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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뮈텔 주교와 함께하는 근대 문화 산책9: 정동(貞洞) 연회에서 만난 뮈텔 주교 - 프랑스 공사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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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6-26 ㅣ No.1570

[뮈텔 주교와 함께하는 근대 문화 산책] (9) 정동(貞洞) 연회에서 만난 뮈텔 주교


- 프랑스 공사관 편 -

 

 

제8대 조선교구장을 지낸 뮈텔(G. Mutel, 閔德孝) 주교는 교구장 임명 소식을 접한 1890년 8월 4일부터 선종하기 직전인 1933년 1월 14일까지 42년 동안 거의 매일 일기를 썼다. 이 일기에는 대한제국 말기부터 일제 강점기의 정치·사회적 상황은 물론 교회 내 주요한 사건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뮈텔 주교는 일기뿐 아니라 교구장 재직 시절 받은 편지와 전보, 명함, 각종 행사 초대장, 메뉴판, 기차표 등도 남겼는데, 이 자료가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다. ‘서울대교구 설정 200주년’인 2031년을 앞두고 본 연구소에서는 역대 교구장들이 남긴 유물을 한데 모아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작업을 하며 순교자 유해 발굴과 시복식 과정을 담은 교회 안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근대 교통, 음식, 의료 기술에 관련된 교회 밖 문화 이야기까지 나누고자 한다. - 필자 주

 

 

정동 아래 묻힌 그 시대의 기억

 

13년 전인 2010년 가을, 서울 정동길에 자리한 창덕여자중학교 운동장 아래에서 파란색 청화 안료로 장식된 서양 식기와, 짙은 노란색 유약이 도드라지는 자기 뚜껑 등이 출토되었다.1) 운동장은 정동 27-31번지 일원으로, 개항기 프랑스 공사관이 있던 자리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이전한 프랑스 공사관 터를 조선총독부에서 매입하여 서대문소학교가 들어서면서 건물터가 운동장으로 덮이게 되었다. 그리고 1973년 창덕여자중학교가 이 부지로 이전하면서 학교 운동장 부지가 되었다. 학교의 증·개축 공사를 위한 문화재 발굴 조사가 진행되면서 운동장 아래 묻혀 있던 프랑스 공사관의 약 70% 정도가 조사되어 그 시대에 실제 사용했던 유물들이 세상에 드러났다. 특히 조선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던 독특한 형태, 문양, 색상을 가진 식기들의 파편뿐 아니라 와인병 등도 출토되었다. 이 자기편(瓷器片)들은 서양 요리를 담는 식기의 조각들이었다.

 

출토된 자기 중 대부분은 백자에 청화 안료를 사용하여 국화꽃과 튤립꽃을 전사한 것이다. 그중 두 점은 자기에 찍힌 마크로 인하여 제작회사가 확인된다. 한 점은 프랑스에서 생산된 것으로 K&G 뤼네빌(Luneville)의 피닉스(Phénix) 라인 자기로 깊이가 깊고 구연부(口緣部, 아가리)가 넓은 그릇이고, 다른 한 점은 영국에서 생산된 웨지우드(Wedgwood)산으로 수프를 담는 움푹한 그릇인 터린(tureen)이다. 프랑스 공사관 부지에서 발굴된 자기들을 통해 우리는 그 시대를 들여다볼 기회가 생겼다.

 

 

프랑스 공사관에서 펼쳐진 연회

 

프랑스인인 뮈텔 주교가 조선 땅에 오기 직전까지도 조선과 프랑스는 적대관계로 긴장감을 유지해 왔으나 1886년(고종 23) 조불수호통상조약을 기점으로 우호적으로 전환된다. 조선과 외교 관계를 맺은 후 프랑스는 1888년에 수표교 근처에 외교 공관을 설립하였으나 1889년 정동으로 이전한다. 정동은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들어가면 펼쳐지는 개화기 구미 각국의 외교장(外交場)이었던 곳이다. 미국을 시작으로 영국 · 러시아 · 프랑스 · 벨기에의 공관이 들어섰고, 미국인 선교사인 알렌(H.N. Allen)과 아펜젤러(H.G. Appen zeller), 스크랜턴(M.F. Scranton)의 주택과 근대식 학교와 호텔 등이 들어섰던 정동은 서양 문화의 집합소였다.

 

정동에 자리한 프랑스 공사관에서는 해마다 7월 14일이 되면 프랑스 혁명 기념일을 맞아 연회가 열렸다. 1901년에도 어김없이 교민들을 위한 연회가 베풀어졌다. 뮈텔 주교는 이 연회에 참석하여 “우리가 지하 성당에서 벗어나 백일하에 있게 된 것은 공사 당신 덕분”이라며 감사를 전하는 축사를 했다.2)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를 거치며 12명의 파리외방전교회의 선배 신부를 잃었던 뮈텔 주교의 감회가 읽히는 대목이다.3) 이어서 푸른 잔디밭이 펼쳐진 테니스장에 44명을 위한 연회장이 마련되었다.

 

서비스는 왕궁 호텔에서 맡아 했다. … 8시 30분에 시작된 야회는 날씨 덕을 보았고 또한 4개의 전등 덕에 더욱 화려했는데, 이 전등들은 가로수 길을 비추었고, 그러나 정원 전체에 켜진 빨간 램프의 효과를 방해하지는 않았다. 노래와 횃불 행렬 후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연회는 무도회로 계속되었을 것이다. 조선인 명사들이 모두 연회에 참석했고, 또 외국인 교민들도 아주 많이 참석했다. 요컨대 축제는 매우 성공적이었다.4)

 

연회의 서비스를 맡은 ‘왕궁 호텔’은 1901년 경운궁 대안문(大安門)5) 앞에 설립된 ‘팔레 호텔(Hotel du Palais)’을 말한다. 1901년 서울의 유일한 호텔로 프랑스인이 운영한 곳이다. 이 호텔이 연회의 케이터링(catering, 음식 공급)을 맡아 진행한 것이다. 뮈텔 주교가 날씨 덕에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한 연회는 그다음 해(1902년)에는 온종일 내린 비로 실내에서 진행되었으며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더군다나 연회 당일 아침에는 철도가 불통되어 정오경부터 운행되기 시작했을 정도로 끊임없이 비가 내렸다. 그런데도 오후 9시에 열리는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뮈텔 주교는 공사관으로 향했다. 한 식탁을 주재하게 되어 있었다고 하니 식탁마다 호스트가 지정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비는 하루 종일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저녁 9시에 닿기 위해 공사관으로 갔다. 많이들 왔다. 160명 정도를 예상했었는데, 110명 정도는 될 것이라고 한다. 식당에는 군악대가 자리 잡고, 이따금 우리에게 연주를 들려주었다. 리셉션 후 현관에서 11시경까지 노래들이 있었으나, 별로 성공적은 못 되었다.…식사는 대단히 예술적으로 꾸며진 지하실에 준비되어 있었다. 4~5개의 방에 160명분의 음식이 나뉘어 차려져 있었다.6)

 

온종일 내리는 비로 예상 인원보다 50여 명이 적게 참석한 기념일 연회에서 뮈텔 주교는 20인분씩 음식이 차려진 여러 개의 방 가운데 C방으로 들어가 연회의 한 식탁을 주재하였다. 연회에는 군악대가 음악을 연주하였고, 가수의 공연도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3시간여 동안 연회에 참석한 뮈텔 주교는 무도회가 시작되기 전에 자정이 되어도 그치지 않는 비를 맞으며 정동을 출발해 명동으로 돌아왔다.

 

 

연회의 음식이 담긴 그릇은?

 

뮈텔 주교는 자국의 공사관에서 열린 연회에 빠짐없이 참석하였으며, 당시 만찬에서 제공된 음식이 적힌 메뉴를 수집해 두어 우리는 120여 년 전 프랑스 공사관에서 열린 만찬의 식탁을 재현해 볼 수 있다.7) 접으면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메뉴의 표지에는 일본의 도안을 활용한 문양이 인쇄되어 있다. ‘J.A. Lowell & Co., Boston’이 1878년 2월 제작한 판화이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이 되면 구미에서는 동아시아 문양이 실린 도안집이 활발하게 제작되어 산업 미술품의 디자인으로 적용되었다.

 

메뉴를 펼치면 1901년 7월 14일 연회의 식탁에 차려진 8개의 코스로 구성된 프랑스 요리가 적혀 있다. 코스는 오르되브르(Hors d’œuvre, 전채), 포타주(Potage, 수프), 푸아송(Poisson, 생선), 앙트레(Entrée, 전식), 로티(Roti, 구이), 레귐(Legume, 야채), 앙트르메(Entremets, 식후 디저트), 데세르(Desserts assortis, 모듬 디저트)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두 번째 코스인 포타주 즉, 수프는 콩소메(Consommé)가 차려졌다. 콩소메는 고기나 채소를 푹 끓여 고운 체에 거른 맑은 수프를 말한다. 이 수프는 어떤 모양의 그릇에 담겼을까? 정동의 프랑스 공사관 터에서 굽은 ‘팔(八)’자형으로 벌어져 있고, 몸체가 곡선으로 올라가 구연이 살짝 벌어진 형태의 손잡이가 달린 타원형 그릇이 발굴되었다.8) 몸체에 녹색의 안료로 그려진 꽃잎은 하나의 덩굴에 묶여 연결되어 있으며, 굽 외면에 일렬로 작은 꽃을 전사(轉寫)하였다. 이 그릇은 서양에서 ‘터린(tureen)’이라 불리는 그릇으로 수프나 스튜(stew), 소스 등을 담기 위한 용도로 제작된 것으로 둥근 몸체와 뚜껑이 한 쌍으로 존재한다. 발굴된 터린은 영국의 도자기 브랜드인 웨지우드(Wedgwood) 마크가 있다.9) 조선에서는 사용하지 않던 독특한 형태의 그릇이다.

 

콩소메 다음으로 전식인 앙트레가 제공되었다. 이는 식사의 메인 요리 전 또는 주요 코스 사이에 제공되는 요리를 뜻한다. 연회의 메뉴에 제공된 앙트레는 간이나 자투리 고기, 생선살 등을 갈아서 밀가루 반죽을 입혀 오븐에 구워낸 정통 프랑스 요리인 파테(Pâté)와 페이스트리(Pastry) 위에 고기 살을 얹어 만든 한 입 요리, 소고기 안심 총 3종류가 올려졌다. 이 음식들은 접시에 담겨 식탁에 놓이는 종류들이다.

 

조선의 접시는 작고 굽이 높은 편이며, 입지름이 20cm를 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서양의 접시는 납작하고 넓어 입지름이 30cm가 넘는 대형 접시도 식탁에 자주 오른다. 프랑스 공사관 터에서는 파편이라 접시의 절반만 남아 있지만 추정 입지름이 30cm가 넘는 대형 접시도 발굴되었다. 타원형 접시의 가장자리에는 청색 안료를 사용하여 굵고 가는 선을 둘렀으며, 내면에도 청색 선을 한 줄 둘렀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디자인이 음식을 더욱 돋보이게 했을 것이다. 큰 접시에 음식을 소량 담아 제공하는 상차림은 음식을 먹음직스럽게 보이도록 그릇에 올리는 방법에 있어서 조선과 서양의 차이점을 보여준다.

 

 

뮈텔 주교가 즐긴 음식은?

 

뮈텔 주교는 프랑스 공사관에서 펼쳐진 연회에서 고국인 프랑스의 익숙한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일기 전체에 수없이 발견되는 ‘식사’에 대한 기록 중 ‘맛있다’, ‘훌륭하다’, ‘좋다’라고 평가한 기록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대체로 맛에 대한 평가를 적극적으로 표현해 두지 않았다. 뮈텔 주교가 식사에 대해 맛있었다고 평가한 소수의 기록 중에는 연회 음식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소박한 식사에 대하여 맛에 대한 평가가 적혀 있는 경우가 많다.

 

“맛있게 점심 식사를 했다.”고 기록한 것은 안성의 공베르 신부 사제관에 방문했다가 돌아가는 길에 극구 사양했지만 공베르 신부가 싸주었던 음식이다.10 기차 대합실에 앉아 후배 신부가 싸준 음식을 먹으며 그 정성에 감사하는 마음이 맛으로 표현된 것으로 읽힌다.11) 또한 “아주 맛있게 들었다.”고 기록한 것은 충남 논산(論山)에 방문한 뮈텔 주교가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기차 식당칸에서 준비된 음식이 떨어져 시장기를 안고 주교관에 돌아와서 먹은 간단한 식사였다.12) 그리고 ‘음식이 좋았다’고 기록한 것은 휴일에 전차로 동대문 밖 왕비의 능인 홍릉(洪陵)까지 갔다가 내려와 주막에서 먹은 점심 식사였다. 음식은 간소했고, 가격도 저렴했지만 좋았다고 기록하였다.13) 뮈텔 주교는 성직자로서 대재(大齋, 금식)와 소재(小齋, 금육)를 지키려 노력하며 간소한 식사를 즐겨하고 맛있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을 살게 하는 음식은 시각과 후각, 미각, 촉각, 청각 등의 모든 감각으로 즐기게 된다. 혀를 즐겁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눈으로 보아서도 맛있어야 식욕이 자극된다. 시각적인 즐거움은 음식의 색이나 모양으로 느끼기도 하지만 담는 방법과 담기는 그릇에 따라서도 느껴진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끊임없이 담기는 그릇과 짝을 지어 공생해 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글을 읽는 오늘 하루만큼은 맛있는 음식이 가장 맛있어 보이게 하는 그릇에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담아 급하지 않게 천천히 음미하며 온몸에서 느껴지는 모든 감각에 귀 기울여 보자. 내 몸을 살게 하는 음식을 시간에 쫓겨 급하게 먹지 말고 아주 가끔은 온 감각을 열어두고 식사하는 시간을 가져보기를 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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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문화재연구원, 『서울 정동 유적』, 2012 발굴 보고서 참조.

 

2) 당시 프랑스 공사는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 葛林德, 1853~1924)였고, 재임기는 1887~1890년과 1895~1906년이었다.

 

3) 기해박해(1839년) 때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는 3명으로 앵베르 주교, 샤스탕 · 모방 신부이며, 병인박해(1866년) 때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는 9명으로 베르뇌 · 다블뤼 주교, 위앵 · 오메트르 · 브르트니에르 · 도리 · 볼리외 · 푸르티에 · 프티니콜라 신부이다.

 

4) 『뮈텔 주교 일기』, 1901년 7월 14일 자.

 

5) 덕수궁(德壽宮)의 정문이다. 광무 1년(1897)에 고종이 명례궁(明禮宮, 현 덕수궁)을 옛 이름인 경운궁(慶雲宮)으로 다시 부르게 하고, 1906년 4월에 그 정문인 ‘대안문’을 대한문(大漢門)이라고 고쳤다.

 

6) 『뮈텔 주교 일기』, 1902년 7월 14일 자.

 

7) 1901년 7월 14일 프랑스 공사관 프랑스 혁명 기념일 연회 메뉴(「뮈텔 문서」 1901-44. 가로 8.3×세로 12.5cm).

 

8) 고려문화재연구원, 『서울 정동 유적』, 2012, 144~151쪽.

 

9) 웨지우드는 1759년 영국 버슬렘(Burslem)에서 시작된 영국의 대표적인 도자기 브랜드로, 세계의 유명 왕실에서 애호하던 도자기였다.

 

10) 공베르(A. Gombert, 孔安國, 안토니오, 1875~1950) :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1900년 10월 9일에 한국에 입국한 뒤 안성(安城)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안성, 평택, 천안 등지의 16개 공소를 사목 관할하였다. 1950년 납북되어 죽음의 행진 중 옥사하였으며, 현재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로 시복 시성이 진행 중이다.

 

11) 『뮈텔 주교 일기』, 1904년 10월 5일 자.

 

12) 『뮈텔 주교 일기』, 1913년 9월 3일 자.

 

13) 『뮈텔 주교 일기』, 1901년 9월 30일 자.

 

[교회와 역사, 2023년 6월호, 글 남소라 모니카(한국교회사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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