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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뮈텔 주교 일기를 통해 본 한국천주교회와 근대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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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0-14 ㅣ No.459

한국교회사연구소 「뮈텔 주교 일기」를 통해 본 한국천주교회와 근대사회 심포지엄


재임 43년 한국교회 기틀 다진

 

 

왼쪽부터 최기영(서강대)ㆍ장규식(중앙대)ㆍ김태웅(서울대)ㆍ박찬식(제주대)교수, 종합 토론 사회를 맡은 노길명 고려대 명예교수, 내포교회사연구소장 김정환 신부, 부산가톨릭대 교수 한윤식 신부, 조현범 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 김수태 충남대 교수.

 

 

200자 원고지로 3만 장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뮈텔 주교 일기」가 총 8권으로 완역 출간된 지 2년 만에 이에 대한 재조명작업이 이뤄졌다.

 

(재)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김성태 신부)는 9월 23일 서울대교구 명동성당 교육관에서 '「뮈텔 주교 일기」를 통해 본 한국 천주교회와 근대사회'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가졌다. 조선과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에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1854~1933,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이름 민덕효) 주교가 쓴 일기를 토대로 당시 천주교회와 사회를 돌아보는 자리였다.

 

심포지엄은 1890~1933년 43년간 조선ㆍ서울대목구장으로 재임한 뮈텔 주교 일기를 통해 당시 시대상과 한국천주교회 교세 변화 양상을 살피고, 「서울대목구 지도서」를 분석하고, 조선 말과 대한제국기 정세 및 선교사들의 인식 등을 새롭게 성찰했다.

 

 

뮈텔 주교 재임기의 교세 변화

 

내포교회사연구소장 김정환 신부는 뮈텔 주교가 대목구장으로 재임했던 시기를 조선대목구 시기(1890~1910)와 서울ㆍ대구대목구 분리 이후 시기(1911~20), 원산대목구 분리 이후 시기(1920~33) 등 세 시기로 나눠 교세변화를 분석했다.

 

첫 번째인 조선대목구장 시기엔 박해가 끝난 이후 선교가 활발해지면서 1만 7577명이던 신자 수가 20년 만에 7만 6843명으로 4.37배 급증하는 양상을 보인다.

 

하지만 조선대목구가 두 개의 대목구로 나뉜 두 번째 시기엔 일제강점과 국내외 정세 변화, 교육사업 실패 등으로 선교가 위축되고 1차 세계대전으로 선교사들이 징집되면서 서울대목구는 현상유지도 버거운 정체 상태가 된다. 그래서 교세도 1912년 5만 2109명에서 1921년 5만 9761명으로 9년간 14.68%(7562명)늘어나는 데 그쳤다.

 

원산대목구 설정 이후에도 선교 열의 감소로 교세는 1922년 5만 3574명에서 1933년 5만 7295명으로 11년간 3721명(6.95%)밖에 늘지 않았고, 두 대목구 분리로 서울대목구 교세는 상대적으로 위축됐다.

 

조현범 박사는 토론을 통해 "뮈텔 주교가 작성했던 교세통계표나 신학생 통계 등은 대단히 정교한 만큼 이걸 몽땅 교회사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고 그 변화를 추적해 당시 교회사를 연구하는 방법도 가능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뮈텔 주교와 「서울대목구 지도서」

 

부산가톨릭대 교수 한윤식 신부는 뮈텔 주교가 1922년 9월 21일자로 공포한 「서울대목구 지도서(Directorium Missionis de Seoul)」에 주목했다.

 

한 신부는 "뮈텔 주교의 서울대목구 지도서 간행은 한국천주교회 성장 및 발전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며, 그 이유는 서울대목구 지도서가 1923년 간행 뒤 서울대목구뿐 아니라 대구ㆍ원산대목구, 평양ㆍ연길지목구를 포함하는 한국교회 전체 신자들의 교회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규범집이었다는 점을 들었다. 또 1932년 간행된 「한국교회 공동 지도서」에도 서울대목구 지도서의 많은 규정이 그대로 수용되거나 심화됨으로써 이후에도 계속해서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한 신부는 서울대목구 지도서 안에 제시된 다양한 규정들에 대한 연구가 기존의 각종 '한국교회 지침서'들과의 관련성 속에서 이뤄진다면 그 중요성은 자못 클 것이라고 전망하고, 이를 위해 서울대목구 지도서를 단순히 서울대교구의 옛 사목 규정집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했다.

 

김수태 충남대 교수는 "한국천주교회가 만든 여러 지도서는 당시 교회와 사회의 변화상을 잘 드러내는 중요한 문서들"이라며 "때문에 이를 여러 시각에서 잘 분석하고 이용한다면 더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조선 말ㆍ대한제국기 뮈텔 주교의 정국 인식과 대정치권 활동

 

김태웅 서울대 교수는 당시 고종의 대프랑스 외교정책과 뮈텔 주교의 선교방향은 프랑스 정부의 동아시아 정책을 매개로 상호 부합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뮈텔 주교는 반독립협회 노선을 걸으며 조선 왕실과 정치적 행보를 같이 하기도 했지만, 이런 활동은 한국천주교회의 성장을 가져오는 동시에 300건이 넘는 교안(敎案) 발생을 초래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후 뮈텔 주교의 활동은 러일전쟁과 교육계몽운동, 개신교와의 경쟁의식 등 국내외 정세 변동에 따라 왕실과 거리를 두면서 교육부문으로 옮아갔으며, 일제 강점 이후엔 통감부의 규제 속에서 교회조직과 재산을 보호하고 교육활동을 보호하기 위해 일제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고 항일 민족운동과는 거리를 뒀다고 분석했다.

 

박찬식 제주대 교수는 "뮈텔 주교 재임 시기 교회는 '교민조약'(1899년)과 '교민화의협정'(1901년), '선교조약'(1904년) 등을 통해 신앙과 선교 자유를 법적으로 인정받고 정교분리에 합의했지만 이를 내세워 향촌사회와 대립하고 때로 치외법권의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며 "따라서 뮈텔 주교가 접촉했던 관료들과의 친분이나 교류 실상에 대한 미시적 연구가 심화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뮈텔 주교의 한국 인식과 한국 천주교회 : 「뮈텔 주교 일기」를 읽다

 

최기영 서강대 교수는 뮈텔 주교 일기를 △ 정착과 확장 : 1890~1910 △ 정체와 순응 : 1910~1933 등 두 부분으로 나눠 살피고, 뮈텔 주교의 한국 인식은 '시혜적 애정'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즉 뮈텔 주교의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애정은 선교사로서의 사명과 연결된 일종의 베풂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뮈텔 주교는 영혼 구제를 위한 신앙만을 강조했고, 민족정체성이나 독립운동에 대한 이해는 크게 부족했다고 분석했다. 뿐만 아니라 세계 천주교회의 보수적 흐름에 익숙해있던 뮈텔 주교와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토착화나 한국인 성직자 중심의 교회 형성, 평신도 지도층 양성 등에 무관심했다고 최 교수는 덧붙였다.

 

그 결과 뮈텔 주교가 수장으로 자리하고 있던 시기에 외형적으로 한국천주교회는 성장을 하고 있었지만 내적 발전은 따르지 못했다고 진단하고, 그 부분은 뮈텔 주교 개인이 책임져야 할 부분도 없지 않겠지만 그게 바로 시대적 한계였다고 주장했다.

 

장규식 중앙대 교수도 토론을 통해 "1907년 천주교와 개신교 교세 역전 문제를 다룰 때 당시 천주교가 서구문화 전파나 시대정신의 대변과 관련해 어떤 역할을 했고 그에 대한 뮈텔 주교의 입장은 어떠했는지 깊이 연구해야 할 듯하다"고 주문했다. [평화신문, 2011년 10월 2일, 오세택 기자]

 

 

‘뮈텔 주교 일기를 통해 본 한국 천주교회와 근대사회’, 한국교회사연구소 심포지엄


“뮈텔 주교, 한국인 영혼 구하고자 노력”

 

 

1891년부터 제8대 조선대목구장으로 부임한 후 42년 간 한국 천주교회를 이끌었던 뮈텔 주교. 그의 일기를 통해 당시 사회와 교회를 비추기 위해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김성태 신부)는 9월 23일 서울 명동성당 교육관 3층에서 심포지엄을 열었다.

 

‘뮈텔 주교 일기를 통해 본 한국 천주교회와 근대사회’라는 주제로 열린 심포지엄은 ▲ 뮈텔 주교 재임기의 교세 변화- 김정환 신부(내포교회사연구소 소장) ▲ 뮈텔 주교와 서울대목구 지도서- 한윤식 신부(부산가톨릭대학교 교수) ▲ 뮈텔 주교의 대한제국 정국 인식과 정치활동- 김태웅(서울대학교 교수) ▲ 뮈텔 주교의 한국 인식과 한국 천주교회- 최기영(서강대학교 교수) 순으로 진행됐다.

 

 

뮈텔 주교 일기로 본 한국 천주교회

 

교구장에 임명된 소식을 접한 1890년 8월 4일부터 선종하기 직전인 1933년 1월 14일까지의 뮈텔 주교 일기는 거의 매일 계속됐다. 분량은 6000여 쪽 정도이며, 교회 안팎의 사건, 조선 사회에서 발생한 주요 정치적, 사회적 사실들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따라서 뮈텔 주교의 일기는 교회사적인 의미뿐 아니라 선교사의 눈으로 본 당시 시대상의 흐름을 짚을 수 있다. 뮈텔 주교가 재임하는 동안 교세의 변화도 컸다.

 

1890∼1910년 조선대목구라는 하나의 교구로 1890년대 말에는 간도지역으로까지 확대됐던 그의 관할구역은 1911년 대구대목구 설정, 1920년 원산대목구 설정, 1927년 평양지목구 설정 등으로 인해 축소된다.

 

특히 일제의 강점이 이뤄진 직후인 1911년부터는 간도로 이민하는 신자가 급격히 증가했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는 선교사의 급감으로 현상 유지에 급급한 상황이 됐다. 또한 박해를 겪으면서 다소 높은 신분을 가졌던 천주교 신자들이 하위계층으로 전락했으므로 오지나 도심 외곽지역에 교세가 증가되는 특징을 보이기도 했다.

 

일기에 의하면 뮈텔 주교가 고해와 견진성사를 주기 위해 방문한 지역은 대부분 읍내나 장터가 아닌 도심에서 먼 지역이었으며, 신자들 대부분은 생계를 위해 빈농이나 옹기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러한 신자들의 여러 가지 계층적 한계는 한국전쟁 이후 급격한 사회변화가 이뤄질 때까지 계속 유지됐다.

 

김정환 신부는 “천주교회가 뮈텔 재임 초창기에도 여전히 하층민들의 종교로 인식되는 계층성의 문제가 있었다”며 “경제·종교적 이유, 계속되는 박해에 대한 불안감이 더해지면서 도심지역으로까지 확산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날 심포지엄에는 1923년 서울대목구 지도서를 간행하며 뮈텔 주교가 강조한 사항들이 발표되기도 했다. 일기에 의하면 신자 교육과 교리교사 교육, 선교사의 정치적 중립, 본당 등록 대장, 한국인 사제 양성 등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는 선교사의 한국에 대한 이해도 강조했는데, 선교사들에게 한국어 시험을 규정한 것이나, 인내심을 갖고 한국의 음식과 풍속에 적응해 사목활동을 수행하며 한국인들에게 맞출 수 있도록 할 것을 권고했다.

 

한윤식 신부는 “뮈텔 주교가 서울대목구 지도서를 반포함에 있어 일본의 한국 강점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독립운동 참여에 부정적 입장을 표명했다는 것은 오늘날 민족주의 관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며 “하지만 뮈텔 주교에 의한 서울대목구 지도서의 간행은 한국 천주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고 전했다.

 

9월 23일 서울 명동성당 교육관 3층에서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에 관한 심포지엄이 열렸다.

 

 

뮈텔 주교의 행동방향

 

조선말 고종정부의 정치적 위기로 서구열강들과 일본의 압박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뮈텔 주교는 정교분리를 내세우며, 취약한 선교와 신자들의 신앙생활 여건을 개선하고 나아가 교세를 확장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정치권과 최대한 거리를 두었지만 취약한 여건들을 개선하기 위해 반독립협회 노선을 걸으며 대한제국 왕실과 정치적 행보를 함께하기도 했다. 학자들은 뮈텔 주교의 당시 이러한 입장과 행동을 여러 가지로 해석한다.

 

김태웅 교수는 “그의 이러한 활동은 한국 천주교회의 성장을 가져오는 동시에 교안의 빈발을 초래했다”며 “하지만 그의 활동방향은 한국인 식자층의 교육계몽운동, 개신교와의 경쟁의식 등으로 대한제국 왕실과 거리를 두며 교육부문으로 옮아가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한 발제자는 뮈텔 주교의 이러한 행동이 민족문제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그에게는 한국인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통해, 한국인의 영원을 구제하는 일이 선교사들의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최기영 교수는 “인간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던 시대에 뮈텔 주교는 한국인의 영혼을 구하고자 했다”며 “그것이 바로 한국에 대한 애정의 발현으로 한국에 대한 애정은 순교자 현양으로도 나타났다”고 말했다.

 

심포지엄에서는 뮈텔 주교 일기에 대한 여러 주제들이 다뤄졌지만 발제자들 모두 뮈텔 주교 일기가 갖는 역사적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는 같은 의견을 보였다. 당시 교회 안팎의 사건과 사고, 사실이 자세히 담겨 그 이해를 돕는 중요한 사료라는 것이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김성태 신부는 “한국 천주교 역사뿐 아니라 근현대사를 살피는 일차적 사료이지만 제대로 주목받지 못해왔다”며 “한말 식민지시대의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이번 심포지엄이 자그마한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가톨릭신문, 2011년 10월 2일, 오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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