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6일 (월)
(백)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진리의 영이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세계교회ㅣ기타

[교황] 한국교회와 요한 바오로 2세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6 ㅣ No.75

[특집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한국교회와 요한 바오로 2세

 

 

1. 요한 바오로 2세, 두 번의 방문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면 그야말로 큰 기쁨이 아닙니까?” 이 말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년 5월 한국 방문의 첫 발을 내디디면서 한 말이다. 이 말은 공자의 「논어」 첫머리에 나오는 맡을 원용하여 교황이 당신을 한국인의 벗이요 한국인을 자신의 벗으로 여기는 심정을 확인하는 것으로 매우 의미심장한 뜻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교황은 이 말을 한국어로 하여 우리 사회에 상당한 반항을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황이 한국인과 한국어로 직접 대화하려는 열망을 잘 드러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땅의 백성들과의 대화는 이들의 복음화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따라서 교황의 이러한 노력은 한국교회가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이 말은 결코 피상적인 의례에만 그친 것은 아니었다. 교황은 자신을 진정 한국인의 벗으로 여기고 한국과 한국인들을 위해 기도와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우선 그 바쁜 일정 중에서도 한국 방문을 준비하며 한국어를 배우고자 상당한 시간을 들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사실 이순(耳順)을 넘긴 연치(年齒)에 외국어를, 그것도 앞으로 별다른 쓰임새가 없다고 할 한국어를 배운다는 것 자체가 진정으로 한국인의 벗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없다면 엄두도 못 낼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한국과 한국교회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이토록 각별한 것이었다.

 

이토록 각별한 사랑과 관심이 있었기에 교황은 두 차례나 한국을 방문하였다. 1984년에는 한국 천주교회 이백주년을 경축하고자 그리고 1989년에는 서울에서 열린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주재하고자 한국을 방문했던 것이다. 아시아에서는 교황이 두 번 이상 방문한 나라가 필리핀, 인도 그리고 한국 외에는 없다.

 

1984년 103위 시성식을 치르게 된 것만 하더라도 요한 바오로 2세의 특별한 배려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원래 복자가 성인이 되려면 그분에게 신자들이 전구를 청하여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인정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당시 한국교회의 실정으로는 거의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고 해도 과언에 아니다.

 

일반적으로 기적은 자연법칙을 이기거나 초월하여 일어나는 사건이다. 예를 들면 기적이란 의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정한 불치병이 완치되는 경우에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건은 하느님께서 함께하고 계시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하게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103위 복자들의 전구로 그러한 기적이 일어났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입증할 만한 자료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여 당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한국교회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장을 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103위 복자들의 전구로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기적이라고 볼 수 있는 만큼 이분들을 성인품에 올리기에 필요한 기적 심사를 면제해 줄 것을 교황에게 청원했고, 바로 이 청원을 교황이 들어줌으로써 103위 복자의 시성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렇게 많은 수의 성인이 동시에 탄생한 것도 세계교회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편 시복 시성식은 바티칸에서 거행하는 교회의 오랜 전통을 깨고 103위 시성식을 한국에서 거행하게 된 것도 교회 역사상 처음이며, 이것도 요한 바오로 2세의 특별한 배려가 있었기에 기능한 일이었다. 당시 한국 주교회의에서 먼저 시성식을 한국에서 거행하는 것을 교황에게 건의하였다. 한국 신자들이 많이 참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103위 성인들이 그리스도인의 씨앗을 싹 틔운 바로 그 땅에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드러내게 하자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건의를 교황이 흔쾌히 받아들임으로써 시성식을 서울에서 거행하게 되었다. 이후 시복 시성식을 바티칸 밖에서 거행하는 경우도 종종 생기게 되었으니 요한 바오로 2세 덕분에 한국교회는 말하자면 시복 시성식을 복자나 성인의 연고지에서 거행할 수 있는 새로운 전통을 세계교회에 세워놓은 셈이다.

 

이렇게 역사적인 시성식을 한국에서 거행함으로써 교황은 한국교회가 자기 역사의 제3세기에 그리스도의 충실한 증인이 되어 복음의 봄을 더욱 활짝 꽃피워야 할 사명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었다.

 

 

2. 한국의 분단 상황에 대한 교황의 관심

 

1989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폐막 미사 강론에서 교황은 우리나라를 두고, 갈라져서 미처 평화와 정의 안에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는 이 세계를 상장하는 존재라고 말하였다. 또한 교황은 1990년 가을에 사도좌를 정기방문한 한국 주교들에게 비극적인 남북분단으로 한국인들이 반세기가 넘게 서로 갈라져 숱한 분쟁에 시달려 왔음을 상기시키면서, 전 세계적인 정치적 변화와 한국의 노력이 합쳐져 진정한 정의와 자유, 신성한 인권 존중을 토대로 하여 오랜 숙원인 통일을 이룩하기를 기원하였다.

 

교황은 이렇게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의 통일에 대해 당신이 늘 갖고 있는 관심을 표명하고, 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한국교회에 대해 충심어린 연대감을 표현해 왔다. 교황은 북한교회와 국민들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이들과 대화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예컨대 교황은 1987년 평양에서 열린 비동맹국 각료회의에 장익 주고(당시 신부)를 포함한 대표단을 파견하고 1988년에는 장의 주교를 바티칸 특사 자격으로 평양의 장충성당을 방문하도록 하는 등 북한과의 접촉을 시도하였다. 또한 이를 통해 북한 당국과 한국교회의 접촉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교황청은 또한 1988년 북한의 유학생을 교황청 우르바노 대학교에서 공부하도록 배려하기도 하였다.

 

교황은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폐막 미사 강론을 통해 성찬례 참여는 화해를 위한 활동을 촉구한다 지적하였다. 이어서 고향은 그리스도교가 이백년 전 한국에 들어왔을 때 그 당시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한국 전통사회의 계급장벽을 과감히 헐어버리고 사랑과 정의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냈음을 상기시키고, 오늘날 한국교회는 분단의 비극을 극복하여 화해를 이루도록 불리었다고 강조하였다.

 

교황은 1998년 4월 19일 아시아 주교 시노드 개막 미사 뒤에 있었던 주일 삼종기도 시간에 매우 이례적으로 전 세계 신자들에게 기아와 영양실조에 허덕이고 있는 북한 주민들에게 연대감을 표시하도록 호소하기도 하였다. 교황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수단조차 없는 북한 주민들을 도우려는 가톨릭 신자들의 노력과, 같은 민족이며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문화유산을 갖고 있는 두 나라 사이에 화해를 이루려는 가톨릭 신자들의 노력을 지지하고 격려해왔다(아시아 교회, 28함).

 

북한의 가톨릭 공동체와 온 백성에게 합당한 방법으로, 그리고 사목적 사랑으로 물질적 정신적 연대를 제공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화해를 위해 긍정적인 걸음을 내딛는 것이기 때문이다(2001년 3월 2일 사도좌 정기 방문중인 한국 주교들에게 한 연설), 교황은 북한에 인도주의적 원조를 제공하기 위해 1996년 클라우디오 첼리(Claudio Celli) 대주교를 특사로 파견한 이래 지속적인 원조를 제공해 오고 있다.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는 교황의 이러한 격려와 지지가 한국교회의 민족화해를 위한 활동의 방향을 잡아주고 이를 뒷받침에 주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3. 세계의 인권상황 개선을 위한 교황의 노력

 

현대세계가 죄의 구조를 극복하고 정의와 평화를 이룩할 수 있도록 교황은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교황은 특히 사회교리에 입각하여 인권을 존중하고 신장할 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에게 권고하기도 하고, 이를 위해 특히 신자들과 선의의 모든 사람이 새로운 연대성의 용기(「아시아 교회」, 32항)를 갖고 함께 투신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은 교회와 신자들이 인류 가족을 섬기는 봉사의 근본 임무이기 때문이다(「평신도 그리스도인」, 37항).

 

첫 번째 방한에서 교황은 한국의 많은 노동자들이 아직도 열악한 근로 조건 아래서 시달리고 있던 상황에 대해 언급하였다. 교황은 “인간은 한갓 생산수단처럼, 최소의 투자로 최대를 생산해 내야 하는 하나의 물질적 도구처럼 취급되기 일쑤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근로자는 창조주의 참된 협력자로 존중된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1984년 5월 5일, 부산에서 근로자, 농민, 어민에게 한 연설)라고 역설함으로써 이들을 위한 정의의 실현을 강조하는 일을 빼놓지 않았다. 교황의 이러한 가르침은 한국사회가 진정한 발전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제시한 것이며, 그동안 이를 위해 기울인 한국교회의 노력을 격려하고 지지하는 것이었다.

 

인권을 존중하고 신장하기 위해 교황이 기울여온 불굴의 노력은 세계사의 흐름을 밑바닥부터 바꿔놓아 새로운 천년대에 접어드는 인류에게 희망의 문턱을 넘어설 수 있게 하였다. 곧 교황은 1980년대 말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주의가 붕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것은 당시 소련 대통령이었던 고르바초프가 “최근 몇 년간 동유럽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은 교황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그가 세계무대에서 해낸 주도적 역할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La Stampa, 1992년 3월 3일자)라는 증언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예컨대 소련과 동유럽 개혁 물결의 기폭제 역할을 한 폴란드의 자유노조만 하더라도 과연 가톨릭 교회의 지원 없이 그리고 무엇보다 교황의 예리한 정치적 판단력과 지혜를 바탕으로 한 지원 없이 공산정권을 몰락시키는 일을 해낼 수 있었으리라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교황의 이러한 역할은 세계질서를 개편하는 데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였고, 이것은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서도 유리한 국제적 여건을 제공해 주었다.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 그 이후 활발해진 남북 대화와 교류, 협력 등은 정부와 민간이 벌인 노력의 산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가 붕괴되지 않았다면 쉽사리 거두어들일 수 없는 것이다.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는 당시 한국사회의 불안 요인의 하나였던 이념과 체제 논쟁에도 사실상 종지부를 찍음으로써 사회안정에 적지 않게 기여하기도 하였다.

 

 

4. 아시아에서 한국교회의 역할

 

한국교회는 지난 반세기 동안 실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하였다. 사실 1960년 45만 명(인구 대비 1.8%)에 불과하던 신자 수가 1970년 79만 명(2.5%), 1980년 132만 명(3.5%), 1990년 275만 명(6.3%), 그리고 2002년 435만 명(9.0%)으로 교회가 성장한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록적인 일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1980년대에 한국교회는 연평균 7.6%로 높은 신자 수 증가율을 보였다는 점이다. 신자 수가 거의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성장을 실현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요인들 중에는 교황과 한국교회의 관계가 크게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교회가 교황과 정서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굳건한 친교를 맺고 있다는 점, 요한 바오로 2세가 1980년대에 두 차례나 한국민의 벗으로서, 평화의 사도로서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민과 한국어로 직접 대화하였다는 점, 한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촉진하고 아울러 북한 주민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연대성을 몸소 실천에 옮기고 있다는 점, 그리고 말과 행동으로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모범을 보여준 것이 그 가장 큰 요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황의 이런 모습은 한국인들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야말로 한민족을 위한 위대한 선교사요 희망의 증인인 셈이다.

 

이제 교황은 아시아에서 두 번째의 교세를 이룩한 한국교회에 새 천년대를 맞이하여 그리스도에게서 다시 시작하여 겁내지 말고 아시아의 깊은 데로 저어나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으라(루가 5,4)고 권고한다. 한국교회는 교황의 권고대로 아시아 선교의 주도적 역할을 하여 아시아의 모든 백성이 희망을 안고 하느님께(히브 7,19) 나아가도록 이끌어갈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사목, 2004년 1월호, 한홍순(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장 · 교황청 평신도평의회 위원)]



파일첨부

1,35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