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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 속 신앙 찾기: 판도라 - 희망의 두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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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2-26 ㅣ No.984

[영화 속 신앙 찾기] 판도라 - 희망의 두께

 

 

요즘 가장 ‘극적’인 분야는 뉴스다. 예상도 하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소식이 날마다 쏟아져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다. 뉴스와 픽션의 가장 큰 차이는 ‘개연성’이다. 뉴스는 이미 벌어진 일이다. 말이 되건 안 되건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실은 뉴스 또한 일종의 ‘후일담’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가 가장 극적인 것은 아닐까? 극적(劇的)이고 극단적(極端的)이다. 현실이 상상력의 세계를 압도해 버린 지 이미 오래다.

 

 

판도라, 이미 ‘극적’인 재난 영화

 

영화는 최대한 여러 각도에서 개연성을 검토해야 하는 매체다. 관객을 가장 열심히 설득해야 하는 매체 특성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해 연말 개봉한 박정우 감독의 ‘판도라’는 극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은 개연성의 영역이 아니라 그냥 현실처럼 비치기까지 한다. 이 무지막지한 선택을 현실의 영화 개봉으로 성사시킨 제작진의 뚝심과 열정이 놀랍다.

 

과장이 아니라, 이런 영화는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이 이미 폭발한 바 있는 일본에서는 만들어질 수 없다. 영화 ‘판도라’ 예고 영상에서도, 한 일본인 관객이 눈물을 참으며 “이런 영화를 만들어주어서 고맙다.”고 이야기한다.

 

참사 당시에도 그 뒤에도, 정작 일본 정부는 여전히 ‘후쿠시마’에 대해 비밀주의를 고수하고 있다. 핵 발전소 폭발 직후에 만들어진 일본 영화 ‘온화한 일상’(2012년) 등을 보면, 얼마나 철저하게 국민을 속이고 사고 자체를 묻어버리려 하는지 느낄 수 있다.

 

마스크를 쓰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경제논리’로 덮으려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어떠한 대처도 하기 힘든 개인들의 파괴된 삶이 ‘닫힌 사회’를 여실히 보여준다. 영화 ‘온화한 일상’에 제작비를 댄 사람들의 이름은 철저히 비밀이고, 배우들도 많은 불이익을 감수하며 출연했다고 한다.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끊임없이 방사능 간접 피폭을 우려하는 것만도 괴로운데, 더 나아가 ‘우리의 현실’이 될 수도 있다고 (상상이지만) 경고하는 영화가 나왔다. 참으로 절묘한 개봉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우리 땅에 밀집해 있는 노후된 핵 발전소의 위험성에 대해 미처 깨닫지 못하는 국민이 많은 대신, ‘판도라’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배급망을 통하여 전국 영화관에서 정식으로 상영했으며, 심지어 흥행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이미 관객 4백만 명을 훌쩍 넘었다.

 

 

기계도 사람처럼 수명이 있다

 

솔직히 영화관에 가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원전을 다룬 일본 영화들처럼 ‘재난’은 말로만 나오는 수준의 구성이 아니라, 거대한 세트를 짓고 핵 발전소 폭발 장면과 온갖 위기를 초대형 규모로 보여주었다. ‘대작 재난영화!’를 보면서 펑펑 울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목이 조일 듯한 초반의 긴장감과 조바심을 풀어주며 눈물에 푹 잠기게 한다. 차라리 모든 것을 내려놓고 우는 동안, 무언가를 어떻게든 붙잡아야 한다는 의지가 솟구친다. 뭐라도 붙들고 살아남아야 한다. 당장 꺼야한다, 저 꺼지지 않을 불의 도화선이 점화되기 전에! 지금 당장!

 

영화 ‘판도라’의 내용은 어쩌면 단순하다. 줄거리는 이렇다. ‘역대 최대 규모의 강진에 이어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까지. 예고 없이 찾아온 초유의 재난 앞에 한반도는 일대 혼란에 휩싸이고, 믿고 있던 통제탑마저 사정없이 흔들린다.

 

방사능 유출의 공포는 점차 극에 달하고 최악의 사태를 유발할 2차 폭발의 위험을 막으려고 발전소 직원인 재혁(김남길 분)과 그의 동료들은 목숨 건 사투를 시작한다. 기계도 사람처럼 수명이 있다. 특히 핵 발전소는, 정해진 수명을 다하면 반드시 사고로 이어진다. 절대로 ‘안전’하지 않으며 예외란 없다.

 

하지만 영화 ‘판도라’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다. 감히 그 지옥 불 속에서 희망을 건져올린다. 그 꺼지지 않을 불 속에서도 인간만이 품을 수 있는 희망이라는 것의 실체에 대해 눈물겹게 그려낸다. 한 가닥의 희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녀린 개개인들이 나 아닌 타인을 위한 절대적 소망으로 자신을 희생하려 할 때, 희망은 놀랍도록 두터워진다.

 

희망은 한번 뭉쳐지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확인’되고 나면 삽시간에 불어난다. 희망의 두께는 종종 그 속으로 몸을 던진 이들조차 예측하지 못했을 정도로 두터워진다. 그 두터움이 모든 것을 재편시킨다. 기어이 그렇게 만들고야 만다.

 

 

절망이 희망으로 몸을 바꾸는 순간

 

희망이란 어쩌면 구체적 감각이다. 마음보다 몸이 먼저 알아보는 것은 아닐까? 시간을 입혀 숙성시켜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기다림인지도 모른 채 기다리고, 그것이 희망인지도 모른 채 희망하는, 더디고 혹독한 훈련을 거쳐야만 얻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희망은, 절망의 ‘바닥’을 짚었을 때 비로소 헤아려지는 간절함일 수도 있다.

 

아직은 이 땅을 딛고 살아야 하는 우리가 감내해야 할 몫은, 어떠한 희망도 버릴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희망을 가져도, 희망을 버려도 어차피 시간은 간다.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희망은 아무리 가느다랗더라도 질기다. 희망이 실체가 되려는 구체적 조건이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은 그 질김의 속성을 믿고 끝내 도달해 보겠다는 용기가 아닐까? 가늘지만 질긴 그 끈이 내 손에 잡힐 때까지 놓지 않겠다는 각오로 말이다.

 

그래서 신앙의 선조들은 그토록 희망의 증거를 보여주시기를 하느님께 간청했는지도 모르겠다. 희망의 증거를 조금이라도 보여주신다면, 믿음의 증거 또한 보여드리겠다는, 또는 보여드릴 수도 있다는 식의 조건부 기도를 감히 청하고 애걸하고 그러다 지쳐 쓰러져간 기록들이 성경을 채우고 있다. 인간의 나약함과 절박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대목이다. 우리는 그렇게 믿음을 스스로 저울에 달았고 눈금을 재가며 제풀에 지쳐갔다. 그것을 벗어나 다른 식으로 희망을 품어보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절박함에 기초한 조건은 희망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사실상 절망에 이미 기울어져버린 조건이다. 곧 패배할 것을 아는 이들의 것이다. 그래서 신앙의 선조들은 깨달음 이후에 또 기록하였다. 믿음과 희망은 구체적인 ‘경험’의 문제다. 자신의 삶 안에서 발견하고 느껴지는 것이어야 한다.

 

희망이란 순차적인 조건과 단계를 거쳐 도출되는 게 아님을 영화 ‘판도라’는 새삼 일깨운다. 희망은 실상 이미 내재되거나 장착되어 있는 것 가운데 (숨어)있었다. 다만 그게 희망인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알아보았을지라도 배제했다. 배제할 이유는 너무나 많았다. 산처럼 쌓인 보고서로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희망을 위해 필요한 것은 단 하나, 새로운 각오였다. 그 각오를 향해 몸을 움직여야 했다. 도망도 겉으로는 마치 몸을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 ‘판도라’는 증명한다. 도망쳐봤자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두려움이 서로를 꼼짝하지 못하게 가두기에, 그저 밟고 밟힐 뿐 아무도 도망에 성공하지 못한다. 나 혼자가 아닌 공동체를 위한 각오를 서로 다질 때만, 한 줄기 길이 비로소 열린다.

 

영화 ‘판도라’를 본 뒤 오래도록 의구심을 가졌던 로마서의 구절을 다시 찾아보았다. 어쩌면 희망이야말로 선연히 ‘눈에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 유혹에만 머물지 말고 더 큰 데를 바라보라는 비유가 아닐지 요즘 깊이 생각 중이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 김혜원 로사 - 문화평론가. 극예술을 통한 세상읽기를 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7년 2월호, 김혜원 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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