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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 김대건 · 최양업 전60: 최양업의 부모와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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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8-23 ㅣ No.2122

[신 김대건 · 최양업 전] (60) 최양업의 부모와 가족


최양업을 보면 부모 최경환 · 이성례의 삶과 신앙이 보인다

 

 

최양업 신부의 가정은 오늘날 우리에게 신앙의 전수자로서 조부모의 역할과 부모가 가정 안에서 신앙의 지킴이요 교리교사로서 모범된 삶을 살야야 함을 증언해 준다. 성화는 최양업 신부의 가정을 그린 심순화 화백의 작품으로 당고개 성지에 전시돼 있다.

 

 

최양업 신부에게 있어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과 어머니 이성례(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 다음으로 따랐던 인물이요, ‘전부’였다. 최 신부는 특히 아버지의 두터운 신심과 헌신적인 선교 활동,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 실천 등 신앙인으로서의 모범을 그대로 흡수했다. 최 신부는 1851년 10월 15일 절골 교우촌에서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편지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부모와 가족에 관해 밝힌다.

 

최 신부는 이 편지에서 부모 소개에 앞서 먼저 조부인 최인주에 관해 이야기했다. “(할아버지는) 첫 번째 박해(1791년 신해박해) 때 많은 고초를 겪은 후 석방되었습니다. 그는 순박함과 신심이 뛰어났습니다. 가난한 친척들과 이웃들에게 미리 알아서 구제의 손길을 펼치는 자세도 유별났습니다. 자기 집 종들에게 자기를 영감님이나 마나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아버지와 어머니라 부르라고 명했습니다.” 최 신부는 그의 할아버지가 교회 가르침에 따라 가난한 이웃에 대한 자선을 실천했고, 스스로 신분 차별을 없애 종을 해방하고 그들을 친자녀처럼 대했다고 한다. 최 신부는 그러면서 이러한 조부의 신심이 집안에 그대로 계승됐다고 한다.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

 

아버지 최경환은 신앙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천성적으로 진정한 신앙의 실천자였고… 소년 시절부터 세속의 오락을 경멸하고 오로지 천주교 교리를 듣거나 읽는 것만을 즐거워하였습니다.… 가족 전체가 만장일치로 합의해 고향과 친척과 재산 등을 모두 버리고… 악을 악으로 갚거나 박해자들을 폭력으로 격퇴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합치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여 친지의 도움을 사양하고 산속으로 피신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의 가족은 이 산골에서 저 산골로 이사 다니면서 그들의 손으로 가시덤불과 돌밭을 개간해 연명해 나갔습니다. 그들은 과거에는 부자였으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진해 이러한 궁핍과 재난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모범을 더욱 철저하게 따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만족해하며 살았습니다.… 밭에서 일할 때나 집에서 일할 때나, 길에서 누구와 담화를 할 때나, 항상 천주교 교리와 신심 사정에 대한 이야기만 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꾸밈없이 순박하게, 그리고 몸짓을 해가면서 힘차게 말하는지 듣는 사람은 누구나 탄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육신을 가꾸는 일이나, 세속적인 평판이나, 세속적 관심이나, 현세적인 사정에 대해선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남들이 탄복할 만큼 형제들과 화목하게 살았고, 어머니에 대해서는 가장 다정한 효도로 섬겼으며, 아랫사람들에 대해서도 자상하게 보살펴 주었습니다. 매일 규칙 생활을 하면서 아무리 바쁜 날이라도 신심 독서를 중단하지 아니하였고, 아침ㆍ저녁 기도를 가족 모두와 함께 공동으로 하였습니다.”

 

최경환의 이웃 사랑은 특별했다. 그는 어려운 살림살이 가운데서도 절약해 그 돈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프란치스코는 장을 보러 갈 때에는 물건중에서 제일 나쁜 것이나 흠 있는 것을 골라서 사옵니다.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나무라는 사람들에게는 ‘제일 나쁜 물건을 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런 사람이 없으면 이 불쌍한 장사꾼들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소?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흉년이 되면 프란치스코는 주변에 사는 가난한 이들을 백방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과일을 추수할 때가 되면 가장 좋은 것을 골라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1839년 박해가 일어났을 때, 서울에서는 많은 순교자의 시신이 유기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울과 인근 지방에 살던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사방으로 흩어져 피신했습니다. 신자들은 박해와 기근으로 굶주림에 시달리고 지쳐서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매장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때 프란치스코는 서울에서 50리 떨어진 자기 마을에서 신자들을 권고해 의연금을 거두고, 그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많은 순교자의 시신을 찾아 매장했으며, 또한 불쌍한 교우들을 구원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습니다.”(같은 편지에서)

 

“한 번은 프란치스코가 거리를 지나다가 떡장수가 파를 실수로 밟아 떡판을 진흙 개천에 엎지르고 앉아 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측은한 마음이 들어 묻자 떡장수가 울며 ‘이 떡을 팔아야 어린 자식과 생명을 보존할 터인데, 이 지경이 되었다’고 울먹였습니다. 그러자 프란치스코는 그 값이 얼마냐고 묻고 값을 다 물어 주었습니다.”(「최 바시리오 이력서」에서)

 

1839년 7월 포졸들이 수리산 교우촌을 덮쳤다. 교우촌 회장인 최경환은 당황하지 않고 그들에게 “어찌 이리 늦게 오셨소. 우리는 오래전부터 초조하게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었소.… 아직 동이 트질 않았으니 잠시 쉬었다가 아침을 먹고 기운을 돋운 다음 질서 정연하게 떠납시다”라며 반갑게 맞았다. 의연하고 담대한 최경환의 모습을 본 포졸들은 “이 사람과 이 가족들이야말로 진짜 천주학쟁이”라고 감탄했다.

 

최경환은 함께 끌려간 교우 40여 명 가운데 제일 먼저 심문을 받았다. 그는 맏아들 최양업이 사제가 되기 위해 다른 나라로 떠났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곤장을 110대나 맞았다. 팔다리가 으스러진 상태에서도 최경환은 소리 내 기도하면서 신자들에게 순교를 권면했다. 이런 모습을 본 형리들은 최경환을 ‘바윗덩어리’라 불렀다. 두 달여 동안 하루씩 걸러 고문을 받은 최경환은 서른여섯 나이로 1839년 9월 12일 옥사했다.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

 

경주 이씨 가문의 어머니 이성례는 18세에 최경환과 혼인했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위해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극도의 궁핍과 굶주림 가운데 험한 산속으로 방황하기를 수년을 거듭했는데도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 남편을 여의고 살아남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녀는 곤장과 남편의 순교 앞에서는 용맹했으나 굶어 죽어가는 젖먹이 막내에게는 한없이 약했다. 그래서 그녀는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하지만 맏아들 최양업의 출국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시 체포돼 형조로 끌려갔다. 이성례는 형조에서 배교를 취소하고 순교를 자청했다. 세 차례 혹독한 고문을 당한 그녀는 옥중에서 고문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젖먹이 막내가 자신의 품에서 굶어 죽은 것이다.

 

남편과 자식을 잃은 어머니를 위해 둘째 아들 최의정은 형 최양업을 대신해 한 달 넘게 어머니의 옥바라지를 했다. 순교 전날 이성례는 최의정에게 유언을 남겼다. “하느님의 계명을 부지런히 지키고 형제간에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여라.” 이성례는 교우 6명과 함께 1840년 1월 31일 한양 당고개에서 순교했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애민 정신도 물려 받아

 

최양업 신부는 이처럼 부모로부터 신앙심은 물론 이웃 사랑 특히 가난한 이들을 우선으로 돕는 애민의 삶을 전인격으로 배웠다. 최 신부는 가는 곳마다 병든 백성들을 만났다. 실성하거나 간질에 걸린 사람, 피 섞인 가래를 토하는 사람, 힘이 빠져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사람 등 각종 병에 시달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과 같이 했다. 최 신부는 이러한 병의 원인을 비위생적인 물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물을 정화하는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홍콩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에게 도움을 간곡히 청하기도 했다.

 

그는 신자들에게 영원불멸의 내세만을 가르치지 않았다. 최 신부는 우리 민족이 각자 삶의 자리에서 현실적으로 하느님 말씀을 믿고 구원받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방면의 사회 구조 안에서 정의와 자유, 평화가 실현돼 백성들이 구조적 악으로부터 해방되길 바랐다. 최 신부는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정수 방법까지 배우려 할 만큼 자애로운 목자였다.

 

최양업 신부의 가정은 오늘날 우리에게 신앙의 전수자로서 조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생히 알려준다. 아울러 부모가 가정 안에서 신앙의 지킴이뿐 아니라 교리교사로서 모범이 된 삶을 살아야 함을 증언해 준다. 최양업 신부를 비롯한 그의 가족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31)는 주님의 가르침을 철저히 실천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8월 21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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