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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73: 16세기 (2) 스페인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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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5-07 ㅣ No.1157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73) 16세기 ② 스페인 영성


과도한 영적 체험 지양… 그리스도 본받는 삶 지향

 

 

스페인의 영성가들은 특히 신비스러운 형태의 체험에 몰두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물론 그들이 올바른 신비체험을 언급할 때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정통 교리에서 벗어나는 과도한 영적 체험을 언급할 때에는 스페인 종교재판소가 순기능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단으로 단죄받은 조명주의자들

 

15~16세기 스페인에서 신비스러운 형태의 그리스도교 영성 체험을 하는 사람들을 ‘계시로 조명받고 계몽된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알룸브라도스(Alumbrados)’, 즉 ‘조명주의자’라고 불렀습니다. 조명주의자들은 인간 영혼이 현세에서 완덕을 추구하면서 하느님의 본질을 관상하고 삼위일체 신비를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모든 외적인 전례 예식을 불필요하게 생각하고, 성사 배령은 쓸모없으며, 하느님과 일치하는 상태에 도달하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된다고 선언했습니다. 따라서 스스로를 흠 잡을 데 없다고 생각한 조명주의자들은 욕정에 빠졌으며 양심의 가책 없이 죄를 지었습니다.

 

결국 1525년 종교 재판소장 알론소 만리케(Alonso Manrique de Lara, 1476~1538)는 칙령을 통해 새로운 이단을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물론 이 영성 운동도 처음에는 교회 쇄신을 위해 기도와 관상 생활에 전념하고자 출발했기에, 몇몇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과 예수회 회원들이 함께했습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cio de Loyola, 1491~1556)와 아빌라의 요한도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알룸브라도스는 영적 균형을 잃으면서 이단 운동으로 전락했습니다.

 

아빌라의 요한.

 

 

그리스도 중심적인 영성을 가르친 아빌라의 요한

 

스페인 톨레도(Toledo) 인근 알모도바르 델 캄포(Almodóvar del Campo) 출신인 아빌라의 요한(Juan de Ávila, 1499/1500~1569)은 1513~1517년 살라망카(Salamanca)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 3년간 금욕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이 지역을 여행하던 프란치스코회 수도자의 충고에 따라 요한은 알칼라 데 에나레스(Alcalá de Henares) 대학교에서 도미니코회 수도자 도밍고(Domingo de Soto, 1494~1560)의 지도를 받으며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1525년 사제품을 받은 요한은 가족들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세비야(Sevilla)에서 멕시코 선교를 준비했으나, 세비야 대주교의 권고로 안달루시아(Andalusia)에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고무시키기 위하여 1529년부터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설교를 통해 귀족 계층의 행동을 비난하고 개혁을 호소했기 때문에, 1531년 종교재판소에 고발당했으나 2년이 지난 1533년 무죄를 인정받고 풀려났습니다. 1535년쯤 코르도바(Córdoba) 교구에 입적한 요한은 인근 도시에서 설교하며 학교와 대학들을 설립했습니다. 1538년 요한은 교황 바오로 3세(Paulus PP. III, 재임 1534~1549)의 교황 칙서를 통해 바에사(Baeza) 대학교를 설립했는데, 이 대학교는 훗날 예수회 학교들과 신학교들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요한은 1546년부터 사도 생활 사제단 공동체를 설립할 의향으로 20여 명의 제자와 함께 생활했으나, 1551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자 그들에게 예수회에 입회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성직자 쇄신을 위해 노력하고, 학교와 대학들을 설립하며, 평신도들에게 교리교육을 실시했던 요한은 좋은 평판을 얻으며 훗날 많은 개혁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특히 예수회는 그들이 스페인에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 예수회를 위한 요한의 우정과 도움 덕분이라고 생각하며 요한을 존경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신비체험을 통해 사람들에게 올바른 신비체험을 인식시키려고 노력했으며, 구원의 은총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려오므로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영성생활을 가르쳤습니다. 요한은 로욜라의 이냐시오와 아빌라의 데레사(Teresa de Ávila, 1515~1582)와도 교류했습니다.

 

그라나다의 루이.

 

 

체계적인 기도와 묵상 방법을 제시한 그라나다의 루이

 

스페인 남부 그라나다의 가난한 가정 출신이었던 그라나다의 루이(Luis de Granada, 1504~1588)는 19세에 도미니코회에 입회했습니다. 스페인 북부 바야돌리드(Valladolid)에 있는 도미니코회 특수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루이는 설교가로서 경력을 쌓았습니다. 이내 루이의 명성은 이웃 나라 포르투갈(Portugal)에까지 번졌고, 포르투갈의 요청으로 포르투갈로 이주한 루이는 1557년 도미니코회 포르투갈 관구장이 되었습니다. 루이는 비제우(Viseu)교구와 브라가(Braga)대교구 교구장직을 연이어 제안받았으나 거절하고 설교와 저술 작업에 매진했습니다. 교황 식스투스 5세(Sixtus PP. V, 재임 1585~1590)가 루이의 생애 말년 그를 추기경으로 서임하려고 제안했으나 루이는 그마저도 사양했습니다.

 

루이는 다양한 신학 분야에서 작품들을 남겼는데, 수덕신학에 대한 작품들이 가장 유명했습니다. 1539년 기도 방법에 관해 학생들에게 조언을 주려고 저술했던 소책자가 예기치 않게 성공을 거두자, 루이는 영성생활에 관련된 작품을 저술하는 데 전념하기로 했습니다. 이후 루이는 이 소책자를 발전시켜 1554년에 출판한 저서 「기도와 묵상(Libro de la Oracion y Meditacion)」에서 기도 방식을 제시했습니다. 즉, 전날 밤에 이루어지는 기도 준비, 묵상 자료 읽기, 묵상, 감사, 봉헌, 청원의 순서로 기도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루이는 묵상 자료로 죄, 인간의 삶, 죽음, 최후 심판, 지옥의 벌, 영광에 대한 지복직관, 신적 은혜 등과 같은 신학적인 주제들뿐 아니라, 우리 구세주의 수난을 비롯한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제시했습니다.

 

한편 루이는 1556~1557년 출판한 저서 「죄인들을 인도함(Guía de Pecadores)」에서 수덕생활에 대해서 제시했습니다. 즉, 루이는 하느님께 봉사하고 덕행을 실천해야 하는 이유를 비롯하여 덕행 실천을 통해 얻는 특전을 설명하고, 악습과 칠죄종을 제거하는 방안 및 인간의 의무 등에 대해서 강조했습니다. 특히 이 작품은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1380~1471)의 「준주성범(De Imitatione Christi)」과 비교되면서 짧은 시간 안에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결국 루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으로부터 완덕의 길을 걸어야 하는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완덕으로 나아가는 효과적인 방법은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며 그의 모범을 따르는 것인데, 기도를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루이의 가르침은 근세 많은 영성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몇몇 영성가들은 루이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추천했습니다.

 

유럽 중앙에서 시작해 유럽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던 종교개혁의 현상이 피레네 산맥(los Pirineos)을 넘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로욜라의 이냐시오 및 아빌라의 데레사와 십자가 요한을 제외하고도 한국 가톨릭교회가 미처 알지 못했던 수많은 스페인 영성가들의 열정적인 활동 덕분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게다가 스페인에서 새로운 영성가들이 나타나면 오히려 스페인에 설치되어 있던 종교재판소가 그들의 신비체험을 검토하고 보증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본의 아니게 담당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5월 6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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