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금)
(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강론자료

2016-0306.....사순 제4주일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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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6-03-05 ㅣ No.2002

사순 제4주일 (다해)

여호수아 5,9.10-12         2코린 5,17-21       루카 15,1-3.11-32

2016. 3. 6. 이태원

주제 :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자비를 위하여

사람은 세상에서 누구나 자신이 올바른 길을 간다고 생각하여 말하고, 다른 사람이 자신과 똑같은 길을 가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하고 아쉬워합니다. 현실의 모습은 그렇게 진단합니다만, 자신이 가는 길이 정말로 옳은 것이라는 보장은 우리가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 길을 아는 방법이 궁금하기도 하고, 어쨌든 사람은 각자가 맞이하는 현실에서 여러 가지 것들을 고민하며 삽니다.

 

세상에 실현되어야 할 하느님의 뜻을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알 수 있고, 어떤 모양으로 삶에 실천하겠습니까? 우리는 프란체스코교황님께서 선언하신 자비의 희년기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자비(慈悲,=사랑하고 가엾게 여김)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동양 문화권에 사는 우리는 이 자비라는 용어가 불교에서 먼저 시작된 것이라는 것은 알지만, 우리의 신앙에서 강조하는 사랑이라는 말과 그 의미를 비교하면서, 우리의 삶에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에 실현한 당신의 계획을 사람에게 들리는 소리로 직접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뜻은 세상의 의미를 먼저 아는 예언자나 사제나 교회공동체를 통하여 알려주신다고 하기에, 우리들 각자의 삶에 실현될 하느님의 뜻을 깨닫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내 귀로 하느님의 소리를 직접 듣지 못하는데, 나에게 하느님의 뜻이라고 알려주는 다른 사람의 말에 하느님의 뜻이 담겨있다고 누가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답하는 한 가지로, 사람의 행동을 보면서 그 사람이 드러내는 자세에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라고 판단하시는지 예언자들의 선언이나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 좋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움직이신 모습을 보고서, 자칭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저 사람(=예수)은 우리와는 다르게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음식을 먹는다고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의 말이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려서 얻을 결과가 자기들처럼 의인들과 어울려서 만들 수 있는 결과보다 낫고 좋아야한다는 것인데, 정말로 그들의 판단이 옳은 것이었을까요?

 

예수님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말하는 내용을 들으시고 당장 그들을 비난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을 충실히 담았던 둘째아들과 첫째아들의 비유이야기로, 사람의 행동이 드러낸 일의 한계를 말씀하십니다.

 

비유에 나온, 둘째아들은 아버지가 살아 계신데도, 어른이 죽어야만 실현되는 유산을 나누어달라고 아버지에게 억지를 부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확천금을 얻었으니, 어떻게 사용하겠습니까? 자기에게 생긴 돈을 모조리 탕진한 둘째아들은 먹고 살 걱정을 하면서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동생을 대하던 형님의 마음도 고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형님은 정상적인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은동생에게 시비를 건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자비로운 모습을 보인 아버지에게 불만이 가득한 자세를 드러냅니다. 동생에게 유산의 몫이 나누어졌으니 남은 것은 모두 내 것인데, 그것을 내 허락도 없이 아버지가 함부로 썼다는 불만을 아주 묘하게 포장해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행동만 달랐지, 두 아들의 차이는 별로 없는 셈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내 재산이라고 여긴 것에 관하여 아주 민감한 자세를 드러냅니다.

 

비유에 나온 아버지를 대하는 두 아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떤 아들이 더 낫다고 말하겠습니까? 둘 다 올바른 행동을 한 것도 아니고, 십계명의 두 번째 부분인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제대로 따른 것도 아니니, 우리가 두 아들에게서 좋은 모습을 찾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둘째아들에게 사랑과 자비의 모습을 보여주신 아버지의 태도에 문제가 있던 것일까요? 첫째아들을 홀대한 아버지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었을까요?

 

내가 손과 몸을 움직여, 땅에서 난 소출을 먹을 수 있게 되었을 때, 하늘에서 내리던 만나가 멈췄다는 여호수아기의 말씀은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하느님은 사람의 능력을 보셨기에 더 이상 만나를 내리지 않으셨지만, 공짜로 얻어먹던 그 좋은 기회를 더 이상 얻지 못하게 되었으니, 사람은 어떤 감정을 드러내야 옳은 일이겠습니까?

 

사람이 올바른 길을 가려면, 하느님과 화해해야 합니다. 이 화해를 다른 말로 하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자비의 행복을 느끼며 살아야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화해를 체험하는 자비는 내가 받아들이면 되는 일이지만, 인간사이의 화해는 내가 삶을 바꾸는 행동과 함께 맺힌 것을 푸는 작업도 실천할 수 있어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겠는지, 묵상할 시간입니다. 묵상은 내 생각을 먼저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실현되기를 원할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이 기준에 맞는 결과는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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