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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아직도, 여전히 또한 앞으로도 시노달리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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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5-16 ㅣ No.703

아직도, 여전히 또한 앞으로도 시노달리타스 (1) 아직도 시노달리타스?

 

 

시노달리타스(sinodalitas)라는 생소한 어휘가 교회 안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지 벌써 5년째이다. 국제신학위원회의 『La sinodalità nella vita e nella missione della Chiesa(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가 한국어로 번역된 2019년 이래로 지금까지 마치 습관이 되어버린 것처럼 수없이 반복되어 말하고 있는 시노달리타스이다. 더구나 시노달리타스를 주제로 하는 ‘제16차 세계주교시노드’를 위한 지역교회 차원에서 진행된 교구 시노드를 경험하며, 교구를 막론하고 한국천주교회 전체가 시노달리타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 운영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라파엘 루시아니(R. Luciani)에 따르면 시노드는 시노달리타스를 가장 명확하게 경험할 수 있는 장(場)이다. 따라서 시노드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단순하게 시노드의 의사 결정 과정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여 최종 결의안과 문헌 작성에 기여했다는 것이 아니라 시노드 안에서 상호 경청과 공동 식별, 그리고 공동 결정의 과정 속에서 시노달리타스를 경험하며 체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현실도 과연 그러한가? 교구 시노드를 통해 마땅히 배우고 체득했어야 하는 시노달리타스는 실제 우리 교회 안에서 어느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가?

 

이러한 유형의 질문과 성찰은 왜 ‘아직도, 여전히 또한 앞으로도’ 시노달리타스를 계속해서 언급해야 하는 현실적인 이유를 알려준다. 간단히 말하자면 아직까지 시노달리타스와 가깝지 않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바로 시노달리타스가 교회의 신원과 정체성, 그리고 사명과 활동의 본질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제라르 로세(G. Rossé)와 세바스티아노 핀토(S. Pinto)는 사도행전에서 아홉 차례나 그리스도교를 ‘길’(ὁδός: 호도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시노달리타스를 교회 공동체의 상황과 조건에 따라 취사선택(取捨選擇)이 가능한 옵션이 아니라 ‘같은 길을 함께 걷는’(σύνoδοι: 쉬노도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유전자에 새겨진 고유한 특성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고 사도적이며 ‘시노드적’이고 반드시 ‘시노드적’이어야 한다. 시노달리타스는 교회를 교회답게 하고 사제를 사제답게, 수도자를 수도자답게, 그리고 평신도를 평신도답게 한다. 따라서 시노달리타스를 아직도 말하는 것은 교황 프란치스코의 개인적인 열의나 이 시대의 상황 때문이 아니라, 제삼천년기만이 아니라, 성령께서 강림하셨던 오순절 이래로 하느님께서 기대하시는 교회 공동체 건설의 신적 명령에 응답하는 것이다. [2023년 5월 14일(가해) 부활 제6주일 대전주보 3면,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한산주임)]

 

 

아직도, 여전히 또한 앞으로도 시노달리타스 (2) 시노달리타스, “함께 걷는 여정, ‘함께’와 ‘여정’ 중에 무엇이 먼저?”

 

 

시노달리타스를 흔히 “함께 걷는 여정”이라고 표현한다. 시노달리타스에 대한 논의의 시초에서부터 보편적으로 통용되어 왔을 만큼 모두가 동의하고 인정하는 정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함께 걷는 여정”이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모두가 “함께 걷는 여정”이라고 말을 하면서도 그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여전히 부족한 것이 작금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함께 걷는 여정”인 시노달리타스는 ‘함께’를 뜻하는 전치사 ‘쉰’(σύν)과 ‘길’을 의미하는 명사 ‘호도스’(ὁδός)가 합성된 단어인 ‘시노드’에서 파생되었다. ‘시노드’를 어원(語源)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시노달리타스를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한 두 가지 측면을 보여준다. 바로 ‘쉰’(함께)과 ‘호도스’(길)이다. 이는 전치사와 명사라는 품사에 관한 진술이 아닌 시노달리타스의 이해와 구현을 위하여 ‘함께 있는 생활’과 ‘길을 걷는 활동’ 가운데 어느 것에 우선순위와 가치를 두느냐의 차원이다. ‘함께’에 방점을 둔다면 하느님 백성의 친교 공동체의 건설에 힘을 쏟겠지만 ‘길을 걷는 활동’을 우선한다면 교회의 운영과 회의절차 그리고 권한과 규범을 강조하게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S. Curro(살바토레 쿠로)는 우선적으로 ‘함께’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함께’가 ‘여정’ 앞에 자리하는 것은 문법적으로 명사를 수식하기 위함이 아닌, 여정을 걷기에 앞서서 선행되어야 하는 상태 혹은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온전하게 ‘함께’할 때에만 하느님께서 기대하시는 여정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노달리타스의 여정은 홀로 가는 길이 아니라 모두가 여정의 동반자가 되어 나아가는 길이다. G. Costa(자코모 코스타)는 “빠르게 길을 걷기 위해서 누군가를 내버려두고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시노달리타스’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하고 말한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라는 아프리카 속담과 같이 시노달리타스에 있어 ‘함께’는 가장 중요한 차원이다. 그리고 이 ‘함께’는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들끼리 함께 걷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로 교회에 생명을 주시고 교회와 함께 동행하시며 인도하시는 성령과 우선적으로 ‘함께’하는 것을 말해 준다. 성령께서 ‘함께’하지 않으시면 아무리 신자들 간에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여 잘 지낸다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적 모임이나 집회 그리고 사회적 단체에 불과하다. 따라서 “함께 걷는 여정”인 시노달리타스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약속하신 성령과 ‘함께’, 그리고 우리가 ‘함께’하고 걷는 여정이다. [2023년 5월 28일(가해) 성령 강림 대축일(청소년 주일) 대전주보 3면,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한산주임)]

 

 

아직도, 여전히 또한 앞으로도 시노달리타스 (3) 시노달리타스가 꿈꾸는 ‘함께’의 모습

 

 

시노달리타스는 하느님의 백성이 ‘함께 걷는 여정’으로 여정을 떠나기에 앞서 먼저 ‘함께’하는 데에 우선적 가치와 순위를 부여한다. 왜냐하면 시노달리타스가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에서 샘솟아 친교로 생명을 얻고 친교를 향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노달리타스의 ‘함께’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를 담아내고 드러낸다. 실제로 ‘함께’한다는 것은 그저 단순한 의견의 종합과 협의의 수준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 여정을 걷는 동반자들의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우선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며, 신자들을 만나는 것이고, 세상을 만나는 것이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복음의 기쁨』 8항에 따르면, 이러한 만남은 하느님과의 만남을 그 시작으로 한다. “풍요로운 우정으로 꽃피우는 하느님 사랑과 만남으로써, 또는 그 사랑과 새롭게 만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고립감과 자아도취에서 벗어나게” 되어 다른 이들에게 그리고 세상을 향해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도미니코 마로네(D. Marrone)는 루카복음이 잃어버린 예수님을 찾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마리아와 요셉의 발걸음을 ‘Synodìa’(시노디아: 여정의 공동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 근거하여, 시노달리타스를 사람들 안에 그리고 세상 안에 계신, 아직 드러나지 않은, 예수님을 찾아서 함께 나가는 발걸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시노달리타스가 말하는 ‘함께’는 하느님의 사랑에 마음을 열어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다른 이들과 함께하고, 그들을 거부감 없이 여정을 함께 걷는 길동무로 받아들이고 존중하며, 이들의 행복을 추구하는 형제적 친교를 통해 이루어진다. 기능과 역할만을 강조하며 부속품처럼 여기는 합병이나 획일화를 추구하며 무조건적으로 강요되는 물리적 형태의 병합이 결코 아니다. 미켈레 줄리오 마샤렐리(M. G. Masciarelli)에 따르면 시노달리타스의 ‘함께’는 ‘가까이 다가감’과 ‘거리를 유지함’을 모두 포함하는 세련되고 정교한 개념이다. ‘함께’한다는 것은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 누구도 돕지 못하고 구원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며 또한 이 ‘가까이 다가감’은 숨 막히게 하고 질식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편안하게 숨을 쉬면서 창의적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올바른 공간을 제공하는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함께’는 ‘함께’해야 할 대상을 바로 보게 하고 바로 알게 한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어 다른 이를 배척하지 않고 자신과 똑같은 하느님 자녀의 품위와 존엄성을 지닌 인격체로 받아들이며 공감대를 형성하여 어우러지게 한다. 그 안에서는 어느 누구도 익명(匿名)과 무명(無名)으로 남지 않고 본래의 자기 자신을 완성할 수 있다. [2023년 6월 11일(가해)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대전주보 3면,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한산주임)]

 

 

아직도, 여전히 또한 앞으로도 시노달리타스 (4) 시노달리타스, 교황 프란치스코의 바람

 

 

시노달리타스는 제16차 세계주교시노드에서 주제로 선정될 만큼, 교회가 식별해야 하는 오늘의 시대 징표 가운데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통찰한 대로 우리들이 살아가는 오늘은 ‘변화의 시대’를 넘어서 새로운 ‘때’로 넘어가는 ‘시대의 변화’를 특징으로 한다. 전례없이 획기적이고 중차대한 이‘때’에 시노달리타스는 끊임없는 쇄신으로 부름 받은 교회에게 하나의 도전이자 동시에 골든찬스라 할 수 있다.

 

시노달리타스는 교회의 쇄신을 바라는 교황 프란치스코가 제작한 신조어나 창작물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담론의 핵심주제로 부각되는데 그의 공로와 기여가 가장 컸음은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사변적이고 이론적으로 시노달리타스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구체적인 사목의 현장에서 겪었던 삶과 체험에 바탕을 두고 신학적이고 사목적으로 성찰하고 숙고한 바를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노달리타스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교회에게 주어진 쇄신의 기회를 백분 살릴 수 있는 올바른 지침이 될 수 있다.

 

2015년 10월 17일, 세계주교시노드 설립 60주년 기념 연설에서 교황 프란치스코는 시노달리타스를 가리켜, 가장 먼저 “하느님께서 제삼천년기의 교회에 기대하시는 여정”이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교회의 구성적 차원”이라고 확실하게 표현하였다. 이에 대하여 라파엘 루치아니(R. Luciani)는 “시노달리타스는 단순히 교회의 구성적 차원일 뿐만 아니라 또한 구성하는 차원”이라고 첨언하며 시노달리타스가 지닌 역동성의 현재성을 드러내었다. 즉, 시노달리타스를 살아가는 ‘지금’의 가치와 그에 대한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진술은 시노달리타스에 대한 가장 확실하면서도 명확한 이해에 도달하게 한다. 이를 바탕으로 시노달리타스를 정의한다면 ‘하느님께서 제삼천년기에 기대하시는 교회를 구성하는 차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는 구체적인 “생활방식과 활동방식”(『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 6항)이 시노달리타스의 방식인 것이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고백처럼 “평신도와 사목자와 로마의 주교가 모두 함께 걸어가는 여정은 말로는 표현하기 쉬운 개념이지만 실천하기에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교회 구성원 각자가 하느님께서 기대하시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활동할 때 하느님께서 기대하시는 교회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023년 6월 25일(가해)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대전주보 3면,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한산주임)]

 

 

아직도, 여전히 또한 앞으로도 시노달리타스 (5) 알기 어렵고 혼란스러운 시노달리타스?!

 

 

시노달리타스에 관한 명확한 정의 가운데 하나는 ‘교회의 구성적 차원’이다. 언뜻 보면 아주 쉽게 이해될 법하지만 ‘교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따라 다양하게 풀이될 수 있다. 실제로 현실에서 접하는 교회는 거의 대부분이 ‘본당’이며 그보다 크게는 ‘교구’이지만 교회는 단일 교구 차원을 넘어서 한국 교회, 아시아 교회 더 나아가 보편 교회를 아우른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구성적 차원인 시노달리타스 역시 다양하고 다채로운 수준으로 이해되고 인식되어진다. 시노달리타스는 좁게는 개별 교회 즉, 특정한 지역에서 구체적으로 자리하는 교회의 친교와 관련될 뿐만 아니라 넓게는 교회‘들’의 친교(communio Ecclesiarum), 더 나아가 ‘교회 전체’(Ecclesia tota) 또는 ‘보편 교회’(Ecclesia universa)의 친교와 관계된다. 그리고 정서적인(affetive) 차원과 실제적인(effetive) 차원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는 내부(ad intra)와 외부(ad extra)의 방향성에 따라 교회 ‘안에서의’ 시노달리타스와 교회‘의’ 시노달리타스를 구별하기도 한다.

 

이처럼 시노달리타스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의미와 해석이 가능한 다원적이고 다층적인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 안에서 시노달리타스라고 말하는 내용들 가운데에는 진위 여부를 의심할 만한 것들을 심심치 않게 마주할 수 있다. 교황청 시성성 장관인 마르첼로 세메라로(M. Semeraro) 추기경은 이러한 현실을 한탄하며 “시노달리타스는 최근 몇 해 동안 매우 빈번하게 마치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때때로는 적절하지 않은 의미와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진단하였다. 그가 애석하게 여긴 현실의 모습들은 모두 오용(誤用)과 남용(濫用)으로 초래된 것들로 결코 시노달리타스가 아님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

 

첫째, 시노달리타스는 하나의 슬로건이 아니다.

둘째, 시노달리타스는 이미 실현되었다.

셋째, 함께 걷는 여정인 시노달리타스는 가벼운 산책이 아니다.

넷째, 시노달리타스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다.

다섯째, 시노달리타스는 쉽고 빠른 지름길이 아니다.

여섯째, 시노달리타스는 주교 단체성이 아니다.

일곱째, 시노달리타스는 교회를 민주주의화시키는 길이 아니다.

 

‘시노달리타스가 아닌 것들’을 살펴보며 왜곡과 오해를 극복할 때, 그제야 비로소 ‘함께 걷는 여정’의 제대로 된 첫걸음을 내딛게(primerear) 될 것이다(『복음의 기쁨』 24항, 참조). [2023년 7월 9일(가해) 연중 제14주일 대전주보 3면,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한산주임)]

 

 

아직도, 여전히 또한 앞으로도 시노달리타스 (6) 시노달리타스, 거창한 슬로건이 아니다

 

 

시노달리타스는 불과 얼마 전까지 교회 안에서 가장 요란하게 울려퍼졌지만 이제는 민망할 정도로 외침의 소리도 그 관심도 작아지고 사그라지고 있다. 마치 생명이 다해 버린 유행처럼 그렇게 지나가는 듯하다. 교황 프란치스코를 통해 오늘날에 교회에 뿌려진 시노달리타스가 뿌리 내리고 자라기도 전에 벌써 말라가는 이러한 문제적 상황의 배경에는 시노달리타스에 대해 말만 하고 있던 현실이 자리했음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그동안 시노달리타스는 어떤 구호(口號)처럼 다루어졌다. 시노달리타스라고 말할 수 없는 경우, 예를 들어 형식적이고 무분별한 회의와 모임에도 슬로건처럼 요란스럽게 외쳤을 뿐 공동체든 개인이든 구체적인 행동과 실천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시노달리타스는 교회에 바라는 요구를 집약시킨 거창한 슬로건이 결코 아니다. 그저 말만 한다고 시노달리타스가 실현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주세페 루제리(G. Ruggieri)는 “시노달리타스를 말한다는 것은 교회 역사 안에서 있었던 공의회나 시노드와 같은 사건이나 행사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생활’의 고유한 특성을 드러내는 영역을 다루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노달리타스는 하느님의 백성이 이루어가는 친교를 살아가는 구체적인 생활과 활동의 방식으로 구체화되어야만 한다. 자코모 카노비오(G. Canobbio)는 “시노달리타스를 어떤 정서나 감정, 정신으로 그리고 지나치게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이해하며 말할 때 그 의미는 모호해질 뿐만 아니라 아무 효용가치가 없는 헛된 기대를 품게 된다. … 혹여라도 이러한 기대에 빠지게 되면 교회 안의 시노달리타스의 현실에 크게 실망”할 것이라고 말한다.

 

시노달리타스는 교회 생활에서 구체적인 방식으로 실현되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 세계주교시노드 예비문서는 시노달리타스를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10가지의 핵심 주제를 말해 주고 있다. “1) 여정의 동반자, 즉 함께 걷는 이들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2) 편견을 갖지 않는 열린 처신과 마음으로 경청하는 것이다. 3) 각자가 생각하는 바를 담대하게 표현하고 말하며, 4) 하느님의 말씀을 함께 듣고 성찬례를 함께 거행하는 것이다. 5) 교회의 사명에 대한 공동 책임을 갖고, 6) 교회 안에서 그리고 세상 안에서 대화하고, 7) 다른 그리스도교 교파들과 대화한다. 8) 교회 권위에 대한 존중과 보편 사제직을 통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9) 함께 식별하고 함께 결정한다. 10) 시노달리타스로 양성되고 성장한다.”

 

하느님의 백성 모두가 시노달리타스를 통합적이고 구체적으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교회가 직면한 시대의 도전을 넘어설 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제삼천년기에 기대하시는 교회 건설에 함께 참여할 것이다. [2023년 7월 23일(가해) 연중 제16주일(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 대전주보 3면,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한산주임)]

 

 

아직도, 여전히 또한 앞으로도 시노달리타스 (7) 시노달리타스와 교회의 민주주의

 

 

친교에서 샘솟아 친교를 향해 나아가는 시노달리타스는 때로 교회 안에서 사목자와 평신도 간의 분란을 조장하고 분열을 초래하는 원인이나 논란의 주범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경우는 거의 대부분 시노달리타스가 교회를 민주주의화 시킨다는 잘못된 인식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실제로 시노달리타스가 말하는 하느님 백성의 ‘동일한 존엄성’과 교회 생활에의 ‘참여’를 근거삼아 모두가 똑같은 권한을 행사하기를 바라며 구조적 변화를 촉구하기도 한다. 쉽게 말해, 시노달리타스의 개념과 민주주의의 개념을 혼동하여 자신에게 익숙한 세상의 방식을 교회에 그대로 도입하고 적용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주장하고 옹호하는 입장과 반대하는 입장 사이의 소모적이고 무의미한 대립이 격렬하게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교회는 단 한번도 민주주의를 거부하거나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민주주의를 향상시키고 증진시키며 성숙하게 했고 심지어 민주주의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했다. 에르베 르그랑(H. Legrand)은 시노드에 참여하는 구성원의 다수를 이루는 평신도들의 존재와 특별히 여성의 참여에 대해 민주주의가 교회에 기여한 차원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를 그대로 따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가톨릭 역사가인 주세페 알베리고(G. Alberigo)는 교회는 항상 동시대(同時代)의 통치 모델들을 채택하여 활용했지만 어느 한 가지만을 맹목적으로 고수했을 때 교회의 본질은 심각하게 훼손되었음을 상기시키며 “기계적으로 민주주의의 구조와 방식에 따라 교회의 구조를 바꾸는 것은 교회의 친교를 질식시키고 약화시켰던 중세의 ‘그리스도교 세계’(Christianitas)를 이 시대에 부활시키는 것과 다름 없다.”고 경고한다.

 

요세프 라칭거(J. Ratzinger)는 교황좌에 오르기 전인 1970년에 『Demokratie in der Kirche 교회의 민주주의』를 통해서 교회의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구조와 형태 그리고 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과 가치를 아우르는 형제애와 친교, 자비와 연대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과 같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적 가치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에 따르면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간 존엄성을 교회 안에서 실현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의 민주주의화이다. 이것은 시노달리타스가 말하는 교회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지 않기 때문에 이를 장려하고 완성시킨다. 의사결정 과정에서도 시노달리타스는 다수가 말하는 교회를 ‘위한’ 결정에 앞서 교회‘답게’ 결정하는 정신을 함양시키기 때문이다. [2023년 8월 13일(가해) 연중 제19주일 대전주보 3면,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한산주임)]

 

 

아직도, 여전히 또한 앞으로도 시노달리타스 (8) 시노달리타스는 누가 살아가는가?

 

 

하느님께서 제삼천년기에 기대하시는 시노달리타스의 교회를 만드는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 물음에 그 어떤 예외없이 하느님의 백성 ‘모두’라고 말할 것이다.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의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의 시노달리타스』에 따르면, 시노달리타스는 “교회 전체와 교회 안의 모든 이가 주체임을 표현”(55항)하고 교회 공동체의 “모든 이가 공동체의 삶과 사명에 공동 책임이 있다”(22항). 실제로 세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동일한 존엄성을 지닐 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실현하는 주체로서 그에 합당한 권리와 의무를 지닌다. 그래서 교회 구성원 모두는 시노달리타스의 교회를 이루는데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 모두를 가리켜 시노달리타스의 주체라고 말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옳은 말이다. 그렇지만 이와 관련된 경계하고 주의해야만 하는 실제적인 부작용이 존재한다. 바로 모두가 능동적인 주체라는 개념을 모든 것이 완전하게 똑같은 상태라고 오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나누어주시는”(에페 4,7) 은사와 교계에 따른 직무의 구별없이 동일한 권리를 지니고 똑같은 역할을 수행하려는 잘못된 모습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교회가 추구하는 일치와 친교는 모두가 획일적으로 똑같은 모습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황 프란체스코는 시노달리타스의 주체를 “모든 이들 - 몇몇 사람들 – 한 사람”이라는 삼중형태로 밝히며 전체와 관련된 공동의 사명과, 구별되는 주체들에게 해당되는 고유한 역할이 있음을 말한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모든 이들’과 관련되어 함께 식별하고 결정하고 실행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또한 특별한 직책을 수행하도록 위임된 ‘몇몇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특별한 것들이 있다. 그리고 오직 ‘한 사람’만이 수행해야 하는 권리와 책임에 관한 것들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구별은 다양한 방식으로 교회의 삶과 사명에 참여하는 충만함을 의미할 뿐 결코 상하위계를 뜻하지 않다. 교황 프란체스코는 『복음의 기쁨』에서 “교회에서 역할은 ‘다른 사람에 대한 우월의식을 조장하지’ 않습니다.”(104항) 하고 확실하게 가르치고 있다.

 

에디트 슈타인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 공동체는 “한 주체가 다른 이를 거부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과 동일한 또 다른 주체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공감대를 형성하고 함께 지내며 … 완성을” 이루는 공동체이다. 이를 위해서는 상호인정을 바탕으로 교회적 일치가 획일화가 아님을 알며, 다름이 틀림이 아님을 깨닫고 실천하는 성숙한 교회의식이 필요하다. [2023년 8월 27일(가해) 연중 제21주일 대전주보 3면,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한산주임)]

 

 

아직도, 여전히 또한 앞으로도 시노달리타스 (9) 시노드 교회를 넘어뜨리는 유혹들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160~220)는 “그리스도인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것이다(Fiunt, non nascuntur Christiani).”라고 말한다. 그의 이 심오한 통찰은 한 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개인적 차원에 그치지 않고 ‘되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인 교회 공동체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 역시 ‘되어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실제로 교회는 급변하는 세상 안에서 언제나 하느님께서 바라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고 성령께서 머무시고자 하는 교회가 되도록 부름받았다. 이러한 부름에 응답하는 ‘되어감’의 길에 있어 시노달리타스는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엔조 비앙키(E. Bianchi)는 오늘날 우리의 교회가 하느님께서 기대하시는 교회 공동체가 되어가는 여정을 일컬어 시노달리타스의 여정이라고 표현한다. 시노달리타스의 여정에는 필연적으로 교회의 현주소(現住所)와 하느님의 기대 사이의 간극을 줄이고 좁히는 과정인 쇄신과 개혁이 요구된다. 교황 프란체스코는 “교회의 쇄신은 무엇보다 순례하고 여정을 걷는 교회 그리고 살아 있는 교회로서, 그 생명력을 나타내는 표지이다. 다시 말해 [...] 교회가 살아 있기 때문에 쇄신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교회 역사 안에는 쇄신과 개혁에 대한 수많은 요청과 그에 응답하는 운동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모든 운동들이 성공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새롭게 되는 쇄신의 과정에 있어 아주 쉽게 마주할 수 있는 유혹에 발목 잡히는 경우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그 유혹이란 즉각적이고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변화 혹은 변형을 교회의 쇄신과 동일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브 콩가르(Y. Congar)는 『Vraie et fausse reforme dans l'Eglise(교회 안에서의 참된 개혁과 거짓 개혁)』을 통해 두 가지 유혹의 존재에 대해 말한다. “먼저, 교회가 사람 안에 진리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사물들’에 머물고자 하는 유혹이 있다. 이는 법률이나 수단을 목적으로 여기고자 하는 유혹으로 바리사이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다음으로는 하느님의 사업을 실행하려는 기존의 형식들을 넘어서려는 모든 노력들을 거부하려는 유혹이다. 만일 기존의 형식들이 절대화되면 발전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어떠한 열매도 맺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이것을 회당의 유혹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교황 프란체스코 역시 『복음의 기쁨』 2장과 담화문들을 통해서 사목 일꾼들이 빠질 수 있는 유혹을 고발한다. 서로를 부추기는 세 가지 해악인 개인주의의 팽배와 정체성의 위기 그리고 열정의 쇠퇴를 먼저 지적하고 이기적인 나태, 무익한 비관주의, 영적 세속성, 적대감과 성직주의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경계하도록 가르친다. 그리고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다 주신 새로운 관계”에 마음을 여는 시노달리타스의 회심을 촉구한다. [2023년 9월 10일(가해) 연중 제23주일 대전주보 3면,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한산주임)]

 

 

아직도, 여전히 또한 앞으로도 시노달리타스 (10) 영적 세속성, 시노드 여정의 장애물

 

 

시노달리타스를 일컬어 우리들은 ‘함께 걷는 여정’이라고 말한다.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만 그래서 너무나 쉽게 잊게 되는 한 가지가 있다. 바로 ‘함께 여정을 걷는 힘’이 ‘자기자신’만의 힘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힘을 받으며 그 힘으로 인생과 신앙의 여정을 걷는 것이 시노달리타스이다. 주님으로부터 힘을 받는다는 사실을 망각할 때 교회는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 여정에서 너무나 쉽게 걸려 넘어지게 된다. 이는 외적인 활동뿐만 아니라 내적 차원에서 보다 심각하게 나타난다. 이와 관련하여 교황 프란체스코는 오늘날 교회의 현실을 살펴보며 ‘영적 세속성’이 만연되어 있다고 진단한다.

 

‘영적 세속성’이라는 용어가 낯설 수 있지만 그 내용은 지극히 단순하고 간단하다. 『복음의 기쁨』에 따르면 영적 세속성은 “신앙심의 외양 뒤에, 심지어 교회에 대한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어서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적인 영광과 개인의 안녕을 추구하는” 것으로 교회를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이며 가장 지독한 재앙이다. 왜냐하면 신자 개인의 성향이나 여기에 물든 집단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띄고 외적으로는 특별한 이상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모든 것이 제대로 된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곪아가며 병들어간다. 두드러진 증상없이 조용하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하느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교회를 “그리스도 없는 하느님과 교회 없는 그리스도, 그리고 백성없는 교회”로 변질시키며 교회 구성원들의 내적 타락을 가속화시킨다. 그렇지만 이 간교하고 음흉한 유혹인 영적 세속성을 진단할 수 있는 하나의 증상이 있다. 바로 한결같이 교회에서 두드러지는 자리를 차지하려는 의도를 지닌 수많은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전례나 교리, 교회의 특권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복음이 하느님의 백성에게 그리고 현대의 구체적인 요구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래서 영적 세속성에 감염된 신자들과 그에 잠식된 교회는 하느님의 일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 시스템과 조직의 성공과 번영을 위해 힘을 기울인다. 또한 외적 수단과 형식의 준수에 급급해 결국 교회 정신은 옅어지고 하느님과의 관계는 모호하게 되어 신자들의 모임은 친목단체가 되고 성직자들은 관료가 되게 한다. 결국 시노달리타스의 길에서 걸려 넘어질 뿐만 아니라 그 여정을 거슬러 가며 ‘함께’가 아닌 자신의(of), 자신에 의한(by), 자신을 위한(for) 삶을 추구하게 된다.

 

교황 프란체스코는 영적 세속성의 병폐를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치료약은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에 대한 스캔들이며 (세속적인 눈이 보기엔 쓸데없이 남을 위해 희생했다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1코린 1,23 참조)”이라고 가르친다. [2023년 9월 24일(가해) 연중 제25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대전주보 3면,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한산주임)]

 

 

아직도, 여전히 또한 앞으로도 시노달리타스 (11) 성직주의를 극복하는 시노달리타스의 교회

 

 

교회의 쇄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거나 혹은 시노달리타스에 대해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성직주의 혹은 성직자중심주의’라는 표현을 접해 보았을 것이다. 바로 하느님께서 기대하시는 하느님 백성의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데 반드시 치료해야 하는 고질병 가운데 하나로 말이다. 실제로도 성직주의에 대해 교황 프란체스코는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말살할 뿐 아니라 세례성사를 통해 그리스도교 신자들 마음에 불어넣어 주신 성령의 은총마저 경시하고 무시하는 태도”라고 말하며 강하게 비판한다. 그래서 성직주의를 교회의 시노드적인 실천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 가운데 하나이며 교회의 친교와 복음의 핵심을 왜곡할 위험을 지닌 병폐라고 규정한다. 교회의 ‘권위’를 ‘권위주의’적으로 이해하고 사제직무를 이타적인 무상의 ‘봉사와 섬김’이 아닌 ‘권력’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직자와 평신도 그리고 가르치는 교회(Ecclesia docens)와 배우는 교회(Ecclesia discens) 사이의 엄격한 구분에 기초한 피라미드적이고 수직적인 모습의 교회를 정당화하고 옹호한다.

 

성직주의로 병든 교회를 전적으로 성직자들의 탓이라고 매도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평신도들의 탓도 공동으로 존재한다. 현실 안에서 성직주의는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평신도들이 조장하는 경우도 제법 많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교회의 삶과 사명에서 당연히 짊어져야 하는 책임에서 벗어나게 하기에 편리하고 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황 프란체스코는 성직주의를 “교회의 오른손과 왼손이 함께 지은 죄”라고 말하기도 한다. 결국 성직자와 평신도는 공범(共犯)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성직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성직자들만이 아니라 평신도까지, 즉 하느님의 백성 모두가 시노달리타스의 회심을 해야 하는 것이다.

 

교황 프란체스코는 시노달리타스의 교회를 피라미드의 형태가 아니라 맨 꼭대기와 맨 아래가 뒤집어진 피라미드의 교회라고 한다. 피라미드의 형태인 교회에서 맨 꼭대기에 성직자가 자리했고 맨 아래가 평신도가 자리했다면 뒤집어진 피라미드에서 맨 위에는 과연 누가 자리해야 하고 맨 아래에는 누가 자리해야 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맨 꼭대기에 ‘자신’을 두고 맨 아래에 ‘자신이 아닌 타인’을 배치한다면 여전히 성직주의가 초래한 병폐와 참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권력구조가 아니라 봉사와 섬김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맨 아래에는 가난해지시고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그리스도를 닮기를 희망하는 ‘그리스도교 신자인 자신’이 자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직주의를 넘어서는 시노달리타스의 교회의 모습이라 할 것이다. [2023년 10월 8일(가해) 연중 제27주일(군인 주일) 대전주보 3면,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한산주임)]

 

 

아직도, 여전히 또한 앞으로도 시노달리타스 (12) 시노달리타스는 아래로부터 그리고 함께

 

 

제16차 세계주교시노드가 개최된 2021년 10월 이래로 교회는 계속해서 하느님께서 제삼천년기에 기대하시는 바에 부응하고자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이루기 위한 영적-사목적 회심과 쇄신을 이야기해왔다. 또한 교회 곳곳에서 시노달리타스에 관해 말하면서 회심과 쇄신을 입에 담는 경우들을 심심치 않게 마주하던 때도 있었다. 물론 지금은 저 당시보다는 관심이 사그라들고 흥미가 줄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를 단순하게 한국인 특유의 냄비근성이나 시간의 경과에 따른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취급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원인인가? 교회의 높은 곳에서 높은 사람들이 시노달리타스를 말해왔다는 것이다. ‘위에서’ ‘아래를 향해’ 시키고 명령하는 또 하나의 규정으로 여겨져 평범하게 교회 생활을 영위하는 신자들에게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노달리타스는 ‘위에서’ 시켜서 어쩔 수 없이 지키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모두가 ‘함께’ 자발적으로 살아갈 때에 비로소 열매 맺을 수 있다. 그래서 교황 프란체스코는 시노달리타스는 반드시 ‘아래로부터’ 그리고 ‘함께’ 이해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교황 프란체스코가 말하는 ‘아래로부터’는 위·아래의 파라미드적인 교회가 아니라 수평적이고 대중적인 차원으로 세례받은 모든 이가 마땅히 내어야 하는 소리와 공동책임을 강화시킨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는 경배해야 할 고귀한 혈통이나 특별하게 선택된 엘리트 계층에 따라 정해진 역할이 없으며 모든 신자가 각자의 조건, ‘탤런트’, 성향과 관심에 따라 교회 생활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라는 말은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환대’받고 ‘이해’받는다는 확신으로 교회의 사명에 기여하도록 초대받았다는 것이다. 각자가 기대하는 바대로 다른 사람들에 대해 동등한 관심을 갖고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래로부터 그리고 함께하는 시노달리타스의 교회는 경청하고 형제애가 넘치며 개방적이고 대화하며 역동적이고 선교적인 공동체이다. 대주교 마리오 델피니(M. Delpini)는 ‘아래로부터’ 그리고 ‘함께’하는 시노달리타스를 실현할 수 있도록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거룩한 교회여, 경청할 수 있는 기회와 분위기를 만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남녀노소 모든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또한 하나가 되게 하시는 성령의 은사를 받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 인내와 신뢰와 겸손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모든 이에게 전하는 공동체를 건설하십시오.” 그리고 이를 위한 10가지의 키워드를 제시한다. “하느님의 백성, 형제애, 친교, 경청, 참여, 개방성, 공동식별, 공동책임, 선교적 변모,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2023년 10월 22일(가해) 연중 제29주일(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 주일) 대전주보 3면,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한산주임)]

 

 

아직도, 여전히 또한 앞으로도 시노달리타스 (13) ‘아래로부터’ 그리고 ‘함께’ 만드는 교회, 하느님의 백성

 

 

‘교회는 무엇입니까?’ 혹은 ‘교회는 누구입니까?’에 대해 정답이라고 부르기에 아깝지 않은 답변을 내놓을 수 있는 교육받은 신자들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에게 교회는 누구입니까?’ 하고 질문을 조금만 바꾸면 그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현실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직접적으로 소속되어 생활하고 있는 교회의 현실과 배워서 알게 된 ‘정답’과 적지 않은 괴리감이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에게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 ‘친교 공동체’이기보다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구분되고 상하위계가 명확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교황 레오 13세는 1985년 프랑스 파리의 대주교에게 보낸 서한(Epistula tua)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의 교회는, 거룩한 창설자의 명백한 의지에 따라, 두 부분 즉 배우는 자와 가르치는 자, 양떼와 목자로 확실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 목자들에게만 가르치고 판단하고 지도하는 모든 권한이 주어졌고 신자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들의 판단에 순순히 복종하며 그들이 통치하고 바로잡고 구원으로 이끌도록 따라야 하는 의무가 부과되어 있다.” 그리고 교황 성 비오 10세와 교황 비오 12세에게서도 동일한 내용의 진술을 찾아볼 수 있다.

 

그렇지만 교회는 성직자와 평신도로 구분되기 이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 안에 모인 하느님의 백성이다”(『교회 헌장』 4항). 자신들의 능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순수한 사랑과 은총으로 불러 모으신 백성이다. 그렇기에 모든 구성원들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동일한 존엄성과 자유를 누리며 사회적 지위나 인종과 성별의 차이가 상위·하위 계층의 구분과 동일시될 수 없다(갈라 3,26-28. 참조). 이브 콩가르(Y. Congar)는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을 – 주교, 사제, 부제, 수도자와 평신도 – 각자의 고유한 삶의 조건과 직무에 따라 구별하기에 앞서 먼저 공통되는 가치들”에 집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교황 프란체스코는 『복음의 기쁨』 119-120항에서 “우리는 모두 선교하는 제자이다.”라고 하며 성직자 역시 가르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제자이기도 하며, 평신도 또한 성직자의 가르침과 사목적 보살핌을 받는 수동적 대상일 뿐만 아니라 능동적인 선교의 주체임을 말한다.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는 예수님의 방식인 자비와 섬김, 열매를 맺기 위해 자신을 죽이는 밀알의 방식, 복음적 가난과 겸손을 따른다. 하느님의 사랑에 마음을 열고, 자기중심적 자아에서 벗어나 자신을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자만을 제거하여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는 데 거부감을 갖지 않고 오히려 존중하며 여정을 함께 걷는 길동무로 받아들여야 한다. [2023년 11월 12일(가해)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대전주보 3면,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한산주임)]

 

 

아직도, 여전히 또한 앞으로도 시노달리타스 (14) 형제애(兄弟愛). 시노달리타스를 열매 맺게 하는 선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믿는 우리들만큼 ‘사랑’에 익숙한 이들도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는 새로운 계명을 주셨고 교회는 이를 충실하게 지킬 뿐만 아니라 지키도록 가르쳐왔다. 그래서 사랑은 교회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 항상, 적어도 입으로라도 사랑을 표현하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형제애’는 너무나 익숙하고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렇지만 막연한 인상이나 추상적인 느낌이나 감성이 아니라 형제애가 구체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우리들의 슬픈 현실이다.

 

우리에게 찰리 브라운과 스누피로 알려진 <피너츠>에 이러한 장면이 등장한다.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찰리 브라운에게 이러한 일을 귀찮고 번거로운 일로 여기는 라이너스는 자기를 변호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간을 사랑해. 그렇지만 내 옆의 사람들을 견딜 수 없어.”

 

교황 프란체스코는 「모든 형제들」에서 “세계는 … 다양한 형태의 통합을 향하여 천천히 나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 그러나 퇴보의 징후를 보이고 있습니다.”(10-11항)라고 말하며 ‘형제애’를 회복시키는 것이 이 시대에 얼마나 시급한 일인지를 말한다. 그렇지만 형제애는 그 누구도 강제할 수 없다. 또한 가만히 기다리기만 한다고 저절로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실제로 진정한 형제애는 경청하고 대화하며 함께 나아가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복음의 풍미를 지닌 삶의 방식을” 실천할 때에만 이루어진다. 형제애는 책상에서 작성된 완벽한 지침처가 아니라 “강생을 통하여 온유한 사랑의 혁명으로 우리를 부르신”(복음의 기쁨 88항)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다. 이를 따르기 위해서는 교회가 형제애의 표징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 앞서 스스로가 먼저 ‘형제’가 되어주도록 부름받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시노달리타스의 여정에 있어 보다 명확해진다. 시노달리타스에 형제애가 없다면 이는 다수결이나 여론에 따라 문제를 분석하고 상호 합의된 내용을 결정하기 위한 모임의 규칙에 불과해질 것이다. “형제애” 없이 시노달리타스의 공동체는 있을 수 없으며, 그저 “같은 이해관계로 뭉친 개인들의 집합”이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시노달리타스 안에서 형제애는 결과를 먼저 보지 않고 과정에 주의를 기울여 모두가 책임을 갖고 함께 참여하고 대화하고 함께 실천하게 한다. 그래서 형제애를 통해 시노달리타스는 교회가 성직주의와 권위주의에 빠지지 않게 하며 동시에 ‘서로 사랑하는’ 형제들의 공동체로 변모시킨다. [2023년 11월 26일(가해)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대전주보 3면,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한산주임)]

 

 

아직도, 여전히 또한 앞으로도 시노달리타스 (15) 시노달리타스의 원천이자 목표인 친교(Communio)

 

 

현실적으로 교회 안에서는 친숙하지만 교회 밖에서는 생소하기까지 한 단어나 표현들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표현 가운데 하나는 ‘친교’라는 표현이다. 교회 밖에서 활용되는 사례를 찾아보기가 거의 불가능하지만 이것이 ‘친교’가 종교 영역에서만 유효하고 적법한 제한적인 실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 안에서 친교를 배우고 익힌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교회 밖으로 친교를 확장하지 못했음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

 

친교는 단순히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야 하는 신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교회헌장」 4항이 고백하듯이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로 모인 백성”이기에 하느님의 평화와 사랑이 온 세상 땅끝에 이르도록 모든 이들과 함께 일치하고 친교를 이루며 하느님의 친교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았다. 그렇지만 친교를 이루기에는 너무나 많은 반대와 난관이 존재한다.

 

친교의 반대(反對)를 불일치 또는 갈등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친교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갈등의 원인 자체를 제거하고 말살하려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갔을 때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은 친교와는 전혀 다른 ‘획일화’일 뿐이다. 왜냐하면 차이 또는 다름을 다양성이 아니라 그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질적이고 이상한 것으로 여기며 없애려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다름의 대상이 단순한 의견이나 생각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라면 그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복음의 기쁨」에서 교황 프란치스코는 ‘일치가 갈등을 이긴다.’라는 원칙을 통해 친교를 증진시키는 길을 가르쳐 준다. “이것이 갈등에 대처하는 최선의 길입니다. 곧 갈등을 기꺼이 받아들여 해결하고, 이를 새로운 전진의 연결고리로 만드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 5,9) 이러한 방식으로 차이 속에서 친교를 증진시키는 것이 가능해집니다”(227항).

 

교회가 갈등을 이겨내며 친교를 이루는 길은 결국 삼위일체 하느님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친교가 일방적인 방식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방식으로 이루어지기에 교회가 추구하는 친교 역시도 일방통행이 아니라 다양한 방향으로 관계를 맺으며 구체화되어야 한다. 친교는 다른 생각과 다른 모습이 표현될 수 있는 여지를 제거하고 일방적으로 권위에 순종하며 모두가 똑같아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서로 다름을 인정하며 상호 경청하며 함께하는 하느님의 백성이자 예수님의 선교하는 제자다운 생활과 활동 방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R. Repolo(로베르토 레폴레) 대주교는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이 각자를 분리되고 고립된 주체로 여기지 않고 교회에 봉사하는 형제애의 친교를 이루는 공동의 주체로 여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2023년 12월 10일(나해)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대전주보 3면,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한산주임)]

 

 

아직도, 여전히 또한 앞으로도 시노달리타스 (16) 경청,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묵시 2,7)

 

 

“하느님께서 제삼천년기의 교회에 기대하시는 여정”인 시노달리타스의 여정을 걸어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차원 가운데 하나는 하느님께서 무엇을 기대하시는지를 아는 것이다. 이는 지레짐작이나 추측을 통해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언제나 “들어라”(신명 6,4)라고 하시며 당신의 뜻을 명확하게 말씀하시기 때문에 제대로 된 ‘들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들을 귀 있는 사람”(마르 4,9)이 제대로 들을 때, 곧 경청할 때에만 이루어진다. 그래서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는 “하느님과 함께 백성의 부르짖음을 듣기까지 하느님께 귀를 기울이고,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뜻을 백성에게서 인지할 때까지 백성에게 귀를 기울”(114항)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들을 귀 있는 사람”에게 있어 경청은 의사결정 과정에서 서로 다른 의견과 생각을 조율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아니다. 이와 관련해 교황 프란체스코는 단순한 청취(聽取)와 명확히 구분하여 경청을 ‘단순히 듣는 것 이상’이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나누는 사랑의 친교의 언어”라고 고백한다.

 

실제로 경청은 대화를 시작하게 할 뿐만 아니라 친교를 이루고 복음화 사명을 수행하며 내딛는 첫 발걸음이다. 왜냐하면 경청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머물러 있던 시선을 들어 앞을 향하고, 적어도 한순간일지라도,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다른 이를 헤아리고자 노력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코 복음서에 이와 관련된 경이로운 구절이 있다. 바로 예수님께서 시리아 페니키아 부인을 만나 나눈 대화에 관한 내용이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에게 호되게 마귀가 들린 딸의 어머니는 그저 이방인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는 부인의 간청에 차가울 만큼 냉정하게 거절하셨다. 그렇지만 이 부인이 지혜롭게 말을 하자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귀를 기울이셨다. 부인의 말을 경청하시며 예수님 안에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경청을 통해 예수님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바꾸어 시리아 페니키아 부인의 청을 들어주셨다.

 

“경청은 우리를 단순한 방관자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바른 몸짓과 바른 말을 찾는 데 도움을”(복음의 기쁨 171항) 준다. 거만하게 인생의 모든 정답을 알고 가르쳐준다는 태도가 아니라 겸손하게 다른 이들에게서 지혜를 청하고 해답을 얻고자 해야 한다. 무엇보다 의견과 생각을 청할 수 있는 겸손함과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럴 때 자기독선과 오만에서 벗어나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건네시는 말씀을 경청할 수 있을 것이다. [2023년 12월 24일(나해) 대림 제4주일 대전주보 3면,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한산주임)]

 

 

아직도, 여전히 또한 앞으로도 시노달리타스 (17) 참여. 시노달리타스 실천을 위한 첫 번째 행동양식

 

 

제16차 세계주교시노드의 주제는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 친교, 참여, 사명”이다. 이 주제의 세 가지 차원인 ‘친교와 참여 그리고 사명’은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핵심기둥이라 할 수 있다. 미켈레 줄리오 마샤렐리(M. G. Masciarelli)는 ‘친교와 사명’이 신학적이고 신비적인 차원에서 시노달리타스의 현실을 전해주는 반면 ‘참여’는 시노달리타스를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지침과도 같다고 말한다. 실제로 친교와 사명에 그 누구도 소외되거나 배척당하지 않고 ‘참여’할 때에만 하느님께서 교회에 기대하시는 바에 합당하게 응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노달리타스’에 관한 세계주교시노드 편람」에 따르면 “참여는, 모든 믿는 이가 적합한 자격을 지니고 성령께서 저마다에게 주신 은총을 통하여 서로 섬기도록 부름을 받는다는 사실에 근거를 둔다.” 그래서 참여는 특별한 능력과 소양이 요구되는 평의회나 협의회의 구성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세례 받은 모든 이에게 요구되는 신앙의 자세이며 복음화를 위한 태도이다. 이들은 “교회 안의 역할이나 신앙 교육의 수준에 상관없이 복음화의 능동적인 주체이다”(「복음의 기쁨」, 120항). 세례 받은 모든 사람 안에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성령의 성화하는 힘이 작용”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받은 예수님의 사랑, 그분께 구원받은 우리의 경험”이 복음화를 재촉하기 때문이다.

 

하느님 백성의 교회의 삶과 사명에의 참여를 그저 교회가 추진하는 활동과 사업이 성공을 거두고 성과를 내기 위한 효과적인 방식을 찾기 위해 의견을 제안하고 조언하는 수준으로만 여긴다면 이는 시노달리타스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훼손하는 것이다. 또한 교회의 삶과 사명에 하느님의 백성이 참여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며 방해하는 세력 역시 존재한다. 이는 결코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인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다. 바로 현재의 교회 구조 안에서 만족감을 느끼며 자신들의 일상적이고 직접적인 업무를 마치 하나의 권력으로 여기며 세도를 부리는 이들이다.

 

도메니코 마로네(D. Marrone)에 따르면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이 교회를 사랑하며 시노달리타스를 제대로 실천하는지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은 교회가 아직은 아니지만,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새 부대처럼(마태 9,17 참조), 언젠가 반드시 되어야 하는 모습으로 새로날 수 있도록 애정을 갖고 ‘참여하는가’이다. 하느님의 백성들이 참여할 때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공동의 집이 되고 또한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친교의 배움터가 될 것이다. [2024년 1월 14일(나해) 연중 제2주일 대전주보 3면,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한산주임)]

 

 

아직도, 여전히 또한 앞으로도 시노달리타스 (18) ‘참여’의 다섯 가지 모습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에 따르면 시노달리타스는 “하느님 백성 전체가 교회의 삶과 사명에 관련되고 참여하는 것”(7항)이다. 이는 시노달리타스를 실천하고 살아가는 데 있어 ‘참여’가 필수적이고 핵심적인 차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참여’의 영역은 교회의 삶과 사명 ‘전체’로 개인적 차원과 공동체적 차원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평신도 신학자인 마르코 콜롬보(M. Colombo)는 ‘참여’에 대하여 다섯 가지 방식으로 설명한다.

 

1. 참여하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은 “[하느님의] 백성은 … 성도들에게 단 한 번 전해진 믿음을 온전히 지키며 올바른 판단으로 그 믿음을 더욱 깊이 깨닫고 그 믿음을 실생활에 더욱 충만히 적용한다.”고 말하며 믿음을 올바르게 아는 것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적용’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교황 프란체스코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ultate)』를 통해 현대의 영지주의로 혼탁해진 그리스도교 신앙은 세상과 단절되고 분리된 내적 삶으로서의 영성생활을 장려하여 사랑과 자비의 실천과는 무관한 채 기도와 명상만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하는 길을 추구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그렇지만 야고보 사도는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야고 2,24)고 말하며 교회의 삶과 사명에 참여하는 것이 실천 곧 행동하는 것임을 가르쳐준다.

 

2. 참여하는 것은 기여하는 것이다. 그저 모든 것을 내버려 두고 발코니에 머문 채 세상과 교회를 비판하기만 하는 방관자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진취적이고 주도적인 의지를 지닌 제자들의 공동체 즉 나가는 교회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3. 참여하는 것은 협력하는 것이다. 협력하는 것은 우선적으로 모든 사람이 참여해야 하고 각자 자기의 자리가 있는 교회에서 그 누구도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은사는 잘 보관하도록 한 집단에게 맡겨져 가두어 둔 자산이 아닙니다. …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하여 하느님께 충실한 거룩한 백성의 삶에 조화롭게 통합되는 그 역량에 있습니다”(『복음의 기쁨』30항).

 

4. 참여하는 것은 개입하는 것이다. 함께 여정을 걷는 동반자들이 관심을 두고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한 그들의 불안과 상처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인식에 바탕을 둔다. 바로 양들의 삶에 깊게 머물렀던 양 냄새가 나는 목자들의 삶이 그것이다.

 

5. 참여하는 것은 순교를 각오하는 것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요한 15,18)는 말씀처럼 이익과 승리를 목적으로 하는 세상으로부터 박해받을 각오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024년 1월 28일(나해)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대전주보 3면,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한산주임)]

 

 

아직도, 여전히 또한 앞으로도 시노달리타스 (19) 담대함. 시노달리타스를 구현하는 예언자적 자세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는 끊임없이 쇄신하고자 자신을 살피며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담대하게’ 말을 한다. 교회 안에서조차 듣지 않고 말하지 못한다면 세상에서 제대로 경청하고 ‘담대하게’ 선포할 수 없을 것이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사도들은 언제나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설교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래서 담대함이란 인간적인 용기나 도전정신이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는 데 필요한 신앙의 자세이자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담대함을 고대 그리스인들은 파레시아(parresia)라고 불렀는데 이는 자신의 입장을 정하고 이를 공동체 앞에서 표현할 수 있는 권리이며 의무를 의미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담대함을 폴리스(πόλις)의 시민이라는 지위와 명성에서 비롯되지 않고 성령께서 베풀어주시는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기도를 마치자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면서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사도 4,31). 그래서 담대함은 세례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삼중직무 가운데 예언자직에 참여하는 은사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는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마태 5,37) 정직하고 용감하게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황 프란체스코는 2014년 10월 6일 가정에 관한 특별 시노드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러분들은 주님 안에서 해야할 말은 그것이 무엇이든 감추지 않고 해야 합니다. 동시에 형제들의 말을 겸손하게 경청하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두 가지 태도로 우리 공동체 안에서 시노달리타스가 실현됩니다.”

 

담대함은 교회가 시노달리타스의 여정에서 끊임없이 쇄신되고 풍요로워지게 한다. 교회 안과 밖에서 문제를 인식하고 식별한 이가 입을 다물고 있다면 이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교회를 좀먹고 병들게 할 것이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소개하는 예루살렘 사도회의가 그러했듯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교회에 대한 사랑과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이를 감추지 않고 담대하게 말해야 한다. 피곤해지기 싫고 불편해지는 것이 싫고 그저 조용히 살고 싶다는 핑계로 담대함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담대하게 말하는 것은 듣는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동일한 존엄성을 지닌 동등한 사람으로 여기고 세심한 감수성과 공감으로 존중하며 오해와 모호함의 위험을 제거하고 복음적이지 못하고 독선적인 행동을 바로잡게 하는 신앙의 도구이다. 그래서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요한 20,17)는 사명을 받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주저했다면 그리고 사도들과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두려워했다면 그래서 그동안 해오던 일들만 반복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2024년 2월 11일(나해) 연중 제6주일(세계 병자의 날) 대전주보 3면,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가수원주임)]

 

 

아직도, 여전히 또한 앞으로도 시노달리타스 (20) 서로의 목소리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공동식별

 

 

제삼천년기를 살아가는 교회 공동체는 시노달리타스를 살아가며 새로나고자 많은 관심을 보이고 힘을 쏟고 있다. 분명히 이러한 노력이 그 자체로 교회의 쇄신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움직임이지만 한 번의 ‘시도’가 아니라 지속적인 교회의 여정이 되어야만 교회가 “하느님께서 완전히 거져 주시는 은총에 응답하며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복음의 기쁨」 179)할 수 있다. 그 관건은 하느님께서 제삼천년기의 교회에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식별이라 할 수 있다. 식별한다는 것은 좋은 선택을 내리기 위해 합리적으로 따져보는 과정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신앙 안에서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1코린 12,10)로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의 메시지를 읽는 참된 영적 감수성”(「복음의 기쁨」 154)으로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이해하고 복음의 정신을 구현하는 행동의 기준을 마련하도록 한다.

 

현실 안에서 식별은 교회의 지도자나 전문적 지식과 소양을 갖춘 이들에게 독점적으로 유보되어 있는 듯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성령께서는 모든 이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에 세례 받은 모든 이의 소리를 경청하고 함께 식별해야 한다. 실제로 식별은 세례 받은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허락된 권리이며 맡겨진 의무이다. 세례 받은 모든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직관적으로 통찰하고 이에 따라 행동하게 하는 신앙의 본성인 신앙감각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모든 신자가 함께하는 공동식별은 교회의 내일을 그리며 오늘날의 세상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무엇보다 복음의 새롭고 다양한 길들을 꿈꾸며 함께 걸어가는 ‘공동의 길’을 찾는 것으로 결코 즉흥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기중심적 사고와 개인주의를 피하며 사랑과 존경 그리고 신뢰로 유대를 맺고자 영적으로 준비하는 노력이 필수적이다.

 

이탈리아 가톨릭 운동을 담당했던 구알티에로 시지스몬디(G. Sigismondi) 주교는 공동식별이 어떠한 단계로 진행되어야 하는지를 이렇게 가르친다. 첫 번째, 식별하고자 하는 문제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때 문제의 다양한 측면을 살펴보며 사목적 관련성과 타당성을 공동으로 평가한다. 두 번째, 열린 마음으로 모두가 하느님께 의탁하고자 결심하는 것이다. 세 번째, 각자 개별적으로 그리고 공동으로 성찰하는 것이다. 개별적이고 공동으로 하는 성찰은 모순이 아니라 하나의 특별한 방식으로 개별적 성찰은 다른 이들과의 나눔을 통해 풍요로워진다. 네 번째, 성찰한 바를 나누는 것이다. 이는 논쟁의 과정이 아니라 형제애와 기도 안에서 서로의 목소리를 주의깊게 경청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결정하는 것으로 이는 다수결이 아니라 교회정신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2024년 2월 25일(나해) 사순 제2주일 대전주보 3면,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가수원주임)]

 

 

아직도, 여전히 또한 앞으로도 시노달리타스 (21) 공동 책임, 공동의 그러나 차별화된!

 

 

하느님께서 제삼천년기에 바라시는 그대로 오늘날 교회는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고자 그 여정을 걷고 있다. 이 길에서 교회는 시노드 정신을 구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하느님 백성의 공동 책임에 관한 문제와 마주해야만 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기대하시는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는 참여적이고 공동 책임을 갖는 교회”(「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 67항)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교회는 모든 구성원의 공동책임을 말하며 이를 구현하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렇지만 실현 과정에 있어서 ‘그렇다면 누가 공동체를 주재하는가?’와 같은 상투적이고 소모적인 논의에 발목이 잡혀 분란과 혼란의 원인으로 여겨지고 결국에는 ‘예전에 하던 대로’ 하게 된다. 평신도 신학자인 오타비오 피로바노(O. Pirovano)는 ‘공동 책임’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을 예견했었다. 그에 따르면 ‘공동 책임’을 위험하다고 규정짓는 것은 어원적으로 자격이 없고 의욕이 없는 이들과도 무엇인가를 공유한다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며 더욱이 공유하고자 하는 내용이 ‘책임’이라면 이는 결국 ‘권력’을 공유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 위험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교회 전체와 교회 안의 모든 이가 주체”(「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 55항)들이 행사하는 주체성과 관련된 공동 책임은 동일한 수준과 동일한 형태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브 콩가르(Y. Congar)는 이를 ‘차별화된’ 공동 책임이라고 말한다. 교회의 삶과 사명에서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모든 교회 구성원의 “소명, 신분, 직무, 은사, 책임의 다양성과 보완성이”(「평신도 그리스도인」 20항) 동일한 가치와 존엄성을 지니고 있음을 우선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차별화된 공동 책임은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의 모습이 개인의 고유성이 존중받고 인정되며 공동의 선익을 추구하는 ‘우리’ 곧 ‘차별화된’ 우리라는 것을 확증시켜 준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봉사 직무가 있지만, 그 사명은 하나”(「사도직 활동」 2항)이다. 산드라 마쫄리니(S. Mazzolini)는 그리스도인들이 행사하는 공동 책임을 실현하는 방식을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각자 자신의 고유한 이름과 교회의 이름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공동 책임을 행사한다. 자신의 고유한 이름으로 행동할 때에는 세례받은 이의 고유의 세속성을 표현하고, 신자로서 모든 일상의 생활에서 드러내야 하는 하나의 증거이다. 반면에, 교회의 이름으로 행동할 때, 그의 행동은 협력의 형태를 이룬다. 더 이상 그것은 개인의 단독 행위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행동이다.” [2024년 3월 10일(나해) 사순 제4주일 대전주보 3면,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가수원주임)]

 

 

아직도, 여전히 또한 앞으로도 시노달리타스 (22) 시노드 정신으로 열매 맺는 선교적 변모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교회의 쇄신과 변화를 열망하고 있는 오늘날,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여정’은 하느님뿐만 아니라 세상과 시대가 품고 있는 기대와 요구에 응답하는 유일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를 알고 있다 해서 모두가 제대로 응답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시노드 정신을 ‘공동체’나 ‘다른 이’의 몫으로만 미루고 내적 쇄신에만 힘써 교회적 내향성에 빠지게 된다면 시노드 정신은 제대로 된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로 쇄신되는 것은 결국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신자들’이 복음을 선포하는 공동체로 새로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교 교령 「만민에게(Ad gentes)」는 교회를 “본성상 선교하는 교회”라고 정의한다. 교회에 있어 “선교는 바로 예수님을 향한 열정이며 또한 그분 백성을 향한 열정”(「복음의 기쁨 268항」)의 표현이다. 그래서 교황 프란체스코는 「복음의 기쁨」 제1장에서 ‘교회의 선교적 변모’를 강조하며 “말만이 아니라 삶으로, 무엇보다도 하느님 현존으로 변모된 삶을 통하여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복음 선포자”(259항)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러한 선교적 변모를 이루기 위해 성찰하고 살펴야하는 네 가지 자세가 있다. 그 첫 번째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그 방식은 모든 이가 환대와 사랑과 용서를 받고 복음의 선한 삶을 살도록 격려받는다고 느낄 수 있게 하는 “말과 행동으로 다른 이들의 일상생활에 뛰어들어 그들과 거리를 좁히고, 필요하다면 기꺼이 자신을 낮추며, 인간의 삶을 끌어안고 다른 이들 안에서 고통받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몸을”(24항) 어루만지는 것이다. 두 번째는 배움과 변화이다. 이는 오늘날의 시대가 가르치고자 했던 중요한 것들을 배우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교회는 ‘배우는 사람’을 뜻하는 ‘제자’들의 공동체여야만 했지만 경직된 시스템에 갇혀 새로운 것에 마음을 열지 못하고 배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교회 울타리 너머에는 배워야 하는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다. 선교적 변모는 이를 향한 개방성이고 배움이고 변화이다. 세 번째는 본질이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무엇이 중요한지, 덜 중요한지, 전혀 그렇지 않은지’를 아는 것으로 교황 프란체스코는 이를 ‘진리의 서열 또는 위계’라고 한다. 그에게 복음의 핵심이자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심은 바로 자비이다. 네 번째는 무상성(無償性)이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라는 말씀처럼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아낌없이 거저 나누어주는 예수님의 모습이다. 거저 줄 수 있는 힘은 바로 거저 받은 것에 대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이다. [2024년 3월 24일(나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대전주보 3면,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가수원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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