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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흥선 대원군과 천주교 - 권불십년 시절의 천주교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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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7 ㅣ No.171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흥선 대원군과 천주교

 

권불십년 시절의 천주교 박해

 

 

왕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나를 세운 왕이 아니라면 왕의 아버지는 또 다른 왕이다. 그러나 뒤를 이을 아들이 없는 왕은 가까운 종친이 입양되는 형식을 통해서 후계자로 결정된다. 이때 새로 즉위하는 국왕에게는 양부인 국왕과 함께 국왕을 직접 낳은 생부가 있다.

 

이때 왕실이나 조정에서는 국왕의 생부에 대한 적절한 예우를 해야 했다. 그래서 국왕의 생부에게는 대원군이라는 칭호를 주고 특별히 우대하였다.

 

대원군은 신제로 행정부의 영의정과 대등한 정1품의 직위에 해당되는 보통명사였다.

 

조선 역사에는 4명의 대원군이 있으나 살아생전 대원군에 봉해진 이는 조선 제26대 국왕인 고종의 생부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1898년)으로, 여러 대원군 가운데 살아서 역사에 개입한 유일한 인물이다. 그래서 오늘날 대원군이라 칭호는 그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처럼 쓰인다.

 

 

흥선 대원군의 등장과 천주교

 

흥선 대원군은 자신의 둘째 아들이 12세의 미성년으로 왕위에 오르자 섭정이 되어 국가의 모든 정책 결정권을 부여받았다. 국왕 고종이 즉위한 때 조선왕조는 안팎으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국내의 사정을 보면, 조선왕조는 거듭된 실정과 농민에 대한 수탈로 인해 전국 규모의 농민반란에 직면해 있었다. 한편 대외적으로도 러시아, 영국, 미국 등 서양 여러 나라가 조선에 문호를 개방하라고 압력을 가하였다. 대원군은 이러한 내우외환을 극복하고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해야 할 책임을 통감했다.

 

그는 권력을 장악한 직후 과감한 내정개혁을 통해서 왕권을 안정시키는 데에 기여했다. 그가 집권하면서 벌열들이 장악하던 통치권은 왕실로 돌아갔고, 세도귀족들의 발호를 막을 수 있었다. 국가재정은 안정되었고 도처에서 일어나던 농민저항도 수그러들었다. 이와 같은 개혁정치는 긍정적 측면을 가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전근대적 통치 과정에서 진행된 개혁이었을 뿐이다. 그는 사상에 대한 철저한 통제를 시도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그의 개혁은 결코 조선을 근대사회로 전환시킨 개혁이 될 수는 없었다.

 

그는 권좌에 오르기 전에 민간에서 생활하면서 천주교가 성행하던 당시 사회의 동향을 잘 알았으며, 천주교 신자들의 일상생활까지도 꿰뚫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유학의 한 갈래인 성리학의 가르침에 기초를 두어야 왕권이 안정되리라 판단했다. 당연한 결과로 당시 집권층에게서 강하게 배척받으며 사회문제로 제기되던 천주교 신앙을 탄압하였다.

 

탄압의 대상이던 조선 천주교회의 선교사들과 신자들은 대원군의 포악성을 강조하여 말하기도 한다. 사실 대원군의 천주교 신자 학살은 당대 사회를 전율시키기에 충분했다. 당시 떠돌던 이야기로는 대원군이 ‘살만인’(殺萬人) 곧 “만 명을 죽여야 권좌를 유지할 수 있다.”는 음양술(陰陽術)을 믿어서 천주교 신자들을 그렇게 죽였다고도 했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만인을 죽인 역사’(殺萬人史)의 일부라는 인식도 있었다.

 

한편 대원군 집권 당시에는 서원의 횡포가 대단했다. 서원에 적을 두고 글을 읽는 양반들에게는 조세의 일종인 군포(軍布)를 면제해 주는 특전이 있었다. 이 때문에 국가의 재정수입은 크게 축소되었고 농민에 대한 착취가 강화되었다. 그래서 국가의 재정을 확보하고 농촌을 안정시키려면 서원을 철폐해야 했다.

 

그러나 서원은 조선왕조를 지탱하던 성리학을 보존하고 재생산해 내는 기능을 가졌다. 이러한 서원을 혁파하려면 먼저 자기 사상의 순수성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서원 철폐에 앞서서 당시 사상계의 주요 문제였던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단행했다.

 

 

박해 이후의 대원군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은 철종이 즉위한 이후 활발히 선교되고 있던 천주교회를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당시 사람들의 말로는 대원군이 십 년을 기한으로 하여 천주교의 싹을 말려버리려 했다고 한다. 1866년에 시작되어 3년 남짓 계속된 대원군의 박해로 조선에서 선교하던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을 비롯해서 많은 신자들이 희생되었다. 이때에 희생된 신자들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1868년 9월에 벌써 박해에 희생된 사람이 2천 명이 넘었는데, 그중에 5백 명이 바로 서울에서 죽었다. 1870년에 조선에서 공공연히 떠도는 풍문에 따르면 산에서 굶주림과 곤궁으로 죽은 모든 사람을 빼고도 희생된 사람의 t가 8천에 이르렀다 한다. 물론 이 숫자를 확인할 도리는 없다. 그러나 아무리 이 숫자들이 과장된 것이라 하더라도, 대원군이 그의 약속을 지켜 10년도 안 결려서 천주교의 흔적을 지워버리기를 원하고 있음을 증명해 준다.”

 

대원군의 박해에도 천주교회는 결코 죽지 않았다. 박해는 천주교를 더욱 확산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대원군의 정치권력도 10년을 가지 못했다. 그는 고종 임금이 직접 정치를 맡으면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자신의 며느리 명성황후 민씨 일가와도 치열한 권력투쟁을 했지만 참패하였다. 개항이후 한때 그가 정권을 다시 장악하기도 했지만, 곧 밀어닥친 근대화의 과정에서 그가 설 자리는 더 이상 없었다. 그 뒤에도 그는 정치권력을 회복하고자 무진 애를 썼다. 심지어 그는 1895년 을미사변을 통해 명성황후를 제거하는 일에 개입했다가 철저히 실각하여,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공덕동 자택에서 거의 유폐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때에도 권토중래를 기도하면서 외국인들과 그침 없이 접촉을 시도하였다. 1897년 6월 15일에는 서울주재 프랑스 공사였던 프랑시와 천주교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특별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해 여름 뮈텔이 이질에 걸려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별도로 뮈텔에게 사람을 보내 병문안을 했고, 며칠 있다가는 당시 매우 귀중한 약재인 첨심환 세 알을 뮈텔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그의 부인 여흥부대부인 민씨는 이미 1896년 10월에 뮈텔 주교에게 마리아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아 신자가 된 바 있다. 그렇지만 대원군 자신은 천주교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여전히 관심이 없었다.

 

돌이켜보건대, 대원군은 30여 년 전인 1866년에 조선의 천주교회를 쑥대밭으로 만들고자 했고, 조선에 있는 프랑스 선교사들을 학살했다. 학살된 사람 가운데는 천주교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도 있었다. 그 뒤 30여 년이 지나 이제 그는 베르뇌 주교의 뒤를 이은 뮈텔 주교에게라도 기대어서 자신의 권력을 회복해 보려는 추루한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내었다.

 

 

남은 말

 

대원군은 천주교에 투신한 민중의 마음을 결코 읽어낼 수 없었다. 대원군의 눈에 비친 천주교는, 그가 권좌에서 천주교를 박해하던 1866년이나 유폐생활을 강요당하면서도 뮈텔 주교에게 추파를 던지던 1897년에도, 여전히 서양세력의 일종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정권을 장악했을 때는 천주교를 서양세력의 앞잡이로 판단하고서 이를 배격하고 철저히 탄압했으며, 을미사변 이후 자신의 힘이 극도로 소진되자 천주교를 이용 가치가 있는 서양세력으로 파악하고 다시 접근한 듯하다. 아마도 그의 삶이 실패하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는 그가 천주교를 일종의 정치세력으로만 파악한 데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민중을 학살한 학살자로 그리고 국가의 근대적 개혁과 개방을 막은 인물로 계속 기억될 것이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7년 3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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