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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가톨릭 문화산책: 건축 (6) 성가대석, 성당 속의 작은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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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8-29 ㅣ No.180

[가톨릭 문화산책] <30 > 건축 (6) 성가대석, 성당 속의 작은 성당


거룩한 천사의 찬미 노래 울리는 근원지



프랑스 알비에 있는 알비 대성당(15세기) 성가대석.

 

 

중세 대성당에 가보면 오늘날의 성당과는 전혀 달리 성가대석이 제단과 회중석 사이에 있고, 더군다나 아예 화려한 장식을 한 칸막이로 막혀 있다. 또 성가대의 긴 의자들이 좌우에 배열되어서 제단은 그 사이를 통해서야 보인다. 중세에는 성가대석을 한가운데 두더니, 오늘날에는 성가대석의 위치 규정이 뚜렷하지도 않다. 이렇게 성가대석의 위치와 의미는 의외로 다양하다.
 
성가대는 공동체의 예배인 미사 전례를 위한 전례음악(musica liturgica)을 부른다. 전례음악이란 '전례문'을 노래로 불러 하느님을 찬미하는 교회음악을 말한다. 따라서 성가대의 임무는 미사 중 회중과 함께 또는 번갈아가며 노래하면서 회중을 도와주는 데 있다.
 
노래하는 성가대를 영어로 '콰이어'(choir)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라틴어 코루스(chorus)에서 나왔다. 처음에는 성무일도를 그레고리오 성가로 노래하는 남녀 수도자들을 '콰이어'라고 했다. 이들은 늘 같은 자리에서 성가를 불렀기 때문에 콰이어라는 말은 '성가대'라는 뜻도 되고, 또 이들이 앉는 '성가대석'이라는 뜻도 되는 용어다.
 
그런데 성가대석은 제단과 성가대석 등이 있는 성당의 동쪽 부분 전체를 뭉뚱그려 가리키는 말일 때도 있다. 또 어떤 때는 제단과 성가대석을 포함한 동쪽 부분 전체를 '챈슬'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니 성가대석과 제단,그리고 챈슬이라는 용어는 서로 애매하게 사용된다. 그렇다면 이런 혼동이 왜 생기는 것일까?
 

제대 가까운 곳에 성가대석을
 
본래 초기 그리스도교 성당에서는 제단이 회중석에 직접 이어져 있었다.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몇 단을 올려 다른 곳과 구분하는 제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대성당 안에는 제대와 주교좌(cathedra)를 뒀다. 주교나 수도원장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중요해 이들을 '권위자'(hierarch)라고 달리 불렀다. 위계를 뜻하는 영어의 'hierarchy'라는 단어는 여기서 나왔는데, 성당 건축 안에는 이런 위계가 표현돼 있다.

 

- 프랑스 브르타뉴에 있는 생 쉴피스 성당.



성당의 제단(sanctuary) 주변은 이 자리의 거룩한 위계를 나타내려고 난간을 두르거나 격자 모양의 칸막이벽으로 구분한다. 영국에서는 이렇게 구분된 영역을 '챈슬'(chancel)이라 부른다. 챈슬은 격자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칸첼루스(cancellus)에서 나온 말이다. 제단 앞에서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성직자나 수도자들은 전례 성가를 부르고 기도했다. 이들은 성가를 부르면서 함께 미사를 드렸으므로 이들을 위해 제단 가까운 곳에 성가대석을 둬야 했다. 그래서 이 자리를 '전례 성가대석'(liturgical choir)이라 부른다.
 
이렇게 성당은 성직자를 위한 챈슬과 성가대석을 합한 부분과 회중석 등 크게 둘로 나뉘었다. 성직자와 평신도가 칸막이벽으로 명확히 구분된 것이다. 제단과 성가대석은 난간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벽을 칠 때는 제단을 막은 벽은 '챈슬 스크린'(chancel screen), 성가대석을 막은 벽은 '성가대석 스크린'(choir screen)이라 한다. 이 두 개의 벽 모두를 '챈슬 스크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칸막이벽은 늘 호화롭게 장식됐다. 알비(Albi) 대성당에는 화려한 챈슬 스크린으로 에워싸인 제단과 성가대석이 아주 길게 격리돼 있다. 회중석을 향한 문만 잠그면 성가대석 자체가 또 하나의 성당이 된다. 한편 수도원 성당이나 대학 성당에서는 성가대가 따로 있지 않고 구성원 모두가 성가를 불렀으므로 인근 주민과 함께 미사를 드릴 수 있게 회중석을 이어 붙이는 수도 있었지만, 그 자체가 이들의 성당이었다. 그리고 스크린 앞에 강론대(bema)와 독서대를 뒀다.
 
성당 안의 한가운데에 놓인 성가대석은 수도원 제도가 확립됨에 따라 하루 종일 성무일도로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성가대석은 거룩한 천사의 노랫소리가 언제나 이 땅에 닿게 하는 자리였으므로 매우 중요해졌다. 그러나 성가대를 전담한 이들은 성직자나 수도자들이었지, 오늘날과 같이 평신도가 봉사하는 성가대가 아니었다.
 
고딕 시기에 이르러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앉고 서면서 성무일도를 노래로 불렀으므로 의자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긴 시간 서서 노래를 부르려면 의자의 엉덩이받이 아랫면에 조그만 판을 깎아 붙여야 했다. 이 엉덩이받이를 올리면 약간 튀어나오는 이 조그만 나무판에 선 자세이면서도 슬쩍 앉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이것을 '미세리코드'(misericord)라고 하는데, 이는 "오랫동안 서 있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뜻이다. 이는 의자를 올렸을 때만 보인다. 이런 의자를 '스털'(stall)이라 한다. 이 말은 '서 있는 자리'라는 옛 영어인 'steall'에서 왔다는데, 이 말로도 이들이 얼마나 오래 서서 노래를 불렀는지를 알 수 있다. 공들여 만든 스털을 좌우로 평행하게 배치해 서로 마주 앉아 시편이나 성가를 교송하기에 적합하게 했다.


- 루돌프 슈바르츠가 설계한 성 요셉 베르나르도 성당(1955년).
 

성가대석 위치의 변화

성가대석 한가운데에는 렉턴(lectern)이라는 보면대가 놓였다. 이는 성무일도를 위해 반주 없이 부르는 단선율 음악인 평성가(plainchant)를 적은 커다란 양피지로 된 교송 책을 놓기 위함이었다. 프랑스 브르타뉴에 있는 생 쉴피스 성당을 보면 칸막이 대신에 난간과 스털을 연결해 제대 안의 영역을 확실히 구분하고 있고, 그 높이가 낮아서 회중석에서는 제대와 성가대석을 잘 바라볼 수 있다. 가운데 제대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성당에서 제단과 성가대석을 따로 구분하고 격자로 만든 스크린을 통해 안을 보는 것을 평신도는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럼에도 평신도는 제단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게 됐다. 더구나 전례의 발달로 음악은 더 세심해졌고 성직자들은 성가를 더욱 세련되게 불렀다. 그러나 성가가 이렇게 세련될수록 평신도들은 예배의 중심에서 멀어지고 전례의 구경꾼이 될 뿐이었다.
 
르네상스에서는 일반적으로 성가대석을 옮겨 제단 앞으로 냈으며 칸막이 스크린도 사라졌다. 그 대신 제대와 회중석은 제대 난간으로 구분하고, 그 난간에서 무릎을 꿇고 성체를 모시게 했다. 또 제대와 회중석을 직접 연결하고자 성가대석을 제대 뒤에 놓거나 회중석 뒤편에 놓았다. 이렇게 제대 뒤에 놓인 성가대석을 '레트로콰이어'(retrochoir)라고 한다. 이러한 성가대석은 순례자를 수용하기 위해 성당 동쪽 끝에 주로 설치됐다. 이에 비하면 팔라디오(Palladio)가 1591년에 완성한 베네치아의 일 레덴토레 성당(Il Redentore)은 성가대를 제단 위에 두면서도 제단과 회중석과 성가대석을 직접 연결한 가장 탁월한 예다. 제단 뒤를 열주로 만들어서 제대 뒤 공간이 회중석에서 잘 보인다. 그러나 열주 밑에는 낮은 벽을 둬서 노래하는 성가대는 안 보이게 하고 빛이 가득 찬 방에서 성가만이 고요하게 들려오게 했다.
 
스페인에서는 타라조나 대성당(Tarazona)과 같이 '코로'(coro, 스페인어로 성가대석)를 아예 회중석 뒤편에 둬 제단과 회중석을 직접 잇는 평면이 나타났다. 이 경우에는 가끔 동쪽의 제단과 서쪽의 성가대석에 둔 좁은 통로로 서로 이어지게 했다. 더욱이 바로크 시대에는 전례운동의 결과, 성가대석을 성당 뒤 2층석으로 옮기고 제대와 회중석을 더욱 분명하게 통합했다.
 
한편 수도원 성가대의 규모가 커지자 수도원 학교에 다니는 학생 중에서 소프라노 소년을 뽑거나 직업 성가대원을 영입했다. 그러다가 여성들이 소프라노와 알토를 노래하게 되면서 혼성 4부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성가는 예전보다 훨씬 복잡해졌고, 전례보다는 오히려 세속적인 성격이 점점 더 강해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성가대석이 성당 뒤로 가게 된 이유이며, 성가대가 왜 전례음악에 충실해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교훈이기도 하다.
 
현대 성당에서는 성가대석을 어떻게 구현했을까? 루돌프 슈바르츠가 설계한 성 요셉 베르나르도 성당(1955년)에서는 성가대석이 성당 뒤편에 약간 높게 위치했으나, 회중석 바닥과 차이가 별로 없다. 그리고 입구는 회중석과 성가대석 사이에 나 있다, 이것은 성가대가 회중의 일부이면서도 전례에 쉽게 참여하도록 한다는 의미를 담은 혁신적 평면이었다. 이것은 오늘날 성가대석을 어디에 둬야 하는지 원칙을 분명히 한 '로마 미사 전례서 총지침'과도 일치한다.
 
오늘날 성가대석을 어디에 둬야 하는지에 대한 규정은 없다. 그러나 성가대석이 어디에 놓이는가보다 성가대가 중백의를 입고 찬미한다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이 중백의는 성당 한가운데에서 성가를 부르던 성직자나 수도자를 대신해 성가대가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다는 표지이기 때문이다.
 
[평화신문, 2013년 8월 25일,
김광현(안드레아, 건축가,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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