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목)
(백)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교의신학ㅣ교부학

[교회] 한국교회와 시노달리타스2-3: 구약성경의 시노달리타스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5-16 ㅣ No.705

[한국교회와 시노달리타스] (2) 구약성경의 시노달리타스 (상)


시노달리타스에 대해 알고 싶다면 성경을 읽어보면 됩니다

 

 

- Hans Jordaens III 의 ‘홍해를 건너는 유다인들’.

 

 

이제 시노달리타스는 어느 정도 익숙한 용어가 되었고 시노달리타스의 중요한 특징들도 숙지된 것 같다. 시노달리타스는 무엇보다 구약성경의 핵심을 꿰뚫는 개념이다. 구약성경의 거의 모든 중요한 대목에서 우리는 시노달리타스에 대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구약성경은 시노달리타스의 기원과 특징을 잘 설명한다.

 

구약성경의 이스라엘, 곧 하느님 백성은 무엇보다 하느님께 충실하며 하느님만을 섬기고 살아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하느님께 충실한 것은 곧 지금 여기에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에 충실하게 사는 것을 뜻한다. 자신이 처한 구체적인 맥락에서 하느님의 뜻을 점차 깨달아 가며 이스라엘은 한층 더 높은 차원의 신앙 공동체로 형성되어 갔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하느님 백성은 같은 길을 걷는 공동체요, 중재자와 함께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성장하는 공동체로 묘사된다. 결국 하느님 백성 안에는 상명하복의 일방적 군사문화도, 다수결의 민주주의도 결정적 원리가 될 수 없다. 오직 역사에 임하시는 하느님만이 기준이다.

 

 

창조

 

성경의 역사는 창조에서 시작되었다. 창조는 인간 공동체가 하느님과 함께 길을 가는 출발점이었다. 성경의 증언은 확실하다. 태초부터 하느님께서는 고립된 개인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친교의 표지 아래 그분과 협력하도록 부름받은 사회적 존재로 창조하셨다.”(「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12항. 창세 1,26-28 참조) 삼위일체인 하느님께서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창세 1,26) 사람을 창조하셨고, 세상 모든 자연과 함께 자연의 일부로 창조하셨기에 인간은 처음부터 신적·인간적·자연적 관계와 공동체성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관계와 공동체를 떠나서는 어떤 인간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본질이 이렇기에 죄의 본질도 명확하다. 죄는 바로 이런 창조 때에 피조물에 새겨진 관계와 공동체성을 거스르는 것이고 결국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죄는 하느님 계획의 실현을 위협하고, 창조의 진선미가 표현되는 질서 있는 관계망을 깨뜨리며, 인간의 마음 안에서 그의 소명을 흐리게”(12항) 한다. 결국 시노달리타스는 우리 인간의 존재 방식의 특성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시노달리타스가 실현되는 것은 창조의 본래적 질서에 접근하는 길이고, 시노달리타스에서 멀어지면 창조 질서와 소원해지는 것으로 새길 수 있다.

 

 

창세기의 조상들

 

창세기 선조들의 이야기에 하느님 백성의 특징은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창세기의 대표적인 선조들, 곧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요셉 등은 한 번도 고립되거나 고독한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 밖의 작은 가정 공동체를 이끄는 사람들이었다. 하느님은 작고 가난한 공동체와 언제나 동행해 주는 따뜻한 분이셨다. 창세기의 가정 공동체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야 했던 우리 하느님 백성의 원형을 보여준다.

 

창세기의 선조들은 하느님 명령에 따라 길을 나섰다. 아브라함은 우르라는 큰 도성에 머무르지 말고 가나안이라는 구석진 곳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함께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창세 12,1) 그는 한평생 자신의 가정 공동체와 함께 하느님이 제시하신 길을 갔던 사람이다. 그가 이끈 가정은 아내와 자식과 조카 롯 등 피붙이는 물론이요 종과 가축까지 포함하는 유목민의 무리였다.

 

가정 공동체이지만 다양성을 갖춘 공동체였다. 이 공동체는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하며 우르에서 하란을 거쳐 낯선 가나안으로 오는 대장정의 여정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냈다.(창세 12,4-5) 아브라함뿐 아니라 이사악과 야곱 등이 이끈 공동체도 ‘함께 길을 가는 공동체’라는 점에서 본질이 같다.

 

창세기의 마지막은 다시 이 공동체가 길을 가는 것이다. 하느님은 기묘한 방법으로 막내 요셉을 통해서 이 공동체가 이집트로 들어가게 하셨다.(창세 38-50장) 우르에서 하느님의 명을 따라 함께 길을 나선 공동체는 역시 하느님의 명을 따라 다시 이집트 땅으로 함께 길을 떠났다. 야곱의 열두 아들들은 하느님의 인도하심으로 들어간 낯선 땅 이집트에서 백성으로 불어났다. 이집트는 이들에게 중간에 거쳐 가는 곳일 뿐이었다. 그들은 시리아-팔레스티나가 아닌 낯선 땅을 함께 가는 도중에 그렇게 된 것이다.

 

하느님이 창세기 선조들과 맺어주신 계약은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와 맺으신 것이 본질이다. 하느님은 이미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실 때 “나와 너희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맺어지는 계약”(창세 17,10)임을 분명히 말씀해 주셨다. 하느님과 함께 길을 가는 공동체요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공동체이니 하느님이 내려주시는 복도 공동체에 미치는 것이 당연하다. 하느님은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창세 22,17)고 약속해 주셨다.

 

우리는 시노달리타스로 인해 아브라함의 가정 공동체가 지닌 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 공동체는 성 밖의 가난한 백성이었고, 이웃 백성들을 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 않았지만, 오직 하느님의 명에 따라 함께 길을 나서는 신앙 공동체였고, 이웃과 대화하며 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탈출 사건

 

이집트 탈출은 하느님의 구원 행위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사건이다. 탈출은 역사에 한 번 일어난 사건, 곧 일회적 사건에 그치지 않고 거대한 구세사의 물줄기가 터져 나오는 사건이다. 시노달리타스와 관련된 중요한 용어는 모두 이집트 탈출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탈출기의 히브리어 이름은 본디 ‘이름들’(שמות)이다.(탈출 1,1 참조) 그런데 그리스어 번역본인 칠십인역(LXX)은 이 책의 이름을 ‘나오는 길’ 또는 ‘탈출의 길’이라는 뜻의 ‘엑소도스’(εξοδος)라고 새롭게 붙였다. 칠십인역의 창의적 통찰은 이 사건의 핵심을 분명하고 쉽게 드러낸다. 탈출기는 본질적으로 이집트에서 나오는 길, 구원의 새로운 길을 드러내는 책이다.

 

이미 창세기에서 공동체로 함께 움직였던 백성은 당연히 이집트에서 나오는 길도 함께 했다. 그러므로 이집트에서 나오는 길은 백성이 ‘함께’(/쉰/ σύν-) 가는 ‘길’(/호도스/ όδός)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탈출(exodus)은 시노도스(synodos)이기도 하다. 이 말을 라틴어로 ‘콘칠리움’(concillium)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특히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께서 이 신비를 깊이 묵상하였다. 성인은 바로 이 점이 교회의 본질이요, 그리하여 교회의 이름이란 이렇게 ‘함께 가는 길’(σύνοδος)이라고 성찰하였다.(「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 3항 참조). [가톨릭신문, 2023년 5월 14일,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한국교회와 시노달리타스] (3) 구약성경의 시노달리타스 (하)


‘하느님 백성’은 언제나 함께 길을 가는 열린 공동체입니다

 

 

- 시나이산 전경.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광야에서

 

시노달리타스를 이해하기 위해 광야 시절의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다. 이집트를 탈출한 공동체는 광야를 함께 지나갔다. 시나이 광야는 일찍이 아브라함 등 창세기 선조들이 함께 갔던 길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하느님은 길을 가던 공동체에게 다시 계약을 선물로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중재자 모세를 통해 백성들을 불러 모으셨다.(신명 4,10) 그런데 하느님께서 ‘불러 모으셨다’고 표현된 히브리어 /카-할-/( קָהָל )이 훗날 /에클레시아/( ἐκκλησία )라는 그리스어로 번역되어 ‘교회’(ecclesia)라는 말로 전승되었다.

 

지금까지의 과정만 봐도 하느님께서 백성과 함께하시면서 일하시는 방식을 선명히 볼 수 있다. 하느님 백성은 언제나 함께 길을 가는 공동체요, 하느님은 길을 가는 공동체에게 많은 은총과 가르침을 베풀어 주셨다. 십계명도 길을 가던 백성을 불러 모으셔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언제나 밖으로 나가는 공동체요 함께 가는 공동체가 그 본질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도 역시 다양성을 갖추었다. 다양한 남성, 여성, 아이들, 노인은 물론이고 일부 이방인 등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길을 가는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는 폐쇄적이고 고립된 존재가 아니었다. 다양성을 갖춘 백성이 하느님의 ‘계약 상대자’임이(13항) 분명하다.

 

 

광야의 지도력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함께 광야를 지나는 백성의 지도력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에 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끄심은 중재자 모세를 통하여 백성에게 전달되고, 백성의 마음은 중재자를 통해 하느님께 닿는다. 그러므로 “그 회중의 한가운데에는 유일한 안내자로서 목자로서 주님께서 계시는데, 그분께서는 모세의 직무를 통하여 현존”하신다.(13항) 이 점이 바로 시노달리타스가 실현된 공동체의 지도력을 보여준다. 길을 함께 가는 공동체는 무엇보다 하느님이 이끄시는 것이다.

 

물론 중재자 혼자 일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모세는 장인의 조언에 따라 자신을 보좌할 사람을 꾸렸다.(탈출 13,18-27) 이밖에도 광야 시대에 이미 모세 곁에는 판관, 원로, 레위 등 다양한 직분의 사람들이 공동체를 위해서 봉사하였다. 그런데 이런 모든 직분들도 역시 중재자를 통해 하느님께 연관되는 것이다. 그들은 “종속적이고 단체적 방식으로 모세에게 연결”된다.(13항)

 

함께 길을 가는 공동체의 내부는 때로 소란스러웠다. 광야에서는 하느님 백성 내부의 지도력을 두고 신뢰받는 지도자들 간에 이견이 발생하기도 했다.(민수 12장) 아론과 미르얌은 모세의 피붙이기도 했지만 하느님에게서 지도력을 받은 중재자에게 도전할 수 없는 존재였다. 지도자 뿐 아니라 백성이 반란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코라 등은 일부 백성을 규합하여 모세에게 맞서 일어났고(민수 16,2) 모세와 아론이 백성 위에 군림한다고 비판하였다.(민수 16,3)

 

이런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그 해결책은 인간적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해결되었다. 이런 갈등을 겪었기 때문인지, 모세는 마지막 유언에서 이스라엘의 4대 권력기관(임금, 판관, 예언자, 사제)이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역설하였다.(신명 16,18-18,22)

 

이렇게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함께 길을 가는 것 자체가 하느님 백성의 생활 방식과 활동 방식(vivendi et operandi)이다.(6항) 하느님은 광야에서 우리 백성이 과연 어디에 의지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려주셨다. 하느님 백성은 지도자든 일반 백성이든 중재자가 전해주는 하느님의 뜻에 충실해야 한다. 이런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집트의 생활방식에 익숙해져 있던 백성은 광야에서 전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익혀야 했다. 곧 이집트식으로 생활하고 활동하는 백성은 약속된 땅에 들어갈 수 없었다.(민수 14,22-23; 신명 1,35) 이 점도 시노달리타스 이해에 중요하다. 시노달리타스는 그 자체가 하느님 백성의 생활 방식과 활동 방식일 뿐만 아니라 우리는 시노달리타스를 통하여 하느님 백성에 맞는 참된 생활 방식과 활동 방식을 발견한다.

 

 

왕국

 

약속한 땅에 들어가서 이제 유랑은 끝났다. 하지만 백성에겐 새로운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온 땅이었지만 필리스티아인 등 새로운 사람들과 경쟁해야 했고, 때로는 전투를 치러야 했다.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와 판관들은 전쟁을 지휘하는 사람들이었다. 역사의 새로운 국면을 맞아 하느님 백성은 치열한 경쟁의 한 가운데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 했다. 함께 단결하지 않으면 곧 죽음이었다.

 

사울과 다윗 시대에 이 백성은 어엿한 국가를 세웠다. 하지만 두 인물의 명암은 대비되었다. 사울은 백성을 이끌고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여 어엿한 나라를 세운 공이 크지만, 결정적으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졌다. 한편 다윗은 사울과 비슷하게 전쟁 지도자였지만 하느님께 충실한 인물이었다. 세속적 성공의 면에서 두 인물은 엇비슷할지 모르지만 성경의 평가는 극단적으로 다르다. 두 인물을 통해 함께 길을 가며 애써 이루려는 하느님 백성의 마음이 과연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예언자

 

예언자의 시대에 하느님 백성에게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길이 시작되었다. 하느님은 예언자를 보내시어 “역사의 길을 따라 걸으라는 요구를” 일깨우셨다.(14항) 임금도 신하들도 일부 사제들과 예언자들도 하느님의 뜻에 멀어져 버렸다. 하느님은 이제 새로운 중재자, 곧 예언자를 보내시어 하느님 백성의 기능과 사명을 새롭게 가르쳐주셨다.

 

예언자는 함께 길을 가는 하느님 백성 내부의 의견 교환, 일치, 의사결정 등에 대해서 시사점을 준다. 쳉어(E. Zenger) 신부님이 지적하듯, 구약성경에 책으로 기록을 남긴 예언자는 모두 저항 예언자들이고 이들은 당시 하느님 백성 사회에서 소수였다. 엘리야 예언자는 야훼의 예언자는 자신 뿐인데 바알의 예언자는 450명이나 된다고 한탄하기도 하였다.(1열왕 18,22) 하느님 백성의 절대다수가 우상에 빠졌을 때, 하느님은 다수결의 원리가 아니라 하느님께 충실한 소수의 예언자를 통해서 하느님 백성을 이끄셨다.

 

그리고 하느님은 예언를 통하여 함께 길을 가는 공동체가 무엇보다 정의를 지향해야 하고, 하느님의 정의란 가난하고 다양한 소외자들을 지향함을 강조하셨다. “그 정의는 특히 가난한 이, 억눌린 이, 외국인에 대한 것이며 주님의 자비를 눈에 보이게 증언하는” 것이다.(14항) 이런 가르침은 신약성경의 예수님에서 절정에 달한다. [가톨릭신문, 2023년 5월 21일,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14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