여 강요한다.

“모든 피조물은 초월적 충만함(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를 통해서 하나의 공동 목적지, 즉 하느님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83항). 이 여정에서 우리 인간은 여정의 ‘표지’이며 생명의 ‘샘물’이 되라고 거룩한 부름을 받았다. 이는 마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론 곧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의 여정 중인 인류의 표지가 되어야 할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론을 상기시킨다.


IV. 창조의 조화 안에 있는 각 피조물의 메시지(84-88항)에서 성찰할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심지어 미래에 존재할 그 모든 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께서 일구신 ‘공동의 가정’(home)의 ‘한 가족’(family)인 셈이다. 다수성과 다양성을 전제하는 이 가족의 각 구성원은 그 나름의 자리와 개성과 가치를 지닌다(86항 참조). 이는 흔히 ‘다수성’을 “쓸모 있는 것과 쓸모 없는 것”으로 구별하려는 우리의 태도와 ‘다양성’과 ‘차이’를 곧잘 차별로 환원시키려는 우리의 태도를 경계한다.

2. 게다가 이 다양성과 다수성은 모든 피조물이 상호 의존하고 보완하며 서로에게 기여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이 관계 속에서 각 사물이 지닌 의미와 중요성을 드러낸다는 것을, 동시에 “무진장한 하느님의 부유함”을 드러낸다는 것을 의미한다(86항).

모든 피조물은 저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주기를 바라신 가르침(메시지)”(85항)을 갖고 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의 이 메시지와 현현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생태적 덕들(the ecological virtues)을 계발하는 것”(88항)이다. 그 덕으로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창조 안에 그 나름 고유하고 적절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이는 소극적으로는 왜곡된 인간 중심주의를 극복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는 모든 피조물을 하느님 현존의 자리로 인정함으로써 ‘우주적(보편적) 친교’의 길로 나서게 한다. [평화신문, 2015년 9월 6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12. 제2장 - 4 보편적 친교와 재화의 공동 목적 예수님 눈길로



V .우주적(보편적) 친교(89-92항)

회칙은 다음과 같이 ‘친교’의 차원을 확장한다.

1. 모든 피조물이 우주적 가족(universal family) 이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의 소유자”이시기 때문이다(89항 참조). 하느님께서 주인이시라는 이 확신은 다른 피조물을 책임 있게 대해야 마땅하며, 더더욱 “우리 가운데 존재하는 엄청난 불평등에 대해 특별히 분노해야”하는 근거가 된다(90항).

회칙은 묻는다. “실천적으로, 우리는 분노하는 대신에 오히려 자신들이 다른 이들보다 나은 인간이라고 여기는 이들을 계속해서 묵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마치 그들이 더 위대한 권리를 갖고 태어났다는 듯이 말이다(90항).

2. 그러면서, 회칙은 현재 환경 운동 일부에서 보이고 있는 태도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인신매매에 무관심하거나, 사회적 약자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으면서, 혹은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되는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는 일을 하면서, 위험에 내몰린 [동식물] 종들의 거래와 맞서 싸우는 것은 분명히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91항). ‘환경에 대한 관심’과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과 ‘사회 문제를 풀겠다는 확고한 투신’은 결합되어야 한다. 회칙이 강조하는 이 보편적 친교는 환경, 인간, 사회에 대한 관심과 행동으로 드러나게 된다.

3. 마침내 회칙은 “평화와 정의와 창조 보존은 확실히 상호결합되어 있는 세 주제”라고 천명한다. 사람 사이뿐만 아니라 형제인 태양과 자매인 달과 형제인 강과 어머니인 대지(92항)와 곧 모든 가족을 결합시키는 ‘보편적(우주적) 친교’의 힘은 하느님의 사랑이다.


VI. 재화의 공동(보편) 목적(93-95항)

1. 우리에게 매우 낯설고 심지어 그리스도인에게조차 생소한 교회의 오랜 가르침이 바로 ‘재화의 보편적 목적’ 원리다. 우리에게는 철두철미 재화의 사적 소유와 임의의 처분 권리가 거의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사적 재화의 권리(사유 재산권)를 절대적이며 불가침하다고 인정한 적이 없다.” “사적 재화가 소수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은 하느님의 계획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교회 가르침은 적어도 한국 교회 안에서는 설 자리가 거의 없다. 오히려 “부당한 습관들”이야말로 능력으로 칭송받는 형편이다(93항). “인간의 권리들을 존중하지 않고 증진시키지 않으면서” 경제적 성장만을, 그것도 소수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것을 ‘발전’이라고 내세우는 우리의 현실에서는 자연스럽지만, 회칙은 이를 “가치 있는 것이 못 된다”고 비판한다(93항).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은 “창조주께 대한 충실성”(93항)을 의심해봐야 한다.

2. 회칙에서 어쩌면 도발적으로, 혹은 불쾌하게 들릴 수 있는 몇몇 대목 가운데 하나가 이 자리에서 발견된다. 회칙은 뉴질랜드 주교들의 가르침을 인용한다. “가난한 나라들과 미래 세대들한테서 그들의 생존에 필요한 것을 강탈하는 그 비율로 세계 인구의 20%가 자원들을 소비하는” 이때 “너는 살인하지 마라”는 하느님의 계명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95항). 이 대목은 “우리는 생산된 식량 가운데 거의 1/3가량이 내버려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식량이 버려질 때마다 그것은 마치 가난한 사람들의 식탁에서 식량을 훔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50항)의 다른 표현이다. 굳이 설명과 성찰이 필요 없다. 어찌 “고통스러운 자각”(19항)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VII. 예수님의 눈길로(96항-100항)

1.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은 아버지로 강조하셨으며(96항), 세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에 주목하셨으며(97항), 창조(삼라만상)와 완전한 조화 속에서 사셨으며(98항) 인간의 노동을 거룩하게 하셨다(99항).

예수님의 삶에서 “건전치 못한 이원론”은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역사의 과정에서 일부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건전치 못한 이원론을 펼쳤으며 복음을 왜곡했다”(98항). 우리의 경우를 보자. 우리는 “세상의 육신과 세상의 일과 세상의 것들을” 멀리해야 한다고 내세우면서 정작 실제로는 집착하고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스도인이라면서 어떻게 사람과 자연과 사회와 세상을 착취하고 학대하며 함부로 다뤄 상처를 입힐 수 있겠는가? 혹은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제1장) 태연하거나 회피할 수 있겠는가? 고통스러운 자각이 없고 그 자각을 인격적으로 변환시키지 않고, 더 나아가 무엇이든 하지 않는다면, 불신앙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어디까지나 “창조 범위 안에 있고”, “자연과 창조주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핵심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64항). [평화신문, 2015년 9월 13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2,756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