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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협ㅣ사목회

지금 여기 평신도: 교회 쇄신과 평신도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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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5-21 ㅣ No.69

[지금 여기 평신도] 교회 쇄신과 평신도의 역할

 

 

평신도 희년을 지내고 있는 2018년, 그 어느 때보다도 가슴 설레는 봄을 보내고 있다.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시작된 평화의 기운이 한반도를 휘감더니 이내 베이징과 워싱턴으로 통쾌하게 내달려 동북아시아의 평화, 그 험난한 가시밭길을 벚꽃으로 수놓는다.

 

독자들이 이 글을 읽을 즈음이면 이미 또 한 번의 남북 정상 회담이 끝나고, 뒤이을 미국과 중국을 포함하는 4자 회담을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가까워 오는 한반도의 평화를 실감하려 애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성령은 이렇게 뜻밖의 장소에서 의도하지 않은 모양으로, 또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이 봄날의 훈풍이 되어 한반도를 들썩이게 한다.

 

 

교회의 문을 열어 신선한 공기를

 

‘교회 쇄신과 평신도의 역할’이라는 제목을 달아 놓고 앞자락에 평화의 꽃길이니 훈풍이니 봄 타령을 한바탕 늘어놓은 것은 가는 봄날에 갑작스럽게 날아든 소식에 대한 달뜬 기분이나 감상만은 아니다. 반세기 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한 요한 23세 교황과 더불어 공의회에 참가한 이들이 느낀 것이 바로 이런 희망에 대한 설렘이 아니었을까?’ 하는 데로 생각이 이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교회의 문을 활짝 열어 신선한 공기를 들어오게 하자.’는 공의회의 정신은 다퉜던 연인이 서로 다시 만나듯, 또 죽을 고생 끝에 집에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 품에 안기듯 세상과 다시 만나 화해하고 용서하는 데서 시작했다.

 

벽을 보던 제대를 회중을 향하게 돌려놓고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로 미사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이야말로 교회가 세상과 어떻게 화해해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때까지 교회가 세상과 사람들에게 등을 돌려 왔던 이유는, 한마디로 ‘세속’은 더럽고 추하며 악한 것이므로 거룩한 하느님의 제사는 제단을 세상이 아니라 그 반대로 돌려놓고 해야 한다는 뿌리 깊은 ‘성속 이원론’을 바탕으로 한다.

 

공의회는 이런 금기를 여지없이 깨버렸다.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에 모든 것을 쏟아 부어 당신을 완전히 비워 내셨다면 지상의 어느 것 하나 ‘하느님의 씨’가 아닌 것이 없다. 그리하여 세속의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성스럽다는 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새로운 오순절’(New Pentecost)이라고 부를 정도로 표면이 아니라 저 심층에서부터 달라져야 한다는 근본적 쇄신으로의 전환이었다. 곧 초기 교부 시대에 보이던 친교와 대화, 설득과 초대, 동의, 공동선과 같은 방향으로의 전환인 것이다.

 

일부에서는 공의회의 개혁적 면모를 인정하기 어려워하면서 ‘교회는 지난날도 현재도 미래도 하나이므로 공의회도 그러한 지속성 차원에서의 하나이지 새로운 오순절이라는 표현은 적당하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을 겪은 뒤에도 프랑스가 프랑스이듯이, 또 6·25전쟁을 겪고 그 폐허에서 나온 한국도 지금의 한국이듯 ‘혁명적 변화’를 몰고 온 공의회를 겪은 교회도 정체성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급진적인 변화가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벽을 보고 미사를 드리고 뜻 모르는 라틴어로 기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의미에서 공의회를 혁명적이고 개혁적이라고 보는 것은 당연하다. 그와 같은 교회의 큰 변화의 방향, 곧 세상과의 대화와 화해, 또 세상에 대한 적응이라는 쇄신의 방향은 앞으로 교회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그 길을 제시해 주는 나침반 구실을 하였다.

 

공의회가 제시한 쇄신은 여러 측면에서 말할 수 있겠지만, 바람직한 교회상을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평등의 공동체로 제시한 것은 평신도의 지위를 한껏 격상한 것과 함께 공의회가 이룬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전환으로 여겨진다.

 

 

아래로부터 일궈 낸 쇄신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상을 구체적으로 실험한 예로 아시아나 라틴 아메리카의 ‘기초 교회 공동체’(Basic Christian Communities)나 프란치스코 교황의 ‘시노드(Synod)로서의 교회’를 들 수 있다. 이 두 교회론 모두 교계만을 교회로 여기던 통념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교회를 ‘아래로부터’ 일궈 낸 그 쇄신을 원천으로 한다.

 

아래로부터의 쇄신이란 바로 지역 교회가 뿌리내린 토양, 곧 그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뜻하며 신자들의 공동체로서 교회가 지역 주민의 삶과 함께했다는 것을 뜻한다. 1970년대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의 기초 교회 공동체는 바로 이러한 삶의 자리에서 이웃과 공동으로 삶을 나누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면모를 간직한 교회였다.

 

그러나 교계는 본당을 중심으로 한 교회상을 원했고, 오늘날처럼 본당과 교구 중심의 제도적 교회로 점차 굳어지게 되었다. 그에 따라 교회 안에서 평신도의 역할은 공동체 활동 전반을 아우르며 이끌었던 활동가요 지도자에서 그야말로 사제를 돕는 ‘보조자 또는 협조자’(assistant)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들어서 다시 한번 소공동체가 한국을 포함해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 전면화되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는 1990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제5차 총회를 열고 소공동체를 공식 교회론으로 채택하기에 이른다.

 

김수환 추기경과 강우일 주교는 한국에 이 소공동체 운동을 도입하고 확산시키는 데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나날이 익명화되고 중산층화되어 가는 도시 중심 교회의 현실적인 대안으로서 교회 쇄신의 핵심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많은 본당에서 실시되는 ‘복음 나누기 7단계’는 소공동체 프로그램으로서, 거의 유일한 활동으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소공동체가 지난 30여 년 동안 주로 교회 담장 안에서 활동해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1970-1980년대에 지역을 아우르며 이웃과 함께 활동해 온 기초 교회 공동체가 1990년대 이후 교회 담장 안에 갇혀 아직도 그 상태에 머문 듯하다.

 

 

야전 병원으로서의 교회

 

담장 안에 갇힌 교회가 쇄신을 일깨우는 사건이 있었다. 바로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등장이다. 교황은 직무를 수행하며 「복음의 기쁨」과 「찬미받으소서」 등 여러 문헌을 쏟아냈다. 이를 통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라는 것과, 나아가 가난한 이들의 고통과 전 피조물의 고통이 하나라는 점을 더 분명히 하면서 이를 위해 교회가 쇄신되어야 함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난 뒤 꼭 60년 만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거침없는 개혁 의지와 실천을 통해 교회가 개혁하고 쇄신하도록 성령의 바람이 다시 불고 있다. 교황은 하느님 백성 모두가 함께 걷는 여정인 ‘시노드로서의 교회’를 제창했다.

 

2014-2015년에 가정을 주제로 주교 시노드를 연이어 개최했다. 2018년에는 청년 신앙과 성소를 주제로, 2019년에는 신음하는 생태계에 대한 관심으로 ‘범아마존 지역 주교 시노드’를 열 예정이다.

 

교황은 하느님 백성 모두가 그리스도를 향한 ‘함께 걷는 여정’이 교회임을 제대로 이해하면 그 안에서는 어느 누구도 다른 이들보다 높을 수 없으며 오히려 자신을 낮추어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평등의 교회가 실현될 때에야 비로소 ‘야전 병원’(field hospital)으로서의 교회를 말할 수 있다. 평등이 실현된 공동체로서 교회는 고통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달려갈 수 있는 수천수만의 다양한 평신도 중심의 야전 병원으로서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이하 평협)설립 50주년을 기념하고자 평신도 희년을 지내는 올해 그 성숙함의 징표로 평협이 이런 ‘야전 병원’으로서 다시 태어난다고 선포하면 어떨까?

 

‘평신도의 제자리는 어디인가? 하느님을 온전히 믿고 의탁하는가?’ 등의 물음은 안락함과 부를 탐하며 할 수 있는 위선적인 언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고통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장, 그곳에서 그들의 고통과 함께하는 야전 병원으로서의 교회가 던져야 할 피땀 어린 질문이어야 한다.

 

이러한 ‘교회적 상상력’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실천이야말로 21세기 한국 교회의 쇄신과 그 쇄신의 주체로서 평신도의 믿음을 더욱 성숙하게 하는 길이라 믿는다.

 

* 황경훈 바오로 - 우리신학연구소 소장. 아시아평신도지도자포럼(Asian Lay Leaders Forum)의의장을 맡고 있으며, 수원가톨릭대학교에서 종교학과 불교학을 가르치고 있다.

 

[경향잡지, 2018년 5월호, 황경훈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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