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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기도]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너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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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6-05 ㅣ No.954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너’ 중심


‘너’를 향하는 방향 선택, 그리스도교 영성 생활 핵심

 

 

찬미 예수님.

 

지난주에 우리는 몸 차원의 원리와 정신/마음 차원의 원리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서, 이 원리들이 근본적으로 ‘나 자신’을 위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 곧 ‘자기중심성’을 띠고 있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의 몸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필요를 먼저 채우고 싶어 한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모습을 ‘이기적’이라거나 윤리적으로 ‘나쁜’ 것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는 것도 함께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이러한 움직임은 몸을 지니고 있는 생물학적 존재인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몸이나 정신/마음 차원에서가 아닌 영의 차원에서는 어떠할까요?

 

영의 차원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안에 머무시고 또 활동하시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 안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활동하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이십니다. 예전에 영성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영적 인간’과 ‘육적 인간’에 대해 다루었던 부분을 기억하시나요?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시는 영적 인간과 육적 인간 사이의 구별은 실제로 영으로만 이루어진 사람과 육으로만 이루어진 사람 사이의 차이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영과 육을 함께 지닌 한 사람이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가는지를 따지는 구별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즉, 영적 인간이나 육적 인간 모두 영과 육으로 이루어진 것은 마찬가지인데, 그중에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영적인 인간이고, 육의 욕망만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육적인 인간이라는 것이었죠. 이처럼 영적 인간이란 다름 아닌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때,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시면서 그를 이끌어주시는 그 자리가 바로 영의 차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영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움직임은 다름 아닌 성령의 움직임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대로 우리가 영의 차원의 원리를 따라 움직이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지난번에 어느 자매님의 표현을 빌려 말씀드렸던 겁니다. ‘기도라는 것이 내 스스로 해나가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이 내 안에서 움직이시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라고요.

 

그렇다면, 영의 차원에서의 성령의 움직임은 어떠한 방향으로 이루어질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바라보게 됩니다. 영의 차원에서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분은 성령이시지만, 이러한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한 본체이시며, 삼위일체의 내적 ‘생명’에서나 세상을 위한 당신 사랑의 선물에서나 성부와 성자와 분리되실 수 없는’(「가톨릭교회교리서」 689항)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곧, 성령의 움직임은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움직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움직임, 삼위일체 신비의 핵심에는 바로 ‘사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수회의 프랑수아 바리용 신부님은 「흔들리지 않는 신앙」(생활성서사/2014)이라는 책에서 ‘사랑’이라는 열쇠를 통해 삼위일체의 신비를 탁월하게 풀어내십니다.

 

“다시 말해, 더 이상 내가 나 자신의 중심이기를 멈추기 위하여, 자신을 해체하여 내 중심이 너이게 하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네가 나의 중심이요, 나는 너를 위하여, 너에 의하여 산다. 나는, 너 역시 너 자신을 해체하여 이제 더 이상 네가 너 자신의 중심이 아니며, 내 안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나는 네 안에 집중되어 너를 위해 산다. 너는 내 안에 집중되어 나를 위해 살고, 우리 둘 모두가 서로에 의하여 산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것이 베풂이다!-이요, 상대방에 의하여 산다는 것-이것이 받아들임이다!-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내 안에서, 나를 위해, 나 자신에 의해 사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신비 전부이다.”(45~46쪽)

 

삼위일체의 사랑의 신비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삼위일체 신비를 사랑의 움직임으로 풀어내는 바리용 신부님의 말씀을 우선 생각해보면, 우리는 성령의 움직임 역시도 ‘나 자신’이 아닌 ‘너’를 향한 움직임이라고 알아들을 수 있게 됩니다. “삼위일체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향한 순수한 움직임이요, 아들은 아버지를 향한 순수한 움직임이고, 성령은 이 움직임의 상호성이요 역동성 자체”(48쪽)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영의 차원에서 움직이시는 성령의 이끄심은 나 자신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너를 향하는 움직임입니다. ‘나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너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의 차원에서의 이러한 움직임을 우리는 ‘타자지향성’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쯤 되면, 제가 어떤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지 벌써 알아차리는 분들이 계시겠죠?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근본적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은 나 자신을 위한 방향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부족하거나 못나서도 아니고, 이기적이거나 성덕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원래부터 생겨난 모습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몸의 차원, 정신/마음 차원에서의 움직임이죠. 그런데 영의 차원에서는 이와 정반대의 움직임이 일어나게 됩니다. 영의 차원에서 움직이시는 성령께서는 삼위일체 사랑의 신비 안에서 늘 언제나 다른 사람, ‘너’를 향해 우리를 이끌어 가시고, 이러한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우리들은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이 아닌 상대방을 위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우리 그리스도교 영성 생활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네, 맞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향하는 방향이 아닌 ‘너’를 향하는 방향을 선택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영의 차원의 원리를 따라 사는 삶’이요, ‘영적 인간의 삶의 방식’이며, ‘영성’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 드러나는 바대로, 성부 하느님께서 먼저 이러한 방향을 택하셨고, 성자 예수님 역시도 이 방향을 따르셨으며, 성령께서도 우리를 이 방향으로 이끌고 계신 것입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죠? 우리 안에는 기본적으로 ‘나’를 향하는 원리가 자리하고 있지만, 이 원리를 따를지 아니면 ‘너’를 향하는 영의 차원의 원리를 따를지는 우리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조금씩,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끼시나요?

 

* 민범식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로마 그레고리오대학에서 영성신학 박사와 심리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가톨릭신문, 2017년 6월 4일, 민범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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