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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숨은 성미술 보물을 찾아서7: 장우성의 성모포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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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1-27 ㅣ No.607

[숨은 성미술 보물을 찾아서] (7) 장우성의 ‘성모포영상’


우리네 어머니 닮은 소박한 성모님

 

 

- 장우성의 성미술 전람회 출품작 ‘성모포영상’. 현재는 ‘성모자상’이라고 부른다. 성모 마리아와 그 품에 안긴 아기 예수를 간결하고 소박하게 표현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현재 실물 확인 가능한 5작품 중 하나

 

1954년 성미술 전람회에는 모두 9점의 한국화가 출품됐다. 그중 성모자를 주제로 한 작품은 권영우의 ‘성모자’와 장우성의 ‘성모포영상’(聖母抱嬰像)이다. ‘성모포영상’이란 제목은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이란 뜻으로 성미술 전람회 개최 당시 「경향잡지」에 실린 원제목이다. 현재는 ‘성모자상’으로 표기하고 있다.

 

월전(月田) 장우성(1912~2005)의 출품작인 ‘성모포영상’은 현재 실물을 확인할 수 있는 출품작 5점 중 하나로 그리스도교 회화의 성모자 도상을 한국적인 표현과 기법으로 완성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처음에 성신고등학교에 소장됐다가 강남성모병원(현 서울성모병원)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서울대교구청 내 추기경 집무실에 소장돼 있다.

 

장우성 화백은 1912년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나 경기도 여주에서 성장했다. 그는 그림을 배우기에 앞서 한학을 공부하고 이당(以堂) 김은호(1892~1979)의 제자로 들어가 채색공필화법(彩色工筆畵法)을 배웠다. 그림을 공부한 지 2년 만인 1932년 바닷가의 파도와 갈매기를 표현한 작품 ‘해빈소견(海濱所見)’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면서 등단했고, 이후 여러 차례 입상했다.

 

그는 해방 후에 조선미술건설본부 위원으로 활동했다. 또 배렴과 이응노, 김영기, 이유태, 김중현 등과 함께 단구미술원을 조직해 동양화 쇄신을 위해 노력했다. 1949년 국전 창설 이후 1981년까지 국전추천작가와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6ㆍ25 전쟁 당시에는 종군화가로 중부전선에 종군했고, 1953년에는 이충무공 기념사업회에 위촉돼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제작했다. 이후 이 영정은 표준 영정으로 지정됐다.

 

장우성은 서울대학교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지내며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한국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울러 한국 전통 문인화 화법을 현대적 감각으로 변용해 현대적이고 한국적인 수묵화를 창조, 한국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왔다는 평을 받고 있다.

 

장우성은 2003년 화가로서의 70년 인생을 정리한 회고록 「화단풍상70년」을 펴냈다. 작가는 이 책에서 1954년 성미술 전람회 출품작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부산 피난에서 환도한 직후 미도파 화랑에서 성화전람회가 열렸다. 동ㆍ서양화, 조각 등 많은 작품이 나왔는데 80호 크기의 한복 입은 ‘성모자상’을 출품했다. 그 작품은 처음에 성신(聖神) 고등학교가 소장했다가 지금은 강남성모병원에 있다.”(「화단풍상70년」 147쪽)

 

장우성이 처음으로 한복차림의 성모와 성인상을 제작한 것은 1949년 바티칸 국제 성미술전에 한국 대표로 ‘한국의 성모와 순교 복자’ 3부작 출품했을 때다.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성화로 한국화풍의 한복을 입은 성모와 성인상을 출품하는 것이 좋겠다는 장발의 추천으로 완성된 작품이다. 앞서 배운성 화백이 1930년대에 한복을 입은 성모상을 그린 바 있지만, 한복을 입은 성모상을 한국화풍으로 그린 것은 장우성 화백의 작품이 처음이다.

 

1954년 장우성 화백의 성미술 전람회에 출품한 ‘성모포영상’은 흰색 한복을 입은 성모 마리아와 그 품에 안긴 아기 예수의 모습을 간결하고 소박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해방 이후 장우성의 화풍 변화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수묵 선조가 강화된 단아한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특징은 1949~1954년에 걸쳐 제작된 종교화 ‘한국의 성모와 순교 복자’와 ‘성모포영상’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조형상의 단순화 추구 보여주는 기준작

 

‘성모포영상’에서 흰색 한복을 입은 성모 마리아의 신체는 길게 늘어져 단순화되고 색채 사용은 최대한 절제되었으며 서구의 데생법을 연상시키는 복선(複線)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를 통해 장우성의 인물화가 해방 이후 조형상의 단순화를 추구하는 새로운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준작이 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모든 것이 생략된 배경에 자유로운 먹선과 흰색 호분 채색으로 완성된 이 작품에서 아기 예수의 옷고름과 버선코의 붉은색은 작품에 생기를 더해주는 요소가 되고 있다. 이렇게 ‘성모포영상’은 소박하고 단아하면서도 생동감 있는 성모자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이 작품은 장우성이 그린 여러 성모상 가운데 왕후의 모습이 아닌 흰색 한복 차림으로 간결하게 그려진 유일한 작품이다. 유족인 장정란 교수는 인터뷰에서 이 그림이 “당시 한 살배기 아들을 안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모델로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래서인지 화려한 당의와 족두리가 아닌 소박한 흰색 한복과 짤막한 비녀로 쪽 찐 머리를 한 성모의 모습에서 당시 한국의 평범한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아기 예수 역시 자세와 표정은 의젓해 보이지만 성스러운 종교화에 등장하는 인물임에 앞서 다정하고 인간적인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다.

 

1953년 서울 환도 후에 장우성 화백은 노기남 대주교의 주선으로 가톨릭 교리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영세는 늘 미뤄두곤 했다고 한다. 가족들의 기도와 무던한 노력 덕분이었는지 장우성 화백은 아내가 세상을 뜬 지 5개월 만인 2004년 9월 8일 자택에서 김수환 추기경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가 선종하기 5개월 전이었다. 작가는 아내의 세례명 마리아에 맞춰 요셉으로 세례받았다고 한다.

 

장우성 화백의 한복을 입은 성모상은 국내뿐만 아니라 바티칸ㆍ벨기에ㆍ독일ㆍ미국 등 여러 나라에 소장돼 한국 성미술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그는 비록 예비신자였지만 감동적인 성화를 통해 신앙을 전파하고 소임을 다한 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스스로 하느님께 귀의하고자 했던 것 같다. 아무런 장식 없이도 빛나고 소란스럽고 화려하지 않기에 더욱 아름다운 ‘성모포영상’이 그의 신앙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1월 27일, 정수경 가타리나(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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