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24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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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교회 건축의 영성: 초대 교회 성전 건축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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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19 ㅣ No.354

[교회 건축의 영성] 초대 교회 성전 건축의 의미

 

 

지난 호부터 초대 교회를 통해서 성전 건축의 의미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초의 미사이며 그리스도교 전례의 핵심인 성체성사를 세우실 때 “이미 자리를 깔아 준비된 큰 이층 방”(마르 14,15)에 두 제자를 보내어 미리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어떤 형태의 특정한 종교 건물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최후의 만찬도 이층 방에서 식사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사후에 종말론적 생각을 가졌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시며, 모두가 한 형제자매임을 세상에 알려야 할 의무감이 있었습니다.

 

기원후 44년 우상 숭배를 혐오했던 그리스도인들은 제단이나 조각상, 초상 또는 그와 유사한 그림들로 꾸며진 성전을 갖추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는 이교도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무신론자라고 비난할 정도였습니다(송현섭, 「전례 공간의 예술성」 참조).

 

 

첫 신자 공동체 생활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사도 2,42.44-47).

 

 

가정집 미사 시대

 

그 뒤 그리스도교 전례는 요즈음 반 모임 때 집집마다 돌아가며 말씀의 전례를 하듯이 일반 가정집에서 거행했고, 2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전례만을 위한 고정된 장소를 가지려 하였습니다.

 

고정된 전례 장소는 일반 가옥(dura europos)으로, 그 형태는 로마 시대 도시의 여느 집과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중앙 정원의 한쪽 길이가 8m쯤 되는 직사각형 건물의 2층으로 되어 있는 다세대 주택이었습니다. 1층에 있는 집주인이 사용하던 대여섯 개 방 중에서 한두 개의 방들이 그 당시 그리스도교 전례 공간이었습니다.

 

성 갈리스토 카타콤바.

 

 

그 공간에는 특별한 장식도 없고, 집안으로 들어가는 대문 오른쪽에 ‘세례대’로 사용하던 직사각형의 벽돌로 된 통이 덮개로 덮여 있어서, 얼핏 벽돌로 만든 여물통처럼 보였습니다. 덮개의 안쪽에는 푸른색 바탕에 별들을 그려 놓았고, 붉은색 바탕의 이 통의 밑바닥에는 어깨에 양을 둘러멘 착한 목자상을, 그 앞쪽엔 양 떼들을, 그리고 왼쪽 구석에는 낙원에서 즐기는 아담과 하와를, 세례통 덮개의 윗 표면에는 죄에 떨어진 아담과 구세주요 새 아담인 그리스도를 그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세례통 3면의 외벽에는 다음과 같은 그림이 있습니다. 곧, 지금은 반쯤 남아 있는 반신불수에 대한 치유 장면과 베드로 성인이 물 위를 걷는 장면, 무덤 앞에서 울고 있는 두 명의 마리아와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 골리앗을 쳐 이기고 있는 소년 다윗의 승리 등 입니다(송현섭, 「전례 공간의 예술성」 참조). 

 

성찬 거행 시에는 특별한 어떤 도구나 기구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성찬 거행이 일반 가정의 식사 예법 성격을 띤 데다 거기에 천상 연회적인 특성만을 덧붙였기 때문입니다.

 

 

터키의 데린쿠유 지하 도시

 

신학자 이제민 신부는 성지 순례를 통해 카타콤바(지하 무덤)의 형태가 아닌 삶과 신앙에 대해 묻습니다.

 

“데린쿠유의 지하 교회 신도들이 지상의 교회를 사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데린쿠유의 지하 동굴을 보면서 무엇을 느꼈는가? 데린쿠유, 너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신앙이다. 그 자체로 하나의 사랑이다. 그 자체로 인류에게 던지는 하나의 희망이다. 현대인이여, 너 정말로 사랑하며 살고 싶은가? 희망을 심어 주고 싶은가? 인류의 평화를 바라는가? 네 마음에 데린쿠유를 파라. 이 사회에 데린쿠유를 파라. 이 조국에 데린쿠유를 파라. 묻지 말고 파라.”

 

데린쿠유 동굴 안에서 주교(사제)와 신도들의 관계는 어떠했을까요? 지하의 그들에게도 오늘날 지상의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 속에서 살았을까요? 오늘날 지상의 사제와 신자들의 관계가 신앙을 지키며 살았던 저 지하에서의 사제와 신도들의 관계와 같은 것일까요? 오늘날 지상의 주교의 권위는 저 지하의 주교의 권위와 같은 것일까요? 오늘 지상에서 말하는 주교(성직자)들의 권위가 저 지하에서 주교가 보인 권위와 같은 것일까요?

 

터키의 데린쿠유 동굴.

 

 

지하의 이 교회 안에서 성직자의 권위주의와 성직자 중심주의의 교회를 생각하게 됩니다. 저 지하에서도 성직자를 중심으로 모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 성직자 중심이 이 지상의 성직자 중심과 같은 것이었을까요? 초대교회 성직자의 권위와 교회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다시금 존경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의 권위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성직자의 권위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평신도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지하의 그 교회 모습이 오늘 지상의 이 교회의 모습이었을까요? 오늘 지상의 교회의 구조가 이들 지하 교회 구조와 같은 것일까요? 오늘날 우리 교회는 가난을 부르짖습니다. 이 교회가 부르짖는 가난이 저 지하의 교회에서 신도들이 살았던 가난과 같은 것일까요?

 

지상의 교회는 정의를 이야기합니다. 교회 안팎을 향하여 정의를 부르짖습니다. 이 정의가 저 지하의 교회에서 행해졌던 정의와 같은 것일까요? 지상에서 우리는 형제애를 이야기합니다.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서 부지런히 형제애를 부르짖습니다. 이 형제애가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저 지하 교회의 신도들의 형제애와 같은 것일까요? 저들처럼 형제애를 실천하고 있는 것일까요?

 

초대 교회에서 드러나는 성전 건축에 대한 생각들은 요즘과는 많이 다른 시사점을 우리에게 던져 줍니다. 현대 성전 건축의 거룩함이나 권위는 서구에서 시도되었던 빛에 대한 절제나 공간의 개념 형태나 조형성 등이 중요한 핵심은 아니었습니다. 초대 교회 안에는 삶에 대한 권위와 말씀에 대한 권위가 있었을 뿐입니다. 복음을 들으며 삶으로 그것을 증언하고 세상 안에서 실천하였습니다. 그들의 삶이 교회에 나타났듯이, 현시대의 교회에 대한 올바른 물음이 이 시대의 교회의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 이호 요셉 - 광주대교구 운남동본당 주임 신부. 경희대학교 건축대학원과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건축 계획과 설계를 공부하고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함평 하상성당, 군산 축동성당, 한성대성당 등의 설계에 함께하였다.

 

[경향잡지, 2017년 4월호, 이호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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