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31일 (토)
(녹)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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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삶의 기원을 찾아가는 성지순례: 이스라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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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9-29 ㅣ No.1934

[성지순례기] 삶의 기원을 찾아가는 성지순례 : 이스라엘 (2)

 

 

성모님 수유동굴과 성 예로니모 동굴

 

우리는 예수님 탄생 기념성당이 있는 베들레헴에 도착하여 먼저 성모님 수유동굴 성당을 찾아갔다. 정문 위에 성모님께서 아기 예수님을 안고 젖을 먹이는 성상이 있는 성당으로 들어서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계단 벽에는 성가정이 이집트로 피난하는 모습과 젖을 먹이고 계신 성모님상, 가브리엘 대천사상 등이 놓여 있었다. 전승에 의하면 이곳은 성가정이 이집트로 피난하면서 잠시 머물면서 성모님께서 갓난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젖을 먹이셨다고 하는 장소이다. 동굴은 전체가 하얀색이었는데 그 이유는 성모님이 아기 예수님에게 젖을 주다가 한 방울이 동굴의 돌 위에 떨어졌는데 그때 갑자기 동굴이 하얗게 변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우유동굴성당’이라고 불린다는데 개인적으로는 성가정의 신비를 너무 미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성당은 종교를 초월하여 어머니의 모정을 보여주는 장소로 사랑받는다고 한다. 이 동굴을 순례한 많은 불임 여성이 아기를 낳은 다음 봉헌한 기도문과 예물을 보관하는 장소가 있었는데 연세 드신 작은형제회 수사님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다양한 봉헌물들을 가리켜 보였다.

 

수유동굴에서 5분 정도 걸어서 예수님 성탄성당으로 이동했다. 예수님 성탄성당으로 들어간 우리는 성당 옆의 수도원 회랑을 따라 성 가타리나 성당이 있는 곳으로 갔다. 가타리나 성당의 자하에 있는 예로니모 성인(St. Jerome, 347-420년)이 사시던 동굴로 간 것이다. 예로니모 성인은 평생을 예수성탄성당 옆에 있는 동굴에 살면서 4세기경까지 히브리어 성경만 있던 <구약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셨고 베들레헴에 수도 공동체를 세우셨다고 한다. 예로니모 성인이 사시던 동굴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갑자기 주위가 깜깜해졌다. 전기가 나간 것이다. 어둠 속에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우리에게 누군가 불 켜진 초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초를 들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는 자매들의 움직임이 동굴 벽에 신비스런 그림자로 비쳤다.

 

오래된 토굴은 안쪽으로 이어졌다. 곳곳에 성모 마리아의 배필인 요셉 성인께 봉헌된 제대와 무죄한 어린이들의 제대, 그 다음으로 예로니모 성인의 무덤 제대가 나타났다. 특히 성인의 무덤 제대 위 벽에 걸린 십자가가 마음을 끌었다. 그 다음 동굴은 예로니모 성인이 성경을 번역하고 기도생활을 하던 서재로 벽에는 천사가 예로니모 성인에게 지혜를 전해 주는 벽화가 있다.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한 작은 창도 있었는데 그 창은 하늘이 보이는 밖으로 통하는지 궁금했다. 그동안 예로니모 성인이 히브리말 성경을 라틴말로 번역한 불가타 성경을 만드신 분인 것은 알았지만 이곳 예수성탄성당 옆 동굴에서 사신 것은 처음 알았다. 예수님 탄생지 옆, 동굴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이 거의 고행에 가까운 삶이 아니었을까. 예수님과 말씀에 대한 예로니모 성인의 단순하고 숭고한 열정이 내 안에서 일어나기를 기도하게 되었다.

 

이외에 386년부터 베들레헴에 정착하여 예로니모 성인을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수도생활을 했던 바울라 성녀와 바울라의 딸 에우스토키움 동정성녀에게 봉헌된 제대가 있다. 이 바울라 성녀는 우리가 방문한 수유동굴성당을 지은 분이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이 동굴 안에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러면 4세기경에는 이 지역이 광야였고 동굴 지역이었을까?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옛 성인들의 흔적을 더듬다가 밝은 지상으로 올라오니 마치도 한순간 꿈을 꾼 것 같았다. 우리는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가타리나 성당의 경당으로 갔다. 아치형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작은 경당은 우리 일행으로 꽉 찼다.

 

이곳에서 우리는 사순절의 첫 주간미사를 드렸다. 복음은 세례를 받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는 장면이었다. 유혹은 시련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싶다. 내가 가야 할 목적지와 추구해야 할 본질을 더욱 선명하게 밝혀주는 시련의 다른 이름, 김영남 신부님은 강론을 통해 ‘순례의 감동이 무디어지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보느라 예수님의 역사적 현존과 가르침을 잊고 단순한 여행자가 될 위험을 다시 한 번 당겨주었다. 신부님의 말씀대로 이 은총의 땅에서 걷고 숨 쉬는 복된 순간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을 추슬렀다.

 

 

예수성탄성당(CHURCH OF THE NATIVITY)

 

미사를 마친 다음 다시 예수성탄성당으로 돌아오기 위해 아르메니아 정교회 수도원 회랑을 지났다. 오래된 전통이 배어나는 수도원의 정취가 깊게 묻어나는 회랑을 걷는 것이 좋았다. 돌로 지은 오래된 건물로 지금도 수도원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투박하고 거대한 석조건물인 예수성탄 기념성당의 건물 정면은 3개 수도원의 벽(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작은형제회)으로 둘러싸여 있다. 성당 정면에 원래 있던 세 개의 문 중 두 개는 막아 버리고 가운데 문만을 남겨놓은 흔적이 보인다. 우리가 드나드는 현재의 문도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두 번이나 크기를 줄였기 때문에 성곽과 같은 거대한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몸을 굽혀야 들어갈 수 있는 낮고 좁은 문을 통해 들어간 성당 안은 운동장만큼이나 넓게 느껴졌다. 높은 천정 양편의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돌기둥에 부딪치며 성당 내부로 쏟아지고 있었다. 여기 저기 여러 나라에서 온 순례자들이 많았지만 성당이 너무 넓어서 그런지 복잡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가 예수님이 탄생하신 동굴 터에 처음으로 성당을 지은 이래 이곳은 수많은 역사가 덧칠해졌다. 성녀가 324년에 지은 성당은 대지진과 사마리아인들의 폭동 때에 불타버리고 우리가 순례하는 현재의 성당은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531년에 지은 것이다.

 

성당 바닥에는 헬레나 성녀 시대의 모자이크 조각들이 남아 있었다. 성당을 등분하는 40여 개의 돌기둥의 위편에는 동양화 같은 느낌이 드는 십자군 시대의 무채색 모자이크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레바논 삼나무를 손으로 깎아 화려하게 장식한 이콘으로 꾸민 중앙제대는 예수님이 탄생하신 동굴 위에 위치하고 있다. 수많은 향로에서 올라오는 연기와 향이 제대를 둘러싸고 있었다. 여기저기 걸려 있는 동방교회 특유의 상징이 가득 담긴 화려한 이콘들이 눈을 끌었다. 지하로 내려가기 전에 우리는 마음속 기도를 담아 초를 봉헌했다.

 

우리는 예수님이 탄생하신 동굴로 내려가기 위해 제대 오른편으로 내려갔다. 다른 순례자들의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내려간 예수님의 탄생 장소는 은빛의 ‘베들레헴의 별’로 표시되어 있었다. 예수성탄성당은 부분으로 나누어 여러 교회가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데 예수님의 정확한 탄생 장소를 가리키는 이 베들레헴의 별은 가톨릭교회 소유라고 한다. 1847년 그리스 정교회 쪽에서 이 별을 훔친 사건으로 국제적인 분쟁이 일어났고 크림전쟁(1854-1856년)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평화의 왕이 오신 곳에 평화가 없었던 것이다. 라틴어로 “Hic de Virgine Maria Jesus Christus Natus est.”(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셨다.)라고 새겨진 베들레헴의 별은 14각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구원 역사를 보여주는 십자가의 길 14개 처를 상징하며,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 14대, 다윗으로부터 바빌론 유배까지 14대, 그 후부터 예수님까지의 14대를 상징한다고 한다. 예수님이 오신 2천 년 너머의 구약에서 이어지는 그리스도교의 전통과 신비를 이 은빛별로 상징해 놓은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이신 분이 세상에 오시어 새로운 계약의 시대를 연 거룩한 동굴 바닥에 엎드려 입을 맞추었다.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낮은 자리로 내려오신 하느님의 겸손하심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탄생 동굴을 지나 3-4m 정도 더 내려가면 아기 예수님을 눕혔던 구유가 있던 성탄동굴 자리가 있다. 모두들 예수님을 받아 안은 복된 구유가 있던 곳을 조배하고 다시 좁은 계단을 통해 성당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야 하는 작은 문을 통해 성당 밖으로 나왔다. 성채 같은 성당을 되돌아보며 거대한 건물 지하에 자리한 아주 작은, 그러나 우주적인 의미를 가진 거룩한 장소, 예수님의 탄생지를 마음 깊이 기억했다.

 

우리는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오래된 상가가 들어선 평화광장까지 걸어갔다. 광장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의 서울광장 같은 곳은 아니고 관공서 앞 적당한 공터에 상가와 식당이 있는 곳이었다. 우리가 들어간 식당은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건지 모르지만 오래된 중국음식점을 연상시키는 분위기였다. 그곳에서 이스라엘 요리인 양고기꼬치와 튀긴 고기요리를 먹었다. 그런 다음 가이드는 우리를 아랍인 지역에 있는 규모가 큰 기념품 판매소로 안내했다. 자매들이 선물을 고르는 동안 나는 먼저 밖으로 나왔다. 잠깐이라도 아랍인 거리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멀리 갈 수는 없었고 기념품 가게 앞길을 건너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낡은 담이 쳐진 집들이 늘어선 거리는 초라하고 조용했다. 오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 쓸쓸했다. 다시 차를 타고 차창 밖으로 유다인 지역과 아랍인 지역을 구분하는 장벽이 이어지는 것을 보며 마음이 무거웠다. 지역이 나뉘고 고립됨으로써 가족이 분열되고 어느 날 갑자기 학교를 갈 수 없게 되는 등의 인권 침해가 일어난다고 한다. 그 때문에 사람과 생산품들의 이동이 제한되어 경제적 파괴가 심각한 지경임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또 얼마나 피폐해질 것인가. 사람들의 표정 없는 얼굴과 허름한 차림새, 낡은 주거환경으로 아랍인 지역은 금방 표시가 난다. 팔레스타인 구역 쪽의 분리장벽에는 유다인들에 대한 아랍인들의 분노를 드러내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때에 독일 나치정권에 의해 잔혹한 인종말살을 당했던 유다인들이 요즘 팔레스타인에게 하는 가혹행위와 억압정책을 보면 이들이 하느님이 명하신 사랑의 율법을 지키는 자들인가 하는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거룩한 땅을 쟁취하기 위해 벌이는 전쟁이라니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이기심과 폭력으로 얼룩진 세상에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할 수 있는 작은 것을 실천하기로 결심해 본다.

 

 

아인카렘(EIN KAREM) 그리스도교인들의 마음의 고향

 

아인카렘으로 이동하는 버스는 예루살렘 시내의 혼잡한 교통사정으로 자주 멈췄다. 경사진 거리는 도로 확장공사가 한창이었다. 주변에 보이는 건물들은 모두 흰색으로 주택은 층수가 높지 않고 작은 편이었다. 예루살렘 길거리는 넓어야 4차선이었다. 때문에 곳곳에서 도로 확장공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탄 차는 자주 멈추면서 복잡한 시내를 빠져나갔다. 덕분에 시내 풍경과 지나다니는 유다인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버스 정거장 근처에 서 있는 여학생들, 꼬불거리는 귀밑수염을 기른 남자가 검은 양복 단추를 목까지 채우고 검은 모자를 쓰고 지나가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마리아가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리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예고를 받고 ‘길을 떠나 걸음을 서둘러 유다 산골에 있는 한 동네를 찾아간’(루카 1,39-46) 아인카렘은 골짜기 사이로 올리브 나무와 포도밭이 펼쳐지는 산간지방이었다. 복잡한 예루살렘 도심에서 서쪽으로 8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아인카렘은 ‘포도밭의 샘’이라고도 한다. 그처럼 풍요로운 이름을 가진 아인카렘에 도착하니 공기까지 평온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먼저 마리아의 사촌 엘리사벳과 즈카르야의 집터 위에 세워진 세례자 요한 탄생 기념성당을 찾아갔다. 성당은 양편으로 기념품점이 들어선 좁은 길 막다른 곳에 있었다. 성당에는 세례자 요한의 일생을 그린 커다란 성화가 그려져 있었다. 중앙 제단 왼쪽의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가면 세례자 요한이 탄생한 동굴이 있다. 그곳의 탄생 경당 제대 아래 대리석에는 “HIC PRAECURSOR DOMINI NATUS EST.”(여기서 주님의 선구자가 나셨다.)라고 새겨진 글이 있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루카 7,28; 마태 11,11)고 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오실 길을 닦은 선구자요 구약과 신약을 이어주는 가장 큰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 하지만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고 하면서 예수님의 그늘 뒤로 사라지고자 했다. 그의 겸손은 자신의 탄생지인 아인카렘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방문한 곳으로 더욱 잘 알려지고 있는 것에서도 드러나는 것 같다.

 

성당 마당에는 여러 나라 말로 된 즈카르야의 노래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봉헌한 기도문도 있었다. 세례자 요한 탄생 기념성당을 나오면서 작은 기념품 가게 안에 진열된 다윗의 별 목걸이를 보았다. 그 순간, 또다시 오래전에 이곳에 왔던 느낌이 일어났다. 울퉁불퉁한 좁은 돌길로 이어지는 오래된 골목과 시골풍경이 어찌 이다지도 정겹고 낯익을까. 과거와 현재가 성경의 세계 안에서 하나로 통해서 그런가.

 

마을은 언덕에 둘러싸인 산간지방으로 울창한 나무들이 무성했다. 계절로 치면 겨울이지만 많은 꽃들이 피어 있어 우리나라 ‘고향의 봄’ 같은 느낌이었다. 담장에 늘어진 식물과 활짝 핀 꽃들이 흐드러진 오래된 집들이 정감 있었다. 열서너 살쯤 보이는 금발의 유다 소년이 빨간 자전거를 끌고 온통 식물에 싸인 대문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한폭의 영상이었다. 열린 대문 사이로 보이는 집 마당에도 화초가 가득했다.

 

제법 긴 계단을 올라 마리아 엘리사벳 방문 기념성당에 들어갔다. 성당 정면에는 천사의 인도를 따라 사촌 엘리사벳을 찾아가는 마리아의 모습과 함께 ‘여인들 가운데, 축복받으신 분’(Benedicta tu in mulieribus)이라는 글이 새겨진 커다란 모자이크화가 우리를 맞이했다. 지하성당과 이층성당으로 이루어진 이 성당은 1955년에 지은 것이지만 원래는 세례자 요한 탄생 기념성당과 같이 비잔틴 시대부터 있었다고 한다. 동굴 터에 자리 잡은 지하성당 중앙 벽에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나는 성화가 있다. 왼쪽 벽에는 예루살렘 성전 주님의 제단에서 분향을 하고 있는 즈카르야, 그리고 오른쪽에는 예수 탄생 이후 베들레헴 근처의 두 살 이하의 사내 아이들이 살해당할 때에(마태 2,16) 엘리사벳이 세례자 요한을 숨겨주었다는 외경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그림이 있었다. 그림 아래 벽 속에 있는 세례자 요한을 숨겨준 ‘기적의 바위’를 볼 수 있었다.

 

아치형으로 꾸며진 이층성당은 마리아의 영광을 찬미하는 주제로 꾸며졌다. 성당 중앙의 제대 벽에는 나자렛을 떠나 유다 광야를 걸어오시는 마리아가 천상 성인 성녀들과 세상의 모든 믿는 이들에게 둘러싸인 모습의 그림이 있어 순례자들의 눈과 마음을 잡아당긴다. 이 같은 마리아의 여정은 순례의 여정을 걷는 모든 믿는 이들의 표상이기도 하다. 실제로 아인카렘은 나자렛에서 100km나 떨어진 곳으로 버스로 2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2천 년 전에 열서너 살의 소녀였던 마리아가 걷기에는 사나흘은 넘게 걸리는 거리이다. 어린 소녀가 여행 중에 만나는 위험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용기는 당신의 마음에 충실하신 하느님의 돌보심을 믿는 신앙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기나긴 고난과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하느님의 ‘때’가 찼을 때 ‘네’라는 응답으로 세상에 새로운 희망과 구원을 가져오신 마리아, 성당 안은 교회 안에서 불리는 마리아의 호칭을 보여주는 멋진 그림들로 차 있었다. 로사리오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성모님의 도움으로 터키군을 물리친 레판토 해전), 은총의 중개자(예수님의 첫 기적을 일으키신 카나의 혼인잔치), 하느님의 어머니(마리아를 천주의 모친으로 선포한 431년의 에페소 공의회), 교회의 어머니이시며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이신 마리아, 그리고 그림 사이에 그려진 천사들의 모습도 너무 아름다웠다.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성당 정원의 벽에는 41개 나라의 말로 쓰인 마리아의 노래가 있는데 한국어판 마리아의 노래는 대구대교구 이문희 대주교님의 아버님이신 한솔 이효상 씨의 친필로 씌어져 있다.

 

온통 하얀 아몬드 꽃과 푸른 나무로 둘러싸인 골짜기와 그 너머에 있는 세례자 요한 기념성당의 탑과 지붕을 바라보며 마리아 엘리사벳 방문 기념성당 계단을 내려오면 ‘마리아의 샘’을 만난다. 그 옛날 성모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이 우물가에서 만났다는데 지금도 돌 틈으로 가느다랗게 물이 흐르고 있었다. 2천 년 전, 이스라엘이 구원을 기다리며 신음하고 있을 때 ‘네’라는 응답으로 이 세상에 하느님의 때가 올 수 있도록 협력하신 마리아와 그의 사촌 엘리사벳, 두 여인의 만남과 기쁨을 아직 잠들어 있는 세상은 알아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의 온전한 행복이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따르는데 있다는 것을 믿고 그 길을 간다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는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다. 마리아의 겸손한 순종이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준 것처럼 내 삶의 모든 것이 하느님께 드리는 ‘네’가 되길 빈다.

 

 

실로암 연못(Siloam Pool)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옛날 다윗의 도성이 있는 시온 산 지역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초막절 축제 동안에 태생소경의 눈을 치유해 준 장소인(요한 9,7-11) 실로암 연못으로 가는 길은 옛 다윗 도성이 있던 곳이어서 대대적인 발굴작업을 하고 있었다. 곳곳의 땅이 파헤쳐져 있어서 철제로 된 설치물과 널빤지를 밟고 지나야 했다.

 

실로암 연못은 솔로몬의 뒤를 이어 다윗의 도성을 이어받은 히즈키야 임금이 기원전 7세기경에 만들었다. 히즈키야는 수로와 도시 성벽을 확장 보수하여(2역대 32,1-23) 솔로몬 시대보다 3배 정도의 규모로 예루살렘 성을 확장하였지만 아시리아 제국 산헤립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성이 포위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성 밖에 있던 기혼 샘의 물을 다윗 도성의 바위 아래를 파서 만든 500여 미터 정도의 수로를 통해 성안에 위치한 실로암 연못으로 끌어들였다고 한다(2역대 32,30).

 

자그마한 이슬람 사원 옆에 있는 계단을 내려가니 커다란 대리석 토막이 잠겨 있는 작은 물길이 있었다. 예수님 시대 실로암 못은 아주 넓고 큰 못이었다는데 지금은 비잔틴 시대부터 있었다는 성당의 대리석 기둥들이 잠겨 있는 작은 개울이었다. 예수님은 이 못의 물로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고쳐주셨고(요한 9,1-12), 실로암 탑이 무너져 사람들이 죽은 사건을 말씀하시면서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셨다(루카 13,4-5). 실로암은 ‘파견된 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날 때부터 앞을 못 보던 사람이 실로암 연못에서 눈을 뜨게 되었다. 그는 또한 자신을 볼 수 있게 해주신 분을 전하기 위해 유다인들에게 파견되었다.

 

물은 철창문이 달린 컴컴한 히즈키야 터널을 통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2천 년도 훨씬 먼 옛적부터 흐르던 물은 지금도 깨끗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바위를 파서 만든 수로는 한 사람이 지나갈 만한 폭이었다. 물이 흐르는 바위 속 어둠을 따라가면 지금도 물이 솟는 기혼 샘에 이른다고 한다. 히브리어 ‘기혼’(gihah)은 ‘힘차게 분출하는’이라는 뜻으로 지금도 기혼 샘은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어둠을 지나는 물길을 따라가 샘에 이르면 소경이 눈을 뜬 기적을 몸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통곡의 벽(WESTERN WALL)

 

그 다음은 옛날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던 지성소가 자리했던 성전의 일부로 유다인들에게 아주 귀중한 성역이며 마음의 고향인 통곡의 벽을 보러 갔다. 일반적으로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벽은 원래 예루살렘 성전 서쪽에 있던 벽이다. 기원후 70년 로마인들에게 파괴된 예루살렘 제2성전 가운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유적지이자 마지막 유적지로 비잔틴 시대부터 지금까지 유다인들의 희망과 순례의 중심이 되고 있다. 19세기 말부터는 민족의 단결 및 구원의 상징적인 장소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물론 전 세계에 흩어진 유다인들이 이곳을 찾아와 기도를 드린다. 이 통곡의 벽이 유다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는 들어가는 입구에 검색대를 설치해 놓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한 사람씩 검문대를 통과해 커다란 광장으로 들어섰다.

 

이 광장터는 2천 년 전까지는 성전과 마을을 가르는 깊은 골짜기였다고 한다. 그곳에서는 이슬람이 팔레스티나는 정복했을 때 솔로몬의 성전 자리 위에 지은 ‘바위 돔 사원’ 혹은 ‘황금돔 사원’의 지붕이 바라다보였다. 이슬람 전승에 의하면 이곳에서 마호메트가 승천했다고 한다. 예루살렘 구시가지는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아르메니아 정교회, 유다인들의 중요 성지가 모여 있는 곳이기도 했다. 통곡의 벽 기도처는 남성 구역과 여성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여성들이 기도할 수 있는 벽은 남쪽 방향으로 가야 했는데 남성들의 기도처보다 삼분의 일 정도의 규모였다. 할머니부터 어린 학생들까지 수많은 여성들이 저마다 간절한 표정으로 벽을 향해 서서 성경을 읽거나 손을 합장하고 간절하게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 사이를 비집고 다가간 성벽 돌 틈에는 하느님께 바라는 기원을 적은 쪽지들이 빼곡하게 끼워져 있었다.

 

결혼식을 올리러 가는지 웨딩드레스 차림의 여성이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벽쪽으로 다가가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간절하게 기도를 올리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모두들 열심히 기도하였다. 오늘날 유다인들의 이기적인 민족주의가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있지만 이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끈질긴 신앙은 정말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다시 광장에서 만나 예루살렘의 북쪽 성문인 다마스쿠스 성문 안쪽으로 갔다. 그곳에는 70년경 예루살렘을 점령한 로마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길 ‘카르도’ 유적이 남아 있었다. 그 길이 끝나는 곳에 그려진 옛날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예수승천 기념경당(THE CHAPEL OF THE ASCENSION)

 

올리브 산 정상에 있는 예수승천 기념경당으로 갔다. 산 정상이라고 하지만 평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오래된 돌 벽에 있는 작은 아치형 문으로 들어갔다. 팔각형의 돌담 한가운데 둥근 돔을 인 오래된 석조건물이 있었다. 아무 장식이 없는 내부는 건조하고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원래 예수승천 기념경당은 팔각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은 없이 하늘을 향해 열린 모양이었는데 이슬람교도들이 성전으로 사용하면서 돔을 덧씌워 놓았다고 한다. 이곳이 ‘안식일에 걸어도 될 만한 거리에 있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올리브 산’(사도 1,1-12)인 예수님의 승천 장소였다. 옛날부터 예수님의 승천 장소로 알려진 올리브 산 정상에 경당이 세워진 것은 비잔틴 시대 때(387년)였다고 한다. 그 뒤로 많은 종교전쟁을 치르면서 경당의 소유는 여러 종파로 이전되었는데 현재는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은 그리스도교 신자들만은 아닌 것 같았다. 경당 안으로 들어서니 널찍한 공간 한가운데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실 때 남기셨다는 오른쪽 발자국이 찍힌 바윗돌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만진 바위는 반들반들하게 닳아 있었다. 그 바위를 바라보며 마음의 눈으로 예수님의 승천을 그려보았다.

 

 

주님의 기도 기념성당(THE CHURCH OF THE PATER NOSTER)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장소에서 남쪽으로 약 5분 정도, 거리로 치면 약 100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 주님의 기도 기념성당이 있었다. 이 성당은 예수무덤-부활 기념성당과 예수탄생 기념성당과 함께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헬레나 성녀가 지은 3대 동굴성당 중 하나이다. 성녀 헬레나는 326년에 이 성당을 지었다. 그 뒤로 예수승천 기념경당처럼 소유주가 여러 번 바뀌었고 마지막으로 이슬람교도들에게 넘어갔다. 1868년에 프랑스의 공주 오렐리아 드 보씨가 이 성전을 구입해 가르멜수녀회에 관리를 맡겼다고 한다.

 

널찍한 계단을 통하여 성당으로 올라갔다. 성당과 수녀원은 긴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백색의 단순한 아치형의 회랑(Chiostro del Pater)과 수녀원 담 벽에는 세계 각국의 언어로 된 주님의 기도문이 전시되어 있는데 부산교구에서 기증한 우리말로 된 주님의 기도문도 있었다. 회랑을 지나 지하 소성당으로 가면 4세기경의 성당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소박한 제단 옆으로 그 옛날 예수님이 혼자, 아니면 제자들과 함께 머무시던 동굴 터가 있었다. 그곳이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했을 때 주님의 기도문을 가르쳐 주신(마태 6,9-13; 루카 11,1-4) ‘어떤 곳’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자주 이곳에서 아버지께 기도하셨고 예루살렘의 멸망과 재림과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기도 하셨다(마태 24,1-3; 마르 13,1-2; 루카 21,5-6).

 

은은한 조명이 비치는 동굴을 바라보면서 마을과 떨어진 한적하고 낮은 산언덕인 이곳에 모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던 제자들의 행복한 시간을 상상했다. 아버지께 드리는 커다란 신뢰의 기도를 제자들이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많이 기쁘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덧붙여 당신 삶의 비법인 기도 방법도 제자들에게 전수하셨다. “끊임없이 간청하여라.” 아버지께만 모든 것을 바라는 가장 완전한 기도인 주님의 기도를 한마디씩 새기면서 그 옛날 제자들이 한 것처럼 단순한 마음을 주시길 청했다.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리는 가이드를 따라 올리브 산 중턱으로 갔다. 키드론 골짜기 너머로 현대적인 건물과 옛 건물이 어우러진 예루살렘의 모습이 펼쳐졌다.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돔 사원과 다윗의 도성이 보인다. 예루살렘을 대표할 만한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는 황금돔 사원은 이슬람교에서는 마호메트가 승천한 바위가 있는 곳이며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외아들을 바치려 했던 곳이다. 전 세계 그리스도교인 ‧ 유다인 · 이슬람교도들의 마음의 고향인 영원한 도성 예루살렘, 오른쪽으로는 어제 우리가 다녀온 예수성탄 기념성당이 바라다보였다. 우리가 서 있는 올리브 산과 키드론 골짜기 너머의 예루살렘 일대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생애의 마지막을 보내셨다고 생각하니 주변의 모든 것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황금사원의 문은 예루살렘 대성전으로 직접 통하는 골든게이트로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마르 11,1-11) 통과하신 문이라고 한다. 이 성문은 1530년 터키 군에 의해 폐쇄되었고,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감싸고 있는 성벽의 문들도 모두 막혀 있었다. 우리가 있는 곳 가까이에 유다인들의 공동묘지가 있었다. 유다인들은 올리브 동산을 ‘여호사밧’(하느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뜻) 언덕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유다인들은 마지막 심판 때 무덤에서 부활하여 키드론 계곡 너머에 있는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 모이기를 희망하며 예루살렘 성이 바라다보이는 이곳에 묻힌다고 한다. 마침 묘지에서는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었다. 겟세마니 동산 앞의 키드론 계곡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무덤이 있고, 예루살렘 대성전 옆의 성곽 앞에는 이슬람 신자들의 공동묘지가 있다. 예루살렘 대성전과 올리브 동산에 3대 종교의 공동묘지가 모여 있는 것이다. 영원한 부활의 희망을 지닌 모든 종교가 하느님 안에서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그날은 언제일까.

 

 

사도들의 동굴과 성모님 무덤성당

 

고뇌의 대성당 뒤편으로 성모님의 무덤동굴과 사도들의 동굴경당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성모님 무덤동굴 정문 옆으로 담을 따라가면 사도들의 동굴경당이 나온다. 사도들의 동굴경당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우시며 기도하실 때 제자들에게,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하는 동안 여기에 앉아 있어라.”(마태 26,36) 하신 장소로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곳’(루카 22,41)이기도 했다. 전승에 의하면 이곳은 예수님께서 쉬시고, 기도하시고 제자들과 대화하기 위해 자주 들르시던 장소라고 한다. 동굴은 야산의 추운 밤공기를 피할 수 있을 만큼 아늑했다.

 

동굴 안 제대 아래 양 옆에는 슬픔과 두려움에 싸여 잠에 빠진(루카 22,45) 제자들을 묘사한 청동상이 놓여 있었다. 예수님께 죽음의 위기가 다가오는 분위기를 제자들도 짐작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 묻기조차 두려워하면서 애써 위험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예수님과 함께 겪어야 할 고통을 직면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리라. 그래서 졸음으로 현실을 피하려던 게 아니었을까. 그런 제자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하여” 스승과 함께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서 예수님을 우선해야 할 때에도 핑계와 합리화로 무장하고 귀와 눈을 닫아버리는 내 모습을 보았다.

 

사도들의 동굴에서 나와 몇 걸음 떨어진 성모님 무덤동굴로 갔다. 그동안 성모님께서는 터키의 에페소에서 사도 요한과 함께 살다가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예루살렘 근처 올리브 산에 성모님의 무덤이 있다는 것은 의외였다. 이 장소는 성모님께서 겟세마니 동산 근처에서 돌아가셨다는 전승에 따라 2세기경에 지은 기념성당이라고 한다. 지금은 그리스 정교회와 아르메니아 정교회가 공동 관리하고 있다. 뾰족한 탑 꼭대기에 깃발이 펄럭이는 석조건물 정면에 있는 널찍한 계단은 성모님 무덤동굴 성당으로 이어진다. 무덤동굴은 정교회 특유의 수많은 등과 성모님의 영광과 업적을 기리는 이콘들로 꾸며져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콘은 단연 ‘티히빈의 성모’(The Tichvine Mother of God)다. 러시아 티히빈 지방의 전통적인 성모성화라고 하는데 머리를 약간 왼쪽으로 숙인 성모님은 아기 예수를 안고 다른 손으로는 아기 예수를 가리키고 있다. 아기 예수는 지구본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축복을 주고 계신다.

 

성모 마리아께서 영혼과 육신이 함께 승천하셨다는 교리에 따라 지하 오른쪽에 놓인 성모님의 무덤 자리는 빈 석관이 놓여 있었다. 이 지하 성당이 옛모습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1187년에 이곳을 점령했던 이슬람교도들이 성모님을 ‘예언자(예수)의 지극히 복된 어머니’로 공경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성모님 무덤동굴과 제자들의 동굴경당, 이 두 장소는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기 시작하던 초세기에 예루살렘에 살던 그리스도교인들의 마지막 신앙의 보루였다고 전해진다.

 

 

예수님 눈물성당(Dominus Flevit)

 

우리는 유다인 공동묘지 옆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내려갔다. 이름처럼 올리브 나무가 많은 올리브 동산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자주 제자들과 들르신 장소이며 주님 지상생활의 마지막 때인 수난시기의 추억이 가득한 산이기도 하다. 그곳에 있는 ‘예수님 눈물성당’을 찾아가는 중이다. 왼쪽으로 러시아 정교회 소속의 마리아 막달레나 수도원 담과 오른쪽으로는 겟세마니 동산 벽을 끼고 걸어가는데 나무 사이로 푸른 빛의 타원형 돔이 보였다. 곧 이어서 마당에 커다란 종려나무가 서 있는 작은 성당에 도착했다. 예수님이 흘리신 눈물 모양으로 지었다는 성당이다. 작은 경당은 검소하면서도 오래된 흔적이 배어났다. 경당 안 제대 뒤편에 있는 성배와 가시관의 문양 창살 너머로 예루살렘의 전경이 바라다보였다.

 

그 옛날 이곳이 올리브 산 중턱 야산으로 남아 있었을 때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예수님께서 건너편으로 보이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신 것을 묵상한다. 6세기경에 처음 세워진 성당은 사라지고 우리가 순례하는 지금의 성당은 1955년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1-4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루카 13,34) 진정한 구원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동족에 대한 연민과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 예수님 시대나 오늘의 세상이나 지나가는 세상 것들에 길들어 살며 진정한 평화와 선의 길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예수님이 나 때문에 눈물 흘리는 일이 없도록, 또한 나의 삶으로 세상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들 때문에 아파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로해 드릴 수 있기를….

 

 

겟세마니 동산과 고뇌의 대성당

 

예수님 눈물 기념경당에서 가까운 곳에 겟세마니 동산이 있었다. 겟세마니라는 지명은 올리브와 관련되는 ‘기름틀’, ‘착유기’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사실 겟세마니 동산은 올리브 동산이라고 불리기도 했을 만큼 이 장소는 옛날부터 올리브 나무가 많았고 그에 따른 가공업이 발달했을 것이다. 겟세마니 동산의 올리브 정원에는 약 2,000살이 넘은 올리브 나무 몇 그루가 보존되어 있었다. 이 나무들은 예수님의 생존 시대부터 있었던 나무들이거나 적어도 예수님의 수난을 지켜본 원뿌리에서 돋아난 새싹이라고 한다. 말이 2천 년이지 그 긴 세월을 살아온 이 올리브 나무들은 그 옛날 예수님의 시간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오래된 나무들은 죽은 것 같이 딱딱하고 주름이 늘어졌어도 새 잎이 나와 여전히 열매를 거두고 있었다. 마치도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불러일으킨 예수님의 메시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곳은 제자들이 머무는 곳으로부터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거리’(루카 22,41)로 사도들의 동굴과 가까운 거리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잠들었던 시간에도 예수님의 고통을 지켜본 올리브 고목들은 오늘도 이곳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예수님이 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시던 그날 밤의 정경을 느끼도록 이끌어 주고 있었다.

 

 

고뇌의 대성당(the Basilica of the Agony)

 

올리브 동산을 둘러본 다음 ‘여러 민족의 대성당’이며 고뇌의 성당인 겟세마니 대성당으로 들어갔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공포와 불안 속에서 고뇌하시며 온갖 정성을 다해 성부께 기도드리시던 곳(마르 14,32-42; 마태 26,36-46; 루카 22,39-46)이기에 ‘고뇌의 대성당’이라고 불린다. 성당 정문 입구에는 올리브 고목을 조각해 놓은 커다란 가리개가 순례자들을 압도했다. 성당 안은 컴컴했다. 지금까지 보아온 어떤 성당보다 어둡고 무거운 침묵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홀로 죽음의 공포 속에서 피땀을 홀리며 아버지께 기도드리던(루카 22,44)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었다. 중앙제대 뒷벽에는 올리브 나무 아래 바위에서 예수님 홀로 기도하시는 그림이 있고, 제대 앞으로는 그 옛날 예수님께서 엎드려 기도하셨음직한 커다란 바위가 가시덤불 형상의 울타리 안에 놓여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루카 22,44). 모두들 말을 잊은 채 그날 밤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했다.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를 아버지가 외면하셨을까? 아니, 하느님은 침묵하시면서 아들 예수의 고통에 함께하셨을 것이다. 작고 좁은 인간의 마음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인 아드님 안에서 고통은 구원의 신비가 되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음의 길을 가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누군가에게서 위로받으셔야 할 순간에 홀로 내쳐짐을 당하신 예수님(마태 26,39; 마르 14,35; 루카 22,41)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부터 그분은 이미 죽음의 고통으로 들어가셨을 것이다. 한낱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나를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신 예수님, 늘 당신을 따른다면서도 다른 곳을 바라보는 나를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신 예수님, 나는 그분의 표현하기 힘든 어리석기조차 한 사랑 앞에서 말을 잃는다.

 

겟세마니 대성당에서 나와 길 건너편에서 바라본 대성당의 정면 또한 장엄하고 상징적인 그림으로 꾸며져 있었다. 가운데 십자가 아래로 그리스어의 알파와 오메가가 쓰인 판을 들고 계신 성부가 계시고 그 아래편으로 세상의 죄악을 고통으로 승화시켜 봉헌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있다. 양편으로는 예수님이 가시는 고난의 길에 동참하는 여인들과 제자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세상의 믿는 이들을 대변한다. 거대한 성전을 받치고 있는 네 개의 기둥 꼭대기에는 네 복음사가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 385년쯤에 지은 원래의 성당은 전쟁과 대지진으로 파괴되었고, 지금의 성전은 작은형제회에서 1924년에 지은 것인데 예루살렘에 있는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로 손꼽힌다고 한다. 겟세마니 대성당이 ‘고뇌의 대성당’이라는 이름 외에 ‘여러 민족의 성전’(the Church of All Nations)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 성당이 세계 16개 그리스도교 국가 신자들의 현금으로 지어진 성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키드론 골짜기를 지나 기혼 샘으로

 

우리는 겟세마니 대성당에서 나와 길가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잠시 쉬면서 겟세마니 동산과 겟세마니 대성당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더니 키드론 골짜기 너머로 예루살렘 성벽이 보였다. 옛날엔 험한 계곡이었고, 우리나라로 치면 ‘시구문 밖’쯤 되어 성에서 나오는 온갖 더러운 것들을 처리하는 곳이었던 키드론 골짜기는 많은 나무와 푸른 풀이 자라는 아름다운 공원이 되었다. 우리는 기혼 샘으로 가기 위해 키드론 계곡으로 내려갔다. 걷는 것이 힘든 자매는 차를 타고 다른 길을 통해 기혼 샘까지 가기로 했다. 몇 명의 자매와 함께 가이드를 따라 걷는 계곡은 건기라서 물이 흐르지 않는 넓고 평평한 산책길 같았다. 예루살렘 성벽을 배경으로 언덕에 심어진 올리브 나무와 풀꽃들이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였다.

 

키드론 계곡과 게헨나 힌놈 계곡은 구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두 개의 계곡이다. 그중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동쪽에 있는 이 키드론 계곡은 유다인들에게는 장차 도래할 메시아의 재림을 기다리는 구원의 상징이라고 한다. 맞은편에서 아랍인 남자가 어린 소년과 함께 양 떼를 몰고 오고 있었다. 그 모습은 사진에서 본 옛날 유목민을 연상시켰다. 우리는 신기해하면서 양 떼가 우리 앞을 지날 때까지 바라보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오른편으로 삼각형의 돌 지붕을 이고 있는 바위가 보였다. 다윗 왕의 아들 압살롬의 묘라고 했다. 잘난 외모와 재능을 지녔던 압살롬, 그는 자신의 그릇에 넘치는 교만으로 아버지 다윗 왕의 속을 무던히도 썩혔다. 하느님을 잊고 아버지를 배척하며 세상의 왕권과 영화를 탐하던 왕자 압살롬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목숨을 잃었다. 압살롬의 묘 옆으로 예언자 즈카르야의 묘가 있었다. 도굴꾼들의 짓인지 묘지 윗부분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을 제의하면 무덤은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높은 곳의 바위를 뚫어 문을 만든 것과 돌계단들이 눈에 띄었는데 그것들은 구약시대 사제가문 무덤의 흔적이라고 한다. 골짜기로 올라갈수록 험상궂은 바위들이 보였다. 몇 차례의 지진과 자연재해를 거친 커다란 바위들과 계곡의 흔적은 그 옛날 이곳이 외지고 경외심을 일으키는 계곡이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우리는 계곡을 벗어나 차도로 올라가서 차를 타고 온 자매들과 합쳤다. 구약시대의 히즈키야 왕은 다윗 성 밖에 있는 기혼 샘의 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바위를 파서 수로를 만들었다. 발굴을 위해 파헤쳐진 곳 근처의 오래된 건물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입구에 기혼 샘 표지판이 있었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기혼 샘은 에덴 정원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창세 2,13)의 하나이다. 척박한 토지에 마르지 않는 기혼 샘의 물을 하느님이 보내주시는 생명의 물로 받아들인 이스라엘인들의 오랜 신앙이 살아 있는 곳이었다. 계단 아래로 보이는 닫힌 철창문 안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기혼 샘 주변을 돌아본 우리는 어제 가기로 했다가 미루어둔 시온 산 성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닭울음 성당(베드로 회개 기념성당)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시온 산은 ‘모든 거룩한 장소들의 요약’(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인 예루살렘의 중심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성지이다. 다윗의 도성의 다른 명칭인 시온은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유다고, 이슬람교도들에게도 중요한 성지로 ‘거룩한 시온’(하기아 시온)이라고 불린다. 시온 산에 있는 그리스도교 성지는 갈리칸투(닭울음 성당 – 베드로 회개 기념성당), 최후의 만찬 기념성당 그리고 마리아 영면 기념성당이다.

 

우리는 먼저 베드로 회개 기념성당(Church of St. Peter in Gallicantu)을 찾아갔다. 차에서 내려 걷는 동안 성당 꼭대기에 있는 베드로의 회개를 상징하는 닭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닭울음 성당이라고도 부르는 베드로 회개 기념성당은 예수님을 심문했던 대사제인 카야파의 집터로 알려진 곳에 지은 건물이다. 예수님은 겟세마니에서 이곳까지 끌려와 지하 감옥에서 하룻밤을 지내시고 첫 번째 심문을 받으셨다. 우리는 먼저 닭울음 성당 옆 전망대에 올라가 시온 산 남동쪽에 있는 키드론 계곡과 게헨나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계곡 건너편으로 촘촘하게 들어선 집들과 우리가 다녀온 예수님 눈물성당, 겟세마니 동산이 보였다. 오른편으로는 예루살렘 성벽이 있었다. 그 아래로 보이는 건물은 ‘하켈드마’, ‘피밭’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이었다. 그곳은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받은 돈으로 산 밭터라고 한다. 유다는 그곳에서 거꾸로 떨어져 배가 터지고 내장이 모조리 쏟아져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사도 1,18-19).

 

팔각형 지붕 아래로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후 그리스도교 기념성당이 있었던 비잔틴 시대의 예루살렘 모형도가 있었다. 지금은 이슬람교도들의 성전이 된 실로암 연못 위에 있었던 성당, 골고타와 예수님 무덤 위에 지었던 예수님 무덤성당(부활성당), 그리고 베짜다 연못터에 있던 기념성당 등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에 예루살렘 성지에 세운 기념성당터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중요 건물들과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움직이신 거리와 장소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대사제 카야파의 집터와 안토니오 요새 등.

 

비잔틴 시대 때 처음으로 이곳에 베드로 회개 기념성당이 세워졌다. 그 후 12세기에 새로 교회가 지어지면서 ‘닭울음 성당’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성당 외벽에는 예수님을 줄에 묶어 감옥으로 내려 보내는 그림이 모자이크로 그려져 있다. 성당 앞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는 입구에는 ‘고난 받는 주님의 종’ 조각상이 놓여 있다. 손을 묶인 채 고통스런 표정을 한 주님의 종의 시선은 하늘을 향하고 있다. 마치도 아버지를 찾는 예수님의 부르짖음이 들릴 것 같다. 성당 안 중앙제대 벽에 그려진 모자이크화는 최고 의회에서 예수님이 심문 받으시는 장면으로 이 성당의 주제를 설명해 준다.

 

제대와 신자석 사이에 둥근 구멍이 나 있었다. 이곳으로 예수님을 밧줄에 묶어 지하 물 저장소였던 구덩이로 내려 보냈다고 한다. 성당 앞에 있는 나선형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니 예수님 시대의 주거지역인 동굴과 물 저장시설, 감옥이 나타났다. 이 지하 동굴 감옥에 예수님이 카야파에게 재판을 받으러 가기 전에 갇혀 계셨던 것이다. 감옥에는 죄인들을 묶어 놓았던 돌기둥이 서 있었다. 이곳을 거쳐 간 이들에게 위로를 건네기라도 하듯 누군가 꽃 한 송이를 갖다놓았다. 그 작은 꽃은 삭막한 지하 감옥에 한줄기 바람 같은 위로를 전하고 있었다.

 

성당 밖 계단 옆으로 베드로와 대사제의 집 하녀의 모습을 새긴 조각상이 있다. 병사 옆에 서 있는 하녀의 거듭되는 질문에 당황한 베드로가 점진적으로 더욱 더 강하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잡아떼는 모습이 실감나 보였다. 자매들은 그 조각상을 보면서 저마다 생각에 잠겼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그러자 베드로가 더욱 힘주어 장담하였다.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결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마르 14,30-31)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신 주님을 고백하면서도 하찮은 이기심으로 쉽게 그 믿음을 저버리는 불쌍한 나. 주님의 자비 없이 어떻게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있을까. 훗날 부활하신 예수님은 세 번이나 거듭된 베드로의 부인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세 번의 질문으로 되돌려주었다. 베드로와 하녀의 조각상 뒤편으로 윗도시인 예루살렘과 아랫도시인 키드론 계곡으로 이어지는 로마시대의 돌계단이 남아 있었다.

 

예수님은 성목요일에 시온 산에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시고 이 길을 통해 겟세마니로 기도하러 가셨다. 그리고 기도하시다가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에게 체포되어 다시 이 길을 통해 카야파의 집으로 끌려가셨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안에 위치했던 이 돌계단은 겟세마니 동산과 예루살렘을 잇는 가장 가까운 길이었다는데 계단 옆으로는 당시의 주거지터가 남아 있었다. 지금은 돌계단으로 바뀌었지만 2천 년 전 그 밤에 예수님의 행적을 기억하고 있을 이 길, 숱한 적대자들에게 둘러싸여 죄인이 되어 걸었던 예수님의 발걸음을 받아안은 길, 사랑 때문에 죽음을 향해 가신 예수님의 행적을 전해주고 있었다. 하나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진리를….

 

 

최후의 만찬 기념성당, 다윗의 무덤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시작된 최후의 만찬 기념성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행하시고, 예수님의 승천 후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강림을 체험한 거룩한 장소, 그때부터 이곳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최후의 만찬 기념성당은 또 그리스도교 최초의 공의회인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린 곳(사도 15,1-35)이기도 하다. 원래는 십자군 시대 때 지은 건물이지만 예루살렘의 다른 성지들처럼 수많은 종교전쟁으로 주인이 몇 차례 바뀌어 지금은 유다교의 소유가 되어 있다. 순례자들에게는 건물의 일부분만 볼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었다.

 

우리는 돌로 지은 오래된 이층 건물로 올라갔다. 우리가 들어선 곳이 바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지막 만찬을 한 ‘큰 이층 방’(루카 22,12)이었다. 아치식 돌기둥이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넓은 장소는 비어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세상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하시면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요한 13장), 당신 자신을 내어주는 성체성사를 세우신 것이다. 빈 방에 2천 년 전 예수님의 흔적을 기억할 만한 것은 없었다. 이 성당을 점령한 이슬람교와 유다교에 의해 그리스도교의 흔적은 모두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치식 기둥 중간쯤에 전설의 새 펠리컨의 조각이 남아 있었다. 자신의 몸을 쪼아 낸 피로 자식을 살린다는 전설의 새 펠리컨은 자신을 희생하여 세상을 구한 예수님의 상징적 이미지로 이 성당 안에 남은 유일한 그리스도교 상징이었다.

 

정사각형의 넓은 빈 방에서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보여주는 최후의 만찬 모습을 그려보았다. 세상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나누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모습,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도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을 걱정하신 예수님, 나는 언제나 예수님의 그 지극한 사랑과 섬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지. 방 안쪽에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는데 그곳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곳이 바로 예수님께서 부활 ‧ 승천하신 후 성모님과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다가 성령을 받은 장소라고 한다(사도 1,12-14). 오늘날 그리스도교 순례자들은 작은형제회에서 원래의 기념성당터 바로 옆에 지은 최후만찬 기념성당과 수도원에서 최후의 만찬미사와 성령강림 미사를 봉헌한다.

 

1층으로 내려와 ‘다윗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갔다.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 설교에서 “나는 다윗 조상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죽어 묻혔고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우리 가운데에 남아 있습니다.”(사도 2,29)라고 했다. 그때부터 최후의 만찬 경당이 있는 시온 산에 다윗의 무덤이 위치하고 있다는 전승이 생겨났다고 한다. 역사적이나 고고학적인 근거는 없지만 다윗을 위대한 인물로 공경하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유다인들에게는 통곡의 벽 다음으로 중요한 성지라고 했다. 다윗의 무덤도 남녀의 출입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었다. 여성이 들어가는 문 위편으로 율법을 담은 메주자가 달려 있었다. 물론 남자들이 출입하는 문 위에도 달려 있을 것이다. 안으로 들어갔더니 정면에 김은 벨벳 천으로 싸인 큰 관의 일부가 놓여 있었다. 관의 나머지는 무거운 휘장으로 가려진 반대편에 있는 남성들의 예배장소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다윗의 관 가운데에 휘장을 쳐 남성들과 여성들의 기도장소를 나누어 놓은 것이다. 실내의 규모는 남성들의 예배장소가 여성들이 들어가는 곳보다 3분의 2쯤 더 넓다고 한다. 마침 다윗의 무덤 안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휘장을 살짝 들치고 반대편 예배소를 들여다보았다. 검은 모자를 쓰고 흰 수염을 기른 유다인들 몇이 의자에 앉아 성경을 읽거나 다윗의 관을 만지며 기도를 하고 있었다. 검은 의상과 귀밑으로 곱슬머리를 늘어뜨리고 검은 모자를 쓴 남성들의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이색적이고 신기하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 영면 기념성당(Dormitio Beatae Mariae Virginis)

 

시온 산에 있는 또 하나의 그리스도교 성지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 성모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다가 지상 생애를 마치고 하늘에 오르셨음을 기념하는 성전이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 영면 기념성당은 작은형제회의 최후의 만찬 기념수도원 옆 성 베네딕토수도원 안에 있었다. 성모님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 시온 산에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십자군 시대 때 지은 성모영면 기념성당은 12세기에 이슬람 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지금의 기념성당은 독일의 베네딕토수도회에서 1910년에 지은 것이다.

 

기념성당은 1층의 대성당과 지하성당으로 되어 있다. 우리는 지하성당으로 들어갔다. 차분하고 낮은 빛이 감도는 성당 중간에 여섯 개의 기둥 가운데 임종하신 성모님의 모습을 재현한 석상이 놓여 있었다. 사람의 실물보다 조금 크게 만들어진 성모님상에서 남성다운 위엄이 느껴졌다. 성모님상을 모신 곳 천장 가운데로 어머니 마리아를 하늘에서 맞아들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 주변은 구원역사에 참여한 구약의 여인들인 하와 ‧ 유딧 · 에스테르 · 룻 · 미리암 등이 그려져 있었다. 이곳에 온 순례자들은 먼저 성모님께 초를 봉헌하고 기도를 드린 다음 성당 안을 돌러보아야 한다. 성모님 곁에 할아버지 한 분이 계시는데 그분은 기도를 하기 전에 성당을 둘러보거나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 순례자들을 혼내시기 때문이다. 기념성당 벽에는 여러 나라에서 봉헌한 성모님 성화가 있었다. 그리고 성당 오른편과 왼편으로는 성모님 기념성당과 관련된 성인과 왕족들에게 바쳐진 작지만 아름다운 경당들이 있다. 성모님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마음과 몸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 제자들을 모으고 예수님이 남기신 가르침을 되새기며 기도하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 예수님의 구원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성모님의 업적을 기억하기 위해 신자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태동한 시온 산 성지에 성모님의 영면 기념성당을 마련했을 것이다. 대성당의 높은 돔과 이층 창은 하느님의 어머니를 기념하는 성소피아 대성당과 같은 구조로 지어졌다고 한다. 성당을 지은 이의 정성이 느껴지는 우아하고 화려한 성당 내부에는 제대를 중심으로 구약의 예언자들, 베네딕토수도회와 관련된 성인들과 왕족들의 기념경당이 있었다.

 

성모님이 진정 복된 분인 것은 예수님 곁에서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루카 11,28)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둘러본 성모님의 성지는 신앙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최대의 아름다움으로 꾸며져 있었다. 하지만 기념성당의 외적인 아름다움만을 보고 간다면 성모님이 받으시는 찬미와 영광의 바탕이 되는 죽음의 고통을 지나칠 수도 있을 것 같다. 성모님이 받으시는 영광은 아들 예수님이 인류를 위해 걸으신 십자가의 길과 죽음을 함께 받아들이셨고 그 고통을 믿음 안에서 승화시키셨기 때문임을 기억하는 은총을 빌어본다.

 

 

성 안나 기념성당(THE CHURCH OF ST. ANNE)

 

시온 산에 있는 성지를 둘러본 우리는 스테파노 성문(사자 문)을 통하여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안의 좁은 길 양편으로는 고만고만한 기념품 가게들이 이어졌다. 좁은 시장터 같은 거리는 여러 나라에서 온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로 가득했다. 복잡한 거리를 두리번거리면서 일행의 뒤를 따라가기 바쁜데 갑자기 자매들이 시장거리의 혼잡함을 뒤로 하고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문 안으로 들어섰다. 잎사귀가 무성한 열대 식물들과 나무 사이로 단아한 석조건물이 보였다. 이곳은 아프리카 선교사목을 하는 파드레 비안키(Padre Bianchi) 수도회라고 했다. 우리는 정원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성모님의 어머니 성 안나께 봉헌된 성당이 있었다. 투박할 정도로 단순한 성당은 회색빛 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환하고 밝은 곳에 있다가 성당 안으로 들어갔더니 거의 주변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점차로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아담하고 천장이 높은 성당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장식이 극히 절제된 초세기 풍의 건축양식으로 단순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이 성당은 요아킴과 안나가 마리아를 낳은 집터인 지하 동굴 위에 세워진 성당이라고 한다. 천정이 높은 중앙제대 뒤로 예수님의 유년기 전하는 마태오와 루카복음 성경의 이미지가 그려져 있었다.

 

바오로딸 수녀들이 부른 노래를 좋아한다는 가이드가 우리를 제대 앞으로 데려가더니 성가를 불러주기를 청했다. 우리가 부르는 성가는 성당을 가득 채웠다. 노래를 그다지 잘하지 못해 평소에 ‘음가대’라 자칭하는 나는 곁에 선 자매의 아름다운 음성이 내 소리인 양 착각하며 소리 높여 성가를 불렀다. 합창을 마치고 성가대 솔리스타인 크리스티나 수녀가 몇 곡의 노래를 더 불렀다. 조용하게 신자석에 앉아 있던 외국인 순례자들이 우리의 노래가 끝나자 화답하듯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부를 때는 몰랐는데 남녀혼성의 화음이 수준 이상인 그들의 찬양은 높은 천장을 돌아 내려오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그들이 성가를 끝냈을 때 우리는 그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조용히 성당을 빠져 나왔다. 처음 보는 외국인들과 예수님 안에 한 가족으로 주님의 묘하신 일을 찬미할 수 있었던 것이 마음에 남는다.

 

성당 우측 중간에 있는 계단을 내려가면 지하 경당이 나온다. 성모님의 부모인 성녀 안나와 요아킴 성인이 살았던 동굴에 지은 기념경당이다. 동굴 옆 중앙제대는 아기 마리아에게 봉헌된 것이다. 성 안나 성당은 11세기 십자군 시대의 대표적인 건물로 비잔틴 건축양식이 잘 보존된 유일한 성전으로 특히 고딕식 둥근 지붕의 아름다움이 유명하다고 한다. 음치가 노래를 해도 천상의 소리로 들릴 정도로 완벽한 내부 공간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성 안나 성당이 지금까지 이렇게 옛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슬람의 살라딘 장군이 건물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파괴하지 않고 보존하면서 이슬람교 신학교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성전 출입문 위쪽에는 아랍어로 쓰인 신학교 현판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우리가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축일로 지내는 9월 8일이 바로 성 안나 성당의 축복일이라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벳자타 연못

 

성 안나 성당에서 나와 정원 안쪽으로 들어갔더니 오래된 연못터가 있었다. 이곳이 바로 에수님께서 서른여덟 해 동안 누워 있던 병자를 치유하신 기적(요한 5,1-9)을 베푸신 벳자타 연못터였다. 원래의 벳자타 못터는 땅 밑에 있었다고 한다. 그럴 것이 원래는 빗물을 받는 저수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저수지의 규모가 점점 커져서 위, 아래 저수지로 나뉘게 되었다고 한다. 연못은 네 개의 주랑이 모서리에 있고 다섯 번째 주랑이 연못을 둘로 나눈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이 연못에 다섯 개의 주랑이 있다고 한 요한복음서의 말을 확인해 주었다. 이 연못 중의 하나는 성전의 제물로 바칠 양을 씻는 곳이었기 때문에 ‘양의 우물’이라고도 불리었다.

 

옛날 십자군들은 이 벳자타 연못 위에 예수님의 기적을 기억하는 작은 경당과 기념성당, 그리고 거대한 수도원을 지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아마도 여러 시대 유적들의 복합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고풍스런 기둥과 돌의 모형을 보면 벳자타 못은 멋지고 큰 연못이었을 것 같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 벳자타 못 가에 있던 눈먼 이, 다리 저는 이, 팔다리가 비틀어진 이 같은 많은 병자들 중에서 서른여덟 해 동안 누워 지낸 병자가 예수님께 치유를 받았다. 예수님은 그의 무기력함 안에서 치유받고자 하는 열망이 살아 있는 것을 보셨던 것이다. 나는 이 복음을 읽을 때마다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영적 게으름과 좋지 않은 습성을 떨치지 못하는 약한 의지를 지닌 내 모습을 보곤 했다. 그러면서 주님의 은총만이 나를 변화시켜 주심을 깨닫고 주님께 의지하며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이끼가 끼고 오래된 건물의 흔적을 내려다보니 그 옛날 넓은 주랑에 앉아 물에 몸을 담그려는 많은 병자들과 가족들이 모여 있던 광경이 그려졌다. 커다란 주랑이 이어지던 이 연못은 현대식으로 하면 자선병원의 대기실 같은 풍경이 아니었을까. 2천 년 전 사람을 고치는 의사 예수님은 마음을 고쳐 병자를 낫게 하시는 것이 오늘의 의사와 달랐던 것이다.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들도 메마른 세상에서 상처받고 소외 받는 이들을 어루만져 마음을 치유해 주는 영적 의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연못 유적지 아래로 내려가면 아직도 물이 고여 있고 예수님께서 서른여덟 해 동안 누워 있던 병자를 치유하신 주랑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다음번 순례지로 이동해야 하는 관계로 아래까지 내려갈 시간이 없어 세월이 만들어 낸 돌벽의 운치와 이끼 낀 주랑의 흔적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십자가의 길(Via dolorosa)

 

다음의 순례지는 예수님 구원사업의 정점으로 가는 십자가의 길이었다. 초세기에는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고 체포되신 겟세마니 동산에서 키드론 계곡을 지나 대사제 카야파의 집을 거쳐 골고타 언덕까지 걸으며 십자가의 길 기도를 드렸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지리적이고 정치적인 제약을 받게 되어 많은 변화가 있었다. 오늘날 순례자들이 걷는 십자가의 길은 16세기경에 확정된 것으로 빌라도 총독 관저가 있던 아랍인 초등학교 마당에서 예수님 무덤성당까지 약 1.5km 정도의 거리이다. 비탄의 길, 슬픔의 길(Via dolorosa)로도 불리는 십자가의 길은 좁은 아랍인 시장 골목을 지나 무덤성당으로 이어진다.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기 위해 빌라도 총독 관저가 있던 아랍인 초등학교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 30분이었다.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시작하는 시간은 우연인지 계획된 것이었는지 마침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시간과 맞춤하게 된 것이다. 운동장 계단에서 우리를 바라보던 한 청년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십자가의 길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어떤 대가를 요구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냥 십자가의 길 기도를 시작하기로 했다.

 

제1처 :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시다

 

이곳은 예수님이 사형 선고를 받으신 빌라도 법정이 있던 자리로 안토니오 요새의 남쪽 부분인데 대성전 뜰에 붙어 있었다(요한 19,4-16). 네모나게 깎은 돌들을 세워 박아놓고 포장한 마당이 예수께서 재판받기 위해 서 계셨던 장소라고 한다.

 

제2처 :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다

 

아랍인 학교 맞은편에는 채찍질 교회라는 이름의 작은 성당이 있었다. 이곳은 예수님 당시 안토니오 요새의 북쪽 부분으로 동쪽에서부터 채찍성당, 사형선고성당, 에체호모 시온수녀회와 왕의 놀이 장소가 함께 있다. ‘왕의 놀이’(The King’s Play)라고 불리는 곳은 로마 군인들이 모여서 쉬고 놀던 곳으로 돌바닥에는 우리나라의 사방치기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로마 군인들에게 조롱을 받고, 매를 맞으셨다. 그래서 빌라도는 바라빠를 풀어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마태 27,26).

 

우리는 예수님의 매 맞으심을 묵상하고 다음 처로 향했다. 채찍성당에서 이어진 회랑을 조금 걷다보면 왼쪽에 사형선고성당이 있는데 이곳에 있는 ‘리토스트로토스’(돌 깔아 놓은 자리)라고 불리는 곳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향하여 걷기 시작하셨다. 채찍성당 옆으로는 작은형제회가 운영하는 성서대학이 있다고 한다.

 

제3처 : 예수님께서 첫 번째 쓰러지시다

 

3처부터는 본격적으로 아랍인의 시장터로 들어섰다. 세계 각처에서 온 사람들이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며 지나는 길은 폭이 2미터쯤 되는 작은 골목길이다. 길 양편으로 이어지는 작은 기념품 가게들은 우리나라 재래시장과 비슷했다. 아르메니안 가톨릭 소유의 작은 경당 제대에는 십자가를 지고 쓰러지신 예수님의 모습이 있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미 숱한 매질과 모욕으로 지치셨다.

 

제4처 :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만나시다

 

이곳에서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한쪽은 통곡의 벽 쪽으로 가는 길이며, 오른편의 길가로 난 문 위에 예수님과 성모님이 만나는 장면의 조각이 골고타 언덕으로 가는 길을 알려준다.

 

제5처 :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지다

 

1895년에 지은 작은형제회 소속의 작은 경당을 밖에서 경배하고 지나쳤다. 점점 언덕으로 올라가는지 길은 낮은 계단으로 바뀌었다.

 

제6처 : 베로니카,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리다

 

이곳에는 예수의작은자매회에서 운영하는 이콘 판매점과 경당이 있었다. 오늘은 순례자들이 많지 않아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는 일행은 우리뿐이었다.

 

제7처 : 예수님께서 두 번째 쓰러지시다

 

이곳에는 작은형제회가 관리하는 조그만 경당이 있었다.

 

제8처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시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뒤를 따르며 슬피 울던 여인들에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셨다. 죽음의 길을 가시면서도 자신보다 다른 이의 선을 생각하는 이 무한한 사랑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제9처 : 예수님께서 세 번째 쓰러지시다

 

무덤성당의 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골고타 언덕이 가까운 것 같다. 이곳에는 콥트 교회가 있었다. 콥트 교회를 지나 고풍스런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뜰 안에 제10처의 표지가 서 있었다.

 

제10처 : 예수님께서 옷 벗김 당하시다

 

우리는 좁은 통로를 올라가 골고타 언덕의 정상인 예수님 무덤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골고타는 예수님 당시 사용하던 아람어로 ‘해골산’이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죄인들 앞에서 당신의 몸을 드러내야 하는 치욕까지 당하셨다. 십자가의 길 10처에서 13처까지는 골고타 언덕에 한데 모여 있다. 이곳에서는 십자가의 길 기도문을 따라 하기보다 침묵 속에서 예수님의 수난을 생각하며 움직였다.

 

제11처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

 

눈물에 젖은 얼굴로 창에 찔린 가슴을 움켜진 아름다운 성모님의 모습을 보니 시메온의 예언이 떠올랐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5)

 

제12처 :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채 숨을 거두신 양편으로 성모님과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한 사람씩 제대 아래로 보이는 골고타 언덕의 바위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원, 나의 구원을 이루신 거룩한 십자가가 서 있던 이곳, 해골산의 거친 바위도 예수님으로 인해 거룩해진 것이다.

 

제13처 : 제자들이 예수님 십자가에서 내리다

 

숨을 거두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 누이신 바위(루카 23,53). 우리는 거룩한 예수님의 몸을 받아안은 돌에 손을 대고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기억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 있던 자리 옆으로 예수님이 홀리신 피로 부활한 첫사람인 ‘아담의 경당’이 있었다. 인류의 첫 창조물인 아담은 또한 새로운 구원의 은총을 받은 첫사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무덤성당(예수부활 기념성당)

 

돌아가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 모신 바위를 지나 십자가의 길 14처로 갔다. 그곳은 예수님 무덤이었다. 우리는 예수님의 무덤에 들어가기를 기다리는 순례자들 뒤에 줄을 서서 이곳저곳 성당 안을 둘러보았다. 침침하고 거대한 성당 내부 이곳저곳으로 길이 나 있었다. 수도복이 다른 여러 수도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날 무덤성당은 복잡한 역사와 종교의 문제로 로마 가톨릭과 아르메니아 정교회, 그리스 정교회를 비롯하여 콥트 교회, 시리아 정교회, 에티오피아 교회 등 모두 여섯 종파가 분할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혼란스런 오늘의 세상과 갈라진 그리스도교의 현실을 상징하는 단편적인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분열되고 어지러운 세상을 처음 창조하시던 때처럼 하나로 모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뜻밖에 정동 작은형제회에 계시던 수사 신부님을 만났다. 테오필로 수사님은 종신서원을 하시고 예수님이 사시던 땅에서 살고 싶어서 성지 관구로 옮겼다고 한다. 그분은 영적으로나 실제적으로 한국에서 오는 순례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계셨다. 무덤성당 안에는 작은형제회 수사님들의 공동체가 있다고 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 성녀가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왔었던 324년경 이곳에는 주피터와 비너스 신전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헬레나 성녀는 아들인 로마 황제의 도움으로 326년에 이교도의 신전을 헐고 이곳에 있던 예수님의 무덤을 발굴한 다음 기념성당을 세웠다. 로마를 그리스도교화시킨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구세주의 구원사업이 완성된 거룩한 이곳을 지구의 중심으로 선포했다.

 

예수님께서 묻히신 곳은 골고타 근처에 있는 새 무덤(요한 19,41-42)으로 원 무덤 주인은 당시 유다 최고의회의 의원인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었다(마르 15,43; 루카 23,50). 그는 예수님을 몰래 따르던 자(마태 27,57; 요한 29,38)라고 전해진다. 그는 동료 니코데모와 함께(요한 19,39) 예수님의 시신을 자신의 무덤에 모셨다(마태 27,58-60; 마르 15,46; 요한 19,38-40). 예수님의 무덤 입구는 정교회 특유의 화려한 등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입구 양편으로 세 개씩 커다란 촛대가 서 있었는데 그 촛대는 예수님의 무덤을 공동 관리하는 교파들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 정교회 수사가 지키고 있는 예수님의 무덤 입구는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야 했다. 첫 번째 방은 비어 있었는데 그곳을 ‘천사들의 경당’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천사들의 경당’ 안쪽으로 방이 하나 더 있었다. 그곳에 예수님의 시신을 모셨던 빈 돌관이 있었다. 요한과 베드로가 천사를 만난 곳은 무덤의 첫 번째 방인 천사들의 경당이고 그 안쪽에 예수님의 시신이 모셔져 있었던 것이다. 비록 상징적인 빈 무덤이기는 하지만 이곳까지 십자가의 길을 걸으면서 예수님의 큰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모두들 예수님이 계셨던 빈 무덤 돌을 쓰다듬으며 그분이 겪으신 고난을 기억하고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드렸다.

 

우리는 예수님의 무덤 동굴 옆에 있는 발현경당에서 부활 대축일 미사를 봉헌했다. 2천 년 전에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이루신 구원의 장소에서 그 구원을 오늘 우리 안에 되살리는 미사를 드리는 것이다. 테오필로 수사님과 김영남 신부님께서 미사를 집전해 주셨다. 발현경당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 사흘째 되는 날, 시신에 향유를 발라드리러 갔던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 무덤을 보고 놀랍고 슬픈 마음에 주님을 찾아 헤매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는 요한복음 20장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는 아담한 경당이다. 제대 오른편에는 예수님께서 묶여서 매를 맞았다는 쇠기둥이 서 있었다. 작은 성당에서 드리는 미사에는 우리 일행 외에 서너 명의 외국인이 함께했다. 그들의 경건함에서 주님에 대한 깊은 신뢰가 느껴졌다.

 

미사를 봉헌하고 난 우리는 성채같이 거대한 성당을 나와 아랍인 상가로 들어섰다. 날이 저문 시간이라서 좁은 시장 길에는 여행자들보다는 현지인들이 많았다. 빵 굽는 냄새, 생선, 야채가게, 과일가게들이 늘어선 좁은 시장에서 가난한 아랍인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터널 같은 시장을 벗어나 어두워진 성 밖으로 나왔다. 우리가 나온 다마스쿠스 성문에 조명등이 켜졌다. 이스라엘에서의 순례가 끝났다는 아쉬운 마음과 함께 피곤이 몰려왔다. 시간은 오후 여섯 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회지 하나되어 39호(2013년, 성바오로딸수도회 시청각통신성서교육원 발행), 김 가브리엘라 수녀(졸업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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