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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조선교구의 창설과 파리외방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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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5 ㅣ No.163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조선교구의 창설과 파리외방전교회

 

 

우리나라 교회는 외국 선교사들의 직접적인 도움 없이 우리 민족의 자발적 노력으로 창설되었다. 분명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사실 천주교 신앙의 자발적 수용은 당시 중국에서 한문으로 간행된 천주교 서적의 독서와 연구의 결과였다. 따라서 우리나라 교회 창설 배경에는 한문 서학서를 간행해 준 선교사들의 노력이 자리 잡고 있다. 이와 같이 창설된 조선 교회는 1830년대에 이르러 파리외방전교회의 직접 선교를 통해 독자적인 교회 조직을 마련하고 선교를 강화해 간다.

 

 

‘선교 보호권’과 ‘파리외방전교회’의 창설

 

세계사에서는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에 이르는 때를 ‘대항해 시대’ 또는 ‘지리상의 발견 시대’라고 규정한다. 이른바 지리상의 발견은 가톨릭 국가였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경쟁적으로 전개한 일이다. 이에 교황청에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 나라 사이에 새로 발견된 지역과 관련하여 예상되는 분쟁을 미리 예방하고자 했다. 또한 교황청에서는 원주민 선교를 추진하고자 두 나라에 일정한 경계를 정해주며, 그 경계 안에서 두 나라가 각각 선교사와 교회를 보호하며, 성당을 건설하여 십일조를 걷을 수 있고, 교구를 설립하여 주교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를 ‘선교 보호권’(Padroado, Jus Patronatus)이라 한다.

 

그러나 이 선교 보호권은 선교를 촉진하는 수단이 되지 못하고 그 지역에 대한 정복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정치도구로 변질되었다. 더욱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식민지 경쟁의 대열에서 탈락하고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 새로운 나라가 해양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후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선교를 추진할 수 있는 힘이 없는데도 선교 보호권을 앞세워 자신들 지역에 대한 다른 나라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을 금지하였다.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재위 1621-1623년)는 정치적 식민 선교를 순수한 교회 선교로 바꾸고자 포교성(현재의 인류복음화성)을 설립했다. 이로써 교황청에서는 ‘교황 파견 선교사’를 새로운 전교지역에 파견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또한 교황을 대리한 선교사[代牧]가 일정 지역에서 교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대목구(代牧區) 제도를 설치했다.

 

곧 새롭게 실시하려는 대목이나 대목구는 종전의 주교나 교구에 대칭되는 제도였다. 이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자신에게 부여된 ‘선교 보호권’에 따라 교황 파견 선교사의 입국이나 대목구의 설정에 항의했다. 그러나 교황청에서는 ‘선교’는 수행하지 않으면서도 ‘보호’라는 권리만을 주장하는 그 두 나라에 맞서 나가며 새로운 선교정책을 강행해 나갔다.

 

이러한 세계 교회사의 흐름이 동아시아 사회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곧 포르투갈은 선교 보호권에 따라 1558년(조선 명종 12년)에 고아에 대교구를 설정하여 인도 선교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포르투갈은 1566년 중국 마카오에 전진기지를 마련했고, 교황청은 1576년(선조 9년) 마카오 교구에 내린 대칙서(bula)에서 그 관할구역을 ‘중국 일본과 인접지역’으로 규정하여 막연하게나마 조선의 선교 관할권이 언급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포르투갈이 해양을 지배하던 시대가 곧 끝나면서 새로운 지역을 선교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에 교황청에서는 1679년에 중국에 난징[南京] 대목구를 설정하여 선교사를 새롭게 파견하고, 그 관할구역을 ‘난징과 조선 및 인근 성’으로 설정했다. 또한 교황청은 1690년에는 난징 대목구에서 베이징[北京] 대목구를 독립시키면서 조선 선교의 책임은 막연하게나마 베이징 대목구 관할로 넘어갔다. 이로써 동아시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이 무력해졌다.

 

 

조선 교회와 파리외방전교회

 

이처럼 일찍부터 교황청은 조선을 자신의 선교지역으로 의식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조선 교회는 조선인들의 ‘자발적’ 노력으로 창설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교황청에서는 베이징의 감목대리 구베아(Gouvea)에게 ‘개인차원’에서 조선 교회를 보호해 주기를 부탁했다. 구베아 주교[代牧]는 청국인 주문모 신부를 선교사로 조선에 파견했고, 그 뒤 조선 교회는 사실상 베이징 교구[代牧區]의 관할지역이 되었다.

 

1790년대 이후 조선 교회에서는 교황청에 수차례에 걸쳐 주교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특히 1826년 조선 신자들의 간절한 편지를 받은 포교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은 조선 교회의 상황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로 즉위한 그는 조선대목구의 독립을 추진했고, 조선 교회 선교를 담당할 단체로 파리외방전교회를 지목하여 부탁했다. 당시 파리외방전교회의 장상들은 조선에 파견할 선교사들이 없는 것으로 판단해서 교황청의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나 샴(현 타일랜드)의 방콕에서 선교하던 브뤼기에르(Bruguiere)가 이 소식을 듣고 조선 선교를 자원함으로써 조선교구[代牧區]가 설정될 수 있었다. 이로써 조선 교회는 파리외방전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그러나 조선교구의 설정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그 첫 번째 문제점은 포르투갈 교회가 장악하고 있던 선교 보호권과 관련된 것이었다. 포르투갈의 관할 아래 있던 마카오 교구에서는 선교 보호권에 의거해 조선은 여전히 자신의 관할구역에 속한다고 판단하여 교황청이 별도의 대목구를 설치하는 데에 반대했다. 또한 조선대목구의 설정에는 법적으로 조선에 대한 관할권을 가지고 있던 난징 대목구와 실제 관할권을 행사해 오던 베이징 대목구의 문제도 있었다. 그리고 조선에는 베이징 대목구에서 파견한 중국인 선교사 유방제(劉方濟) 신부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교황청에서 조선대목구의 자립과 조선인 사제 양성에 대한 적극적 지원을 약속받았고 조선 입국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조선에 입국하려던 과정에서 당시의 복잡한 상황으로 여러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또한 1836년 조선에 입국한 모방(Maubant) 신부와 브뤼기에르 주교의 뒤를 이어 조선대목구의 책임을 맡은 앵베르(Imbert)의 경우도 조선 선교의 관할권에 대해 확실히 해두어야 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입국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의 상당부분은 조선 선교 관할권을 계속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베이징 대목구 측한테 당한 것이다. 또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에 이미 파견되어 있던 유방제(본래 이름은 여항덕) 신부가 오직 베이징 대목구의 주교만을 자신의 장상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한편, 유방제 신부가 베이징 주교의 관할 아래에서 자신이 혼자 조선 포교지를 맡아 가지고 있기를 바라는 것으로 판단했다. 이러한 판단의 여파는 앵베르 주교나 모방 신부에 이르러서도 드러나는데, 그들은 유방제 신부가 조선 선교에 이바지한 바를 인정하면서도 결국은 유방제 신부를 중국으로 내쫓았다.

 

 

남은 말

 

조선교구 설정과정에서 지난날의 선교 보호권 문제로 적지 않은 어려움이 따랐다. 이 난관을 극복하고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조선의 선교를 책임지게 되었다. 유방제 신부가 조선을 떠나자 조선 선교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책임이 되었다. 그들은 전교회의 방침에 따라 현지인 성직자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이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한 선교지역에서 현지인 성직자 양성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던 데 대한 반성의 결과로 교황청에서 강조하던 내용이기도 했다. 물론 신학생을 선발하여 중국에 파견해서 교육을 시키려던 시도는 유방제 신부 단계에서도 구체적으로 진행된 바 있다. 그러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새롭게 신학생을 선발했고, 김대건과 최양업 신부 등이 서품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조선 교회에 굳건한 신앙의 뿌리를 내리게 했다. 그들은 조선말을 배워 조선인과 함께 살면서 선교했다. 박해가 닥쳐왔을 때 신자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했고, 조선 신자들과 함께 형장에 나가 숨을 거두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이들이 뿌린 씨앗의 결실을 맛보고 있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8년 6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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