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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교황님이 축복하신 서울대교구 성지순례길: 말씀, 생명, 일치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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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16 ㅣ No.1445

[교황님이 축복하신 성지순례길 - 신앙선조의 숨결을 따라]


말씀의 길 01 - 명동대성당

 

 

서울시 중구 명동길 74

 

소한 무렵의 추운 날, 명동에 들어섭니다. 동장군도 아랑곳하지 않는 이들의 화사한 표정에서 사해동포의 향기가 물씬 배어납니다. 종현(鐘峴)에 우뚝 선 고딕 양식의 명동성당이 늘 한결같습니다. 붉은빛 벽돌이 꽁꽁 언 날을 따사롭게 합니다. 평일 오후여서인지 성당 안이 참 고요합니다. 1898년 5월 29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축성된 성전에서 주님을 독차지하는 기쁨을 누립니다.

 

대성전 앞쪽의 문을 열고 나서자, 바로 아래편에 지하 소성당으로 들어가는 앙증맞은 쪽문이 보입니다. 제대 바로 뒤 유리문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옵니다. 실내가 어두워서 빛이 더욱 찬란합니다. 그야말로 암울한 시절을 환히 밝히던 분들의 유해가 안치된 묘역입니다. 기해박해(1839) 때 순교한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 김성우 안토니오, 이 에메렌시아와 무명 순교자, 그리고 병인박해(1866) 때 순교한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가 우여곡절 끝에 이곳에서 쉬고 있습니다.

 

1800년, 천주교에 호의적이던 정조가 승하하자 노론 벽파인 정순대비가 어린 순조를 대신해 섭정했습니다. 대비는 천주교 신자가 많은 남인 시파를 몰아내기 위해 사악한 천주교를 토벌하라는 척사윤음(斥邪綸音)1)을 반포했습니다. 그때부터 온 나라에서 박해가 시작됐습니다. 세 성인 사제들은 신자들의 수난을 막기 위해 포도청에 자진 출두해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2)을 받았습니다. 또한 최양업 신부의 부친인 성 최경환은 포도청에서 태형으로, 성 김성우는 당고개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두 분 평신도와 두 분 사제 역시 영광의 화관을 썼습니다. 이분들의 피가 지금도 한국천주교회의 심장을 용솟음치게 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마태 26,69-75)

 

베드로 사도조차도 예수님이 붙잡혀간 날, 너무 두려운 나머지 하룻밤에 세 번씩이나 스승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선조들도 그 한마디면 죽음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망치지도 않았고, 천주를 부인하지도 않았습니다. 모진 고문과 배고픔과 목마름 속에서도 주님을 용감하게 증거한 순교자들 앞에서 고개를 떨어뜨리는 까닭입니다. 양떼를 보호하기 위해 자진해 순교한 세 목자의 사랑에 목이 멥니다. 양 냄새 나는 사제가 돼야 한다고 권고하는 오늘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순교자의 붉은 피는 현대에 들어와 압제와 불의에 맞서 싸우는 원천이 됐습니다. 깔끔하게 단장된 성당 언덕길을 내려오며 오늘의 백색순교와 더불어 인권과 정의를 되새겨봅니다. 소담스런 함박눈이 내리면 좋을 날입니다.

 

1) 척사윤음(斥邪綸音) : 사악한 천주교를 치라는 왕의 문서

2) 군문효수형 : 죄수의 목을 베어 군문(軍門)에 높이 매달아 놓는 형벌 [2015년 1월 18일 연중 제2주일 서울주보 5면, 김문태 힐라리오(가톨릭대학교 교수)]

 

 

말씀의 길 02 - 김범우의 집터

 

 

서울시 중구 을지로 66

 

저 멀리서 봄내음이 나는 듯한 입춘입니다. 24절기 중 첫 번째니 한 해의 맏계절이라고나 할까요.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바로 앞에 있는 김범우의 집터에도 봄기운이 돕니다. 하지만 집은 오간 데 없고 자그마한 푯돌만 서 있습니다. ‘장악원(掌樂院)터’(음악의 편찬 교육행정을 맡았던 조선왕조 관아자리)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예악을 중시했습니다. 예는 천지의 질서를 바로잡는 일이었고, 악은 천지를 화합케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김범우(金範禹) 토마스는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1784년에 이벽의 인도로 천주교에 입교해 굳은 믿음을 갖게 됐습니다. 1785년 봄에 지금은 명동이라 불리는 이 명례방 집에서 이벽, 이승훈, 권일신,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등과 함께 전례와 교리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민간의 풍속을 담당하던 형조의 금리(禁吏)들이 수상쩍은 이들이 모여 있는 걸 보고 들이닥쳤던 겁니다. 듣도 보도 못한 성경과 십자고상과 성화들을 보고 놀란 관리들은 즉시 이들을 체포했습니다. 이른바 ‘을사추조1)적발사건’이 터졌던 겁니다.

 

형조판서 김화진은 이들이 명문가의 양반들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훈방했습니다. 그러나 김범우만은 중인인데다 집주인이라서 옥에 가두고 문초했습니다. 천주교가 무슨 학문인지, 성물들은 어디에 쓰는 건지 캐물었습니다. 그리곤 ‘다시 그런 모임을 갖지 않겠노라, 천주라는 말은 입에 올리지도 않겠노라 맹세하라’며 형벌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김범우는 굴하지 않고 천주 존재를 증언했습니다. 형조판서는 처음 겪는 일이라 더 이상 어찌하지 못하고 곤장을 쳐서 귀양 보냈습니다. 그는 귀양지에서도 큰소리로 기도문을 외우고, 천주의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형벌의 후유증으로 출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종하고 말았습니다. 한국천주교회 순교자의 맏이가 된 겁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 너희는 행복하다!’(마태 5,11)는 진복팔단(眞福八端), 즉 참 행복의 경지에 들어선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음악으로 천지를 화합하고자 했던 장악원 자리가 예사롭지 않아 보입니다. 천주의 뜻에 따라온 천하의 사람들이 남녀노소, 부귀빈천, 신분 여하를 가리지 않고 조화롭게 지내며 하느님 나라를 꿈꾸던 자리였으니 말입니다. 김범우의 집터 가까이에 세워진 명동성당이 명례방 공동체를 역사적으로 기념하는 까닭입니다. 첫 절기인 입춘 날, 첫 순교자의 집 대문에 큼지막하게 붙었음직한 입춘축2)이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春光先到吉人家’(봄빛은 성품이 바르고 복된 사람의 집에 먼저 온다)

 

1) 추조 : 조선 시대에 법률·소송·형옥·노예를 관장하던 형조

2) 입춘축 : 입춘에 봄이 온 것을 축하하거나 기원하며 쓴 글 [2015년 2월 15일 연중 제6주일 서울주보 5면, 김문태 힐라리오(가톨릭대학교 교수)]

 

 

말씀의 길 03 -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이벽의 집 터)

 

 

서울시 종로구 청계천로 105

 

만물이 기나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생동하는 경칩이 지났습니다. 청계천에도 파르스름한 봄빛이 오르고 있네요. 지금은 장충단공원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는 수표교가 있던 자리에는 목재 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바로 옆 길가에 ‘한국천주교회 창립 터’(1784년 겨울 수표교 부근 이벽의 집이던 이곳이 세례식이 최초로 거행되어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된 터이다.)라는 푯돌이 서 있습니다.

 

이벽은 1754년에 경기도 광주의 양반집에서 태어났습니다. 벼슬길에 나가기보다 공부하길 좋아해 아버지의 눈 밖에 나기도 했습니다. 1779년(정조 3년) 무렵 주어사라는 절에서 권철신이 주도하고 정약전 · 김원성 · 권상학 · 이총억 · 이윤하 등의 남인 소장학자들이 참여한 강학회가 열렸습니다. 이벽은 한문서학서 강학1)이 마련됐다는 소식을 나중에 들었습니다. 그는 한겨울에 앵자봉(667m) 반대편의 천진암에 도착해 호랑이의 위협과 엄동설한의 추위를 무릅쓰고 밤중에 산을 넘어 주어사에 도착했다니 입이 벌어질 뿐입니다. 백리 길을 마다않고 한 걸음에 달려간 그 뜨거운 열기를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이를 계기로 이벽은 중국에 가는 이승훈에게 부탁해 1784년 베이징의 베이탕(北堂)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오게 했습니다. 이벽의 열정이 한국천주교회의 문을 연 셈이었지요.

 

그 후 이벽은 이승훈이 가지고 온 서적을 통해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는 한편, 1784년 9월경 수표교 근처 자신의 집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울러 권철신 · 권일신 · 정약전 · 정약종 · 정약용 등의 양반들과 김범우 · 지황 · 최창현 · 최인길 · 김종교 등의 중인들에게 복음을 전해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그야말로 그의 집은 한국 천주교회의 산실이 됐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가 강학회를 했던 주어사와 세례식을 했던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 하품리의 해발 400m 지점에 있는 주어사 터에는 몇십 년 전에 숯가마로 쓰였다는 둥근 석축만 남아있습니다. 하얀 바탕에 검은 페인트로 ‘주어사, 천주교 강학회 장소’라 쓰인 자그마한 철판만 외로이 서 있습니다. 불교와 유교와 천주교가 원만하게 융합하던 조화로운 기운만 남아있을 뿐이지요. 이 땅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신자공동체를 이루었던 이벽의 집터에서도 진리를 갈망하던 젊은 학자들의 뜨거운 숨결만 느낄 뿐입니다.

 

세례를 받으며 긴 잠에서 깨어난 신앙선조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시냇물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비둘기의 날갯짓이 힘찹니다. 어디선가 우렁찬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1) 강학 : 조선 유학자들이 공통된 주제를 놓고 서로 묻고 답하며 토론하던 학문연구 방법 [2015년 3월 15일 사순 제4주일 서울주보 5면, 김문태 힐라리오(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말씀의 길 04 -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서울시 종로구 창경궁로 296-12 

 

꽃내음이 물씬 풍기는 대학로는 늘 밝고 활기찬 젊은이들로 붐빕니다. 골목길로 접어들어 언덕을 오르자 낙산의 수수한 자연색이 눈에 가득 찹니다. 1855년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배론의 성요셉 신학교를 모태로 발전해온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입니다. 사제 양성의 못자리로 예전의 소신학교와 구별하기 위해 대신학교라 부르던 곳입니다. 

 

신학생들이 학업에 매진하는 진리관과 육체를 단련하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대성당 앞으로 갑니다. 탁덕(鐸德)1)의 본보기인 한국인 최초의 사제이자 한국교회 성직자의 주보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상이 우뚝합니다. 성당에 들어서자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은은한 빛이 스며듭니다. 장방형 성당은 단순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줍니다. 굳건하게 보이는 고상 옆 감실 바로 아래,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가 모셔진 돌함이 있습니다. 

 

“김대건! 그대는 몇 나라 말을 할 줄 아는가?” 

 

“중국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라틴어를 아오.” 

 

심문하던 관리들이 깜짝 놀라며 수군거렸습니다. 

 

“저자는 열여섯 살 때 마카오에 가서 유학하고 온 인재요. 여러 나라 말을 구사할 뿐만 아니라, 서양의 학문을 꿰뚫고 있지요. 앞으로 조선을 위해 큰일을 할 수 있는 보물 같은 자입니다.” 

 

잠시 후 관리들이 부드러운 낯빛으로 속삭였습니다. 

 

“그대가 천주를 버린다면 높은 벼슬을 내려 재능을 맘껏 발휘하도록 하겠다. 세상의 온갖 영예와 호사를 누리게 될 것이다.” 

 

고문을 당해 피땀으로 범벅이 된 김대건 신부님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번개처럼 스쳐 지나갈 이 세상의 권력과 재산과 명예가 무슨 소용 있겠소? 내가 조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이 땅의 백성들이 천주를 알아 영혼을 구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일이오.” 

 

김대건 신부님은 결국 1846년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습니다. 1821년에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솔뫼) 양반집에서 태어난 이 땅의 첫 번째 사제는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순교했습니다. 하느님을 증거하다 치명한 증조부인 김진후 비오 복자, 부친인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의 뒤를 따른 것이지요. 오늘날 성인 사제가 되고자 하는 신학생들과 이곳을 거쳐 간 많은 사제들의 사표(師表)가 된 겁니다. 최민순 신부님이 작사한 대신학교의 교가에서 꿋꿋한 사제의 기상이 유감없이 드러납니다. 

 

“진세를 버렸어라 / 이 몸마저 버렸어라 

깨끗이 한 청춘을 / 부르심에 바쳤어라” 

 

1) 탁덕(鐸德): 덕을 행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신부의 옛말 [2015년 4월 19일 부활 제3주일 서울주보 5면, 김문태 힐라리오(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생명의 길 05 - 가회동성당(석정 보름우물터)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 57과 석정 보름우물터(계동길 110) 

 

새로 정비된 계동과 가회동 일대의 북촌 기와집들이 정겹습니다. 신록과 같은 젊은이들이 고색창연한 마을을 거닐고 있어 순례길이 더욱 즐겁습니다. 가회동성당 내의 한옥과 인형으로 만들어진 신앙선조들의 모습을 보며 2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조선에서 평신도들이 사제 역할을 하는 가성직제도1)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선교사를 보내주겠노라 약속하였습니다. 마침내 1794년 12월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윤유일과 지황의 안내를 받아 조선에 입국하는 데 성공하였지요. 주문모 신부는 한양 북촌에 있는 최인길의 집에 머무르며 조선말을 익혔습니다. 그는 이듬해 4월 5일 부활대축일에 이 땅에서 최초의 미사성제를 올렸습니다. 

 

“HOC EST ENIM CORPUS MEUM QUOD PRO VOBIS TRADETUR(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루카 22,19 참조)이 1,800여 년이 지난 조선 땅 한양에서 재현되었던 겁니다. 라틴어 미사라 어리둥절했겠지만, 성체를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신앙선조들의 감격과 떨림은 지금도 남아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신입교우였던 한영익의 밀고로 윤유일 바오로와 지황 사바가 체포되어 6월에 순교하였습니다. 주문모 신부는 여회장인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하였습니다. 명도회를 만들어 정약종을 회장으로 삼아 교리와 전교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때 정약종이 지은 최초의 한글교리서인 「주교요지(主敎要旨)」가 크게 소용되었지요. 주문모 신부는 여러 지역을 은밀히 다니며 사목활동을 하는 한편, 정조의 아우인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에게 세례를 주어 전교의 폭을 넓혀갔습니다. 그처럼 사제와 평신도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불과 5년 만에 신자 수가 4천여 명에서 1만여 명으로 늘어나게 되었지요. 주문모 신부는 1801년 신유박해가 터지자 중국으로 피신하던 중 발길을 돌려 의금부에 자수하여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습니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강완숙 골룸바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가회동성당에서 5분 거리에 석정 보름우물이 있습니다. 이 물을 마시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속설이 있었다니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우물이었던 모양입니다. 주문모 신부는 이 우물물을 길어 세례를 주고 미사를 드렸답니다. 이 물로 세례성사를 받아 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고, 성체성사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으니 다산과 풍요의 우물이 맞네요. 허리를 잔뜩 굽혀 돌로 둥글게 쌓은 우물 안을 들여다봅니다. 오늘날 신자 수는 5,560,971명으로 우리나라 인구의 10.6%에 달하지만, 주일미사 참례자 수는 20.7%에 불과한 우리 교회의 모습처럼 어둡습니다. ‘성체성사는 우리 신앙의 요약이고 집약’(가톨릭교회교리서 1327항)이라는 가르침이 무색합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4) 

 

1) 가성직제도 : 평신도들이 성직자의 고유한 성무인 미사와 고해 등의 성사를 집전한 일 [2015년 5월 17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서울주보 5면, 김문태 힐라리오(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명의 길 06 - 우포도청 터와 좌포도청 터

 

 

종로구 청계천로 1 / 종로구 돈화문로 26

 

초여름의 햇살이 무척 따가운 날입니다. 뜨겁고 모진 형벌을 받았던 분들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포도청 자리를 찾아 나선 길이라 더 그런 걸까요. 포도청(捕盜廳)은 글자 그대로 도적을 잡기 위해 만들어진 관청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지방의 중죄인을 압송하여 조사한 후 상급기관인 형조와 의금부로 넘기는 일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창덕궁을 기준으로 하여 각각의 포도대장이 관할하는 좌·우포도청이 있었습니다. 종로3가 옛 단성사 앞에 좌포도청 자리를 알리는 푯돌이, 광화문 네거리 옛 동아일보 사옥 앞에 우포도청 자리를 알리는 푯돌이 서 있습니다. 

 

1795년에 북촌에서 주문모 신부를 돕던 최인길 마티아, 윤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가 천주교인으로는 처음으로 좌포도청에서 문초를 당한 뒤 순교하였습니다. 관리들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죄인들을 몰래 때려죽인 겁니다. 이른바 을묘박해가 터진 것이지요. 그 후로 포도청은 최양업 신부의 부친인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열세 살 난 성 유대철 베드로를 비롯한 성인 22위, 복자 5위, 하느님의 종 23위가 치명한 곳이 되었습니다. 특히 우포도청은 조선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를 탄생시킨 장소로 기록되었습니다. 1879년에 충청도 공주에서 드게트 신부, 김덕빈 바오로, 이용헌 이시도로와 함께 체포된 복자 이병교 레오가 치명한 곳이거든요. 

 

순교자들은 모진 고문을 당한 후 매 맞아서, 목 졸려서, 굶주려서, 혹은 병들어서 치명하였습니다. 살이 타고 뼈가 으스러지는 참혹한 고문을 받은 뒤, 감옥에 돌아와 배가 고파 바닥에 깔아 놓은 가마니를 뜯어먹고 이를 잡아먹었다고 하니, 그 비참한 광경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천주를 모른다는 말을 하고 십자고상을 밟고 지나가거나 성화에 침을 뱉으면 바로 풀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앙선조들은 끔찍한 수난을 피하지 않았던 겁니다. 

 

발걸음을 되돌려 포도청을 관할하는 순례지인 종로 성당 앞에 섭니다. 성당 외벽에 설치된 포도청 순교자 부조인 ‘수난과 영광’이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 찬란한 하느님 나라로 가는 여정을 떠올리게 합니다. 순교는 신앙을 증거하기 위하여 죽음을 당하는 일이며, 죽음에 직면하여 신앙의 의미와 진리를 효과적으로 증거하는 행위입니다. 좌·우포도청 푯돌 앞에 서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고자 하는 순교 정신을 지니고 있는지 묻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나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고 살아가고자 하는 백색순교 정신 말입니다. 

 

태초에 나를 있게 하시고 오늘의 나를 살게 하시는 창조주 하느님의 존재를 증거하는 한편,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쓰시는’(시편 118,22 참조) 하느님의 권능을 증거하며 산다면 고난 끝에 치명한 순교자들의 뒤를 따르는 길이 아닐까요. [2015년 6월 21일 연중 제12주일(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남북통일 기원 미사) 서울주보 5면, 김문태 힐라리오(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생명의 길 07 - 서소문 순교성지

 

 

중구 칠패로 5 

 

‘땡 땡 땡!’ 

 

성큼 다가온 여름, 햇빛이 쏟아져 내리는 맑은 날입니다.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차단기가 내려옵니다. 그리고 잠시 후 기차가 지나갑니다. 서소문 건널목입니다. 서울에 아직도 이런 곳이 있다니요. 어린 시절에 불렀던 동요가 떠오릅니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잔다. … 기차소리 요란해도 아기아기 잘도 잔다.’ 해방 직후, 혼란 속에서도 무럭무럭 자라는 아기의 평화스러운 모습을 잘 그린 노래지요. 

 

건널목 바로 옆에 서소문 순교성지가 보입니다. 죄인이 목에 쓰던 칼을 상징한 세 개의 순교자 현양탑이 우뚝 서 있습니다. 중앙 현양탑에 붙은 부조가 도드라져 보입니다. 예수님이 매달린 십자가 옆에 칼을 쓰거나 묶여있는 이들의 표정이 결연합니다. 

 

조선시대에 장터였던 이곳은 공식적인 사형집행 장소였습니다. 죄인들은 포도청에서 문초당하고, 형조나 의금부로 이송되어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 후 전옥서에 갇혀 있다가 이곳에 끌려와 처형되었던 것이지요. 죄인의 옷을 벗기고 꿇어 앉힌 뒤, 턱밑에 나무토막을 받쳐놓고 목을 쳤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으니 파급효과가 컸을 겁니다. 

 

바로 이 서소문 네거리 광장은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때 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장소였습니다. 이름이 확인된 순교자만도 100명이 넘거든요. 그 중 정하상 바오로를 위시한 성인이 44위, 강완숙 골룸바를 비롯한 복자가 25위나 됩니다.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광화문 광장에서 시복미사를 거행하기에 앞서 이곳을 참배한 까닭입니다. 

 

서소문은 한양의 사대문과 사소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맹자에 따르면 사람은 하늘이 내려준 본성인 인의예지를 지니고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그 본성을 잘 지키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었던 것이지요. 그에 따라 사대문의 이름도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숭례문(남대문), 홍지문(원래의 북대문은 숙정문)으로 정해졌던 겁니다. 서소문의 이름에 ‘의’자를 넣어 소의문(昭義門)이라 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현양탑 한 가운데 새겨진 성경 말씀이 절묘합니다. 

 

‘복되어라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마태 5,6) 

 

그런 의로운 분들에 대한 배려일까요. 그 앞에 시원한 물이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분수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오늘의 크고 작은 어려움을 굳건한 믿음으로 이겨내고자 하는 마음이 샘솟는 듯합니다. 의로운 사람 열 명만 있어도 죄악에 빠진 소돔을 파멸시키지 않겠다고 하신 하느님의 말씀(창세 18,16-32 참조)이 귓전을 때립니다. 또다시 기차가 지나갑니다. 기찻길 옆에 서서 박해 속에서도 하느님을 증거하며 평화롭게 눈감았던 신앙선조들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남북분단 70년, 세월호 참사 1년, 메르스 사태 등으로 어수선한 정국을 평화롭게 잠재울 수 있는 의로움을 그려봅니다. [2015년 7월 19일 연중 제16주일 서울주보 5면, 김문태 힐라리오(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생명의 길 08 - 중림동 약현성당

 

 

중구 청파로 447-1 

 

‘덥다 더워.’ 

 

삼복더위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서울역과 충정로역 사이에 있는 중림동 약현성당으로 향합니다. 유구한 역사에 걸맞지 않는 좁은 정문이 순례자를 맞습니다. 가파른 약현 언덕길을 올라가자 붉은 벽돌의 아담한 성당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비로소 세속에서 벗어난 고즈넉한 기운이 맴돕니다. 1891년 종현의 명동성당에 이어 서울의 두 번째 본당으로 설립되었지만, 건물은 명동성당보다 6년 앞선 1892년에 지어졌습니다. 1886년 조불조약 이후에야 천주교 박해가 끝났습니다. 그러자 순교자들의 피로 얼룩진 서소문 네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성당을 세웠던 것이지요. 이 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벽돌 교회 건축물로, 사적 제25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방화로 소실되어 2000년에 새로 지어졌지만 말입니다. 

 

이곳에는 16위 성인의 유해와 함께 서소문 밖 순교자 44위 성인과 27위 복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어 더욱 특별한 느낌을 줍니다. <서소문 순교성지 전시관>에 들어섭니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다’라는 문구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불과 40여 년 전인 1974년에 선종한 신부님이 신앙선조들과 함께 나란히 소개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약현 본당 출신으로 1923년에 사제서품을 받은 김선영 요셉 신부입니다. 용산 성심신학교의 교수와 황해도 장연 본당의 보좌신부를 거쳐 중국 선교에 나섰던 사제입니다.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 흑룡강성 해북진 선목촌에 파견되어 교포들을 사목하였던 것이지요. 1949년에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외국인 추방령이 내렸지만, 김선영 신부는 ‘양떼를 두고 떠날 수 없다’며 하얼빈 본당을 지켰습니다. 결국 1951년에 중국 공산당은 교황과 단절하고 독자적으로 세운 교회인 애국회에 가입하라고 탄압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선영 신부는 이를 거부하여 반혁명분자 죄목으로 15년형을 받아 투옥되었습니다. 참혹한 옥살이가 끝난 뒤에는 노동으로 사상을 개조한다는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복역하다 선종하고 말았습니다. 

 

김선영 신부는 중국 공산당의 핍박을 피해 조국으로 돌아올 수도 있었습니다. 또는 그들이 주도하던 애국회에 가입하여 양떼들을 돌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호히 치명의 위협에 맞서는 한편, 달콤한 회유도 떨쳐 버렸습니다. 착한 목자의 길을 고집했던 것이지요. 25년간의 옥고와 강제노동도 하느님을 향한 그의 굳은 뜻을 꺾지 못했습니다. 순교자의 뜨거운 열정은 조선시대나 현대가 다르지 않은가 봅니다. 지금 김선영 신부는 ‘근현대 신앙의 증인’에 선정되어 시복 추진 중에 있습니다. 

 

전시된 김선영 신부의 사진과 암울한 시기에 척박한 땅에서 사용하던 초라한 유품들이 남다르게 다가옵니다. 그의 행적을 찾아 지난 10여 년간 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 등의 만주 일대와 북경 등지를 누볐던 기억이 새롭습니다.(김문태, 「둥베이는 말한다」, 가톨릭출판사, 2012 참조) 삼복더위에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묵시 3,15)이라는 말씀이 뜨끔한 건 웬일일까요. [2015년 8월 16일 연중 제20주일 서울주보 5면, 김문태 힐라리오(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일치의 길 09 - 당고개 순교성지

 

 

용산구 청파로 139-26 

 

대지를 뜨겁게 달구던 태양의 기세가 꺾였습니다. 모기의 입이 삐뚤어진다는 처서를 보내고, 제비가 강남으로 돌아간다는 백로도 넘긴 탓이지요. 세월의 변화를 그 누가 막을 수 있을까요. 풀벌레 소리가 고즈넉한 당고개 순교성지에 들어섭니다.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하고 있지만, 고층 아파트에 파묻혀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합니다. 순교한 지아비의 등에 엎드려 아기를 안은 채 흐느끼는 여인의 그림이 순례자의 발길을 잡습니다. 처절한 영광이 찬란하게 빛나네요. 

 

이곳은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성지입니다. 기해박해 때 서소문 광장에서 장사하던 이들은 음력설 대목을 위해 죄인들을 처형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래서 관리들은 이곳으로 자리를 옮겨 1840년 1월 31일(음 1839년 12월 27일)과 2월 1일 이틀에 걸쳐 열 명의 천주교인들을 참수하였던 겁니다. 그때 순교한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홍병주 베드로와 홍영주 바오로 형제, 이문우 요한, 손소벽 막달레나, 이경이 아가타, 이인덕 마리아, 권진이 아가타, 최영이 바르바라 이렇게 아홉 명은 1984년 여의도광장에서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아내이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어머니인 이성례 마리아만은 제외되었지요. 2014년 8월 16일에 비로소 광화문광장에서 복자품에 올랐거든요. 

 

이성례(1800년-1840년) 마리아 가족은 1839년 7월 31일에 교우촌의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습니다. 9월 11일에 남편이 곤장을 맞아 포도청 감옥에서 순교하였고, 이어 막내인 젖먹이가 품에서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 나머지 어린 네 자식들마저 다 굶겨 죽일 수는 없는 일이었지요. 그녀는 모성애를 이기지 못하고 배교한 뒤, 자식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큰아들을 마카오로 유학 보낸 죄목으로 다시 형조로 끌려갔습니다. 이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홀몸으로 투옥된 그녀는 온몸으로 천주를 증거하였던 겁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곤장, 가마니라도 뜯어먹어야 하는 배고픔, 침조차 말라버린 타는 듯한 목마름, 그리고 감옥 밖에서 들려오는 6살에서 15살 난 어린 네 자식들의 울부짖음을 의연히 견뎠습니다. 천주를 향한 열정이 그녀를 다시 순교의 길로 이끌었던 것이지요. 

 

모든 걸 다 포기해도 어머니라는 이름만은 버릴 수 없는 게 여인의 마음 아닐까요. 모든 어머니가 그렇듯 복자 이성례 마리아도 처음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녀는 다시 천주의 자녀로서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아무도 ‘이것이 저것보다 나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때가 되면 좋은 것으로 판가름 나기 때문 이다.”(집회 39,34)라는 말씀이 가슴에 파고듭니다. 

 

늘 변하지만, 언제나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는 계절의 변화가 예사롭지 않게 보입니다. 때가 되어 어김없이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가 새로운 날입니다. [2015년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서울주보 5면, 김문태 힐라리오(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일치의 길 10 - 새남터 순교성지

 

 

용산구 이촌로 80-8

 

전철 1호선을 타고 용산에서 노량진 쪽으로 가다 보면 한강대교 북단 서쪽에 묘한 건물이 나타납니다. 우람한 3층 한옥에 3층의 뾰족한 종탑이 희한하기 그지없습니다. 언뜻 보면 불교의 대웅전(大雄殿) 같기도 하고, 유교의 대성전(大成殿) 같기도 하네요. 2층에 내걸린 ‘천주교’라 쓰인 현판을 보고서야 비로소 이곳이 성당이라는 걸 눈치챕니다. 난간에는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성당’이라고 써놓았고요.

 

새남터는 억새와 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입니다. 조선 초기에는 군사 훈련장이었고, 성삼문 등 사육신과 같은 국사범들을 처형하던 곳이었지요. 이곳에서 1801년 신유박해 때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순교하였고, 이어 1839년 기해박해 때 성 앵베르 주교와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가, 1846년 병오박해 때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성 현석문 가롤로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성 베르뇌 주교, 성 브르트니에르 신부, 성 볼리외 신부, 성 도리 신부,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 성 정의배 마르코, 성 우세영 알렉시오 등이 순교하였습니다.

 

1987년에 완공된 성당의 왼편 광장에는 한복을 곱게 입고 긴 비녀를 꽂은 성모상이 이채롭습니다. 치마저고리를 입은 성모 마리아가 축 늘어진 예수를 안고 있는 대성당의 피에타 조각도 마찬가지고요. 대들보와 서까래가 모두 드러난 대성당의 천정도 이와 다르지 않네요. 순교 성인 아홉 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기념관의 선교사 모형도 인상적입니다. 베로 짠 상복을 입고 방갓을 쓰고 얼굴 가리개까지 들고 있습니다. 박해 시기에 외국 신부들이 온몸을 가릴 수 있는 기막힌 차림새였지요. 조선 시대에는 상주에게 관대하였으므로 길에서 포졸들에게 검문받을 염려도 적었을 거고요. 그야말로 한국적인 면모가 물씬 풍기는 성지입니다.

 

기념관을 나서자 사제로서 최초로 우리나라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의 흉상이 서 있습니다. 그 바로 옆에는 ‘대원군 척화비’가 자리하고 있군요. 흥선대원군이 외세 침입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1871년 4월에 이러한 비석을 전국 각지에 세웠거든요. 문구가 단호합니다.

 

‘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丙寅作辛未立’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하자는 것이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우리 자손만대에 경계하여 병인년에 만들어 신미년에 세운다.)

 

천주를 믿고 그 뜻대로 살고자 하였던 만여 위가 넘는 분들이 순교한 까닭입니다. 당시 우리 신앙 선조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불사른 신해 진산사건을 계기로 참혹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 땅의 이념과 풍습을 거스른 죄였지요. 그때 서로 다른 학설이나 교리를 배워서 절충하고자 하는 습합(習合) 정신이 있었다면 어떠하였을까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선교 지역에서는 그리스도교 전통에 있는 것들 외에 각 민족의 관습에서 발견되는 입문식의 요소들도, 그리스도교 예식에 적용될 수 있는 데까지 받아들일 수 있다.”(전례헌장 65항 참조)고 밝혔지요. 이 땅에 토착화된 한옥 성당과 한복 차림의 성모상이 파란 가을하늘과 어우러져 참 곱습니다. [2015년 10월 18일 연중 제29주일(전교 주일 ·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서울주보 5면, 김문태 힐라리오(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일치의 길 11 - 절두산 순교성지

 

 

마포구 토정로 6

 

“쳐라! 서양 오랑캐의 발자국으로 더럽혀진 땅은 그들과 통하는 사악한 무리의 피로 씻어내야 한다.”

 

흥선대원군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합니다. 1866년 병인 양요가 터진 직후의 일이었습니다. 연초에 조선에서 프랑스 신부들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자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극동 함대 소속 군함 3척이 9월에 양화진을 거쳐 서강까지 올라왔던 겁니다.

 

이어 10월에는 군함 7척이 강화도에 상륙해 고려성을 습격하였지요. 프랑스 군인들은 국립도서관이었던 외규장각 안에 있던 귀중한 책들과 은괴와 동종 등의 보물들을 약탈 하였습니다. 게다가 건물에 불까지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애초에 프랑스 군함이 조선에 들어온 명목은 자국의 선교사들을 보호하겠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프랑스 군대가 저지른 행위는 종교를 빌미로 삼아 식민주의적 동양침략정책을 펼친 것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었지요. 설상가상으로 1871년에는 미국의 아시아 함대 사령관인 로저스가 이끄는 군함이 강화도를 침략한 신미양요가 터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실세였던 흥선대원군은 외국 군대와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되는 천주교 신자들을 살육하기 시작하였던 겁니다. 실제로 박해를 피해 조선에서 탈출한 리델 신부가 통역관으로, 그리고 조선 신자 몇몇이 물길 안내인으로 프랑스 함대의 조선 침략을 도왔거든요. 이에 따라 천주교 신자들은 프랑스 군함이 들어왔던 양화진에서 목이 베어졌습니다. 이름이 확인된 이곳의 처형자 22명 가운데 외적을 불러들인 혐의자가 무려 13명이나 되었으니까요. 그들에게는 군율을 어긴 사람을 먼저 처형한 뒤에 임금에게 아뢰는 선참후계(先斬後啓)가 적용되었습니다. 서양 오랑캐와 내통한 이들을 참혹하게 죽여 뭇사람에게 본때를 보이고자 하였던 것이지요.

 

양화나루 위쪽으로 우뚝 솟은 이 언덕의 원래 이름은 잠두봉이었습니다. 마치 누에가 머리를 들고 있는 것 같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답니다. 강변에 우뚝 솟아있어 용두봉 또는 들머리라고도 불리었고요. 그런데 박해시기를 지나면서 수많은 순교자들이 목 잘려 죽은 곳이라는 뜻으로 절두산(切頭山)이 된 것이지요.

 

병인박해로부터 150년이 지난 오늘, 절두산 순교성지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분주하게만 보입니다. 성지 오른쪽 바로 옆 당산철교 위로 2호선 전철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발아래 강변북로에는 수많은 자동차가 누에처럼 꼬리를 물고 가고 있고요.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처럼 바쁘게 살아가는 것일까요. 지금 우리는 어디에 목숨을 바치고 있는 것일까요. 유유히 흐르는 한강만이 그 옛날의 가슴 아픈 사연을 전해주는 듯하네요. 초겨울의 싸늘한 강바람 속에 신앙 선조들의 신음과 비명과 절규가 실려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치명한 뒤에 천주를 직접 뵈리라는 지복직관의 희망이 묻어있기에 슬프지는 않습니다.

 

‘천주님! 저희를 긍휼히 여기소서.’ [2015년 11월 15일 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서울주보 5면, 김문태 힐라리오(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일치의 길 12 - 용산 신학교 성당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19길 49

 

대설 절기를 훌쩍 넘긴 추운 날입니다. 성심여자고등학교에 들어섭니다. 삼삼오오 걷던 여학생들의 인사에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따뜻해지는군요. 오르막길 한 가운데에 선 예수성심상이 두 팔을 벌려 순례자를 맞이합니다. 기둥에 쓰인 말씀이 가슴에 파고듭니다.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라.”(요한 15,9 참조)

 

예수님은 이어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고 하셨지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해온 일들과 지금 하고 있는 일들, 그리고 ‘서울의 천주교 순례길’을 찾아 나선 일도 내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라는 생각에 숙연해집니다.

 

예수성심상 바로 뒤의 가파른 언덕에 3층 건물이 우뚝 서있습니다. 바로 용산 신학교 성당입니다. 붉은 벽돌 벽면, 검은 빛 벽돌 기둥, 아치형의 기다란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고풍스럽습니다.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자 놀랍게도 단층이네요. 언덕을 깎지 않고 그 위에 그대로 건물을 지었기 때문이군요. 출입문 위에는 자그마한 종이 매달려 있습니다. 예전에는 성당마다 종탑이 있었고, 실제로 삼종기도 바칠 때 밧줄을 잡아당겨 종을 쳤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 성당은 명동 성당과 중림동 약현 성당을 설계한 파리 외방전교회의 코스트 신부가 설계하여, 1902년에 축성되었답니다. 그래서 그 아담한 규모까지도 중림동 약현 성당을 빼닮았군요. 그 옆으로 역시 앞에서 보면 3층이지만, 옆으로 돌아가면 2층인 성심기념관이 있습니다. 1892년에 건립되어 신학교 교사로 쓰던 건물입니다. 성당과 마찬가지로 붉은 벽돌과 검은 벽돌로 지어졌습니다. 건물 중앙에 놓인 계단을 올라 1층에 들어서자 좁은 통로와 마루가 잘 어울립니다. 큰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환하고도 따스한 느낌을 주고요. 이 교사와 성당은 사적 제25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모방 신부는 방인(邦人) 사제를 배출하기 위해 1836년에 16살 무렵의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를 마카오로 보내 교육시켰습니다.(김문태 「세 신학생 이야기」 바오로딸 참조) 이 십여 년 뒤인 1855년에는 충청도 배론에 성 요셉 신학교를 세웠습니다. 이 땅에서 사제를 양성해야 한다는 일념에서 이루어진 거사였지요. 그러나 병인박해로 폐교되었고, 1885년에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엉골(범골)에 예수 성심 신학교가 새로 개교하였습니다. 그리고 2년 뒤에 바로 이곳으로 이전하였던 것이지요. 이곳에서 105명의 사제가 배출되었다니 그 유래가 깊습니다.

 

주님이 뽑아 세운 목자는 어떤 모습일까요. 프란치스코 교황이 제시한 ‘양 냄새 나는 사제’겠지요. 문득 최민순 신부의 ‘두메꽃’이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 살고 싶어라 / 한 송이 꽃으 로 살고 싶어라 /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 첩첩 산중에 /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 햇님만 내 님만 보신다면야 / 평 생 이대로 / 숨어서 숨어서 피고 싶어라’ [2015년 12월 20일 대림 제4주일 서울주보 5면, 김문태 힐라리오(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일치의 길 13 - 왜고개 성지

 

 

서울시 용산구 한강대로40길 46

 

한겨울답게 바람이 찹니다. ‘대한이가 소한이네 집에 가서 얼어 죽는다.’는 말이 실감 나는 날입니다. 우람한 군종 교구청 건물이 보이네요. 여느 성지와 달리 조금은 낯선 느낌이 듭니다. 군종교구가 한국천주교회 16개 교구 중 가장 늦은 1989년에 출범하여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군인을 대상으로 한 특수한 교구여서 그런 걸까요.

 

교구청 옆 계단을 올라 국군 중앙 주교좌 성당에 들어섭니다. 무소부재의 하느님께 인사를 드리고 나섭니다. 성당 바로 옆에 ‘왜고개 성지’ 현판이 소박하게 매달려 있습니다. 왜고개는 와현(瓦峴), 와서현(瓦署峴)으로 불리던 곳으로 옛날부터 기와와 벽돌을 굽던 곳이었답니다. 명동성당과 중림동약현성당을 지을 때도 이곳 벽돌을 가져다 썼다고 하는군요. 협소한 성지의 간이지붕 밑에 선 십자고상이 더욱 외롭게 보입니다. 세운지 오래되지 않은 순교자 현양비에는 이곳에 묻혔던 열 분의 순교자 명단이 새겨져 있네요.

 

박순집 베드로는 몇몇 신자들과 함께 1866년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베르뇌 주교와 성 브르트니에르 신부, 성 도리 신부, 성 볼리외 신부, 성 우세영 알렉시오, 프티니콜라 신부, 푸르티에 신부의 시신을 찾아 이곳에 안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 요한과 성 최형 베드로의 시신도 이곳으로 옮겨왔습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일이었지요. 그의 용감한 거사로 왜고개는 새남터 순교자 7위가 33년간, 서소문 순교자 2위가 43년간 안식하는 성지가 되었지요. 아울러 이곳은 1846년 병오박해 때 순교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이 미리내로 이장되기 전에 잠시 묻혔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에 안장되었던 순교자 8위가 1984년에 성인품을 받는 영광스러운 땅이 되었던 겁니다.

 

신라의 원광 법사는 삶의 도리를 묻는 화랑들에게 세속 오계를 내려주었습니다. 그 중 ‘임전무퇴(臨戰無退)’하라는 계율은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지요. 전쟁터에 나가 물러서지 않고, 두려움 없이 앞으로 돌진하는 것이 군인의 기상이니까요. 우리의 순교자 역시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곤장을 맞아가며 모진 고초를 당하고, 얼굴에 회칠을 하고 귀에 화살을 꽂은 뒤 머리가 잘리거나, 머리채가 기둥에 묶인 뒤 참수당하는 고통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순교자들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용감하게 천주와 예수 그리스도를 온 세상에 증거하였지요. 하나밖에 없는 귀한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면서요.

 

그토록 장렬하게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을 관원 몰래 빼내 안장한 박순집 베드로의 용기도 대단합니다. 그의 목숨을 건 용기와 두려움 없는 신심으로 인해 순교자 153명의 행적이 환히 밝혀졌거든요. 지금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 『박순집 증언록』 3권에 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16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난 자손답게 용맹무쌍하였던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이곳에 군종교구청이 들어선 것도 우연은 아닌 듯합니다. 성지를 나서는 순례자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건 웬일일까요. [2016년 1월 17일 연중 제2주일 서울주보 5면, 김문태 힐라리오(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일치의 길 14 - 노고산 성지

 

 

서울시 마포구 백범로 35

 

15년 만에 맹위를 떨쳤던 동장군이 저 멀리 나앉은 날입니다. 매서운 추위를 겪고 나서인지 입춘 바람에서 봄기운을 느낍니다. 이희승의 ‘딸깍발이’라는 수필이 웃음을 자아냅니다. 동지 설상(雪上) 삼척 냉돌에 변변치 못한 이부자리를 깔고 누운 가난한 선비가 “요 괘씸한 추위란 놈 같으니, 네가 지금은 이렇게 기승을 부리지마는, 어디 내년 봄에 두고 보자.”하고 별렀다던 이야기 말입니다. 대자연의 흐름을 누가 거스를 수 있을까요.

 

예수회가 1960년에 개교한 서강대학교에 들어섭니다. 교정 뒤편의 야트막한 노고산 쪽으로 올라가자 예수회를 창설한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 동상이 보입니다. 스페인 영주의 아들로 태어나 군인이 되어 부귀영화를 좇다 병상에서 ‘그리스도의 생애’라는 책을 읽고 회심한 후, 영신수련의 길을 열었던 삶을 되새겨봅니다. 정문 쪽으로 내려가자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의 순교 현양비가 서 있습니다.

 

1795년 이 땅에서 첫 미사를 드렸던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였습니다. 그 뒤 1834년에 여항덕 신부가 잠시 입국하였으나, 1836년에 모방 신부가 들어와 본격적으로 사목하였지요.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1831년에 조선교구의 독립을 승인하고, 파리 외방전교회가 관할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등 세 신학생이 마카오로 유학 가게 된 것도 모방 신부의 결단으로 이루어진 쾌거였지요. 초대 조선교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에 들어오지 못한 채 병사하였고, 1837년에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가 입국하였습니다. 세 성인은 박해가 심해지자 스스로 관가에 나아가 1839년 9월21일 새남터에서 함께 군문효수형을 당하였습니다. 포악한 늑대로부터 양떼를 지키고자 한 착한 목자의 마음이었지요. 이들의 시신은 교우들이 20여 일 만에 빼내 노고산에서 4년간 쉴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1835년 형조 옥에서 병사한 성 이호영 베드로, 1839년 포도청 옥에서 곤장을 맞고 치명한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도 이곳에 잠시 매장되었지요. 또한 1866년 서소문 밖에서 참수된 성 전장운 요한,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은 성 정의배 마르코도 여기에 잠시 묻혔고요. 이곳에 안장된 순교자들은 1984년에 나란히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2014년말 한국의 천주교 신자는 인구의 10.6%인 5,560,971명이나 됩니다. 그리고 주교 36명, 신부 4,948명, 수사 1,574명, 수녀 10,160명, 신학생 1,435명, 본당 1,682개, 공소 792개로 규모도 커졌고요. 하지만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는 20.7%에 불과하답니다. 성당에 가지 말라고 위협하거나, 성사에 참여하지 말라고 막는 사람이 없는 데도 말이지요. 신앙 선조들이 피를 뿌려 세우고 지킨 교회가 대자연의 흐름처럼 다시 뜨거워지길 기원해봅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말이 귓가에 맴돕니다.

 

‘인간은 주 천주를 찬미하고 공경하고 그에게 봉사하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다.’(「영신수련」) [2016년 2월 21일 사순 제2주일 서울주보 5면, 김문태 힐라리오(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치의 길 15 - 삼성산 성지

 

 

서울시 관악구 호암로 454-16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는 말이 실감나는 날입니다. 혹독한 수난 끝에 치명한 순교성인들을 찾아 나선 길이라 그런 걸까요. 꽃샘추위에 몸이 움츠러들고, 흐린 날씨에 마음마저 가라앉는군요. 가파른 아스팔트길을 잠시 올라가자 삼성산 성령수녀회의 건물이 보입니다. 입구에 ‘천주교 삼성산 성지’라 새겨진 큰 바위가 우뚝 서있습니다. 다 왔다고 숨을 몰아쉬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성지 올라가는 길 330m’라는 자그마한 이정표가 산길을 향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서울대교구의 성지들이 대부분 도심 한 가운데 있어서 접근성이 좋을 뿐만 아니라, 길도 평탄하니까 놀랄 만도 하지요.

 

돌계단을 밟고 한참 올라가서야 성지에 도착합니다. 구두를 신은 발이 자꾸 질퍽한 흙길에 미끄러지고, 울퉁불퉁한 바위를 헛딛네요. 문득 십자가를 메고 해골터라는 뜻을 지닌 골고타를 오르며 세 번씩이나 넘어지셨던 예수님이 떠오릅니다. 잠시나마 그 고통의 한 자락을 느껴봅니다. 사순 시기라 그 아픔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성모상 앞에 자그마한 무덤 셋이 나란히 누워있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한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의 묘소입니다. 1868년 양화진에서 순교한 박바오로와 몇몇 교우들은 새남터에 묻혔던 세 순교자의 시신을 몰래 빼내 노고산에 암매장하였지요. 1843년에 박바오로는 안전을 위해 유해를 자신의 선산인 삼성산으로 이장하였던 겁니다. 마침내 세 성인의 유골은 1901년에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를 거쳐 명동성당 지하묘소로 옮겨졌지요.

 

머리 위에서 요란한 소리가 납니다. 올려다보니 비행기가 바로 눈앞에 날고 있습니다. 김포공항이 여기서 멀지 않으니 당연한데도 새삼스럽게 보이는군요. 불현듯 모든 움직이는 물체는 목적지가 있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일찍이 운동증명으로써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였답니다. 움직이는 사물은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므로 자연의 움직임이나 변화에는 근원적인 원인이 있다고 하였지요. 그리고 그 처음 원인이 바로 하느님이라고 하였던 겁니다. 궁극적 존재인 하느님이 계시니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있다는 결론이지요.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이곳에서 안식을 취하던 프랑스의 세 사제는 이역만리의 낯선 땅에 와서 선교하다 모진 고통 끝에 치명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에 올라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뒤를 따른 것이지요. 세 성인은 그들의 종착점을 또렷하게 알고 있었던 겁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지향점을 지니고 있는지요. 또한 우리의 삶은 하느님을 드러내는 데 마땅하고 옳은 움직임이지요. 봄을 거스르지 못하는 나무에 매달린, 앵베르 주교의 글이 가슴에 파고듭니다.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러 왔소!’ [2016년 3월 13일 사순 제5주일 서울주보 5면, 김문태 힐라리오(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생명의 길 16 - 경기감영 터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 9

 

하얀 목련과 붉은 진달래가 활짝 핀 날입니다. 춘삼월 만화방창의 계절이라는 말이 실감 나는군요. 예전에 서대문, 즉 의로움을 돈독하게 한다는 돈의문(敦義門)이 있던 자리 아래로 적십자병원이 보입니다. 그 바로 앞 도롯가에 자그마한 표지석이 서 있네요.

 

‘경기감영은 경기관찰사가 행정 사무를 보던 관청이다. 경기감영에서는 민정, 군정 및 사법 등의 업무를 맡았으며, 관하의 수령을 지휘 감독하였다.’

 

오늘날의 경기도청 격인 이곳은 1801년 신유박해 무렵에 경기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을 압송하여 문초하던 관청이었습니다. 관할지역에서 배교하지 않는 신자들을 상급기관인 이곳으로 이송하여 문초하였던 겁니다. 경기도 여주 출신인 복자 최창주 마르첼리노, 복자 이중배 마르티노, 복자 원경도 요한, 그리고 양근(지금의 양평) 출신인 복자 윤유오 야고보 등이 그러하였지요. 죄인을 문초하고 판결한 후 관할지역으로 돌려보내 처형하였으므로 이곳은 순교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명, 복자 조용삼 베드로만은 예외였지요.

 

조용삼은 양반집 자손으로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어려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가세가 기울어 여주의 임희영 집에서 아버지, 동생과 함께 더부살이를 하였습니다. 그는 심신이 허약한데다 외모도 볼품이 없어서 늘 놀림거리였답니다. 서른이 되도록 장가를 못 간 것이 당연하였지요. 그러던 차에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를 만나 비로소 하느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놀라움과 기쁨도 잠시였습니다. 1800년 4월15일 부활 대축일을 지내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정종호의 집에 간 조용삼이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던 겁니다. 그는 배교하지 않으면 아버지를 죽이겠다는 위협에 잠시 마음을 바꾸기도 하였지만, 혹독한 문초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하느님을 증거하였습니다. 사실 그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세례를 받기 전이었으므로 배교를 하고 말 것도 없는 처지였지요. 천주를 모른다는 말 한마디면 당장 풀려날 수 있었던 겁니다.

 

조용삼은 여주 관아에서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아 결국 경기 감영으로 압송되었습니다. 신유박해가 터진 터라 그는 더욱 가혹한 문초를 받게 되었지요. 그는 마침내 옥중에서 세례를 받고, 3월 27일(음력 2월 14일)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박해자들을 향한 그의 목소리가 세례명인 베드로답게, 반석답게 굳건하였습니다.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천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뿐입니다.”

 

천주를 향한 그의 순결한 마음이 고을마다 하얀 목련꽃으로 활짝 피어났습니다. 그의 뜨거운 피가 온 산천에 붉은 진달래로 피어올랐습니다. 돈의문 터를 지나는 순례자의 가슴 속에도 그러한 꽃이 만발하길 빌어봅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0) [2016년 4월 17일 부활 제4주일(성소주일) 서울주보 5면, 김문태 힐라리오(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생명의 길 17 - 형조 터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17

 

신록의 계절답게 광화문 일대도 새 생명으로 파릇합니다. 분수대에서 솟구치는 물도 시원하고요. 경복궁 바로 앞에 세워진 세종대왕 좌상의 우람한 모습에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문화대국을 꿈꾸었던 시절의 영화가 배어 나오네요. 바로 옆에 오늘날 대표적인 문화예술의 장인 세종문화회관이 자리 잡고 있는 것도 우연은 아닌 듯하군요. 우리의 전통문화가 부단히 이어지고 있는 듯해 감회가 새롭습니다.

 

바로 그 언저리의 길바닥에 <형조 터>라는 표지판이 깔려있습니다. 섬뜩한 느낌이 드네요. 조선시대에 재판, 형집행, 죄수와 노비 관리 등의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이었으니까요. 1785년 봄에 명례방의 김범우 토마스 집에서 이벽, 이승훈, 권일신,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등이 전례와 교리 모임을 가졌습니다. 때마침 민간의 풍속을 담당하던 형조의 금리(禁裏)들이 수상히 여기고 들이닥쳐 모두 체포되었지요. 당시의 형조판서 김화진은 이들이 명문가의 양반들이라 모두 훈방하였습니다. 하지만 중인인 김범우는 옥에 가두고 문초하여 천주교 신자로서 최초의 죄인이 되었지요. 이후 수많은 신앙선조들이 추조라 불리던 이곳에서 수난을 당하였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형조의 감옥이 꽉 차서 당시의 형조판서 조병현이 천주교 신자들을 내보내려고 배교를 권하였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천주교 박해는 문화의 충돌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그릇된 말은 아닐 겁니다. 1791년에 모친상을 당한 복자 윤지충 바오로가 ‘조상 제사 금지령’에 따라 사촌인 복자 권상연 야고보와 함께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거든요. 이 일로 인해 유학자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군주도 없고 아비도 없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난적으로 몰았지요. 천주교의 입장에서는 이 땅의 전통적인 문화를 무시한 셈이었고, 유교의 입장에서는 서양의 이질적인 문화를 척결한 셈이었습니다.

 

하나의 종교 · 사상이 다른 종교 · 사상을 만나 서로 절충하는 습합(習合)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야기된 비극이었지요. 자신의 문화로써 상대의 문화를 누르고자 하는 압승(壓勝) 형태를 띠었던 데에 문제가 있었던 겁니다. 마침내 1939년 12월8일, 비오 12세 교황은 효심의 발로인 유교 제사가 그리스도교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교서를 발표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천주교 신자도 세상을 떠난 부모를 살아있을 때처럼 모시는 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지요.

 

교회의 토착화 노력은 오늘과 같은 다문화시대, 세계화 시대에 더욱 절실합니다. 나와 다르게 보이는 상대방의 처지와 입장을 헤아려 보듬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지요. 육백여 년 전,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이 그러하였듯이 말입니다.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할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자가 많아, 내 이를 가엾이 여겨 새로 28글자를 만드니,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 날로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다.’(「세종어제훈민정음」) [2016년 5월 15일 성령 강림 대축일 서울주보 5면, 김문태 힐라리오(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생명의 길 18 - 의금부 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47

 

까끄라기가 있는 곡식인 보리를 베고, 모를 심는다는 망종이 훌쩍 지났습니다. 노르스름한 보리의 시절이 가고, 파릇한 벼가 자라는 때가 온 겁니다. 종각의 대각선 쪽 길가에 엄중한 문구의 표지석이 서 있습니다.

 

‘의금부 터, 조선조 관리 양반 윤리에 관한 범죄를 담당하던 관아 자리’

 

의금부는 왕명을 받들어 왕족의 범죄, 반역죄, 유교의 윤리에 어긋나는 죄, 외국인을 비롯한 대외관계 범죄에 연루된 중죄인을 다스리는 최고의 사법기관이었습니다. 따라서 천주교의 주교,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 역시 이곳에서 심문을 받고 판결을 받았지요.

 

1801년 신유박해 때 이승훈, 이존창, 황사영을 비롯하여 9위의 복자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최필공 토마스, 최창현 요한,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홍낙민 루카,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윤지헌 프란치스코, 강경복 수산나가 이곳에서 심문을 받았습니다. 또한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8위의 성인인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 모방 베드로 신부, 샤스탕 야고보 신부, 정하상 바오로, 김제준 이냐시오,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조신철 가롤로,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등이 국문을 받았지요. 이어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8위의 성인인 베르뇌 시메온 주교,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신부, 볼리외 베르나르도 신부, 도리 베드로 신부, 남종삼 요한, 최형 베드로, 정의배 마르 코, 전장운 요한 등이 이곳을 거쳐갔고요.

 

흥미로운 것은 의금부에서 신문고를 주관하였다는 겁니다. 신문고는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왕이 직접 해결해주기 위하여 대궐 밖 문루 위에 달았던 북이었지요. 왕의 직속기관인 의금부 당직청에서 북을 친 자의 억울한 사연을 접수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던 겁니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은 신문고를 칠 기회조차 없었지요. 신앙 선조들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아비도 없고 군주도 없는 무부무군의 난적으로 규정되었으니까요.

 

당시의 유학자들을 비롯한 지식인들 역시 천주교를 사악한 학문으로 몰았지요. 이기경이 사악함을 물리치고 정도를 지키고자 지은 <낭유사>라는 벽위가사가 그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해줍니다.

 

‘져놈의 거동보소 쳔지간 괴물이라 / 부모를 모르거든 임군을 아올손가 / 어버이 사랑함은 도로혀 원수되니 / 이것도 사람인가 금수만 못하도다’

 

신앙선조들은 천주를 믿는다는 것 하나만으로 금수 취급을 받으며 모진 고문과 참혹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답니다. 그들의 억울함은 하소연할 곳조차 없었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용감하게 그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한 박해를 달게 받는 것이야말로 천상의 화관을 받는 일이라 여겼으니까요. 현세의 삶을 마치면 또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물의 개구리나 도랑의 물고기가 어찌 알 수 있을까요. 누런 보리가 베어진 들판에 파릇하게 선 벼가 새롭게 보이는 까닭이지요. [2016년 6월 11일 연중 제11주일 서울주보 6면, 김문태 힐라리오(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생명의 길 19 - 전옥서 터

 

 

전철 1호선 종각역 6번 출구 도로 쪽 화단

 

초복 무렵의 태양이 이글거리는 날입니다. 도심 한복판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후끈한 지열과 자동차들이 내뿜는 매캐한 연기가 가세하니 불구덩이가 따로 없군요. 보신각 맞은편 도롯가에 ‘전옥서(典獄署) 터’라는 자그마한 표지석이 서 있습니다. 화단에 심어진 회양목 사이에 있어 유심히 살피기 전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요.

 

‘조선시대에 죄인을 수감하였던 감옥으로 한말 항일의병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곳’

 

전옥서는 형조의 지휘를 받아 죄수들을 가두어 두었던 곳으로 오늘날 구치소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 선조들 역시 형조에서 심문을 받고,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이곳에 갇혀 있었지요. 좁은 옥사에 많은 사람이 수감되어 있었다고 하니 그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심지어 감방이 꽉 차면 복판에 새끼줄을 쳐놓고 죄수들을 양쪽에 나란히 눕힌 뒤 발을 그 위에 얹게 하였다고 하네요.

 

신앙 선조들은 낮에는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찢기는 고문에 시달렸고, 밤에는 옥사 바닥에 깔린 가마니를 씹어야만 하는 극심한 배고픔과 목마름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이맘 때 쯤이 아니었을까요. 곁에 있는 이의 살만 닿아도, 아니 숨결만 닿아도 한숨이 터져 나오는 삼복의 찌는 듯한 무더위가 그러하였을 겁니다. 아울러 모기와 빈대와 벼룩과 같은 흡혈 곤충들의 시도 때도 없는 괴롭힘이 그러하였겠지요.

 

신앙 선조들은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그러한 혹독한 처분을 받았던 겁니다. 그 지옥과 같은 곳에 4년 가까이 갇혀있던 분도 있었습니다. 바로 성 이호영 베드로(1803~1838년) 였지요. 그는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 누나인 성 이소사 아가타(1784~1839년)를 비롯한 식구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뒷날 한강변 무쇠막으로 이사하여 중국인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를 만나 회장이 되었지요. 그때 과거에 급제하는 꿈을 꾸고는 순교하여 천주를 만나리라 짐작하였답니다.

 

아니나 다를까요. 그는 l835년 2월 집에서 누나와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습니다. 그들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도 뜻을 굽히지 않아 결국 형조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이호영 베드로는 사형 문서에 쓰인 ‘사학죄인(邪學罪人)’을 인정하지 않았지요. 천주교는 사악한 학문이 아니라 바르고 참된 도리라고 버티자 포졸들이 강제로 손도장을 찍게 하였지만요. 그는 사형 집행이 연기되어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던 중, 1838년 11월25일 병사하고 말았습니다. 이소사 아가타도 1839년 5월24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고요.

 

불처럼 뜨거운 날, 전옥서 터에서 파랑새가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못된 고을 원에게 수난당하다 죽어서 파랑새가 되었다는 순박한 우렁각시 부부의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수난 끝에 치명한 순교자들이 희망과 행복을 상징하는 파랑새를 닮아서 그런가 봅니다. [2016년 7월 17일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서울주보 6면, 김문태 힐라리오(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말씀의 길 20 - 광희문 성지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 350

 

삼복더위가 막바지에 이른 날, 광희문 앞에 섰습니다. 여느 서울 도성의 문과 달리 사람들이 오갈 수 있도록 활짝 열려 있네요. 홍예문을 통과하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집니다. 아니 소름이 오싹 끼친다는 표현이 맞겠군요. 이 문을 통하여 실려나간 수많은 주검들의 원한이 아직도 이곳

에 남아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가 봅니다.

 

태조 이성계는 1392년에 조선을 건국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옮겼습니다. 궁궐과 종묘를 지은 뒤, 도성 둘레에 성곽을 쌓아 방어막을 쳤지요. 그리고 성곽의 동서남북에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의 사대문을 만들고, 그 사이에 혜화문, 소의문, 광희문, 창의문의 사소문을 만들었답니다. 그 중에 광희문은 장충단과 한강 사이의 수구문(水口門)이자 시체를 내보내는 시구문(屍軀門)이었지요. 조선시대에는 사대문 안에 묘를 쓸 수 없었으므로 시신을 서소문인 소의문과 남소문인 광희문을 통해 밖으로 내보냈거든요.

 

천주교를 믿다가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도 광희문을 통해 밖으로 버려졌습니다. 1846년 병오박해 때 포도청에서 교수형을 당한 성녀 김임이 데레사, 성녀 이간난 아가타, 성녀 우술임 수산나, 성녀 정철염 카타리나, 그리고 1867년 병인박해 때 포도청에서 순교한 복자 송 베네딕토와 그의 아들 복자 송백돌 베드로와 며느리 복녀 이안나 등이 그러하였지요.

 

신앙 선조들은 천주를 믿는다는 사실만으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마치 짐승처럼, 짐짝처럼 광희문 밖으로 내던져졌지요. 사실 유교를 국시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는 관혼상제가 무엇보다 중요한 예법이었습니다. 특히 상례는 매우 엄중한 절차로 진행되었지요. 임종 후 격식을 갖추어 시신을 바로잡고, 혼을 부르고, 머리를 풀고 곡하며, 부음을 돌리고, 수의를 짓고, 염을 하고, 입관하였거든요. 그 후 상여에 관을 싣고 장지에 가서 하관하고, 봉분을 만들어 때에 맞추어 제사를 드리는 것이 망자에 대한 예의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래서 조선에 몰래 입국한 프랑스의 외방전교회 신부들은 검문을 피하기 위하여 상복을 입고, 방갓을 썼던 겁니다. 당시에는 상중에 있는 상제에게 매우 관대한 분위기였으니까요.

 

신앙 선조들은 치명한 후에 상례는커녕 길거리에 버려질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천주가 온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분이며, 성자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강생하여 보속하였으며, 착한 사람은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진리를 증거하기 위함이었지요.

 

오늘날 사대문과 사소문을 잇는 18.2km의 서울 성곽길은 탐방로가 되어 많은 이들이 걷는 명소가 되었지요. 그러나 그곳에 얽힌 기막힌 사연을 아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요.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마저 내놓은 이들의 삶을 어떻게 기억할까요. 광희문 아래에 선 순례자가 두려워 몸을 옹송그리는 것은 순교자들처럼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삼복의 태양빛이 쏟아지는 광희문이 써늘한 까닭입니다. [2016년 8월 14일 연중 제20주일 서울주보 5면, 김문태 힐라리오(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일치의 길 21 - 용산 성직자 묘지

 

 

용산구 효창원로 15길 37

 

쪽빛 가을 하늘이 가깝게 보이는 산머리의 용산 성당에 들어섭니다. 사방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곳이라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네요. 성당 옆 비탈에 묘소들이 다섯 단으로 나뉘어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군요. 직사각형의 야트막한 봉분과 바닥을 덮고 있는 푸른 잔디가 평온하게 보입니다. 명당의 제일 조건이 배산임수라 하였던가요. 앞에 유유히 흐르는 한강과 잘 어울리는 풍광입니다.

 

1887년에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가 건립되면서 새남터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성직자 묘지를 만들었답니다. 그 후 이곳에 삼호정 공소가 설립되면서 4위의 주교, 64위의 사제, 2위의 신학생, 1위의 치명자 등 모두 71위가 안장되었던 것이지요. 맨 앞줄 가운데에 ‘主敎蘇公之墓(주교소공지묘)’라는 비석이 눈에 뜨입니다. 초대 조선 감목인 브뤼기에르 주교(1792~1835년)의 묘소입니다.

 

조선은 1660년에 설정된 중국 남경 교구에 속해 있었습니다. 1784년에 이승훈 베드로가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후에는 북경 교구의 구베아 주교 관할에 놓여 있었고요. 1790년에 구베아 주교는 조선에서 신자들이 성사를 집행하는 가성직제도를 금지하는 한편, 조선에 성직자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였지요. 마침내 1794년에 복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파견되었지만, 신유박해 때 순교하고 말았지요.

 

그러자 성 정하상과 성 유진길 등이 조선에 신부를 파견해달라고 교황청에 청원하였습니다.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31년에 조선대목구를 설정하고, 파리 외방전교회가 관할하도록 하였지요. 당시 파리 외방전교회도 사정이 여의치 않았지만, 방콕의 보좌주교였던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에 가기를 자청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조선대목구의 초대 감목으로 임명되었던 겁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마카오에서 출발하여 중국 대륙을 횡단하였습니다. 그는 온갖 시련을 겪으며 3년 만에 만주의 교우촌에 도착하였지만, 안타깝게도 뇌일혈로 선종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그가 개척한 길을 따라 입국한 선교사가 바로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 2대 조선 감목인 성 앵베르 주교였던 겁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는 모방 신부가 수습하여 그곳에 묻혔지만, 1931년 파리 외방전교회의 조선 전교 100주년을 맞아 지금 이 묘지로 이장하였지요.

 

치명하기를 각오하고 길을 나섰던 선교사가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땅에서 영면하게 된 겁니다. 목자를 학수고대하던 양 떼 곁에서 쉬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요. 파란 하늘 아래 누운 벽안의 이방인 사제가 부르는 찬미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하네요.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시편 23,1-2)

 

[2016년 9월 18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서울주보 1면, 김문태 힐라리오(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일치의 길 22 -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터

 

 

영등포구 여의공원로 68

 

단풍이 빨갛게 물든 날, 여의도광장의 한쪽에 마련된 공원에 들어섭니다. 우람한 세종대왕상 옆으로 자그마한 표지석이 서있군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한 이 땅의 순교자들을 성인으로 선포한 제단자리입니다.

 

‘이 땅에 빛을! 한국의 103위 순교자를 성인 반열에 올리노니, 세계 교회가 공경하기를 바랍니다.’

 

1984년 5월6일, 여의도광장에 울려 퍼졌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네요. 당시 광장을 가득 메웠던 신자들의 환호와 함성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군요. 나치와 공산 치하에서 고통받던 폴란드 출신의 교황이 남북분단과 군부독재에 신음하던 한국을 방문했다는 사실에 가슴 벅찼던 때가 생각납니다. 교황의 방한으로 분단과 분열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한 줄기 빛이이 땅에 비추기를 기대하였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원래 시복시성식은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치르는 것이 관례였지만, 우리의 경우는 교황이 직접 방문하여 이루어졌으니 더 감격스러웠지요. 7명의 교황들이 1309년부터 1377년까지 프랑스의 아비뇽에 거처하였던 때를 제외하면, 역사상 처음으로 로마 교황청 밖에서 시성식이 거행되었다고 하니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시작되자 제2대 조선교구장인 앵베르 주교는 「기해일기」를 작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1847년에 제3대 조선교구장인 페레올 주교가 「증보판 기해일기」를 완성하였지요. 이 기록을 최양업 부제가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입니다. 그 뒤 뮈텔 신부가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자료를 수집하던 중, 1890년에 제8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되면서 조사를 본격화하였지요.

 

이 자료들을 근거로 하여 교황청은 1925년 7월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79위를 시복하였습니다. 이어 1968년 10월에는 병인박해 순교자 24위를 시복하였고요. 이들은 모두 순교자였기에 복자품에 오르기 위한 기적 심사가 면제되었지요. 그 이후 1975년에 평신도사도직협의회가 103위 복자들의 시성을 추진하기로 결의하였고, 1976년 주교회의 춘계정기총회에서 103위복자들의 시성 청원서를 교황청에 제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마침내 1983년 9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03위의 시성 승인을 선포하였고, 이듬해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신앙대회와 103위 순교복자 시성식’을 위해 방한하였던 겁니다.

 

무덥고 뜨거웠던 여름을 지난 뒤에 찾아온 풀벌레 소리가 맑고 청량하네요. 모진 고문과 시련 끝에 순교한 성인들의 화관이 더욱 빛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진정한 성인 공경은 복잡한 외적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랑의 강렬한 실천에 있다’(「교회헌장」 51항)는 가르침이 귓가에 맴돕니다. 순간 성인들을 닮아 살지 못하는 순례자의 낯이 단풍잎처럼 붉게 물듭니다. [2016년 10월 16일 연중 제29주일 서울주보 1면, 김문태 힐라리오(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생명의 길 23 - 한국 천주교 순교자 124위 시복 터

 

 

종로구 사직로 16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2014년 8월16일 이곳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복자 반열에 올려 이를 온 세상에 선포하신 것을 기리고자 이 돌을 놓습니다.’

 

시복식은 1984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방한하여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시성식을 한 지 30년 만에 맞이한 경사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하여 광화문 앞에서 한국 천주교 순교자 124위의 시복 선포를 하였지요. 그리고 이듬해에 교황 방한 1주년을 맞아 염수정 추기경이 광화문 광장 바닥에 기념 표지석을 설치하였던 겁니다.

 

이 땅에서 순교한 103위의 시성은 기쁘고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컸지요. 103위 성인들은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들이었거든요. 그 이전에 치명한 순교자들이 빠졌던 겁니다. 1831년에 설정된 조선대목구는 파리 외방전교회가 관할하였는데, 이들이 주관한 순교자들의 시복시성 작업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한 이후에 집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신유박해 200주년인 2001년에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한국천주교회 차원의 시복시성 조사를 하였지요. 그리고 2009년에 교황청 시성성에 시복청원서를 정식 접수하였습니다. 1791년 신해박해 때의 윤지충 바오로를 비롯한 3위, 1795년 을묘박해 때의 3위, 1797년 정사박해 때의 8위, 1801년 신유박해 때의 53위, 1814년의 1위, 1815년 을해박해 때의 12위, 1819년의 2위, 1827년 정해박해 때의 4위, 1839년 기해박해 때의 18위, 1866년부터 1868년까지 병인 · 무진박해 때의 19위, 1888년의 윤봉문 요셉까지 124위가 시복청원 대상이었습니다.

 

성인은 전 세계 어디서나 공적으로 공경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자는 특정 교구, 지역, 국가, 또는 수도단체 안에서만 공적으로 공경할 수 있다는 차이가 있지요. 성인이나 복자가 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이상의 기적이 요구되는데, 우리의 성인들과 복자들은 모두 순교자였으므로 기적심사가 면제되었답니다. 마침내 2014년 2월7일 하느님의 종 124위를 시복하기로 결정하였다는 교령이 발표되었지요.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하여 시복식을 거행하였던 겁니다. 신앙 선조들은 하느님을 증거하다가 참혹한 시련을 겪고 치명한 곳에서 영광의 화관을 쓰게 되었지요. ‘일어나 비추어라’(이사 60,1)에 걸맞은, 빛이 되라는 의미를 지닌 광화문 광장에서 빛이 되어 다시 일어났던 겁니다.

 

햇빛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광화문 광장에 서서 맑은 하늘을 바라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103위 성인들과 124위 복자들의 삶을 본받아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을까요.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라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2016년 11월 13일 연중 제33주일 서울주보 6면, 김문태 힐라리오(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신앙선조의 숨결을 따라 24 - 서울대교구 성지순례를 마치며



동짓날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음이 양을 압도한 이 날을 사악한 기운이 판치는 때라 여겼지요. 그래서 악귀들이 싫어한다는 붉은색 팥죽을 쑤어서 집안 곳곳에 뿌리고, 이웃과 함께 나누어 먹었던 겁니다. 하지만 선조들은 밤이 가장 긴 이날을 하나의 양이 비로소 생긴다는 뜻으로 ‘일양생(一陽生)’이라 하였습니다.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이라 생각하였던 것이지요. 더 내려갈 곳이 없고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으니 이날을 아세(亞歲), 즉 작은설이라 부르며 새 희망의 잔치를 벌였던 겁니다.

1784년 이승훈 베드로가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후, 우리 교회는 심한 박해를 받아 만 위가 넘는 순교자를 배출하였습니다. 그중 103위가 1984년에 시성되었고, 124위가 2014년에 시복되었던 겁니다. 우리는 신앙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신심을 다지고는 하지요.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앞두고 서울대교구와 서울특별시가 만든 총 27.3km에 달하는 ‘서울의 천주교 순례길’은 의미가 깊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울대교구 성지순례길을 순례하는 모든 이들이 순교자의 모범과 전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깊은 친교를 이루고, 영원한 생명이라는 확실한 선물을 얻을 것이라고 믿습니다”라며 이 길을 축복하였거든요.

명동대성당에서 시작하는 순례길 1코스는 ‘말씀의 길’로 김범우의 집터, 이벽의 집터, 좌포도청 터, 종로성당, 성신교정, 석정 보름우물로 나아갑니다. 순례길 2코스는 ‘생명의 길’로 가회동성당, 형조, 우포도청 터, 경기감영 터, 서소문 순교성지로 이어지고요. 그리고 순례길 중에 가장 긴 3코스는 ‘일치의 길’로 중림동 약현성당에서 시작하여 한강을 따라 당고개 순교성지, 왜고개 성지, 새남터 순교성지, 절두산 순교성지를 걸을 수 있도록 조성되었지요. 그 사이에 의금부 터, 전옥서 터, 노고산 성지, 삼성산 성지와 같은 곳들도 있지만요.

서울의 천주교 순례길을 홀로 걷는 시간은 신앙 선조들의 숨결과 발자취를 몸으로 느끼는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지나온 길을 참회하고, 가야할 길을 희망하는 시간이었지요. 신앙선조들의 고귀한 풍모와 순교영성을 닮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무자비한 핍박과 모진 고난을 온몸으로 견디다 치명한 순교자들이 천상의 잔치를 벌이고 있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지복직관의 영광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이들의 참 행복을 짐작해봅니다.

가장 위험하고 비참한 동짓날에도 끝내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선조들의 의연함이 참혹한 고문 속에서도 하느님을 증거하였던 순교자들의 견결함과 다르지 않네요. 현실이 암울하고 위태롭다고 하더라도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자 하는 마음, 현세의 부귀와 권세에 대한 욕망을 넘어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고자 하는 몸짓이 오늘의 순교가 아닐까요. 성경 말씀이 지엄합니다.

‘의인들의 희망은 기쁨을 가져오지만 악인의 기대는 무너지고 만다.’(잠언 10,28) [2016년 12월 11일 대림 제3주일(자선주일) 서울주보 6면, 김문태 힐라리오(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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