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5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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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유박해 배경과 전개 과정: 천주교에 대한 조선정부의 첫 공식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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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1 ㅣ No.25

[신유박해 순교 200돌 특집] 신유박해 배경과 전개 과정 - 천주교에 대한 조선정부의 첫 공식박해

 

 

올해는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꼭 200년이 되는 해다. 신유박해는 천주교에 대한 조선 정부의 첫 공식박해이자 전국적 규모의 첫 박해로, 희생된 천주교 신자가 500여명에 이르는 대규모 박해였고, 순교자만 100∼300명에 달했다. 정부는 특히 '토사교문(討邪敎文)'까지 반포, 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법적 근거를 마련해 100년에 가까운 박해를 공식화한다. 그리스도를 위해 피를 흘린 지 꼭 200년이 되는 해다. 신유박해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초기 순교자들의 시복·시성, 나아가 순교신심을 현대 우리 교회에서 내면화하고 실천하기 위한 기획 연재를 시작한다.<편집자>

 

 

1. 신유박해 배경과 전개 과정

 

모든 정세는 천주교인과 남인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1800년 7월,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온화한 정책을 써온 정조가 49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고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천주교는 가뜩이나 배척을 받고 있던 상황. 섭정이 된 대왕대비 정순왕후는 정약용의 누이의 시아버지인 채제공을 중심으로 한 남인 시파(時派)의 주축을 이룬 천주교도를 일망타진하려 했다.

 

박해의 직접적인 원인은 김 대비의 오빠로 남인 벽파(僻派)였던 김구주의 유배와 사망이라는 대왕대비의 묵은 원한이었지만, 사도세자와 정조를 해치려던 벽파와 온정적이던 시파의 당쟁이 결정적으로 천주교 박해로까지 연결된 것이다. 따라서 벽파와 노론은 정조의 승하로 굴러 들어온 권력을 이용, 자신들의 정치적, 종교적 원한을 풀어나간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신유박해의 직접적인 배경은 천주교와 봉건적 지배 윤리였던 유교의 충돌이었지만 여기에는 기존 권력층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었다. 대다수 교회사학자들은 당시 천주교 신앙의 유포가 당시 봉건 권력층의 이해와 상반됐기 때문이라는 데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당시 천주교 신앙은 급속도로 전파되던 상황이었다. 이승훈(베드로)이 1783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 조선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지 10년 만인 1794년께에는 4000여명의 신자들이 확보됐고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그 수는 1만여명(최대 추정치)에 이르고 있었다. 이는 "금지하면 금지할수록 널리 퍼져나가 씨앗이 떨어져 또 다른 씨앗을 내는" 형국이었다.

 

신유박해의 시초는 정조의 국상이 끝난 직후에 이루어진 최필공(토마스)의 체포였다. 이를 시작으로 그의 사촌동생 최필제(베드로)가 붙잡히고, 서울 회장 최창현(요한)을 비롯해 많은 신자들이 잡혔다. 드디어 100여명(300여명이라는 주장도 있음)이 순교하는 대박해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당국은 1801년 2월(음력 정월 10일) 공식 박해령을 내려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에 의거, 전국의 천주교인을 빠짐없이 고발케하고 뿌리째 뽑도록 했다. 박해령이 내려진 지 9일 만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책고리짝이 발각되면서 박해가 가열돼 마침내 한달 뒤 이가환, 홍낙민, 정약용, 이승훈이 체포돼 국문이 시작됐고 권철신, 정약종 등도 의금부에 갇혔다. 마침내 4월8일(음 2월26일), 정약종과 홍낙민, 최창현, 홍교만, 최필공, 이승훈 등 6명이 신유박해 사상 최초로 서울 서소문에서 참수되고 이가환과 권철신은 옥사했으며, 정약용과 정약전은 배교, 경상도와 전라도로 각각 유배됐다. 이로써 남인의 주요 인물 거의 대부분이 참수, 옥사, 유배됐다.

 

박해는 경기도, 충청도로 확산돼 '내포의 사도'로 불린 이존창(루도비코)이 체포돼 참수됐고 주문모 신부 또한 자수, 5월31일(음 4월19일) 군문효수됐다. 전주에서는 그해 4월부터 박해가 시작돼 유항검(아우구스티노), 관검 형제를 비롯해 200여명이 체포됐으나 배교 후 석방된 신자도 적지 않았다.

 

황사영의 백서사건은 신유박해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끈다. 정약용의 고발로 체포령이 내려졌던 황사영은 7개월간 충북 제천 배론에 은신, 조선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소위 '백서(帛書)'를 작성한다. 이 백서는 조선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았고 결국 그해 12월10일(음 11월5일) 능지처참된다.

 

황사영 사건이 일단락되자 조선 정부는 박해의 전말과 옥사를 변호하는 반교문(頒敎文)을 준비하면서 아직 처결되지 않은 사학죄인은 세밑이 되기 전에 그 집행을 끝내도록 지시한다. 드디어 이듬해 1월25일(음 1801년 12월22일) 토사교문 즉 '척사윤음'이 반포됨으로써 공식 박해는 막을 내린다.

 

이 결과 잔인했던 신유박해는 막을 내렸으나 천주교를 나라의 원수로 규정함으로써 천주교를 박해할 수 있는 법적 토대가 마련된 셈이 되어 천주교 전파에 커다란 장애물로 등장했다. 하지만 교회의 지도자들이 거의 순교하거나 유배된 가운데서도 조선 천주교회는 크고 작은 박해를 견디며 신앙을 지켜나갔고 선교사를 영입하기 위한 시도를 계속했다.

 

[평화신문, 2000년 1월 1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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