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23일 (월)
(백)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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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등불이 된 재속 프란치스칸들 (1) 장면(요한)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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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2-10 ㅣ No.315

[시대의 등불이 된 재속 프란치스칸들] (1) 장면 박사(요한) (상)


겨레에 빛을 - 삶과 신앙적 여정

 

 

1928년 평양 메리놀센터에서 어학교수로 근무하면서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던 장면 박사와 맏아들 진. 장남 진은 미국 안셀름대를 거쳐 프린스톤대학원에서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고 브라운대학에서 강의했으며, 귀국 후 서강대 교수 및 부총장을 역임했다.

 

 

20세기 한국은 식민과 전쟁의 비극, 극심한 좌우 대립과 갈등, 경제개발과 민주화 여정이라는 질곡의 역사였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시대 아픔을 끌어안고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며 세상에 진리를 드러낸 이들이 있다. 장면(요한 세례자, 1899~1966) 박사를 비롯해 오기선(요셉, 1907~1990) 신부, 이광재(디모테오, 1909~1950) 신부, 구도자 김익진(프란치스코, 1906~1970)씨, 김홍섭(바오로, 1915~1965) 판사, 정지용(프란치스코, 1902~1950년 납북 뒤 사망 추정) 시인, 최정숙(베아트리체, 1902~1977) 교육감, 순교자 후예 남상철(프란치스코, 1891~1978)씨, 장발(루도비코, 1901∼2001) 화백, 류현석(요한 사도, 1927~2004) 변호사 등이다. 평신도로서, 사제로서 이들의 삶은 시대의 등불이자 빛나는 사표가 됐다.

 

특히 교회가 800년이 넘도록 사랑을 아끼지 않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1/1182~1226)의 모범을 따른 이들은 가난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평화의 순례자로서 신앙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다. 이들의 공통분모는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이라는 점이다. 참으로 아름답게 신앙을 증거하며 살았던 이들의 삶을 통해 새 복음화(New Evangelization)의 사명을 새긴다. 오는 2012년에 한국 진출 75주년을 맞는 재속 프란치스코회 한국 국가형제회 75주년 기념위원회(위원장 김수업 토마스 데 아퀴노)와 함께 시대의 빛이 된 재속 프란치스칸들의 삶을 돌아본다. 그 첫 번째 인물로 장면 박사를 세 차례에 걸쳐 살핀다.

 

(상) 겨레에 빛을 - 장면 박사의 삶과 신앙적 여정

(중) 조국에 민주주의를 -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리기까지 정치 역정

(하) 주님 제단에 당신을 - 첫 재속 프란치스칸으로서 삶과 영성

 

운석(雲石) 장면 박사하면 제1공화국 국무총리 및 부통령, 제2공화국 내각책임제 하에 첫 국무총리, 5ㆍ16 군부 쿠데타로 9개월 단명 민주당 정권을 이끈 정치가로만 여기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가 선교와 민주주의를 위해 한평생을 살았고, 건국과 외교의 선구자였으며,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으로서 한국에 프란치스코 3회의 토대를 놓았고, 복음적 가치를 자신과 조국에 구현하려 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들은 아마도 많지 않을 듯하다.

 

계성보통학교 교장 재직 시 노기남 신부 및 교사들과 함께한 장면(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 박사.

 

 

구한말인 1899년 8월 28일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혼란과 전쟁, 가난한 시대를 살았다. 부친 장기빈은 2대째 가톨릭 신자였고, 모친 황 루치아는 대대로 내려오는 가톨릭 집안이었기에 그는 태어나자마자 9월 12일에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1909년 1월 3일 견진을 받았다.

 

어려서 늘 부모에 순종했던 그는 인천성당 부설 박문학교를 졸업한 뒤 인천 공립심상소학교 고등과를 거쳐 수원농림학교(서울농대 전신)를 다니던 중 1916년 5월 서울 중림동약현성당에서 김옥윤 여사와 혼인하고 이듬해 학교를 졸업한다. 당시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면 관리로 취직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그는 1917년 9월 중앙기독교청년학관 영어과에 진학해 공부한 뒤 최우등생으로 졸업한다.

 

이어 1918년 4월 용산에 있는 예수성심신학교(소신학교) 강사로 봉직하며 국어와 산수, 역사 등 과목을 가르쳤는데 학생들에게 인기가 대단했다. 이때 학생 중에 훗날 한국인으로는 첫 서울대목구장에 착좌하는 노기남 대주교가 있다.

 

그가 얼마나 신심이 깊은 가톨릭 신자였는지, 또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 시대를 살았는지는 소신학교 교사 시절에 했던 그의 말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

 

"왜놈들이 총칼로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데 그들에게 맨손으로 저항하면 성공하기 어렵다. 하지만 천주님께 대한 믿음이야말로 가장 큰 힘이므로, 우리 민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기가 아니라 힘의 원천인 신앙을 갖는 일이다."

 

"3ㆍ1운동은 천주님이 민족의 얼을 다시 찾게끔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신 것이며, 의로운 죽음이 없이는 독립 쟁취가 어렵다."

 

그는 이처럼 우리 민족에게 지도자가 필요하지만 가장 위대한 지도자는 천주님이라고 여긴 신앙인이었다.

 

1920년 10월 유학차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6개월간 메리놀외방전교회 예비 신학교에서 영어와 기타 과목을 익힌 뒤 이듬해 9월 뉴욕 맨해튼칼리지에 입학, 교육학을 전공한다. 그리 궁색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그는 당시 뉴욕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와 식비를 벌었고, 또 숙식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자취를 했다. 물론 집에서 조금씩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에 앞서 그는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한다. 1921년 8월 28일 뉴욕 성 요한 세례자 성당에서였다.

 

미국 맨해튼 대학 유학시절 동생들과 함께한 장면(오른쪽) 박사.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동생 장발 학장, 장면 박사, 장정온 앙네다 수녀, 처조카 김교임 마르가리타 수녀.

 

 

4년 만에 미국 뉴욕 맨해튼대학을 졸업한 그는 귀국길에 1925년 7월 5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한국 순교복자 79위 시복식에 한국 평신도 대표로 참석하고, 다음날 비오 11세 교황을 알현한다.

 

귀국 후 미국에서 인연을 맺은 메리놀외방전교회 선교지인 평양교구로 간 그는 5년 동안 평양 메리놀센터 어학 교수이자 평양교구 사무, 평양 천주교 청년회장 등으로 있으면서 「영한 교회 용어집」과 「구도자의 길」 등을 저술하고 번역 작업도 하면서 선교에 공헌한다.

 

1931년에는 서울 동성상업학교 교사로 부임, 1933년 윤형중 신부 주관 아래 정지용, 이동구 등과 「가톨릭 청년」을 창간했다. 1936년부터 1945년까지는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 인재 양성에만 전력을 기울인다. 이때 혜화유치원 원장, 계성초등학교 교장도 겸임했다.

 

그는 나라를 잃고 어둠속을 헤매는 젊은이들에게 망명이나 무력 저항의 길도 있지만 가톨릭교회 안에서 훌륭한 교육자의 길을 택해 살 수도 있음을 가르쳤다. 그는 무엇보다 대다수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빛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부들의 신앙」과 「젬마 갈가니(Gemma Galgane)」 등을 번역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교회 사목을 도왔으며, 소속 본당인 혜화동본당 총회장이 되고도 예비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1951년 그는 교황청으로부터 교회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기사 훈장을 받는다.

 

후에 아무리 바쁜 정계 생활 중에서도 매일같이 미사에 참례했다. 제1공화국 당시 야당 후보로 부통령에 당선된 그가 온갖 감시와 수모는 제쳐두고라도 살해 위협 속에 민주당 전당대회에 나가 저격을 당하면서 의연할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힘이었다.

 

이런 그의 삶에 하느님께서는 귀한 열매를 맺어준다. 제2공화국 정부 요인들과 그 관계자 상당수가 5ㆍ16 군사쿠데타로 시련을 겪고도 천주교에 입교했는데, 이는 당시 내각 수반이던 장면 박사가 평소 그들에게 보여준 좋은 표양의 결실이었다. 그가 선종하기 한 해 전인 1965년에 쓴 글 한 대목을 살펴보자.

 

"우리 주변은 암흑 속에 파묻혀 있다. 불평과 저주만으로는 암흑이 물러가지 않는다. 촛불 한 개라도 켜들어야 광명이 온다. 한 사람, 한 사람 촛불을 켜들어 몇 백 몇 천이 되면 점점 더 밝아지고 희망과 살 길이 보일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우리 어깨에 높이 치켜 모시고 각기 손에 촛불을 켜들고 암흑 퇴치의 십자군으로 나서야 하겠다."

 

장면 박사는 이같은 신념으로 겨레의 촛불로 살았다. [평화신문, 2011년 1월 16일, 자료제공=재속 프란치스코회 한국 국가형제회, 정리=오세택 기자]

 

 

[시대의 등불이 된 재속프란치스칸들] (1) 장면 박사(요한) (중)


조국에 민주주의를 -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리기까지 정치 역정

 

 

2공화국 총리 인준 직후 윤보선 대통령과 악수하는 장면(오른쪽) 총리. 왼쪽은 곽상훈 민의원 의장이다.

 

 

정치를 하는 데 권모술수가 꼭 필요한 것이라면 장면 박사는 정치인이 되지 않았어야 했다. 그는 평생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닦으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에도 이렇게 깨끗한 이가 있으면 국민은 행복하다. 여러 왕들과 정치인 가운데에도 성인들이 있었듯이….

 

그가 정계에 투신한 것은 8ㆍ15 광복 이후 일이다. 권유에 의한 것으로 보이지만, 결심을 한 뒤에 그는 최선을 다했다. 평신도 대표로 정계에 나가야 한다는 명분도 그가 정계 진출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인 듯하다.

 

 

유엔총회서 국제적 승인 얻어내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해야 할 바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훗날 그의 소회에 따르면, 그는 "해방된 우리 민족의 최대 당면과업은 우선 정치면에서 조국을 완전 독립국가로 재건하고, 경제적 자주 자립을 확립하며, 문화와 교육 정책과 체계를 재편성하고 강화하는 데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군정자문기관인 민주의원 의원(천주교 대표), 과도 정부 입법의원 의원을 거쳐 그는 1948년 5월 10일 서울 종로 을구에서 무소속으로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그리고 그해 9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제3차 유엔 총회에 대한민국대표단 수석대표로 참석, 공산권 국가들의 반대 공작을 물리치고 신생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을 받아낸다. 1948년 12월 8일의 일이다. 같은 해 12월 말 주미대사로 임명된 그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기민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해 유엔군을 참전케 함으로써 조국을 누란의 위기에서 구했다.

 

무소속으로 서울 종로 을구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서울 익선동 선거사무소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장면(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 박사.

 

 

장면 박사 가문은 어학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 전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우리말을 가르친 아들 장익(전 춘천교구장) 주교의 어학 실력은 잘 알려져 있거니와 장면 박사의 부친 장기빈 옹도 일어와 중국어, 러시아어, 영어에 능통했다. 장면 박사도 영어와 일어에 능통해 외교관으로서 그 실력을 마음껏 발휘했다. 6ㆍ25가 발발하자 그는 미국 정계 요인들을 만나고 곧 유엔으로 달려가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국이 제안한 결의안을 9대0으로 통과시키는 데 기여했고, 개전 초 불리한 전세를 역전시킬 채비를 갖췄다.

 

 

총검보다 자유 바탕 위에 질서 택해

 

하지만 그해 8월 소련 말리크 외상이 안보리 의장이 되면서 6ㆍ25는 미국과 한국의 북침이며 소련은 북한에 소총 한 자루도 보내지 않았다며 그간 한국 사태에 대한 유엔의 결의안은 모두 무효라고 주장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장면 박사는 한국전에서 노획한 소련제 소총 한 자루를 꺼내 보이며 말리크의 말을 반박하는 데 성공했다. 40분간 연설은 TV를 통해 전 세계에 방송돼 극찬을 받았고, 장면 박사 스스로도 생애를 통해 가장 잊지 못할 후련한 연설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4ㆍ19 직후 국무총리가 된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갈망하는 국민에게 자유주의적 이념과 경제제일주의 정책을 제시한다.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방안으로 강경한 수단을 동원하자는 건의를 수 차례나 받았지만 그는 총검에 의한 외형적 질서보다는 자유라는 바탕 위의 질서를 선택했다. 비록 군사 쿠데타로 9개월간에 걸친 그의 짧은 집권은 막을 내렸지만, 지금도 그가 추구한 민주주의적 이상을 탓하는 사람은 없다. 그는 민주주의를 꽃 피우기를 원했고, 경제개발계획으로 국민이 잘 살 수 있는 길을 열고자 노심초사했다.

 

제2공화국 무임소 장관을 지낸 오위영의 '민주투사 운석'이라는 글을 보면, 매일같이 일어나는 시위와 채 정돈되지 않은 질서 속에서도 장면 박사가 제2공화국의 새 살림살이를 꾸려나가고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잘 알 수 있다.

 

제3차 유엔총회에 임한 한국대표단. 앞줄 왼쪽부터 조병옥 박사, 장면 수석대표, 깅기영 대표 등이다.

 

 

"어느 날 각료 몇 사람과 시위 방지에 대해 그분에게 문의 했더니 '나는 독재정권에 시달려본 사람이야. 참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본보기로 마음껏 자유를 누려보게 하고 싶어요.'"

 

그는 이처럼 날마다 벌어지는 시위와 소란조차도 민주주의 실현의 단계요 과도기적 현상으로 여겼다.

 

 

지위고하 막론 사람을 존중했던 총리

 

총리 공보비서관이던 송원영은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날림으로 하거나 거짓으로 하는 일이 없었다고 전한다. 찾아온 사람이 학생이거나 망령끼가 있는 노인이거나 그는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장광설을 한두 시간이나 지껄이는 방문객에게조차 끝까지 정중히 대하며 차근차근 설득하기가 일쑤였다. 다들 정치가는 '쇼맨십'도 갖춰야 한다고 진언하고, 인기를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해본 일도 있었으나, 그는 모두 거절했다. 세단을 타고 앞뒤 호위를 받는다는 행차는 집권 9개월 중 몇 번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지프를 타고 일반인과 똑같이 교통신호를 기다렸다. 날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기도하고 일과에 들어가면, 자정이 가깝도록 줄곧 회의와 면접, 결재, 공식 행사를 하는 신앙 정치가였다고 그는 증언한다.

 

장면 박사는 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자신의 꿈을 반을 이뤘고(분단조국),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주고 실천함으로써 겨레와 만방에 깨끗한 이름을 남겼다. 가난을 벗어나고자 원대한 경제개발계획을 세웠으나 그는 5ㆍ16군사쿠데타로 다시 좌절, 시련 속에서 자신의 지병을 다스리지 못하고 민주주의의 속죄양이 돼 하느님 품에 안긴다. [평화신문, 2011년 1월 23일, 자료제공=재속 프란치스코회 한국 국가형제회, 정리=오세택 기자]

 

 

[시대의 등불이 된 재속 프란치스칸들] (1) 장면 박사(요한) (하)


주님 제단에 당신을 - 첫 재속 프란치스칸으로서의 삶과 영성

 

 

프란치스코 제3회 입회 무렵의 장면 박사. 1921년에서 1922년 사이에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프란치스코회 3회 입회

 

하느님과 교회를 위해 장면 박사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스렸다. 이 일에 도움이 된다면, 무엇에나 최선을 다해 봉사했다. 한국천주교회가 1784년 평신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신앙공동체를 이룸으로써 시작됐다면, 현재 1만2000명이 넘는 한국 재속프란치스코회(프란치스코 3회)는 작은 형제회 주도 이전에 이미 장면 회장의 역할로 그 초석을 세웠다.

 

장 박사가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한 것은 1921년 8월 28일의 일이다. 1919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맨해튼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던 참이었다. 이로써 그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첫 재속 프란치스칸으로 기록된다. 이날 요한 세례자성당에서 입회한 그는 당시 관습에 따라 이듬해 9월 24일 프란치스코라는 수도명으로 프란치스코 3회 착의식을 한다. 이후 3회 월례회가 열리는 주일 오후가 되면 그는 요한 세례자성당으로 향했고, 세속에서도 프란치스코 성인 영성을 따라 복음대로 살면서 학업에 힘을 쏟았다.

 

그가 성 프란치스코를 어떻게 여겼는지는 1965년에 쓴 그의 글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가톨릭교회가 낳은 성인 가운데 가장 찬란한 업적에 빛나고, 가장 많은 제자들을 배출시킨 성인이었으며, 극단의 가난과 겸손과 고행으로 그리스도의 생애를 문자 그대로 따라 복음의 산 표본으로, 속죄의 산 제물로, 사랑과 평화의 사도였다. 또 제자들을 파견해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일대 영적 혁신을 일으킨 희대의 성자였으며, 당시 위기에 빠진 교회를 권력이 아닌 성덕의 위력으로 구출한 절세 영웅이었다. 그는 우리 교회뿐 아니라 비그리스도인까지도 추앙하고 절찬하는 위대한 관상 시인이며 사회 개혁자였다."

 

1940년 3월 예수 부활 대축일을 맞아 장면 박사가 3남 장익의 첫 영성체를 기념해 가족사진을 찍고 있다. 장 박사 오른쪽에 긴 휘장을 매고 가슴에 꽃을 꽂고 선 아이가 훗날 춘천교구장을 지낸 장익 주교다.

 

 

프란치스코 3회 초석 쌓아

 

1937년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 수도회)가 한국에 진출하자 서울대목구 혜화동본당에 적을 두고 있던 장 박사는 본당 신부인 오기선 신부의 3회 입회에 기여했고, 당시 혜화동 일대에 살던 지식인 신자들에게 프란치스코 성인을 알리는 데 노력했다.

 

이같은 노력으로 그의 가족을 주축으로 약현(현 중림동 약현), 종현(현 명동), 백동(현 혜화동), 영등포(현 도림동)본당에서 평신도 28명이 같은 해 12월 25일 3회에 입회했다. 한국에서 최초로 재속 프란치스코회가 혜화동본당에서 닻을 올린 것이다.

 

1939년 1월 3일, 앞서 입회한 회원들 서약식이 거행됐고, 동시에 서울 형제회가 정식으로 조직돼 장 박사가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3회는 특히 일제 치하 가톨릭 지성인들의 희망이자 등불이었다. 당시 가톨릭교회 내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인물들이 모인 서울 형제회는 1942년 12월 3회원으로 첫 한국인 주교에 임명된 노기남 주교 서품식 진행을 전담하기도 했다.

 

모윤숙(1909~1990) 시인의 생전 회고는 '기도하는 신앙인'으로서 장 박사의 새로운 면모를 전해준다.

 

"1948년 12월 12일 새벽이었다. 제3차 유엔 총회 한국대표단으로 3개월째 파리에 머물던 장 박사는 대한민국 정부 승인에 앞서 득표에 도움이 되고자 많은 외국인들과 만나다가 신생 대한민국의 운명을 좌우할 그 날이 다가오자 11일 밤 잠자리에 들기에 앞서 성 요셉성당으로 향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지쳤다고 성당으로 가는 길에 함께하기를 거절했으나 나는 그 뜻에 감복해 함께했다. 날씨는 추웠고, 지나가는 자동차도 한 대 눈에 띄지 않는 거리는 을씨년스러웠다. 성 요셉성당 앞에서, 그것도 난생 처음 가본 성당 성모상 앞에서 거의 한 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기도를 바친 장 박사는 다시 근처 아베 마리아성당에서 새벽미사에 참례하자고 제안했다. 무릎이 아파 더 이상 따라가기 힘들다고 거절했으나, 장 박사가 '큰일을 앞두고 그것도 못 참아 어떻게 하느냐'고 다그쳐 하는 수없이 따라갔고, 그래선지 고통 없이 30분을 더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

 

이같은 열심과 기도 덕인지 이날 오후 3시 유엔 총회는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한다.

 

이어 주미 대한민국 대사를 지내던 장 박사는 6ㆍ25전쟁 중 누이 장정온(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도회 초대 원장) 수녀가 북한군에 끌려가 행방불명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장면(두 번째 줄 가운데) 박사가 생전에 프란치스코 회원들과 함께하고 있다.

 

 

그럼에도 장 박사는 제2대 국무총리를 역임한 뒤 정치에 몰두하면서 1954년 3월 태평양 전쟁과 6ㆍ25전쟁으로 인해 정체되고 흩어진 프란치스코 3회원들을 모아 형제회 재조직을 시도했다. 정치에 여념이 없는데도 회원들을 소집해 1961년 1월에는 서울 형제회 집회가 재개되도록 이끌었다.

 

1963년 9월 17일, 장 박사는 제2차 프란치스코 3회 전국대회에서 재속 프란치스코 한국 형제회(당시 연합회) 초대 회장에 선출돼 형제회를 재건하고 1966년 선종 때까지 한국형제회를 이끈다.

 

 

오직 하느님 뜻 따라

 

이처럼 사생활에서 정치활동에 이르기까지 그는 오직 하느님 가르침을 따르려 했고, 조국의 민주주의 확립에 진력했으며, 한국 가톨릭 평신도 지도자로서 선교를 위해 평생을 바쳤다.

 

지병인 간염으로 성모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문병 온 손님들에게 입교를 권면하던 장 박사는 1966년 6월 4일 67살을 일기로 선종한다. 그해 6월 12일, 국민장으로 9일간 전 국민의 애도를 거쳐 경기도 포천에 있는 혜화동성당 묘역에 안장됨으로써 빛과 소금으로 산 한 생애를 마무리한다.

 

생전, 그를 가까이 한 이들은 그를 '구도자'로 증언한다. 참으로 가톨릭인이었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으며, 프란치스칸으로 한 삶을 살다간 시대의 거인이었다.

 

작은 형제회는 생전 그에게 1회원 자격을 인정하는 특전을 베풀었고, 운명하고 나서 1회 수도복을 입혀 안장했다. 그래서인지 신자들이 임종경을 드릴 때 "망자를 위해 빌어주소서!"라는 기도가 나오지 않고 "우리를 위해 빌어주소서!"라는 말이 나왔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혜화동본당 신자들과 한국 재속프란치스코 회원들의 영원한 회장이었던 장 박사는 자신과 민족을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는 삶을 살고 하느님 대전으로 나아갔다.

 

[평화신문, 2011년 1월 30일, 자료 제공=재속 프란치스코회 한국국가형제회, 정리=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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