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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평양의 순교자들16: 이규식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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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7-23 ㅣ No.1717

[평양의 손교자들] (16) 이규식 베드로


사제 꿈꾸던 청년, 본당 지키려다…

 

 

- 뒷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이규식 신학생, 앞줄 가운데는 김필현 신부다.

 

 

평양교구 시복 대상자 24위 중 성직자는 14위, 평신도는 10위다. 패트릭 번(Patrick J. Byrne) 주교와 홍용호 주교 등 성직자들이 많지만, 공산 치하 평양교구의 첫 순교자 강창희(야고보) 등 평신도 또한 100년 박해를 견딘 조선 순교자들의 후예다운 순교 신심을 드러냈다. 평신도 가운데 이규식(베드로, 1923∼1950?)은 신학생이었다. 1949년 5월 덕원신학교가 공산 정권에 의해 강제 폐교되면서 사제가 되려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끝까지 순교의 용덕을 지켰고 기꺼이 순교의 길을 걸었다.

 

 

매사에 근면 성실하고 기도 생활도 열심 

 

이규식 신학생은 1923년 10월 9일생이다. 출생지는 평안남도 강동군 원탄면 상리 35, 지금의 평양직할시 삼석구역 원흥리다. 아버지는 이동복(바오로), 어머니는 이동춘(막달레나)이었고, 1남 2녀 중 장남이었다. 동생 중 한 명이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이 요셉피나 수녀다. 

 

이규식이 세례를 받은 것은 1939년 4월 9일이다. 부모와 함께였다. 몹시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난 그는 말수가 적고 침착했으며 성품이 착해 소처럼 우직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고향 상리에서 초등학교에 들어갔다가 가족이 동평양으로 이주하면서 대신리본당에서 운영하던 동평학교로 전학, 초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1939년 8월, 대신리본당 부설 동평학교 조회가 열리고 있다. 왼쪽 건물이 동평양에 있던 대신리성당이고, 오른쪽이 동평학교다.

 

 

동평학교에서 그는 ‘운명처럼’ 한 사제를 만난다. 박용옥 신부와 함께 ‘한국 천주교회의 첫 로마 유학생’으로 기록되는 김필현 신부다. 유학을 다녀와 대신리본당 주임으로 있던 김 신부는 소년 이규식을 눈여겨봤다. 매사에 성실하고 근면한 데다 열심히 기도하며 사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12명의 어린 학생으로 이뤄진 본당 성체조배회에서도 그는 발군이었다. 성당과 학교 주위에 울타리를 만드는 봉사나 학교 화장실 청소 같은 궂은일에도 열심이었다. 순명 정신이 투철한 데다 수도자처럼 신앙생활을 하니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김 신부는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그를 동평학교 급사로 채용, 잔심부름을 시키며 지켜봤다. 김 신부는 확신이 서자 그를 일본 나가사키로 보내 가톨릭재단 산하 교육기관이던 6년제 토오료(東陵)중학에 다니게 했다. 이때 학비는 물론 생활비까지 김 신부가 모두 댔다. 그의 성소와 적성이 교회 재목으로 쓰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토오료중학을 졸업하고 평양으로 돌아온 그는 2년간 성모보통학교 교사로 일했다. 모범적이고 열성적인 교사였다. 야단치기보다는 지켜보고 기다려주는 스승이었다. 과묵했지만, 말보다는 행동으로, 실천으로 무엇이든지 시작하면 꼭 끝을 봤다. 한번 단식하면 4∼5일은 보통이었고, 기도 생활은 남들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해방 직전, 그는 성모학교 교사직을 버리고 대신리본당으로 돌아온다. 신학교에 들어갈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대신리본당 제의방에 기거하며 교회 일을 도왔다. 한겨울에도 온기 없는 제의방에서 갖은 어려움을 참고 생활했다. 주임 박용옥 신부에게 2년간 라틴어와 함께 신학교 입학 준비를 위한 공부를 했다. 성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 생활에 전념하는 모습은 ‘마치 수도 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는 기록으로 전해진다. 

 

그는 사제 성소의 꿈에 발을 내딛는다. 해방된 지 2년 후 1947년 9월 덕원신학교에 입학했다. 학업의 길은 길지 못했다. 2년이 채 못 돼 1949년 5월 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에서 운영하던 덕원신학교가 강제 폐교, 몰수되면서 그는 평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는 서포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에 머물며 수도원의 일을 도왔다.

 

 

환난 닥쳐도 제일 먼저 순교하겠다는 용기

 

서포 수녀원도 공산당에 몰수당하고 수녀회가 강제 해산된 데다 평양대목구의 성직자들이 투옥당하자 그는 다시 대신리본당으로 돌아와 본당에 숙직하면서 주일학교 지도교사로 일했다. 그러면서 본당 예수성심회 청년들과 박용옥 신부를 지켰다. 

 

평소 가족과 대화 중에도 “언제든 군난(窘難, 박해)이 닥치면, 제일 먼저 나가 치명(致命)하겠다”고 말하며 굳은 의지를 보이곤 했던 그는 훗날 자신의 수난을 미리 내다봤던 듯하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긴장 속에서 1949년 성탄 판공 시기가 돌아왔다. 12월 6일 오후 2시께, 정치보위부원이 찾아왔다. 박 신부는 판공성사를 보기 위해 모여드는 신자들로 점심까지 거르며 면담과 성사를 주고 있었다. 정치보위부원은 “관후리 대성당 문제로 상의할 게 있으니 평양시 인민위원회로 나와 함께 가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박 신부가 “판공성사 때문에 바빠서 갈 수 없다”고 거절하자 정치보위부원은 물러갔다가 여럿이서 다시 찾아와 계속 동행을 요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신자들이 성당으로 몰려들었다. 박 신부는 판공성사를 주고 보위부원들에게 시달리느라 저녁도 못 먹고 저녁기도도 바치지 못했다. 이때 박 신부는 제의방에 들어가 중백의와 영대만 두르고 나와 신자들에게 성체를 모두 받아 모시도록 했다. 위급한 상황이 닥쳐온 것을 눈치챈 예수성심회 청년들이 영성체를 끝낸 박 신부를 에워싸고 사제관으로 향했다. 성당 문밖에서 기다리던 보위부원들은 박 신부를 강제로 연행하려 했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이규식은 이를 신자들에게 알리고자 성당 종을 치기 시작했다. 종소리를 듣고 신자들은 물론 비신자들까지 모여들자 보위부원들은 성당 종의 줄을 끊어 버렸다. 그러나 이규식은 종탑에 올라 종의 추를 잡고 더 크게 종을 쳐 더 많은 사람이 모이게 했다. 박 신부의 연행이 지연되자 화가 난 보위부원들은 그를 종탑에서 끌어내 온몸을 짓밟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이때 달려온 그의 어머니가 “왜 내 아들을 때리느냐?”며 덤벼들고 항의하는 바람에 구타는 멈췄다. 친구들은 그를 빈 교실로 데려가 눕혔다.

 

박 신부를 지키려는 본당 신자들과 보위부원들 간에 난투극이 벌어졌고, 이를 보다 못한 박 신부는 밖으로 나와 보위부원들에게 끌려갔다. 이어 모진 몰매에 인사불성이 된 이규식도 그들에게 끌려갔다. 이후 소식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당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다친 상황이었기에 오래 살아있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게 목격자들의 증언이다. 설령 살아 있었다고 해도 1950년 10월 20일 국군과 유엔군의 평양 수복 직전에 피살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규식 베드로는

 

■ 1923년 10월 9일 평안남도 강동군 원탄면 상리 35 태생

■ 1939년 4월 9일 대신리본당에서 영세

■ 상리보통학교, 동평학교, 나가사키 토오료중학 졸업

■ 1947년 9월 덕원신학교에 입학했지만, 1949년 5월 신학교가 강제 폐교돼 귀향  

■ 1949년 5월 평양으로 돌아온 뒤 서포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도회 거주

■ 1949년 12월 6일 대신리본당 주임 박용옥 신부를 지키려다가 정치보위부원들에게 끌려가 행방불명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7월 23일, 오세택 기자, 자료=평양교구 사무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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