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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문화 순례: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 유물 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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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1-30 ㅣ No.328

[박물관 문화 순례]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 유물 전시관 (1)


‘인보’(隣保) 정신 구현한 창설자 발자취 엿본다



윤을수 신부 (출처 가톨릭대학교)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 유물 전시관’은 그에 의해 설립된 인보성체수도회 용인수도원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수도회가 유물관을 두고 있는 이유는 성체를 공경하고 성체성사에 박혀 있는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 마음 바르게 부지런히 살아가며 넘치는 행복을 전하라고 한 설립자의 뜻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또한 그분이 지녔던 참행복 영성의 향기를 교회와 세상과 나누기 위해서다.

유물 전시관 관람은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가능하며 신자를 포함해 방문하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하고 있다. 사전에 연락을 해 놓으면 자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인보성체수도회 용인수도원 안에 자리한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 유물 전시관’ 전시공간 모습.

 

 

윤을수 신부(1907~1971) 유물 가운데 가장 먼저 소개할 것은 「라한사전」(羅韓辭典, Dictionarium Latino-Coreano)(1936년)이다. 1907년 충남 예산군 고덕면 용리에서 부친 윤상규 이냐시오와 모친 임 골롬바의 2남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윤 신부는 1920년 9월 13일 서울 용산신학교에 입학했으며 1932년 12월 17일 명동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서품 후에 장호원본당(현 충북 감곡본당) 보좌신부로 있으면서 「장호원 성가집」을 발간했다. 그 후 1937년 프랑스 유학 전까지 동성상업학교 을조(소신학교) 교사를 역임했다. 이때 윤 신부는 교리와 라틴어를 가르쳤고 「라한사전」도 이 시기에 편집, 발행했다.


「라한사전」 표지에는 라틴어「DICTIONARIUM LATINO-COREANO」라고 제목이 쓰여 있고, 서문과 약어부록, 본문 780쪽으로 구성돼 각 쪽마다 2단으로 편집돼 있다.

「라한사전」의 초판 발행일은 소화 11년 7월 31일, 즉 1936년이고 편집인은 윤을수, 발행인은 원순근이며 발행처는 서울 혜화동에 있는 성 니콜라오 신학교로 표기돼 있다. 인보성체수도회 유물관에 전시돼 있는 것은 똑같은 것을 1959년 경향신문사에서 다시 발행한 것이다.

윤을수 신부가 편찬한 「라한사전」 본문 중 일부. 모두 780쪽, 2단으로 편집했다.

 

 

윤 신부의 소신학교 제자였던 조응환 신부(1920~2002)의 증언에 의하면 윤 신부는 라틴어 교사였는데 라틴어를 아주 잘 가르쳤고 밤늦게까지 연구했다고 한다. 소신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는 것이 계기가 돼 사전 발행으로까지 이어졌으리라는 짐작을 하게 하는 증언이다. 번역은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을 넘어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연결하고 매개해 준다는 의미에서 낯선 세계 간의 만남이고 뛰어난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번역은 애초부터 두 세계의 완전한 일치를 기대하기가 어려운 일이기에 어려움과 고통이 따르는 일이다. 그 힘겨운 작업을 해낼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윤 신부는 서문에서 사전을 발행하게 된 동기에 대해 밝히고 있다. 그때 당시 사용하던 다블뤼(Marie Nicolas Antoine Daveluy) 주교의 「라선소자전」(羅鮮小字典, Parvum Vocabularium Latino-Coreanum)으로는 라틴어가 본질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 사전에 배분돼 있는 어구표현 또는 표현 방법이 너무나 옛날 방식이라는 것이다. 여전히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어구가 좀 더 풍부하고 시대에 적절한 사전을 발행하기로 했다고 밝히고 있다.

능통하다고는 하나 조선말을 제대로 배워 본 적도 없고 더구나 숨어 지내며 사목활동을 해야 했던 외국 선교사들이기에 그들의 번역, 표현법, 어휘선택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라틴어를 전례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용어처럼 사용해야 했던 사람들에게는 그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고 표현하고 싶은 당위성과 필요성이 컸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윤 신부가 신학교를 다니고 동성소신학교 교사로 재임할 당시 소신학교를 ‘라틴어과’라고 부를 만큼 라틴어는 소신학교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가르치는 과목이었다.

당시 교회의 공용어와 전례용어가 라틴어였기 때문에 사제가 되려면 반드시 라틴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어야만 했다. 그 당시 신학교 내에서는 일상에서도 라틴어를 해야 했고 한국말을 사용하다 들키면 엄중한 벌을 받아야 하는 규정이 있을 정도로 라틴어 사용이 의무였다. 이 의무는 의외로 좋은 결과를 냈는데 용산신학교의 라틴어 수준은 로마 교황청에서도 인정해 줄 정도로 대단했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가 「라한사전」을 태동하게 하지 않았을까?

윤 신부가 쓴 사전의 서문에 보면 사전을 만들려는 의도는 없었는데 주위 사람들의 권고와 지도가 있어 라틴어 연구와 사전에 관한 경험이 없음에도 사전을 발행하기로 했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이 사전이 윤 신부 의도로만 제작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교회 내 지식인들, 특히 동성소신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던 사람들 사이에 그 필요성에 대해 충분히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고, 사전의 발행에 그들의 직간접적인 참여가 있었음을 알 수 있겠다. 서문 말미에 사전 발행에 관해 많은 노력과 지지를 아끼지 않은 이들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는 임충신 신부(1907~2001), 안응렬(1911~2005), 이동구(1904∼1943), 장면(1899~1966)이 그 지지자들일 것으로 여겨진다.

라틴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할 만큼 라틴어에 익숙한 조선 사람인 윤 신부에 의해 번역된 「라한사전」이 갖는 사전학과 언어학적 관점에서의 높은 가치와 중요성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이제부터 시작해야 할 연구과제다. 이 사전은 1990년대까지 통용된 유일한 라틴어-우리말 사전이었다. 「라한사전」에 등재된 한국어 단어들이, 물론 그 의미가 없어지거나 확장된 것이 있긴 해도, 발간 후 80년이 지난 지금에도 큰 변동 없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우수성은 충분히 증명된다고 본다.

※ 문의 031-334-2901~2 인보성체수도회 용인수도원 [가톨릭신문, 2015년 11월 29일, 신정숙 수녀(인보성체수도회 새감연구소 소장), 사진=인보성체수도회 제공]

 

 

[박물관 문화 순례]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 유물 전시관 (2)


성모자상 모자이크화에 담은 그리운 어머니



성모자상 모자이크화.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모자이크화 한국 성모자상일 가능성이 높다.


주논문으로 「조선유교사론」, 부논문으로 「라선사전」을 제출해 1939년 11월 파리 소르본느 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윤을수 신부는 그 후 폴란드의 바르샤바 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로 결정됐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일본인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 오스트리아, 독일, 네덜란드, 스페인과 포르투갈, 멀리 아프리카의 카사블랑카까지 피신했다. 이어 1941년 9월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로마에 체류하며 라테라노 교회법 전문학교에서 법률 연구를 했다.

그때 거리와 박물관마다 외국의 성모자상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어머니(임 골롬바, 1939년 7월 선종)를 그리워하면서 지니고 있던 한국의 고유한 성모자상 그림을 바탕으로 외국 작가에게 모자이크를 시켰다. 성모자상 모자이크화(1940년대 작)는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 유물 전시관’의 중요 소장품 가운데 하나다.

이 그림 속 여인이 윤 신부의 어머니가 아닌 성모 마리아라는 것은 머리의 후광으로 알 수 있다. 높은 산봉우리들이 어우러진 깊은 산과 흐르는 맑은 계곡물을 배경으로 품위가 깃든 부드럽고 넉넉한 느낌의 한국 어머니가 고운 색동옷을 입은 아이와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평화와 영원을 떠올리게 한다.

안고 있는 아기는 후광이 없다. 예수님일 수도 있고 우리 각자일 수도 있다. 어쩌면 윤 신부 자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박사학위까지 받고 유학을 마친 젊은 사제가 조국과 가족들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가 위로와 평화를 잃지 않고 명랑하고 쾌활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이미 하늘나라에 드신 어머니와 성모님의 하나 된 사랑 때문이 아니었을까?

크기 16.6㎝×23.1㎝인 이 성모자상은 인보성체수도회 소사 모원 회의실 벽에 걸려있었다고 한다. 윤 신부는 외국 손님이나 귀한 손님이 오면 꼭 그 앞에 모시고 가서 자랑스레 성모자상을 설명하곤 했다. 예쁘고 귀부인 같은 외국의 성모상에 익숙한 수녀들은 그런 윤 신부를 보면서 하찮은 저 그림을 뭘 저렇게 자랑하나 의아해했다. 세월이 한참 지나서야 이 성모자상이 갖는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게 됐다는 것이다.

이 성모자상은 모자이크화로는 현존하는 최초의 한국 성모자상일 가능성이 높다. 윤 신부는 어떻게 서구식 성화에 익숙한 그 시절에 한국의 성모자상을 제작할 의도를 가졌을까? 그것은 윤 신부가 파리로 유학을 떠나기 전부터 맺고 있던 서양화가 겸 외교관이며 우리나라 가톨릭 성미술의 선구자요 한국적인 성화의 개척자인 우석 장발(1901~2001)과의 친분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장발은 장면의 동생으로, 당시 용산신학교 교장이었던 기낭(Guinand) 신부(1872~1944) 사제 수품 은경축을 기념해 김대건 신부 초상을 제작했다. 1925년 7월에 로마의 바티칸에서 거행된 79위의 한국 순교자 첫 시복 식전에 형 장면과 더불어 치명복자(致命福者) 친족 대표로 참석하고 귀국해 서울 명동성당 제대 뒤에 유명한 벽화 ‘14 사도상’을 그렸고, 주위의 요청으로 ‘복녀 김 골룸바와 아녜스 자매’도 그렸다. 오기선 신부의 증언에 따르면 윤 신부는 평생을 두고 이 성녀들을 경모했다.

이 성모자상의 원본 그림을 그린 사람은 한국 미술사에서 유럽 유학생 1호로 꼽히는 배운성(1901~1978)이다. 이런 사실은 윤을수 신부 유품 중에서 발견된 ‘Madonna of Korea by Pai Unsung’이라는 제목의 성모자상이 인쇄된 엽서로 인해 밝혀지게 됐다. 윤 신부는 이 ‘한국의 마돈나’를 다량 인쇄해 엽서로 만들었는데 어느 수녀에게 보낸 엽서의 뒷면에 “화백 배운성은 나와 같이 파리에서 공부한 친구인데 나의 부탁으로 금강산을 배경으로 ‘어머니 순정’을 그린 것”이라는 친필을 남겼다.

윤 신부와 배운성의 만남은 1937년 독일에서 파리로 옮겨 온 배운성이 독일어를 가르치고 있던 파리 근교 부르노 고성의 여학교 기숙사에 윤 신부가 학감으로 부임하면서 시작돼 돈독한 관계를 이어가게 된다. 배운성은 제2차 세계대전의 확전으로 인해 파리 생활을 접고 귀국 후 문예지 「삼천리」(1940.12~1941.1)와 가진 인터뷰에서 윤 신부를 “파리학회에서 역문상을 획득하고 일불협회에서도 상을 탄 유명한 문필가”로 소개한다. 이들의 관계에 대해 가늠해볼 수 있는 또 다른 증언은 ‘춤은 움직이는 사색, 즉 무상(舞想)’이라 정의한 바 있는 한국 신무용의 개척자 조택원(1907~1976)의 자서전에서도 발견된다. 그 또한 1937년 11월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는데 윤 신부를 배운성이 마련한 다과회에서 만났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가 돈도 없고 문화적인 충격을 받아 무용에 대한 자신감도 약해져 사흘을 굶고 드러누워 있을 때, 윤 신부가 찾아와 사크레 퀘르(Sacre Coeur) 가톨릭 병원으로 데리고 가 3주일 동안 매일 찾아오며 무료로 치료받게 해주었다고 한다.


- 배운성의 작품인 성모자상 모자이크화의 원본 그림.


근대미술 연구자인 김복기는 해방 후 윤 신부와 배운성이 다시 만났으며 윤 신부의 성화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배운성의 붓에 의해 실현됐다고 보고 있다. 김복기는 배운성이 파리 시절 그린, 한복을 입은 비장한 시선의 한국인 초상화의 주인공이 윤 신부라고 단언한다. 또한 묵주와 성경을 든 ‘어머니 초상’(1930년대 후반 작)이 윤 신부의 어머니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배운성의 가족은 가톨릭 신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배운성은 ‘어머니와 아이들’, ‘성호’(1949년 작) 등의 성화도 남겼다.

※ 문의 031-334-2901~2 인보성체수도회 용인수도원 [가톨릭신문, 2015년 12월 6일, 신정숙 수녀(인보성체수도회 새감연구소 소장), 사진=인보성체수도회 제공]

 

 

[박물관 문화 순례]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 유물 전시관 (3)

세속화 염려하며 번역한 「준주성범」의 울림…


 

「준주성범」 차례(왼쪽). 윤을수 신부가 친필로 적은 「준주성범」 제1권 제1장. 「준주성범」은 성경 다음으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서적으로 평가된다.


윤을수 신부는 평생 스승 그리스도의 살아오심과 가르치신 훈계를 따라 그리스도의 정신만을 항구하게 추종하려 했기 때문에 언제나 행복하게 살았던 그리스도의 제자다. 그는 자신이 설립한 인보성체수도회 수녀들에게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다 헛되니 어버이신 하느님만을 믿고 신뢰하며 이 행복의 길을 걸으라고 당부한다. 윤을수 신부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인생관, 가톨릭 인생관이라고 표현한다.

이렇듯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께 중심을 둔 윤을수 신부의 인생관은 성경을 토대로 「준주성범」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 유물 전시관’에는 윤 신부 번역으로 1949년 성신대학교에서 펴낸 준주성범과 1955년 경향잡지사(후에 가톨릭출판사로 바뀜)에서 펴낸 준주성범이 전시돼 있다. 그리고 1960년대 초반 인보성체수도회 수녀들에게 아침 미사 후 「준주성범」을 풀어 영적 훈화를 했던 내용을 묶어놓은 「새감의 얼」을 볼 수 있다.

‘새감’은 윤을수 신부의 호다. ‘을수’(乙水), ‘새가 물가를 감돈다’는 뜻이다. 이 영적 훈화는 그 당시 녹음기로 녹음이 돼 있었기에 후대의 수녀들도 윤 신부의 가르침을 생생히 접할 수 있는 귀중한 유산으로 남았다. 또한 그가 세상을 떠나기 바로 직전까지 묵상하며 새롭게 손질한 준주성범 원고도 있다. 마치 성경쓰기를 하듯이 직접 손으로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간 글씨체와 행간들에서 정갈하고 온화하며 고요하고 깊은 신뢰가 느껴진다.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그의 기도와 공경이 그러했던 것 같다. 이 수기본에는 이전 출판본에는 없는 서문이 추가돼 있고, 매 장의 끝에 ‘묵상재료’가 적혀 있다. 이 수기본은 그가 세상을 떠나고 30년도 더 지난 2004년 「그리스도를 따라-묵상자료와 함께 준주성범 새롭게 읽기-」라는 제목으로 출판돼 세상에 나왔다.

「준주성범」의 변천을 보여주는 시대별 출판물들.


윤 신부의 준주성범 번역은 그가 신학생 시절 불어를 배우면서 시작됐다. 신학교 입학 동기이자 서품 동기이며 절친이면서 서로에게 연마를 위해 더없이 좋은 경쟁자이기도 했던 오기선 신부(1907~1990)의 증언에 의하면 윤 신부와 둘이 1922~1923년 사이부터 홍요한 선생을 통해 침실 이불 속에서 몰래 불어를 공부했다. 그 시절엔 라틴어 외에 다른 언어 공부는 절대금지였다. 만약 다른 언어를 공부하다 발각되면 학교를 쫓겨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어 공부를 했던 것을 보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새로운 세계를 알고자 하는 갈망이 무척 깊었던 것 같다. 실제로 두 사람은 침실 검색에서 불어 공부하던 것이 들통 나 책을 몰수당하고 교장 신부에게 불려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서 다행히 쫓겨나지는 않았다고 한다. 고해성사를 위해 찾아간 차 엘몬도 신부의 허락과 응원 덕분에 이들의 불어 공부는 계속될 수 있었다. 불어에 어느 정도 귀가 열리고 눈이 뜨이게 되자 윤 신부는 토마스 아 켐피스의 「준주성범」 불어판 포켓용을 입수해 밤낮 틈만 나면 그것을 ‘조막손이 곤 달걀 만지듯 조몰락거리며’ 번역했다. 그는 거기 나오는 일화, 미담, 비유들을 동기들에게 들려주곤 했고 1942년 8월 15일 성신대학에서 한국말 판 「준주성범」 초판을 발간하게 됐다고 회상한다. 현재 윤을수 신부 유물 전시관에는 1942년 초판본 「준주성범」은 없다. 그러나 1949년 11월 20일자로 성신대학에서 펴낸 「준주성범」에 보면 1942년에 초판된 것을 재판하는 것으로 나온다. 경향잡지 1949년 12월호는 “가톨릭 세계에서 복음성서 다음으로 넓게 애독되는 「준주성범」이 나왔다”고 소개하면서 총 270페이지, 가격은 350원, 등기우송료는 80원이라고 알린다. 1949년은 윤을수 신부가 성신대학 학장으로 있던 시기다. 이후에 출판되는 것과 비교해 다른 점은 각 권의 명칭을 첫째 매, 둘째 매, 셋째 매, 넷째 매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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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을수 신부가 「준주성범」을 풀어 수녀들에게 훈화할 때 사용한 녹음기.


절판됐던 「준주성범」은 1955년 6월 20일 경향잡지사에서 간행돼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오기선 신부의 동생 오기순 신부(1910~1993)는 윤을수 신부를 회상하며 그의 저서와 역서들이 많지만 당시 한국교회의 영성 면에 큰 공헌을 한 것이 「준주성범」 번역이라고 증언한다. 「준주성범」은 사제들과 수도자들, 모든 교우들의 영적 독서로 읽혀졌고, 사제들의 강론에 인용되고, 그 시대 한국교회의 영적 지침서 역할을 했다. 1950년대 초반 이 책에 대한 갈망이 상당히 깊었다는 것은 1954년도 후반기 경향잡지에 「준주성범」이 곧 나올 것이라는 공지가 계속되는 사실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방에 십자가는 꽂혔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는 산삼처럼 드물다”며 교회의 세속화를 염려했던 윤을수 신부에게 「준주성범」은 오래전에 쓰인 것이지만 현대인에게도 유효한, 성경 다음가는 인간생활 지도서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께 이르는 길의 안내서이기도 하다. 믿는 사람들이 매일 조금씩 이 책을 읽고 묵상하여 세속주의와 그리스도주의를 구별하고, 양심을 따라 살아가며 진선미이신 하느님과 일치해 살아가는 친밀한 생활로 인도되는 가운데 세상을 비추는 그리스도의 등불이 되는 것. 이것이 「준주성범」을 펴내는 그의 지향이었다.

※ 문의 031-334-2901~2 인보성체수도회 용인수도원 [가톨릭신문, 2015년 12월 13일, 신정숙 수녀(인보성체수도회 새감연구소 소장), 사진=인보성체수도회 제공]

 

 

[박물관 문화 순례]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 유물 전시관 (4)

‘사랑하라’ 계명 실천을 평생의 ‘업’으로 삼았던 여정

 

 

1965년 대성리 농장에서 명상 중인 윤을수 신부.


윤을수 신부의 유물관에 들어서면 마치 윤을수 신부가 일하다 잠시 자리를 비운 것처럼 보일만큼 책상 위에 그가 사용하던 물품들이 진열돼 있다. 성경, 십자고상, 타자기, 편지봉투 오픈 칼, 자, 시계, 도장, 그리고 담뱃대와 재떨이…. 윤을수 신부는 하느님을 사랑 지극하신 어버이로 모시고 산 믿음의 사람이다. 생명으로부터 시작해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해 주시며 언제나 자식으로 대하시는 어버이 하느님께 온전히 내어 맡기고 의탁해 마음의 동요 없이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분의 이상을 따라 이 세상을 살아나간 행복한 신앙인이자 사제요 그리스도의 제자다. 그런 그의 인생 행복관, 그의 세계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책상 위 풍경이다.

윤 신부는 서품 직후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인 1930년대 초 「가톨릭 청년」에 ‘성서 원문’, ‘성서역문의 역사적 고찰’, ‘성서해석에 대한 고찰’, ‘성서에 대한 성신 감도’, ‘성서의 고유한 특장(特長)’, 그리고 모세오경과 여호수아기, 룻기에 대한 글을 기고했을 만큼 성경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성경은 그에게 곧 빼고 더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말씀이자 명령, 길이자 진리였던 것이다. ‘스승이며 주님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유언으로 받들어 그날 밤 그분께서 명령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의 실천을 평생 자기의 ‘일’로 삼았던 윤을수 신부다.

윤을수 신부가 주로 외국의 친우들과 서신연락을 하거나 공문 작성을 할 때 사용했던 ‘올리베띠’ 타자기.


그래서 그는 묵주기도와 성인전에는 열심이지만 성경읽기는 소홀했던 초창기 인보성체수녀들에게 “성경을 읽어라!” 하고 강조했다. 아직 성경을 그리 자주 읽지 않고 있던 1950년대 후반의 한국교회 안에 새로운 수도회를 설립하며 윤을수 신부는 그의 수녀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가 아니라 진정한 인격을 가지고 사는 사람, 사람답게 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그에게 수도생활은 우리 인격의 원형이요, 참사람이신 그리스도를 닮는 것, 그분이 가신 길을 고스란히 따라가는 데서 행복을 구하는 제자됨이다.

윤 신부가 잠시 자리를 비운 것 같은 전시관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십자가다. 그에게 십자가는 책상 앞에 놓고 공경하고 몸에 지니고 다니는 장식품이 아니라 그가 따라야 하는, 상처 입고 죽어가면서도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용서해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하는 예수님의 얼굴이었다. 모욕, 천대, 죽음의 증상이고 ‘고통의 상징이자 열 번, 스무 번, 백 번, 천 번의 용서를 할 수 있다는 증표’다. 그래서 십자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고통을 잘 참아 받는다는 것이요,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사랑이다. 고통을 참아 받음은 제욕, 즉 욕구를 절제하고 자기를 다스리는 덕을 닦는 것이다. 자기 스승 예수를 본받아 윤을수 신부는 많은 시련과 오해, 억울한 일을 당하고 누명을 쓰면서도 변명하지 않는 자세를 지향하여 살았다.

그렇게 참고 걸어가는 길이 어찌 어렵고 힘들지 않았을까! 전시관에 고즈넉이 놓인 담뱃대와 재떨이를 보면 자연스레 겹쳐지는 사진이 한 장 있다. 그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모든 것을 놓고 대성리 강변에서 휴양하고 있을 때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담뱃대를 물고 흰 고무신을 신고 의자에 깊숙이 기대어 앉아 생각에 잠겨 강을 바라보고 있다. 오기선 신부(1907~1990)의 증언에 따르면 유학 전 동성소신학교 교사로 있을 때 윤 신부는 담배를 못 피워 원숭이 담배 피듯 뻐끔뻐끔 후 하면서 분위기를 잘 맞춰주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초창기 인보성체수도회 수녀들은 수단을 입고 흰 고무신에 지팡이를 짚은 채 담뱃대를 물고 있는 윤 신부의 모습을 많이 기억한다. 11년간의 유학생활과 미국 망명생활은 즐거운 때도 많았지만 남에게 말 못할 어려운 고통도 많았다고 했다. 한국 천주교회 첫 번째 박사 신부에게 거는 교회의 기대와는 달리 6·25전쟁으로 피폐해진 사회와 민중 속으로 들어가 함께 살아가기를 선택한 그다. 그리스도의 ‘일’에만 뜻을 두고 모든 것을 묵묵히 인내하고 극복해 나가면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행복하게 살았던 그였지만 지식인이요 신앙인이며 목자로서 홀로 감당해내야 했던 고뇌와 외로움이 없지 않았을 터, 그것이 그를 담뱃대와 친하게 만든 원인이 아닐까 짐작하게 한다.

사제이자 인간으로서 윤을수 신부의 체취와 고뇌가 배어 있는 담뱃대와 재떨이.


지금은 희귀 유물이 된 ‘올리베띠’(Olivetti) 타자기는 주로 윤 신부가 외국의 여러 친우들과의 서신연락과 공문 작성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내국인들과의 서신이나 문서는 손으로 직접 쓴 것이어서 구별이 된다. 그중에 적지 않은 것들이 원조를 청하거나 받은 원조에 감사하는 문서들이었을 것이다.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1962년 미국에서 수녀들과 찍은 사진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무렵으로 짐작이 된다. 이 타자기는 그가 건강이 악화돼 1971년 미국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그의 전 재산인 조그마한 가방 속에 들어있던 유품 중 하나다.

손잡이에 성모님이 부조된 편지봉투 여는 칼은 작지만 윤을수 신부가 함께 그리스도의 이상을 나누었을 많은 인연들과 만남들을 그려보게 한다. 편지와 전보 이외에는 달리 연락방법이 없던 그 시절 윤을수 신부는 정말 다양한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수도원에 남아 있는 서신들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현재 그의 묘비에 적혀 있는 묘비명도 그가 1956년에 세운 한국 최초의 사회사업학교인 구산후생학교 졸업생에게 서신으로 직접 남겨 놓아서 쓸 수 있었다. “어머니 품에서 땅에 묻힐 때까지 나는 웃으며 행복에 넘쳐 살았다고 동서에 전해주!”

※ 문의 031-334-2901~2 인보성체수도회 용인수도원 [가톨릭신문, 2015년 12월 20일, 신정숙 수녀(인보성체수도회 새감연구소 소장), 사진=인보성체수도회 제공]



[박물관 문화 순례]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 유물 전시관 (5 · 끝)

구원을 향해 ‘모든 이에게 모든 것’ 되었던 삶


 

윤을수 신부가 마지막으로 신었던 구두와 양말.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 유물 전시관’에는 조금 특이한 유물이 있다. 낡아서 뒤축이 헌 구두와 양말이다. 이 구두와 양말은 그가 선종한 지 30년 만인 2001년 8월 3일 그의 묘소를 용산 성직자 묘지에서 인보성체수도회 용인수도원으로 이장할 때 그 안에 남아 있던 것이다. 윤을수 신부가 이 세상을 떠날 때 평소에 고무신을 즐겨 신었던 그의 발에 신겨졌던 구두와 양말이다. 그리고 전시관 한쪽에는 길 떠날 채비가 다 돼 있는 느낌을 주는 낡은 여행가방과 지팡이, 검은 장갑이 놓여 있다. 윤 신부가 1971년 1월의 어느 추운 겨울날 병이 깊어져 미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오직 편안히 죽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올 때 지녔던 물건들이다. 낡은 구두, 양말, 가방과 장갑, 손때 묻고 무뎌진 지팡이…. 윤 신부의 손과 발, 인생의 마지막 시기와 관련된 물건들이다. 귀국하는 그를 김포공항에서 맞이한 유일한 사람인 그의 조카가 전해 준 바에 의하면, 그 가방을 열어 보았더니 오래전부터 사용한 타자기 하나, 몇 개의 원고 뭉치가 전부였다고 한다. 윤을수 신부는 이렇듯 죽음에 임박한 상황에 돈 한 푼 없으면서도 ‘어떻게든 될 것’이기에 생활에 관한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돌아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찾아온 동창 신부들을 향해 여전히 유쾌한 유머를 날리는 낙천적이고 고매한 기질의 그를 두고 오기선 신부(1907~1990)는 바오로 사도처럼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모든 이에게 모든 것’(1코린 9,22)이 돼 살았던 사람이라고 추억했다.

 

윤을수 신부가 수없이 많은 길을 떠나며 들고 다녔던 가방과 병든 몸을 의지했던 지팡이.


 

생전의 윤을수 신부는 수없이 길을 떠나고 돌아오는 삶을 살았다. 그 여정의 성격은 참 다양했다. 어렵고 힘없는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늘 잰 발걸음을 해야 했고, 나환자 정착촌 건설 현장, 피난민들의 정착을 위한 간척 사업 현장 외에도 브라질 이민 사업을 위한 시찰 등 사회사업 관계의 국제회의와 기타의 일로 1년이면 몇 차례씩 해외를 왕래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단 하나, 이 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방방곡곡에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와 그분 나라의 승리를 전하고 그 사랑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에게 사랑 없는 신앙생활은 허위의 신앙생활이었다. 그런 그의 여정에 늘 가까이 함께했던 것이 지팡이다. 이러한 윤을수 신부의 활동 모습을 생생한 증언으로 남긴 사람이 있다. 바로 ‘사도법관’ 고 김홍섭(바오로) 판사(1915~1965)다. 그는 윤 신부가 세운 한국 최초의 사회사업학교인 구산후생학교 설립에도 참여했고 그 학교 학생들에게 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1958년 윤 신부가 9명의 의과대학생들과 5명의 구산후생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순회 진료팀을 이끌고 해방 이후 중앙정부의 과장급 하나도 찾아온 적 없는 연평도로부터 소청도, 대청도를 거쳐 백령도에 이르는 서해 도서 지방을 찾아다니며 난민 대책을 위한 사업과 의료 봉사활동을 펼쳤을 때 동행했다. 그는 그의 저서 「무상을 넘어서」에 이 전교여행의 소회와 윤 신부에 대한 기억을 남겼다. 크지 않은 몸집에 보릿짚 모자, 고무신을 신은 윤 신부의 검은 지팡이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봉사단의 움직임도 분주해졌다고 한다. 지팡이는 윤 신부의 지휘봉과도 같았던 것이다.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 유물 전시관’ 한 켠에 걸려 있는 한복.



윤을수 신부는 지병인 당뇨병으로 인해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이 지팡이는 그가 산을 개간하고 나무를 심을 때에는 줄자로 쓰이고 땅이나 집터를 잴 때, 정원이나 밭 등을 만들 때도 정확하게 평수를 계산하는 역할을 했다. 김홍섭 판사는 윤 신부가 인천보다 중국의 산동이 더 가깝다는 외딴섬의 쓸쓸한 촌락들을 찾아다니면서 모처럼 치료혜택을 받고 무표정하게 돌아가는 아낙네, 아이들, 노인들의 뒷모습을 보고 눈물짓곤 하던 모습을 전해준다. 그런 그의 모습 위로 남과 같이 울어줄 수 있고 남과 같이 웃어줄 수 있는 동정의 마음이 자비라고 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이 겹쳐진다.

유물 전시관 안쪽 벽에는 윤 신부의 마지막 인생 여정과 관련된 유물이 하나 더 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가 입었던 한복이다. 윤 신부는 우리의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고 싶어 했다. 그가 설립한 인보성체수도회 수녀들의 수도복으로 치마와 저고리를 입게 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 당시 수녀들은 그러한 그의 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서 제대로 된 정식 수도복을 입게 해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그러면 윤 신부는 늘 수도복이 수녀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수도복 때문에 돌 맞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고 일러주곤 했다고 한다.

윤을수 신부의 우리 전통적인 것에 대한 애정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 초창기 수녀들이 들려준 재미난 일화가 하나 있다. 윤 신부는 1960년대 초반 인보성체수도회 설립자이면서도 외국의 다른 수도회 지원자들도 모집해 인보성체수도회 안에 함께 살다가 비자가 나오면 보내곤 했다. 그때 그 지원자들에게 꼭 한복을 준비하게 했다고 한다. 비행기가 미국 공항에 착륙할 준비를 하면 한복으로 갈아입게 했는데 20여 명의 젊은 아가씨들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차례로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는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주변 사람들의 감탄과 카메라 플래시를 한몸에 받아 몸 둘 바를 몰랐다는 것이다.

인보성체수도회 용인수도원에 모셔진 윤을수 신부의 묘소.


유물 전시관을 나와 수도원 옆길을 조금 걸어 올라가면 양지바른 산기슭에 윤을수 신부와 인보성체수도회 수녀들이 묻혀 있는 묘역이 있다. 윤 신부는 1971년 5월 9일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그가 에오라지 추구했던 영원한 행복, 어버이 하느님의 품에 들었다. 그는 하느님 품에 들어 지금도 이 시대 가장 어려운 이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위해 전구하고 있다.

※ 문의 031-334-2901~2 인보성체수도회 용인수도원

※ 이번 호로 ‘박물관 문화 순례’ 연재를 마칩니다. 지금까지 수고해 주신 필진들과 애독해 주신 독자께 감사드립니다. [가톨릭신문, 2015년 12월 27일, 신정숙 수녀(인보성체수도회 새감연구소 소장), 사진=인보성체수도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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