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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생태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 서론과 1장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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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6-27 ㅣ No.691

[교황 환경 회칙 - 찬미를 받으소서 해설] 1. 식별을 위한 성찰 - 교황 새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 1장을 중심으로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을 대신해 인류에게 보내는 편지

 

 

“우리는 아무도 제기하지 않는 문제들에 대해 대답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면서도 “다른 사람의 삶에 참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아보는 폭넓고 심오한 감수성을 키울 필요가 있다”(「복음의 기쁨」 155항)고 호소한 교황이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를 다녀간 프란치스코 교종이다. 그는 자신의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의 강론 부분에서 이같이 밝혔다는 점에서, 이 부분은 특히 ‘사목자’들에게 한 호소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보낸 편지 

 

프란치스코 교종이 6월 18일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를 발표했다. 우리는 ‘회칙’이라고 부르지만, 모든 사람이 돌려가면서 읽으라고 보낸 편지(encyclical letter)라 할 수 있다. 그날 저녁 어느 뉴스 보도는 교종의 이 회칙을 두고 미국의 어느 정당이 즉각 반발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놓고 논란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교종의 회칙이 길어서 읽는 데 힘이 들기는 하겠지만,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온다면 평화신문 독자들도 꼭 읽어보면 좋겠다. 왜 그 회칙이 그렇게 즉각적으로 반발을 불러일으켰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더 바란다면, 우리의 현실, 우리 교회는 어떤 태도를 취할까 자문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교종은 오늘의 우리가 “자기 파괴적 악행을 키운다”고 본다. 어떻게? “(우리가 키우는) 그 악행들을 보려 하지 않고, 그 악행들을 인정하려 하지 않으며, 중요한 결정을 미루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가장함으로써”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교종은 이를 한 마디로 “회피”의 면허증이라고 부르면서, 이 면허증으로 오늘의 우리는 “지금의 생활 방식과 생산과 소비 모델을 지속”(「찬미를 받으소서」 59항)시키려 한다고 지적한다.

 

 

신음하는 대지 

 

프란치스코 교종의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는 절규에 대한 응답이다. 그것도 ‘사람들의 삶에 실제 영향을 주는’ ‘폭력’ 때문에 곳곳에서 들려오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듣고 하는 응답이다. 교종은 편지에서 우리의 누이와 어머니가 울부짖으며 우리에게 탄원하고 있다고 알린다. “이 누이가 지금 우리가 그녀에게 입힌 상처 때문에 울부짖습니다.…우리는 그녀에게 [그것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있습니다”(「찬미를 받으소서」 2항). 누이란 누구인가? 나와 피를 나눈 혈육이 아닌가? 그 누이는 또 누군가의 어머니이다. 그 어머니가 또 자식들이 입힌 상처 때문에 고통스럽게 울부짖는다. 이 누이이며 어머니는 바로 ‘대지’이다. 

 

이쯤 되면, 독자들은 교종의 편지가 ‘환경’에 관한 것이라 대뜸 눈치챘을 것이다. 그래서 “그럼 자연을 보호해야지!” 할 수도 있겠으나, 그분은 그렇게 대충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지금 “환경의 악화와 인간의 타락과 윤리의 퇴보”(「찬미를 받으소서」 56항)가 긴밀히 결부돼 “끔찍한 불의”(「찬미를 받으소서」 36항)를 저지르고 있지만, 대다수 우리는 “회피”의 면허증을 가지고 그 불의에 침묵한다. 그러는 사이에 누이이며 어머니인 대지는 신음하고, 하늘과 땅과 물에서 자신의 존재로서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무수한 피조물의 찬미 노랫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고, 무수한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나라들은 배제되고 버려져 존재하지 않게 된다(「복음의 기쁨」 53항 참조).

 

 

구조적 원인은 어디에서? 

 

교종은 「찬미를 받으소서」 회칙 제1장에서 ‘우리의 공동 가정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고 묻는다. 오염과 기후 변화, 물 부족, 생물 다양성 상실, 인간 삶의 질 저하와 사회의 붕괴, 지구의 불평등 문제들에 대한 검토를 제안한다. 교종은 이 문제들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라면서 이를 “더 이상 카펫 아래에 쓸어 넣을 수 없다”고 언명한다. 그리고 이 검토가 우리의 “고통스러운 자각” “세상의 고통을 인격적 고통으로 전환시키기”, 그리고 “행동의 길 찾기”를 위한 것이라고 밝힌다(「찬미를 받으소서」 18항). 

 

교종은 이어 지구가 앓고 있는 ‘병의 증세’를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소개하면서, 문제를 야기한 배경 곧 구조적 원인을 밝힌다. 그러면서도 그에 따르는 ‘불편함’이나 ‘비난’을 회피하지 않는다. 좀 지루하지만 회칙이 언급하는 내용을 옮긴다. 

 

△ 진보와 인간 능력에 대한 비이성적 신뢰(19항) △기술과 기업 이익의 결탁(20항) △ 내다버리는 문화와 자원 보존 능력을 결여한 산업 시스템(22항) △ 환경 문제를 악화시키는 악순환(24항) △ 환경 악화로 야기된 고통에 대한 광범위한 무관심과 동료에 대한 책임감 상실(25항) △ 일부 더 많은 자원과 사회적 정치적 권력을 소유한 사람들의 이기적 관심(26항) △ 물 자원을 사유화하여 시장 규칙에 종속된 상품으로 만들려는 경향(30항) △ 거대 다국적 기업의 물 관리 시도(31항) △ 경제와 무역과 산업에의 근시안적 접근(32항) △ 기업의 이익과 소비에 기여하는, 악순환을 가져오는 인간의 자연 개입(34항) △ 거대한 경제 세력, 초국적 기업들의 경제적 이익(38항) △ 환경 파괴에 영향을 미치는 현재의 발전 모델과 내다버리는 문화(43항) △ 지난 200년 간 성장이 가져다준 부정적 측면들(46항) △ 가난한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지금의 분배 모델을 합법화하려는 시도(50항) △ 구조적으로 부당한 거래 및 소유 시스템 (52항) △ 정치뿐 아니라 자유와 정의 문제까지도 장악하는, 기술-경제 패러다임에 토대를 둔 새로운 권력 구조들(53항) △ 경제와 기술의 결탁 그리고 이에 대한 나약한 정치적 대응(54항) △ 투기와 금융소득을 우선하는 경제 권력(56항) △ 충돌에 대처하려는 정치적 노력에 강하게 저항하는 막강한 금융 세력(57항).

 

교종은 이렇게 기득권 세력이 거북해 하고 불편해 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왜? 그리스도교 신앙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 예수님의 가르침, 그리고 성령의 인도에 따르는 교회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의 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교종은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를 통해서 약한 존재, 약한 사회뿐만 아니라, “경제적 이윤이나 무분별한 착취에 휘둘리는 또 다른 힘없고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존재들, 피조물 전체”(「복음의 기쁨」 215항)의 신음에 응답하고 있는 것이다. [평화신문, 2015년 6월 28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환경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 해설] 2. 서론과 1장 ②


‘생태’ 위기, 온 인류가 머리 맞대고 공동 숙제 풀어야

 

 

지난 호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불편함을 무릅쓰고 우리의 ‘누이와 어머니의 절규’를 듣고 응답한다는 요지의 글을 실었다. 응답에는 단순히 듣는 것만 포함되지 않는다. 아픈 사람과 의사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고통을 겪고 있는 아픈 사람에게 의사는 그냥 “아프시군요!” “어떻게 하지요?” “그냥 꾹 참으세요” 하지 않는다. 어디가 아픈지, 어떻게 아픈지 묻고, 필요하다면, 첨단의료장비를 동원해 검사하고, 그래서 증세와 함께 그 원인을 찾아내어 그에 맞게 치료한다. 대개 병이 중할수록 혼자 하지 않고 협진을 한다. 

 

회칙 1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오염과 기후 변화, 물 빈곤, 생물 다양성 상실, 인간 삶의 질 저하와 사회의 붕괴, 지구의 불평등 따위는 병의 증세들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래서 간단히 ‘환경’ 문제로 보려 할지 모르겠다. 실제로 언론에서는 ‘최초의 환경’ 회칙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한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오해’를 살 위험이 있다. 우선 이른바 ‘환경’ 문제는 전임 교종들도 끊임없이, 그것도 시급하게 응답을 촉구하며 호소했다. 

 

둘째로 ‘자연 환경’으로 축소(환원)시킬 수도 있다. 그렇지만 회칙은 ‘생태’를 대체로 인간 환경(human environment), 자연 환경(natural environment), 그리고 사회 환경(social environment)의 종합으로, 그것들 사이의 분리시킬 수 없는 관계로, 더 나아가 ‘하느님의 창조’라는 ‘실재’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 

 

비유하자면, 프란치스코 교종의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는 ‘협진’하자는 초대라 할 수 있다. 그것도 중병으로 온몸 곳곳에서 견디기 어려운 통증을 느끼는 어머니와 누이가, 하느님의 삼라만상이 살아있는 이 지구라는 행성이 지금 우리에게 울부짖고 있으므로, 형제와 자녀들이 모두가 하루빨리 모여서, 증세의 원인을 찾아내서 치료하자고 다급하게 초대한다. 협진하지 않으면, 결국 “하느님의 기대”(61항)를 저버려 “자기 파괴”(55항)가 될 것이므로. 

 

게다가 우리는 “주님을 찬미하는” 하느님 백성이다. 주님 제대에 모여 그리스도와 합하여 하느님께 “주님을 찬미한 삶”을 제물로 봉헌한다. 그래서 자꾸 서로 다짐한다. “주님을 찬미합시다!” 

 

그런데 주님을 찬미하려는 우리 삶이 너무나 강력하게 광범위하게 그러면서도 피할 수 없이 도전을 받고 있다. 하느님께 봉헌할 제물을 마련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하느님 사랑의 무수한 역작이 전시되어 그 존재 자체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는 ‘이 행성’의 미래가 걸린 문제들이 ‘급속도’로 밀려들고 있다. 

 

그래서 교종은 다음과 같이 밝힌다. “‘우리 행성의 미래를 [지금] 어떤 식으로 꾸릴 것인가’에 관한 새로운 대화를 긴급하게 호소합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대화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환경의 도전과 그 인간적 뿌리들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하며 악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찬미를 받으소서」 14항). 

 

교종은 도전을 피하거나 감추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도전에 용감히 맞서고 극복하며 새로운 과정에로 그 도전을 편입시키는 길이 참된 평화, 참된 발전에 이르는 길이라 믿는다(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227항 참조). 또 우리 모두 실재주의자가 되자고 권고한다(「복음의 기쁨」 108항 참조). 

 

물론 교종의 이 신념은 인류와 하느님께 대한 흔들림 없는 신뢰에 토대를 두고 있다. “창조주께서는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결코 당신의 사랑의 계획을 돌보지 않으시거나, 우리를 창조하신 것을 뉘우치지 않으십니다. 인류는 여전히 우리의 공동 가정을 건설하는 데 함께 일할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찬미를 받으소서」 13항). 

 

우리는 어머니와 누이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공동 가정’에서 ‘인류 가족’으로 살 수 있다. 그래서 공동 숙제를 풀기 위해 가족이 ‘다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대화’를 하자는 것이다. [평화신문, 2015년 7월 5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를 받으소서 해설] 3. 서론과 1장 ③


세계적 환경 악화, 50년 전 ‘핵위기’와 비견

 

 

대화하려면 먼저 서로 만나야 한다. 그리고 처지를 털어놓아야 한다. “사실들을 정직하게 바라보기”(61항)가 그것이다. 의사가 아픈 사람을 꼼꼼하게 봐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교종은 ‘사실들’과 함께 “지금 상황에 대한 생생한 분석”(17항)을 제시한다. “땅에서, 물에서, 공기에서 그리고 모든 형태의 생명에서 볼 수 있는 병의 증세들과 그 분석”(2항)을 말이다. 과학적으로나 일상의 경험으로 볼 수 있는 증세들은 ‘사실들’이다. 

 

왜 그런 증세가 나타난 것일까?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 ‘처방’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회칙은 그 처방에서 양극단이 있다고 본다. “진보의 신화를 집요하게 붙잡고 있으면서, 생태 문제들은 어떠한 윤리적 고려들이나 근본적 변화 없이도, 그리고 단순히 새로운 과학기술을 적용하면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는 주장이 그 하나다. 이는 ‘진보’가 만병통치약이라며 먹으라는 식이다. 

 

“사람들과 사람들의 모든 개입은 이 행성에 위협일 뿐이며, 생태 시스템을 위태롭게 한다. 따라서 이 행성 위에 사는 사람의 수를 줄여야 하고, 모든 형태의 개입을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다른 극단이다(60항). 이는 ‘삶’이 곧 ‘죄’라는 식이다. 물론 “오염과 타락을 보여주는 몇몇 분명한 표지를 멀찌감치 떨어져서 피상적으로 보기 때문에, 사태의 심각성을 보지 않는” ‘태연한 회피’, ‘문제의 부정’, ‘무관심’도 있다(14, 59항 참조). 양극단도, 무관심도, 병을 치료해 증세를 없애는 길이 아님은 분명하다. 

 

왜 ‘새로운’ 대화인가? 그 이유를 다섯 가지 정도로 정리해보았다. 우선, 인류는 ‘새로운 사태’를 맞았다. 인류는 “여러 면에서 인류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불균형 속에서 ‘불안’해하고 있다(17,18항). 이 ‘세계적 환경의 악화’는 “50여 년 전 ‘핵위기’에 임하여 비틀거렸을 때”(3항)의 상황과 견줄 만하다. 

 

다음으로, ‘환경 악화’라는 증세를 완화하고 중병의 뿌리를 치료하기 위해 지금까지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나름대로 칭송할 만한 결실을 내기는 했지만(26, 37, 38, 55, 58항), 문제의 “심각성과 시급성, 광대함”(15항)에 비하면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환경 위기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려는 많은 노력들이 실효적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14항). 

 

셋째로, 지난 호에서 소개한 바대로 “방해자들의 강력한 저항” 때문인데, 여기서는 두 가지 정도만 소개한다. 하나는 사회의 여러 영역이 “진보와 인간 능력에 대한 비이성적 자신감”을 갖고 “보다 위험한 접근법”을 취하고 있는데(19항), 이는 ‘인간 삶의 질 저하와 사회 붕괴’ 그리고 ‘세계 차원의 불평등’을 초래하는 ‘악순환’을 불러온다. “과학기술-경제적 패러다임에 기초한 새로운 권력 구조들이 우리의 정치뿐만 아니라 자유와 정의를 압도”(53항)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이는 더 큰 병을 주면서 효과는 덜한 약을 주는 셈이다. 

 

넷째로, ‘리더십의 부재’와 ‘국제 차원이 정치적 대응의 나약함’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경로를 밟을 수 있는 리더십이, 다가올 세대를 향해 편견 없이 그리고 모든 이를 위한 관심을 갖고 지금의 요구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리더십이 없습니다”(53항). “환경에 관한 지구 정상 회담의 실패는 우리의 정치가 기술과 금융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54항). 

 

마지막으로, “절대로 우리는 지난 200년 동안 우리의 공동 가정에 상처를 입히고 학대한 것처럼 그렇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교종은 그냥 이야기만 나누자는 것이 아니다. 교종은 “새롭고 보편적인 연대”(14항)의 길을 나서려 한다. 소극적으로는 “끔찍한 불의에 대한 침묵의 증인”(36항)이 되지 않기 위해서, “하느님의 기대를 저버리지”(61항) 않기 위해서, “자기 파괴적 행동”(55항)을 멈추기 위해서다. 적극적으로는 “대지의 울부짖음과 사회적 약자의 울부짖음을 같이 듣기”(49항) 위해서 “차별화된 책임”(52항)을 짊어지기 위해서다. [평화신문, 2015년 7월 12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를 받으소서 해설] 4. 서론과 1장 ④


지금의 발전모델은 응급 종합 정밀검사가 필요합니다

 

 

메르스가 우리 앞에 갑자기 등장했다. 사람들이 절절맸다. 대형 병원의 첨단 의료 기술이 있으며,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한 국가의 일류 행정이 있으므로 안심해도 괜찮다는 데도 그리 절절맸다. 그러면서도 애써 태연했다. “고령의 기저 질환이 있는 사람이나 위험하지!” 하면서…. 실제로 ‘기저 질환과 메르스가 만나면 치명’임을 보여주었다. 

 

지나친 단순화겠지만, 회칙은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고령의 기저 질환’을 생각해보자. 신체적으로 면역력이 약한데다가 심혈관계 질환이나 당뇨가 있는 경우를 말한다. 삶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조심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 해도 제약은 또 얼마나 많은가. 

 

회칙의 1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몇 가지 실재가 바로 이 ‘고령의 기저 질환’에 해당된다. ‘인생’에서 모든 ‘생’이 결합되어 있는 ‘생태계’(ecosystems)로 확장되었을 뿐이다. 예를 들어 공동 재화인 ‘기후’를 ‘당’ 혹은 ‘혈압’이라 해보자. 우리 몸에 당과 혈압이 있어야 하듯이, 지구에도 기후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당과 혈압 수치에 이상이 생기면 어찌 되겠는가? 물론 몇 가지 조처를 할 것이다. 운동과 식이요법과 투약이 그것이겠다. 그런데 운동을 못 할 정도로 약한 사람은? 너무 가난해서 식이요법을 할 처지가 못 되면, 국민건강보험제도 같은 것도 없는데 너무 가난해서 병원을 찾을 형편이 못 된다면…. 그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다면, 그냥 남의 딱한 처지에 불과한 일일까? 

 

기후 변화가 생태계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서도 너무 태연하다. 기후 변화는 ‘온난화’를 불러오고 있으며, 그 온난화가 해수면을 상승시키고 있다. 회칙은 가정법의 문장으로 “지금의 이 추세대로 가면 비상한 기후 변화와 전례 없는 생태계의 파괴와 모두에게 미칠 심각한 결과들을 제대로 목격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구 인구의 1/4이 해안과 그 주변에 살고 있으며, 대도시 대부분이 해안 지역에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해수면 상승이 극단적으로 심각한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24항) 하고 걱정한다. 

 

회칙은 그 심각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예상한다. “기후 변화가 가져올 최악의 충격은 아마도 다가올 수십 년 안에 개발도상 국가들이 겪을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 가운데 많은 이가 온난화와 관련된 현상에 현저하게 나쁜 영향을 받는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 그들에게는 기후 변화에 적응하거나 혹은 다른 자연 재난들과 맞설 수 있는 재정 활동이나 자원들이 전혀 없습니다.” 여기서 ‘사회적 약자’는 ‘사람’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후 변화에 동물과 식물들은 적응할 수 없으며, 그들은 (사라지거나) 이주할 수밖에 없고, 이는 차례로 사회적 약자의 생계에 악영향을 미칩니다”(25항). 

 

이제 회칙은 예상하는 심각한 상황이 ‘증세’로 나타나고 있다고 밝힌다. 마치 메르스의 증세인 고열이 있는데 바라보기만 하는 형국이다. “환경의 타락으로 악화된 빈곤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이주한 사람들이 수가 비극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 슬프게도 그 같은 고통에 대부분 무관심합니다.” 그 무관심은 무책임이다. 최근 수십 년의 온난화의 원인은 “사람들의 활동 결과로 배출된 온실가스의 고도 집중”(22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시민사회의 토대인 “사람에 대한 책임감”(25항)을 잃어버린 표지다. 

 

기후 변화와 온난화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지난 2세기 동안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시스템을 토대로 지속시켜온 인류의 발전 모델이 가져온 결과일 뿐이다. 그런데 그 증세가 ‘병의 증세’여서 문제다. 메르스 정도가 아니다. 행성 전체에, 인류 전체에 그것도 미래 세대까지, 사람만이 아니라 창조질서와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에게 심각한 ‘악영향’으로 나타나는 증세다. 단순한 ‘부작용’이 아니다. 시급히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치명적’일 수 있다. 

 

마치 지구가 고령의 기저 질환 상태로 치닫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리고 순차적으로 지구가 겪는 고통, 사람이 겪는 고통, 피조물이 겪는 고통, 사회가 겪는 고통은 견디기 어려운 고열의 증세가 될 것이며, 그 증세에 대해 회피와 외면, 무관심과 무책임을 초래하는 그런 ‘발전 모델’은 바이러스쯤 되겠다. 회칙은 지금의 발전 모델을 재검토(정밀검사)하자고 촉구한다. [평화신문, 2015년 7월 19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를 받으소서 해설] 5. 서론과 1장 ⑤


중병, ‘지난 200년 성장과 발전모델’ 증세, ‘사람의 삶의 질의 저하와 사회의 고장’

 

 

지난 호에서는 ‘기후 변화’라는 ‘증세’를 예로 들었다. 증세의 그 악화 속도가 너무 심상치 않아 하루라도 빨리 정밀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교황은 호소한다. 이때 그나마 다행인 경우를 가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체의 어느 한 부위에서만 한 가지 증세가 나타나고, 그 부위에만 나쁜 영향을 주는 경우다. 물론 ‘형편이 허락한다면’이란 전제 조건이 있지만, 해당 전문의를 찾아가 응급 정밀검사하고 원인을 찾아 진료하면 된다. 그런데 만일 그 증세가 곳곳에서, 즉 자연에서, 사람에게서, 사회에서, 그리고 전 지구 차원에서 나타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을 우리는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회칙의 1장은 그 ‘증후군’(상황)을 ‘신선한 분석’(17항 참조)으로 소개한다. 

 

회칙은 ‘오염과 기후 변화’(20~26항) 문제뿐만 아니라, ‘물과 관련된 논쟁점’(27~31항)과 ‘생물 다양성의 상실’(32~42항) 문제도 함께 다룸으로써, 하늘과 땅과 물에서 급속도로 악화되는 각각의 증세를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아! 교황이 환경 전체에 관한 회칙을 냈구나! 교황이 자연 보호를 호소했구나! 그러니까 앞으로 환경 보호에 좀 더 신경을 써야겠군!” 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누군가는 회칙을 불편하게 여기며 일부러(?) 여기까지만 읽고 싶어 할 것이다. 아마 ‘과학기술-경제 패러다임’을 맹신하여, “윤리적 고려들이나 근본적 변화”를 배제하고 “새로운 과학 기술을 적용”하면, 환경 문제쯤은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일 것이다(60항 참조). 그러나 회칙은 이런 태도를 “투기와 금융소득 추구를 우선하려는 현재의 전 지구적 체제”를 정당화하려는 ‘경제 권력’의 시도라고 단호하게 거부한다(56항). 이 경제 권력의 눈에는 자연도, 사람도, 사회도, 하다못해 ‘지구와 우주’도 시장의 규칙에 따라야 할 ‘상품’으로만 보일 것이다. 

 

회칙은 ‘사람의 삶의 질의 저하와 사회의 고장’(43~47항)을 심각한 ‘증세’로 제시한다. 그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며 명백하다. 사람도 이 세상에 있는 피조물로서 생명과 행복의 권리를 누려야 할 존엄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칙은 “환경의 악화와 지금의 발전 모델과 내다 버리는 문화가 사람들의 생활에 미친 결과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43항)고 밝힌다. 

 

회칙은 삶의 질을 악화시키는 몇 가지 ‘상황’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사람이 살기에 건강하지 않은 도시’ 환경과 ‘도시의 불균형 성장과 무분별 성장’이 그것이다. 도시 시민들은 “시멘트와 아스팔트와 유리와 금속 속에 갇혀…자연과의 물리적 접촉을 박탈당한다”(44항). 사실은 그것만이 아니다. 도시 비대화에 따르는 문제들은 열거하기조차 어렵다. 대중교통만 예로 들어보자.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이 있다. 정원과 정원 초과, 만원과 혼잡과 콩나물시루는 점잖은 표현이다. ‘지옥철’이라는 끔찍함을 드러내는 표현도 있다. 

 

다음은 우리도 ‘사회의 고장’을 금세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도시와 비도시에서, 특정 공간의 사유화로 특별한 아름다움을 지닌 지역에 대한 사람들의 접근은 제한됩니다. … 이른바 도시의 ‘보다 더 안전한’ 지역에서는 정성 들여 아름답게 가꾼 녹색 지대가 있습니다만, 사회가 버릴 수 있는 이들이 살고 있는 지역, 즉 좀 더 많이 감춰진 지역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흔한 일입니다”(45항). 

 

우리의 경우, 같은 도시라도 치안부터 교육과 사회복지 급여와 심지어는 도로 청결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의 불균형과 불평등은 거주 지역의 ‘땅값’에 비례한다. 범위를 넓혀, 도시 시민의 쾌적함을 위하여 비도시 시민의 희생을 강요하는 우리의 비윤리적 핵에너지 정책도 ‘사회의 고장’의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지난 200년의 성장이 언제나 통합적 발전과 삶의 질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표지들입니다. 그 가운데 몇몇 표지들은 실제 사회적 쇠락, 즉 통합의 유대들과 사회적 결합의 유대들이 조용하게 파열하고 있다는 징후이기도 합니다”(46항). 

 

회칙은 자연환경의 타락뿐만 아니라 인간 환경과 사회 환경의 타락을 ‘증후군’으로 제시하며, 지난 200년의 성장과 발전 모델을 중한 ‘병’으로 진단하고 있는 것이다. [평화신문, 2015년 7월 26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를 받으소서 해설] 6. 서론과 1장 ⑥


지구적 불평등에 대한 인식 부족과 왜곡된 믿음

 

 

회칙은 1장에서 현재 우리의 ‘공동 가정’에서 목격할 수 있는 ‘증후군’을 소개하고 있다. 회칙은 자연(하늘과 땅과 물)과 사회에서 분명히 목격할 수 있는 ‘사태’들을 소개한다. 그 범위를 넓혀 마지막으로 ‘지구촌 차원의 불평등’(48-52항)을 보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이와 관련하여 회칙은 불편한 모습 세 가지를 소개한다.

 

1. 인간과 사회와 환경의 타락은 서로 결부되어 있으며, 그 타락의 대가를 수십 억에 달하는 “이 행성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48항)이 희생과 고통으로 치르는데도, 그에 대한 인류의 인식은 너무나 미미하다. 회칙은 “배제된 이들이 직면한 문제들”을 “국제 정치적 논의”에서 마지못해 다루기는 하지만, 그마저도 회의를 다 끝내고 회의실을 정리할 때 불태워 버릴 장작더미의 “맨 아래 처박혀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개탄한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회칙은 그 원인의 일부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이는 많은 전문가들과 의견 작성자들과 소통 매체들과 권력 중추들이, 배제된 이들의 문제를 직접 접촉할 일이 거의 없는 부유한 도시 지역에 있다는 사실, 즉 사회적 약자와 멀리 벗어나 있다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그들은 안락하게 삽니다. 그들은…즉 세상 인구의 대다수가 도달하기에는 너무 높은 수준에서 [모든 문제를] 추론합니다”(49항).

 

2. 회칙은 ‘지구촌 불평등’ 문제를 대하면서 ‘소수의 사람’이 “문제들을 직시하기를 거절하는 방식”과 “현재의 분배 모델을 합법화하려는 시도”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이 행성은 소수의 사람이 소비한 후 생긴 폐기물조차 다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어쩔 수 없이 자기들만…소비할 권리(the right to consume)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믿습니다”(50항).

 

3. 회칙은 우리가 거의 생각해보지 못한 개념, ‘생태적 부채’와 ‘차별화된 책임’을 소개한다. ‘생태적 부채’와 관련해서는 아파레시다 문헌(2007년 브라질 아파레시다에서 열린 제5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에서 채택한 문헌)을 인용한, 다음 내용만 소개해도 금세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그 기업들은 발전된 나라들 혹은 소위 제1세계에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을 여기서 합니다. 그 기업들이 철수한 다음에 남겨놓는 것은 실직, 버려진 마을들, 매장 자원의 고갈, 산림 벌채, 농업과 지역 목축업의 황폐화, 오렴된 강…따위와 같은 막대한 인간적 환경적 빚들뿐입니다.” “다국적 기업들은 그런 식으로” 자본을 늘립니다(51항). 

 

‘차별화된 책임’을 회칙은 미국 주교들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흔히 보다 더 힘 있는 이해집단에 의해 지배되는 토의에서, 가난한 사람, 약한 사람, 무너지기 쉬운 사람의 요구”에 더 많이 주목하는 것(52항)이라고 설명한다. 

 

우리의 ‘문제’를 보자. 첫째, 지도자들의 모습을 본다. 사회적 약자와 물리적 접촉을 하고 있는가? 둘째, 도시와 비도시 사이의 심각한 불평등을 본다. 도시 시민이 배출한 생활 쓰레기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도시 시민과 산업 분야에서 소비하는 전력은 어디에서 생산되며, 어느 지역을 거쳐서 오는가? 셋째, 성장은 ‘막대한 인간적 환경적 빚’을 사회적 약자와 미래 세대에 떠맡기는 것은 아닌가? 마지막으로 ‘힘 있는 이해집단’의 몫만 불리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께서는 초주검이 되어 내버려진 이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린 사제와 레위처럼 그렇게 하지 말라 하신다. 물론 우리의 삶과 사회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으면, 사마리아인처럼 가서 그렇게 해야 한다(루카 10,29-37 참조). [평화신문, 2015년 8월 2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를 받으소서  해설] 7. 서론과 1장 ⑦-1


울부짖음을 초래하면서도 귀를 막는 이들은 누굴까?

 

 

회칙은 장마다 고유한 주제와 접근법을 갖고 있다고 밝힌다(16항). 이제 1장을 정리할 때가 되었다. 1장은 ‘오늘날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자는 초대라 할 수 있으며, 그 접근법은 ‘생생한 최신의 과학적 분석’(17항)이라 할 수 있다.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내용이 있다. 첫째는 ‘자연’(하늘, 땅, 물, 생물 다양성)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회와 전 지구’의 상황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소개한다는 점이다. 전문가들 사이의 정직하고 참된 토론을 호소하는 셈이다(61항). 

 

둘째는 단순히 과학적 정보를 널리 소개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목표’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자각’과 ‘인격화’ 그리고 ‘행동’이 그것이다(19항 참조). 회칙은 이를 ‘윤리적·정신적 여정’이라 한다(15항). 모두가 참여하는 대화에 대한 호소이면서, 동시에 ‘말 잔치’에 대한 경계라 할 수 있다. 

 

최신의 과학적 분석에 기초한 ‘오늘의 상황’을 몇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급속한 변화와 심각한 불균형이 초래한 병의 증후군들과 불안(18항 참조). ② 과학기술이 초래하는 사태의 악화와 악순환(20항). ③ 내다 버리는 문화(22항)와 무관심의 세계화(25항). ④ 이미 행성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들을 넘은 인간의 모험적 착취(27항). 

 

왜 이런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을까? 회칙은 이를 “진보와 인간 능력에 대한 비이성적 자신감”(19항)에서 찾는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잘못 인도된 근대정신, 즉 ‘인간중심주의’와 ‘상대주의’에서 그 사상적 배경을 찾는다. 이를 우리는 ‘인간의 무절제한 욕망’의 충족을 행복과 발전이라고 보는 태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며, 학자들은 ‘공리주의적 사고방식과 삶의 양식’ 정도로 정리할지도 모르겠다. 

 

회칙은 현재 상황을 함께 보자고 초대하지만, 격렬한 반발이 있을 것임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래서 한자리에 모여서 ‘정직한’ 대화를 하자고 제안한다. 누가 반발할까? 회칙은 1장 곳곳에서 시사하고 있는데, 참된 ‘윤리성과 영성이 부재한’ 이란 수식어를 붙여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대로 열거한다. 

 

‘기업의 이해관계’(20, 34항), ‘일부 더 많은 자원과 사회적 권력이나 정치적 권력을 가진 사람들’(26항), ‘폐기하고 내다 버리는 습관이 전례 없는 수준에 도달한 곳’(27항), ‘물 자원을 사유화하여 시장의 규칙에 지배를 받는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려는 이들’(30항), 물을 통제하려는 ‘대형 다국적 기업들’(31항), ‘생명(생활)의 원천들을 비이성적으로 다 먹어치우는 경제 그룹들’(32항), ‘빠르고 쉬운 이익을 좇는 이들’(36항), ‘세계적으로 거대한 경제적 이해관계들’(38항), ‘세계 인구의 대다수가 도달하기에는 너무 높은 수준에서 [모든 문제를, 배제된 이들이 직면한 문제들을] 추론’하는 지도자들(49항), ‘소수의 사람들만 소비할 권리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믿는 이들’(50항), ‘발전된 나라들 혹은 소위 제1세계에서는 절대로 할 수 없을 일을’ 저개발국가에서 하는 ‘다국적 기업들’(51항), ‘정보를 조작하면서까지 정치를 지배하는 과학기술과 금융’(54항), ‘경제와 과학기술 사이의 동맹’(54항), ‘경제 권력들’(56항), ‘강력한 금융이익집단들’(57항), 지난 2세기의 ‘진보의 신화를 집요하게 붙잡고 있는 이들’(60항)이다. 

 

이를 정리하면, “방해자(저항과 관심 결여)의 태도는, 믿는 이들에게도 그런 태도는 있는데, 문제의 부정에서부터 무관심, 태연한 회피 혹은 기술적 해결책에 대한 맹목적 자신감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라 할 수 있다(14항). 

 

그러는 사이, 인류는 ‘사회적 부채’(30항), ‘막대한 인간적·환경적 빚들’과 ‘생태적 부채’(51항)를 눈덩이처럼 불려 떠넘긴다. 미래의 행성에 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자연’과 ‘사회’와 ‘사람’에게도 말이다. 물론 현재의 대지와 사회적 약자도 울부짖는다(49항), ‘불쌍한 우리’(2항)는 누구일까? [평화신문, 2015년 8월 9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교황 생태 회칙 - 찬미받으소서 해설] 8. 서론과 1장 ⑦-2


누가 울부짖으며, 왜 귀를 막아서는 안 되는가?

 

 

많은 사람이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는 것”(56항)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인간 활동의 목표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있기 때문”(61항)이다. 그러나 “맑은 정신으로 우리의 세상을 바라보면”(34항) 세상이 황폐화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누이가 우리에게 울부짖고 있습니다.” 여기서 ‘누이’는 대지를 지칭한다. 회칙은 그 ‘대지’가 ‘불쌍한 우리 가운데서’ “가장 심하게 학대를 받고 내버려졌다”(2항)고 한다. 우리가 편리한 대로 사용하고 폐기하여 아무 데나 내다버린 일회용품을 연상케 한다. 그러면 ‘불쌍한 우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회칙에서는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최악의 충격을 겪을 개발도상국들과 그곳에 사는 사회적 약자들과 식물과 동물들’(25항) ‘아프리카 대륙’(28항, 51항) ‘강과 호수와 바다’와 ‘안전한 물을 구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29항) ‘수십억의 인구’(31항) ‘멸종할 수천 종의 동식물’(33항) ‘포유동물과 새들과 곤충들’(34항) ‘주권을 침해받는 (남미의) 개별 국가들’(38항) ‘이 행성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48항)이 바로 불쌍한 우리라 할 수 있다. 불쌍한 우리가 울부짖으며, 충분히 죽었으며, 계속 죽어간다. 

 

어떤 이들은 ‘생성소멸’이 이치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태연히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그것이 ‘자연’의 길이 아니라, ‘인간의 활동’에 의해 유발된 울부짖음이요 죽음이요 멸종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본래 그 존재 자체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야 하고, 우리에게 줄 메시지를 갖고 있는데, 그것을 인위적으로 막은 것이기 때문이다(33항 참조). 

 

회칙은 ‘재앙을 개괄’함으로써 그것을 보고 우리 마음이 크게 움직이기를 기대한다(15항). ‘인간의 활동’으로 ‘출구’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 ‘방향’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희망,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만이 아니라(61항 참조), ‘하느님과 하느님 계획에 대한 신뢰’ 때문이기도 하다(13항).

 

 

무엇 때문에 주저하는가? 

 

왜 귀를 막고 눈을 감아서는 안 되는가? 

 

소극적으로 성찰할 수 있다. 오늘의 상황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있으면서도 회피하거나 숨길 수 없는 문제들’(18항)이며, “끔찍한 불의에 대한 침묵의 목격자”(36항)가 되어서는 안 된다. 게다가 여태까지의 “과학기술-경제적 패러다임에 기초한 새로운 권력 구조들이 우리의 정치뿐만 아니라 자유와 정의를 압도할 수도”(53항) 있으며, “우리에게는 그렇게 할 권리가”(33항) 없다. 물론 우리는 ‘생태적 부채’(50항)를 갚아야 하고, ‘차별화된 책임’(52항)을 이행해야 한다. 보다 직설적으로는, 여태까지 지속시킨 ‘인간들의 자기 파괴적 악행을 고안하는 방식’을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59항). 

 

적극적으로 성찰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는 ‘새롭고 보편적인 연대’(14항)와 ‘단 하나의 인간 가족’이라는 확신(52항)이 요구된다. 무엇보다도, “관대함과 연대와 돌봄의 몸짓들”이 우리 안에서 솟아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사랑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58항)이다. 신앙인으로서는, ‘하느님의 기대’(61항)에 부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회칙은 묻는다. “이 시점에 모두를 권력에 집착하도록 꾀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즉 모든 이가 그렇게 하는 것이 급박했고 또 필요했을 때, 행동을 취하는 데 있어 무능했던 것으로 기억될 뿐인데도, 모두를 그 권력에만 집착하도록 꾀려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57항) [평화신문, 2015년 8월 16일,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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