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5일 (금)
(자) 대림 제2주간 금요일 그들은 요한의 말도 사람의 아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인] 성 정 야고보 샤스탕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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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0 ㅣ No.133

성 정 야고보 샤스탕(Chastan) 신부(1804-1839)

 

 

한국명은 정아각백(鄭牙各伯), 이 땅에 두 번째로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로 1839년 기해박해 때 범 주교, 나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정(샤스탕) 신부는 1803년 10월, 프랑스 태생으로 1827년 1월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가 되었으며 같은 해 4월 동양 포교지의 하나인 페낭 섬으로 떠났다. 그는 그곳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중 마침 소(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임지로 떠나게 되자 함께 동행하기를 자원, 1833년 5월 그곳을 떠났다. 그후 3년 간을 중국 대륙과 몽고, 만주 등지를 전전하며 조선 입국의 기회를 기다렸으나 쉽게 뜻을 이를 수가 없었다. 그 동안 소 주교는 입국도 못한 채 만주 땅에서 병을 얻어 목숨을 잃었으며 1836년 1월 조선 입국에 성공한 동료 나 신부로부터의 기별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마침내 1836년 12월 나 신부의 기별을 받고 의주 변문으로 간 정 신부는 마카오로 유학가는 김대건 등 세 소년 신학생을 전송하던 교우들을 만날 수 있었으며 그들과 함께 무사히 국경을 넘어 이듬 해인 1월 서울에 도착했다.

 

정 신부는 서울에 도착하자 곧 한국말을 배우는 한편 나 신부와 손을 나누어 각 지방에 산재해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집행했다. 정 신부 등 당시의 서양인 성직자들은 상제 옷으로 변장하고 험한 산길을 헤매야 했고 먹을 것도 여의치 않아 소금에 절인 야채 따위로 공복을 채워야 했으며 밤새도록 고해를 듣고 미사를 드린 다음날 새벽에는 또 다른 마을로 길을 재촉해안만 했다. 그들은 이러한 고난을 감수해 가며 오직 복음전파에만 힘썼던 것이다. 정 신부는 한때 중병을 앓게 된 나 신부를 서울까지 올라와 간호해야 하는 어려운 일도 겪었으나 다행히 무사했으며 1837년 12월에는 제 2대 교구장 범 주교가 입국에 성공하여 전교활동은 차츰 본격화되어 갔다.

 

그러나 1839년 몰아닥친 기해 대박해는 이 땅을 수많은 천주교인의 피로 물들였고, 정 신부도 범 주교, 나 신부와 함께 그 해 9월 21일 새남터에서 마침내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정 신부의 나이는 35세요, 이 땅에 들어온 지 2년 9개월 남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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