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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27: 6세기 (2) 베네딕투스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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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6-04 ㅣ No.953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27) 6세기 ② 베네딕투스의 영성


유럽의 수호성인, 서방 교회 수도 생활의 아버지

 

 

베네딕투스 성인, 페널에 템페라,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누르시아의 베네딕투스(Benedictus Nursinus, 480/90~555/60)가 ‘서방 교회 수도 생활의 아버지’이고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그가 사람들을 모아서 정주(定住) 수도회를 창설했고, 베네딕도 수도회와 베네딕투스 수도 규칙서를 따르던 수도자들이 당시 사회에 영향을 끼치면서, 중세 유럽에서 정치 상황의 안정과 문화유산의 보존에 많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정주(定住) 수도회 설립

 

서로마 제국 멸망 후 정치적 혼란기 속에서 태어났던 베네딕투스는 어린 시절에 동고트족의 침략 전쟁을 경험했고 동고트 왕국 치하에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누르시아(Nursia) 귀족 가문 출신인 베네딕투스는 청소년 시절에 로마에서 수학하면서 서방 교회의 혼란스런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그 당시 서방 교회는 교황 심마쿠스(Symmachus PP, 재임 498~514)를 지지했던 동고트 왕과 대립교황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재임 498~507/08)를 지지했던 동로마 황제의 알력으로 한동안 분열과 갈등 속에 있었습니다.

 

로마에서 베네딕투스는 권력자들이 사리사욕을 채우는 조세정책을 펼침으로써 백성들이 궁핍하게 되는 사회적인 모순과 백성들의 고단함을 목격했습니다. 베네딕투스는 세속적인 문화와 윤리적인 타락의 유혹에서 벗어나고자 500년경에 로마 동쪽 내륙 엔피데(Enfide)로 이주해 은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곳에서 베네딕투스는 준비 없는 독거 생활이 영성 생활을 위험에 빠트린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몇 년 후에 그의 명성이 알려지자 베네딕투스는 비코바로(Vicovaro)에 위치한 수도원 원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곳 수도자들과 갈등을 겪자 베네딕투스는 수비아코(Subiaco)로 옮겨 그의 지도를 바라며 모여든 제자들과 함께 ‘성 클레멘스 수도원’을 설립하고 수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곳 본당 신부의 시기 질투 때문에 베네딕투스는 동료 수도자들을 보호하고자 몇몇 제자들과 함께 다시 거처를 옮겼습니다.

 

529년경에 베네딕투스는 로마 남쪽 몬테카시노(Montecassino)로 이주해 대수도원을 설립하고 수도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방 종교에 물든 주민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고자 노력했습니다. 또 베네딕투스는 인근 피우마롤라(Piumarola)에 여자 수도원을 설립하고 쌍둥이 여동생 스콜라스티카(Scholastica, 480경~547경)에게 초대 원장 직분을 맡겼습니다. 이후 베네딕투스는 서쪽 해안가 테라치나(Terracina)에 수도원을 설립하고자 한 차례 방문한 것을 제외하고 죽을 때까지 몬테카시노 수도원에 머물렀습니다.

 

 

기도, 노동, 독서 중심의 수도 생활

 

베네딕투스가 추구했던 수도 생활 정신은 그가 말년에 저술한 작품인 「수도 규칙(Regula Monachorum)」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베네딕투스는 수도자들에게 한 곳에 머무는 정주 수도 생활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즉, “수도원 안에서 살며 규칙과 아빠스 밑에서 분투하는” 회수도자들을 가장 굳센 수도자라고 언급했습니다.(1장 참조) 북방 민족의 침략전쟁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던 백성들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면서 미래를 설계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베네딕투스는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한 곳에 정착해 육체노동을 하면서 수도 생활을 실천함으로써, 타인의 재물을 탐내고 일확천금을 기대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살던 백성들에게 노동의 가치와 중요성을 일깨우며 정착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었습니다.

 

다음으로 베네딕투스는 상호 존중하는 형제애를 강조했습니다. 즉, 아빠스는 더 나은 수도 생활을 위해서 “형제들의 의견을 듣고 깊이 검토한 후에” 판단하고 지도해야 할 것이며, 수도자들도 “온전히 겸손된 복종심을 가지고” 아빠스의 결정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3장 참조) 이방 민족의 침입으로 로마 민족 사이에 이방 민족이 섞여 살아야만 했고, 피난살이로 자유인이나 노예나 타지에서 함께 정착해야 했기 때문에, 베네딕투스는 서로 존중하고 순종하는 사랑의 형제애를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수도자들은 선행, 순명, 침묵, 겸손의 덕을 익히고 실천해야 했습니다.(4~7장 참조)

 

은거 생활 중인 베네딕투스를 그린 작자 미상의 그림, 1540년 경, 스토카르드 국립 미술관.

 

 

하지만 베네딕투스가 가르친 중요한 수도 생활은 기도, 노동, 독서였습니다. 베네딕투스는 수도자들이 공동으로 바치는 성무일도에 대한 규정을 자세히 제시했습니다.(8~20장 참조) 또한 베네딕투스는 수도자들이 개인적인 상황에서 실천하는 기도 생활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언급했습니다.(49~52장 참조) 한편 베네딕투스는 수도자들에게 “정해진 시간에 육체노동을 하고 또 정해진 시간에 성독(聖讀)을” 할 것을 권고했습니다.(48장 참조) 특히 베네딕투스는 독서 생활에 대한 실천 규정을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48장 참조) 오늘날 가톨릭 신앙인들은 베네딕투스와 베네딕도 수도원을 생각하면 일반적으로 ‘기도하고 일하라’(Ora er Labora)라는 표어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만약 이 두 가지 내용만 기억한다면, 베네딕투스의 가르침을 일부만 이해한 것입니다. 즉, 우리는 기도 및 노동과 함께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점은 베네딕투스가 앞서 동ㆍ서방 교회에서 수도자들이 성경 독서를 수도 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했던 정신을 계승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 강조

 

베네딕투스는 매일 적어도 2~4시간씩 정기적으로 거룩한 독서를 실천하도록 권고했습니다.(48,3~4.10~11 참조) 따라서 수도자들은 나태함에 떨어지지 말고 거룩한 독서를 꾸준히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다만, 거룩한 독서와 육체노동은 균형을 맞추어 했습니다.(48,13.17~18.22 참조)

 

그런데 베네딕투스는 수도자들에게 쉬고 있는 다른 동료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독서하라고 권고했습니다. “만일 누가 혼자 독서를 하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할 것이다.”(48,5) 즉, 소리 내어 읽는 독서법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소리 내어 읽는다면 독서에 집중도 잘 될 것이고, 하느님 말씀도 선포할 수 있어서 유용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베네딕투스는 저서 말미에 독서 목록으로 성경 말씀 이외에 교부들의 가르침들이 완덕을 향해 나아가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포함시켰습니다. 그중에서도 “교부들(요한 카시아누스)의 담화집이나 제도서 … 그밖에 우리의 거룩한 사부 「바실리우스의 규칙서」는”(73,5) 수도자들의 덕행 증진에 큰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6세기 초에 베네딕투스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제시했던 새로운 삶의 모습은 그 당시 시대적 요청뿐만 아니라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까지 유효한 정답이었습니다. 베네딕투스의 가르침은 중세 수도 생활과 수도원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15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실천되고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6월 4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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