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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이야기: 기도하지 않는 성인은 없다 - 카말돌리회 그리고 시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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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0-30 ㅣ No.658

[수도원 이야기 – 기도하지 않는 성인은 없다] 카말돌리회 그리고 시토회

 

 

성 아폴리나레 수도원 성당 전경.

 

 

공지영 작가는 이탈리아 카말돌리회 수도원을 방문한 뒤 그 감흥을 「수도원 기행」 제2권(분도출판사, 2014)에 이렇게 적었다.

 

“활동이 많아지면 침묵이 적어지고 그 틈으로 쓸쓸함이 나를 비집고 들어서곤 했다. 그럴 때 바로 모든 커튼을 내리고 주님과 마주 보지 않으면 바로 영혼의 고갈이 시작되었다. … 전적으로 침묵과 기도의 부족이었다. 어떤 신부님이 말씀하신 때로 사막에 간 성인도 있고, 수도원의 방으로 들어간 성인도 있고, 순교한 성인도 있고 모습들은 다 다르지만, ‘기도하지 않는 성인은 없다’는 말도 떠올랐다.”

 

 

로무알도와 카말돌리회

 

작가가 방문한 카말돌리회(Ordo Camaldulensium) 수도원은 1000여 년의 전통을 가진, 철저한 침묵, 기도, 고독의 공간이다. 창설자는 로무알도 성인(950-1027년). 이탈리아 라벤나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성인은 20세 되던 해, 친척을 살해한 아버지 대신 속죄하고자 이탈리아 클라세의 성 아폴리나레 수도원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이내 실망했다. 수도자들의 삶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수도원을 쇄신하려면 수도자의 삶이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동료들의 미움을 사는 계기가 된다.

 

성 아폴리나레 수도원 성당 내부.

 

 

어쩔 수 없이 수도원을 떠난 로무알도는 베네치아 인근에서 엄격한 은둔 생활을 하던 마리노를 만나 스승으로 모셨다. 서기 978년 무렵 로무알도는 스승과 함께 산속으로 들어가 10년 넘게 철저한 은수자로 살았다. 그는 이때 황홀경, 예언적 언사, 눈물과 같은 신비적 은사를 받았다.

 

로무알도가 엄격한 축성생활을 한다는 소식은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오토 3세는 그를 성 아폴리나레 대수도원 원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그는 기존 수도원을 개혁하기보다는 새로운 수도원을 창립해 새 출발하는 길을 선택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수도원이 아레초 인근에 설립한 카말돌리 수도원이다. 뒷날 파스칼 2세 교황은 교서로써 카말돌리회를 공식 인준하였다.

 

이 수도회는 공동생활을 최소화하고, 개인 중심의 엄격한 축성생활을 지향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장기간의 단식, 엄격한 침묵, 독거 생활, 침묵 속에서의 노동 등을 강조했다. 구체적 삶의 방법은 초기 은수자들의 생활을 따랐고, 나머지 조직과 규율 등에 대해서는 베네딕토 규칙서를 따랐다.

 

그렇지만 카말돌리회 수도자들은 ‘나 홀로 축성생활’에만 매진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고독을 통해 성취한 하느님과의 만남을 세상과 나누는 데 적극적이었다. 무료 병원을 설립하고, 빈민을 위한 숙소를 만들었으며, 순례자들을 돌보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창립자인 로무알도 자신도 여러 차례, 축성생활 안에는 활동과 관상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 카말돌리회를 설립한 로무알도 성인이 출가해 들어간 이탈리아 클라세의 성 아폴리나레 수도원 성당 천장화. 로무알도는 이곳 수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정리하자면, 이들은 ‘세상에 개방하지만 세상에 휘말리지는 않고, 세상 안에 토대를 두지만 세상 아래 매몰되지 않는’ 삶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자신의 깨달은 바를 세상에 알리는 복음 선포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이후 카말돌리회는 더 엄격한 차원의 축성생활을 하는 분파를 통해 다양한 열매를 맺게 되는데, 베드로 다미아노의 폰테 아벨라나회가 대표적이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베드로 다미아노는 생전에 많은 저서를 간행하여 수도원의 엄격한 훈련과 고행을 강조했다. 특히 성직자의 결혼을 반대하거나, 성직매매를 비판한 그의 글을 보면 그가 얼마나 엄격하고 원칙주의적인 축성생활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베드로 다미아노에 따르면 축성생활은 철저히 이웃 사랑을 위한 행위였다. 그에게 있어서 사랑의 완성은 고독과 독방 생활, 이를 통해 성취하는 완전한 금욕과 끊임없는 기도였다.

 

 

더 철저하게 : 시토회의 등장

 

이런 흐름 속에서 수도원 개혁 움직임과 관련한 또 하나의 위대한 물줄기를 프랑스에서 만나게 된다. 가톨릭 교회의 청교도, 중세의 사막 은수자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시토회(Ordo Cisterciensis)이다. 베네딕토 규칙서를 ‘제대로’ 따르는 수도원이 점자 사라질 즈음, 몰렘의 로베르토(1027-1111년)는 베네딕토 규칙서를 문자 그대로 따르는 시토회를 설립한다.

 

중세가 배경인 영화를 보면 흰색 수도복에 고깔을 푹 뒤집어쓰고, 고개를 숙인 채 두 손 모으고 걸어가는 모습의 수도자가 종종 나오는데 십중팔구는 시토회 수사라고 보면 된다. 시토회원은 흰색 또는 회색 복장을 하였는데, 그래서 백의의 수도자라고도 불렸다.

 

시토회 수도자의 삶은 엄격했다. 이들은 철저한 금욕과 고독, 침묵, 극도의 고행을 실천했다. 옷을 입은 채 잠을 잤고 식사할 때도 성경을 읽는 소리를 들었다. 노동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교부들이나 사도들처럼 노동하며 살아가는 것을 진정한 수도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이 모든 생활이 로베르토를 중심축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당시 분위기는 로베르토와 같은 선각자가 은둔하며 한 공동체에만 집중하여 살아가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곳곳에서 구원 요청이 쇄도했는데, 많은 수도원에서 허물어져 가는 축성생활을 일으켜 달라며 수도원장직을 제안했다.

 

마침내 교황이 움직인다. 1099년 우르바노 2세 교황이 교서를 통해 느슨해진 몰렘 수도원을 정상화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로베르토는 이를 받들어 시토를 떠나 몰렘의 수도원으로 가서 개혁에 힘쓰다 1111년 4월 17일 선종한다. 이어 로베르토와 함께 시토 공동체를 이끌었던 초기 멤버 성 알베리코 또한 사망했다.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퐁트네 시토회 수도원 내부.

 

 

그래서 시토회는 창설 회원이었던 영국인 수도자 스테파노 하딩이 이끌게 된다. 시토회가 성공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었던 저력은 초기 지도자가 모두 완벽했다는 데 있다. 하딩은 로베르토의 정신을 계승해 더욱 엄격한 축성생활에 매진했다.

 

당시 수도원장은 금박으로 장식한 옷을 입었다. 수도원에서는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였으나 하딩은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황금으로 만든 전례 용품을 모두 폐기했다. 그렇게 그는 창립자의 정신에 따라 가난을 철저하게 실천했으며 이러한 전통은 시토회의 전성기로 이끄는 발판이 된다.

 

 

축성생활의 전성기를 향하여

 

오늘날 역사가들은 11세기가 클뤼니의 시대였다면, 12세기는 시토회의 시대였다고 기록한다. 이처럼 유럽 수도원은 시토회를 통해 전성기를 맞게 된다. 시토회의 명성이 높아지자 입회자가 몰려들었다.

 

가난과 엄격한 고행은 역설적으로 그들을 영광스럽게 했다. 귀족의 아들들, 수준 높은 교육과정을 이수한 인재들이 수도원의 문을 두드렸다. 창설자 로베르토가 사망한 이듬해, 한 번에 서른 명이 넘게 입회하는 경사가 났다. 그들 가운데서도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이가 있었다. 시토회, 아니 유럽 교회 전체에 영향을 줄 인물이 혜성처럼 나타난 것이다. 유난히 눈이 반짝이는 한 사람, 친지와 친구들을 새내기 막내로 이끌고 갓 들어온 그는 뒷날 12세기 유럽 축성생활의 전성기를 열 위대한 신비 사상가 베르나르도 성인이다.

 

* 최의영 안드레아 – 교황청립 마리아의 아들 수도회(CFIC) 동아시아 준관구장. 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교 수도자 신학대학원(클라렛티아눔)을 졸업했다.

 

[경향잡지, 2020년 10월호, 글 ‧ 사진 최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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