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9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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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수도원 이야기: 초기 교회의 은수자들 - 사막에 세워진 신앙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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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2-17 ㅣ No.637

[수도원 이야기] 초기 교회의 은수자들


사막에 세워진 신앙 공동체

 

 

수년 전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팔레르모를 방문했을 때, 은수자 요한 수도원 성당(San Giovanni degli Eremiti)을 찾은 일이 있다. 이곳은 6세기에 기원을 둔 유서 깊은 성당이지만 대부분 초기 교회 수도원 유산들이 그렇듯 이슬람 세력이 팔레르모를 정복하면서 모스크로 바뀌었다가, 남부 이탈리아에 바이킹들이 진출해 왕국을 세우면서 1136년 다시 수도원 성당으로 복원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는 초기 교회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고 이슬람과 북유럽 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수도원 성당에서 볼 수 있듯이 초기 교회 당시 이집트에서의 사막 은수 생활 전통은 소아시아를 거쳐 지중해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사막 은수자들의 삶

 

그렇다면 초기 교회 사막 은수자들의 생활은 어떠했을까. 나는 어린 시절 강원도에서 성장했다. 산을 늘 지척에 두고 살았다. 그러다 보니 산에 얽힌 기억이 많다. 언젠가 폭설이 내리는 날 산에 올랐다가 길을 잃고 크게 고생했던 일이 있다. 길이 눈에 덮여 없어진 탓에 열 시간 넘게 산속을 헤매다 간신히 불빛을 발견하고 민가로 찾아들었다. 당시 내가 느낀 공포감은 대단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도무지 방향을 잡을 수 없다는 점이 가장 무서웠다.

 

내가 산을 늘 옆에 두고 살았던 것처럼,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사막을 지척에 두고 살았다. 당시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였던 알렉산드리아에도 도심에서 불과 30킬로미터만 벗어나도 도저히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불모의 사막이 펼쳐졌다. 그들에게 사막은 어떤 곳이었을까. 아마도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심정은 내가 어린 시절 첩첩산중에 고립되었던 당시에 느낀 공포감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자료들을 살펴보면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사막에 대해 가졌던 공포감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게 사막은 끔찍한 곳이었다. 부족한 물과 음식, 낮과 밤의 극심한 기온 차이, 들짐승의 위협, 바람이 모래와 스치며 내는 기괴한 소리….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사막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안토니오 성인과 봉헌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막으로 간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사막은 해방의 땅이었다. 문명의 고약한 때가 범접할 수 없는 순결한 땅이었다. 250년경, 이집트에서 태어난 안토니오 성인은 진리를 찾고자 사막으로 갔다.

 

안토니오는 부유했다. 편안히 신앙생활을 하며 여생을 보낼 수도 있었다. 부모가 죽으면서 남긴 재산도 많았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다. 전승에 따르면 성전에서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라는 성경 말씀을 읽고 회심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마을 인근 공동묘지에 기거하며 기도 생활에 몰두했다. 그러자 사탄이 이를 방해했다. 그 유혹을 뿌리치고자 철저히 투쟁한 안토니오 성인의 생생한 모습은 성인과 동시대 사람인 아타나시오 성인이 남긴 「안토니오의 생애」에 잘 나타난다.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요동쳤다. 사자, 뱀, 전갈, 늑대들이 울부짖으며 다가왔다. 유령들의 음산한 외침도 밤하늘에 가득했다. 안토니오가 자리에 누워, 짐승들에게 외쳤다. ‘나를 공격해 보라. 주님께서 함께하는 이상 너희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안토니오는 그렇게 13년을 정진했다. 그러자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많은 이가 그에게 지혜를 구하고자 찾아 왔다. 이때 그는 더 깊은 사막 속으로 들어갔다. 봉헌 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시 20년 동안 진정한 고독 속에서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추구했다.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한 그는 사막에서 나와 세상에 참된 진리와 자유, 평화를 외쳤다. 그의 고결한 삶에서 참 행복을 감지한 이들이 몰려들었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봉헌 생활 공동체의 원형이 출발한다. 성인의 모범은 그 뒤 가톨릭 교회를 비롯한 수많은 이에게 영향을 주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고백록」에서 성인에게서 받은 지대한 영향을 이야기한다.

 

 

안토니오 성인의 영향

 

안토니오 성인의 영향은 이뿐만이 아니다. 하느님과의 일치에 대한 열망이 보편적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영적 진보였다. 안토니오는 무덤조차 소유하지 않았을 정도로 철저히 가난을 실천했다(지금도 안토니오의 무덤이 어디인지 아무도 모른다). 수많은 이가 무소유의 사막 생활을 통해 그의 뒤를 따랐고, 사막 생활을 하지 않는 이들도 금욕과 가난, 고독, 단식, 기도, 겸손, 사랑, 영적 진보 등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점은 안토니오가 봉헌 생활의 시조(始祖)가 아니라는 점이다. 수도회 설립자도 아니다. 봉헌 생활의 출발선에 있던 수많은 선각자 중 ‘가장 두드러진 모범’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삶은 그 뒤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의 이상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는 봉헌 생활의 마중물이었던 셈이다.

 

안토니오가 사막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소문이 나면서, 많은 이가 뒤를 따랐다. 특히 이집트에서 그러한 분위기가 확산되었는데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모여 살아가는 사례도 생기기 시작했다. 나일강 서쪽의 니트리아 사막, 켈리아 사막, 스케티스 사막 등지가 그랬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천을 짜거나 밭일을 했다. 성경도 필사했다. 빵, 물, 소금이 주식이었다. 한 자료에 따르면 어떤 사막의 수행자는 15년 동안 26킬로미터나 떨어진 샘에서 물을 길어 먹었다고 한다.

 

니트리아 사막의 은수자 아문의 이야기 또한 유명하다. 아문은 결혼 초부터 아내를 설득하여 순결을 지킨 사람이었다. 아문이 18년 동안 부부 관계를 맺지 않자 아내는 “당신처럼 덕망 높은 사람이 그 덕망을 숨기고 사는 것은 부당하다.”라고 하면서 남편을 사막으로 보냈다. 아문은 사막으로 떠났고 그의 명성에 이끌린 수많은 은수자가 그를 따랐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조직이든 사람이 늘어나면 일종의 규칙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한두 명이 서너 명이 되고, 그 서너 명이 대여섯 명이 되면서 함께 지켜야 할 규칙이 필요하게 된다.

 

적막감이 감도는 사막의 밤, 누더기를 걸친 10여 명의 사람이 모닥불 앞에 모였는데 연장자로 보이는 사람이 일어나 말했다.

 

“함께 살아가려면 규칙이 필요합니다. 기상 시간을 몇 시로 할까요? 공동 기도는 몇 시에 할까요? 식사와 단식에 대한 규정도 필요할 듯합니다. 다들 의견을 제시해 주십시오.”

 

수도 공동체 생활의 시작은 이렇게 작은 모닥불 모임 하나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 최의영 안드레아 - 교황청립 마리아의 아들 수도회(CFIC)동아시아 준관구장이다. 1998년 입회하고, 교황청립 라테라노 대학교 수도자 신학대학원 ‘클라렛티아눔’(Claretianum)을 졸업했다. 로마 ‘이디 제약회사’(IDI Farmaceutici)의 이사, 알바니아 NSBC 가톨릭대학교 부설 병원장을 지냈다.

 

[경향잡지, 2020년 2월호, 최의영 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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