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5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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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성당 이야기38: 지방분권에서 중앙집권 체제로 - 고딕 탄생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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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0-25 ㅣ No.757

[성당 이야기] (38) 지방분권에서 중앙집권 체제로


고딕 탄생의 배경

 

 

지난 회에 로마네스크 건축과 고딕 건축의 ‘연속과 구별’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는 고딕 양식이 로마네스크 양식이 걸어온 길에서 출발했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길에 들어섰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길은 스스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유나 배경을 필요로 합니다. 중세 사회에서 그러한 배경 역할을 한 것은 대체로 그리스도교였습니다. 로마 제국 이후 게르만족 국가들은 하나같이 그리스도교를 국가 통치 시스템의 근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프랑크의 첫 국왕 클로비스(→성당 이야기 4회), 카롤링거 왕조의 카롤루스 대제(→성당 이야기 2회), 신성 로마제국의 오토 대제(→성당 이야기 14회) 모두 정복지의 주민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고 신앙을 토대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렇게 땅에는 나라를 구분 짓는 담장이 세워졌지만, 하늘에는 그리스도교라는 커다란 지붕 하나만 있어서, 하늘과 맺는 관계가 땅의 명운을 좌우하는 시대가 움트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럽의 국가들은 봉건제로 운영되었는데, 이는 일정한 영지 안에서 자급자족의 경제 단위를 형성하는 제도입니다. 영주는 자신의 영지에 곡물 생산을 위한 토지와 부대시설을 갖춰 놓고 농노에게 소작을 시켜서 장원 경제를 유지하였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해진 영주는 자신의 영지와 재산을 지키고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기 위해서 사병을 두었습니다. 사병은 기사 계급이 이끌었는데 이로써 영주는 정치적으로도 독립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장원 안에서 영주를 중심으로 기사와 농노가 신분 질서를 유지하면서 자립 사회를 이루는 중세는 자연스럽게 중앙집권이 아닌 지방분권의 사회로 발전하였습니다. 물론 영주 간에도 위계질서가 있어서 그 서열에 따라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이라 불렸습니다. 하지만 서열이 낮은 영주라도 영지가 크고 경제적으로 영향력이 있으면, 그의 정치적 위상은 높은 작위의 영주를 능가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봉건제가 발달한 프랑스는 국왕이 있더라도 프랑스 전체가 아닌 자신의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국가는 여러 영주들이 서열이라는 형태로 연합체를 형성한 분권적 사회를 이루었고, 왕위는 유력한 귀족들이 번갈아 계승하였습니다. 이러한 체제에 변화가 생겨난 것은 파리의 백작 위그 카페가 프랑스 왕위를 아들에게 세습하겠다고 선언하고 카페 왕조를 시작하면서 부터입니다(987년). 그렇다고 하더라도 국왕에게 프랑스에 대한 실권이 주어진 것은 아니어서, 카페 왕조는 자신들의 영지인 파리와 오를레앙 외에는 아무런 권한도 갖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루이 6세(1108~1137년 재위)에 이르러 카페 왕조는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습니다. 당시 유럽은 성직자 서임에서 시작하여 교회 전반에 걸쳐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이 진행 중이었는데, 카페 왕조가 여기서 교회의 편을 든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교회의 지원을 얻은 루이 6세는 위협이 되는 귀족들을 제압하고 아들 루이 7세에게 강화된 왕권을 물려주었습니다. 이는 프랑스가 분권체제의 봉건 사회에서 중앙집권체제의 군주 국가로 변화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파리를 중심으로 생겨난 이러한 정치의 중앙집중화는 자연스럽게 성당 건축으로 표현되기 시작하였습니다.

 

[2020년 10월 25일 연중 제30주일 의정부주보 7면, 김한수 가롤로 신부(민락동 성당 주임, 건축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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