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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순교자들이 쓴 순교자들의 전기 - 현석문 등의 기해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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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08

[신앙 유산] 순교자들이 쓴 순교자들의 전기 : 현석문 등의 기해 일기

 

 

머리글

 

19세기말 개항기에 조선을 찾은 외국인 학자들은 조선에 전적(典籍)이 많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리하여 그들은 조선을 “전적의 나라”, “문헌의 나라”로 부르기도 하며, 그 풍부한 문헌 자료들에 찬탄을 아끼지 아니했다.

 

각종 전적과 같은 문헌 자료가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문자 기록 자체를 소중하게 여겨 왔던 문화적 관행과 관계되는 현상이다. 사실, 우리 겨레는 예로부터 기록을 소중히 여겨왔으며, 어떠한 경우에라도 기록을 남기고자 노력했다. 이렇게 쓰여진 기록들 중 상당수는 잦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흩어지고 불타 버렸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적지 아니한 기록이 남아 있어 우리 나라는 “전적의 나라”로 불리우게 된 것이다.

 

문자 기록을 존중하던 겨레 문화의 전통은 이땅의 천주교 신도들에게도 이어져 갔다. 그들은 박해의 피보라가 어지러이 춤추는 가운데서도 기록을 남겨 자신의 믿음을 후세에 전하고자 했다. 또한 그들은 믿음 때문에 죽거나 잡힌 형제들의 굳은 믿음과 떳떳한 몸가짐을 밝히고 이를 본받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기해 일기와 같은 순교자들의 기록이 탄생되었다.

 

 

저술 당시의 상황

 

기해 일기는 1839년을 전후하여 순교한 사람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기해 일기가 쓰여지던 당시 조선 천주교회의 상황은 이러하다. 즉, 1831년에 조선교구가 세워진 이후, 조선교구의 선교는 파리 외방 전교회에 위임되었다. 이에 파리 외방 전교회의 선교사들은 1836년 이후 조선에 입국하여 비밀리에 선교 사업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이들의 선교 활동과 조선인 신도들의 자기 희생적 노력으로 조선 천주교회는 날로 발전해 갔다. 그리하여 1835년에 6천여 명이었던 신도들이 1839년경에는 9천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불과 4년여 만에 4000여 명의 신도가 불어난 것이었다.

 

한편, 천주교 신앙의 전파는 봉건사회의 해제기에 접어든 조선 왕조의 붕괴를 촉진하는 것이었다. 이에 집권층에서는 천주교 신앙의 금지라는 사상 통제 정책의 시행을 통해서 조선 왕조의 붕괴를 막고, 봉건적 통치 체제의 강화를 시도해 왔다. 이와 같은 시도는 새 왕이 즉위한 직후에 집중적으로 전개되었다. 예를 들면, 1801년의 신유 교난은 순조(純祖)가 즉위한 직후에 발생했으며, 1866년의 병인 교난도 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한 직후에 얼어났다. 한편,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천주교 신앙이 폭발적으로 급격히 전파되는 지역에서 전개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1839년(헌종 5년)은 천주교에 대한 탄압 과정에서 드러나는 위의 두 가지 특정 이 맞물려 있던 때였다. 더욱이 당시의 통치자들은 조선에 서양인 선교사가 몰래 들어와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는 왕조 국가의 안전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1839년에 기해 교난이 일어났고, 이 교난의 피해자들에 관한 박해와 순교의 기록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기해 일가가 작성되었다.

 

 

저술 과정

 

기해 교난이 발생하자 조선교구의 제2대 교구장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는 순교자들에 관한 기록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박해 초, 앵베르 주교는 수원 부근으로 몸을 피해 5개윌 가까이 숨어 지내면서, 순교자들에 관한 전기를 아주 상세하고 정확하게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앵베르 주교는 얼마 아니 가서 자신도 잡히게 될 것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이 순교자들의 행적이 영영 사라지게 될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앵베르 주교는 서울에 있는 지도적 신도들에게 순교자의 전기를 계속해서 집필하도록 당부했고, 그 후 그는 체포되어 순교했다. 그런데 주교의 부탁을 받은 신도들로는 정하상(丁夏祥), 현경련(玄敬連), 이문우(李文祐), 최영수(崔榮受), 현석문(玄錫文) 등이었다.

 

이들 중 정하상과 현경련은 1839년에 순교했고, 이문우도 1840년초에 순교하게 되었다. 이에 최영수와 현석문은 순교자의 행적을 수집하고 확인하며 보충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최영수마저 1841년 8월에 순교하게 되니, 순교자의 기록을 정리하는 일은 현석문만의 몫으로 남게 되었다.

 

앵베르 주교의 부탁을 받았던 사람 가운데 홀로 남게 된 현석문은 그 부탁을 실천하기 위해 그의 목숨을 지켰다. 그리고 그는 이재의(李在誼)와 최 베드로의 도움을 받으며 이 작업을 계속했다. 현석문은 1845년 페레올(Ferreol) 주교가 입국하자 이 작업 결과를 전했다. 그리고 그는 1846년의 병오 교난 때 잡히어 순교하였다.

 

앵베르 주교를 거쳐 현석문에게까지 이어졌던 순교자 전기의 정리 작업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페레올 주교에 의해 계승되게 이르렀다. 페레올 주교는 이 기존의 기록에다가 1846년에 순교한 김대건 신부와 현석문 등의 기록을 덧붙여 기해 일기를 완성했다. 페레올 주교의 이 작업 완수는 최양업(崔良業) 신부의 기여도 컸다. 최양업 신부는 이 기록들을 라틴어로 옮기는 작업도 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오늘 우리가 볼 수 있는 기해 일기가 완성되었다.

 

 

현석문은 누구인가?

 

기해 일기는 어느 한 사람의 저작이 아니다. 이 기해 일기가 완성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 인물로는 앵베르, 현석문 및 페레올을 들 수 있다. 이 세 사람 중에서도 현석문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현석문은 기해 일기의 저자로 알려지기까지 한 듯하다. 그러나 그는 기해 일기의 공동 저자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해 일기의 저작에 미친 현석문의 역할을 과소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석문(1797~1846년)은 1801년 신유 교난 때 순교한 현계흠의 아들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신앙을 이어받아 박해받는 교회를 이끌어 나가는 데에 자신을 바쳤다. 1837년 앵베르 주교가 입국한 이후 그는 주교의 복사 겸 서울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박해가 일어나자 아마도 그는 순교를 신앙인적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순교에의 동경’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앵베르 주교로부터 순교자의 전기를 기록해서 남기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 부탁 때문에 그는 ‘순교에의 유혹’을 뿌리치고 살아서 기록을 남기는 길을 택하게 되었으리라. 그리고 박해가 끝난 후 그는 교회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김대건과 함께 중국의 상해에까지 가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Daveluy) 신부를 맞아들이는 데에 일조했다. 그는 1846년 병오 교난 때에 김대건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1925년 그는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로 선포되었고,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기해 일기의 가치

 

기해 일기는 현석문 등에 의해 철저히 조사, 정리된 1839년 전후의 순교자에 관한 전기(傳記) 자료이다. 이 자료에는 모두 78명의 순교자들이 기록되어 있다.

 

1839년과 1846년의 박해 때에 순교한 이들의 시복을 위한 노력은 1847년에 시작되었다. 이때 순교에 관한 조사 자료로 기해 일기가 번역 제출되었고 이로써 시복 수속이 시작될 수 있었다. 그 결과 1857년에는 기해 일기에 포함된 순교자 가운데 70명이 가경자가 될 수 있었고, 이들 중 69명은 순교 성인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이로써 기해 일기는 한국 성인의 탄생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아 준 근본 자료라 할 수 있다.

 

기해 일기는 박해를 무릅쓴 신앙인들의 고백적 기록이며, 박해 시대의 교회상을 전해 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기해 일기는 봉건 질서 강화책의 희생양들에 대한 기록이며, 19세기 전반기 조선 왕조의 사회상과 형행 제도를 잘 설명해 주는 흥미 있는 자료이다. 기해 일기는, 또한 문학적 향기가 듬뿍 배인 문학 작품으로서의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다. 이 기해 일기는 순교자들이 쓴 순교자들의 전기이며 성인이 쓴 성인전인 것이다. 이러한 데에서 우리는 기해 일기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이 기해 일기는 1905년에 활판본으로 간행된 바 있다. 그리고 1986년 성 황석두 루가 서원에서는 이를 오늘날의 맞춤법으로 바꾸어 간행하기도 했다.

 

[경향잡지, 1991년 1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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